동행(同行)
성병조
내가 가지고 있는 ⟪신 콘사이스 국어사전⟫과 ⟪뉴우 월드 콘사이스 영한사전⟫은 비슷한 부피에 각각 정가도 1,800원과 2,000원으로 비슷한 가격대이다. 두 사전의 제일 뒷면에는 1974년 10월 1일 구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 당시 나는 군대에서 보도 사병이었는데 매주 한 차례씩 발간하는 영내 신문 편집을 위해 사병 봉급 몇 달 치를 모아 어렵사리 구입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고락을 함께한 사전에는 나의 무한한 애정과 많은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사전은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옮겨 다니는 곳마다 동행하며 지식의 탑을 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다. 엄한 규율과 원칙만이 존중되고 삭막하기 그지없다는 군 생활 속에서도 사전은 친근한 벗으로 존재하였다. 온갖 양식들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처럼 소중하게 여겼다. 어쩌다 내무반에서 전우들끼리 궁금한 점이 있어 논란을 벌이다가도 보물처럼 간직해 둔 사전을 펼치면 그곳엔 항상 우리가 찾는 길이 있었고, 그런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는 낡고 손때가 자욱한 데다 서투른 낙서가 있고, 또 몇 장이 찢겨나가 혼란이 올 때도 있지만 전혀 개의할 일이 못 된다. 아들 녀석이 기어 다니던 때 크레용으로 낙서하고 중간중간 찢은 수난의 흔적을 드러내긴 해도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걸 어쩌랴. 내가 그린 삶의 궤적 위에다 아이들의 유아기적 행적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사전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사전에 담긴 사연을 들려줄 요량이었지만 지금까지 얘기하지 못하고 속으로 간직해 오고 있다. 언제나 배움의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 식구끼리의 보이지 않는 내심이 작용했을까. 아니면 훌쩍 커버린 두 이이에겐 어울리지 않을 얘기일 테니 스스로 발견하고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숙성할 만큼 숙성시키면 다 함께 음미할 때가 올 거라는 기대감으로 여태까지 견뎌왔다.
내가 걷는 학문의 길 한가운데는 항상 두 권의 사전이 귀중한 교량 역할을 하였다. 국어사전에는 낱말마다 영어로 번역이 되어있어 영어 공부하는 내겐 안성맞춤이요, 영어사전에도 사용 빈도에 따라 별표가 붙어있어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단어를 외울 때마다 알록달록 밑줄을 그어 소화한 흔적을 남긴 덕분에 당시의 정서까지 배어 나와 더욱 애착이 간다. 차라리 조금 추접고 어수선한 것이 오랜 역사성을 자랑하고 더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워할 바가 못 된다.
페이지마다 풍기는 삶의 내음과 함께 어우러지는 아쉬운 사연들도 피어오른다. 사전과 교감하는 동안 대학 생활을 마치고 몇 곳의 직장을 거치면서 경험했던 안쓰러운 기억들도 아련히 그려진다. 사전의 주된 거처였던 책상의 맨 위 서랍에서 그걸 꺼내 이사 짐보따리에 집어넣을 때의 야릇한 감정. 내 혼자만의 혼란이 아닌 나의 분신 같은 사전에게 자리 바뀜의 어려움을 안겨주는 것 같아 미안할 때가 있었다. 비록 더 나은 직장이라 하더라도 뿌리를 내리며 안정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이라도 사전에게는 변화의 불안감을 심어주는 셈이 아닌가.
제대하던 날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한 사전을 챙기면서 나는 이렇게 되뇐 적이 있다. “사전아, 정말 고맙다. 네 덕분에 모두가 힘들다는 군 생활을 보람되게 마치게 되었구나. 바깥 사회에 나가서도 내가 소망하는 일들이 뜻대로 성취될 수 있게끔 오래도록 함께 하자꾸나.”
그런데 나는 지금 어느 곳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까지의 약속을 얼마나 지켜왔는가. 구입 당시에는 제법 크게 보였던 사전의 활자들은 이제 돋보기 없이는 읽지 못하게 되었고, 온갖 낙서를 하던 어린 아들은 어느새 장성하여 군을 제대하고, 결혼하여 손주까지 둔 세월의 변화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난날을 조용히 회상해 본다.
사전을 통해 바라본 학문의 길로 나는 얼마나 정진해 왔으며, 사전과 더불어 걸어가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닳고 찢어진 사전의 아픔처럼 나에게도 고뇌의 시간들이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두 권의 사전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교분을 쌓아온 지난 세월이 결코 무의미 하지만 않은 것 같은데,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 뻥 뚫린 듯 허전함이 남아있다.
** 컴퓨터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사전이 둘도 없는 친근한 벗이었습니다. 1995년 수필가로 등단한 후 네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고, 대구시정 슬로건 등 유명 슬로건 공모에서 5회 우승, 그리고 최근에는 KBS 인기 프로 ‘우리말 겨루기’에 두 차례 출연하여 우승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한 것 역시 두 권의 사전이 안겨준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능력도 사전 덕분입니다. 두 권 모두 1974년에 구입했으니 역사가 거의 반세기에 이르고 있군요. 나의 보물인 사전과의 동행은 평생토록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