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한담】
법흥스님
송광사
이력
1931년 충북 괴산에서 나신 법흥 스님은 58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59년 동화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통도사 해인사 상원사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지냈고 74~77년 송광사 주지, 84년 송광사 조계총림 유나를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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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흥 스님은 특히 기억력이 탁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 시대의 아난’이라는 별호가 따라다닐 정도다. 스님은 한번 보거나 들은 내용을 웬만 해선 잊는 법이 없다. 70이 넘으신 지금도 조계종 스님들의 이력, 송광사 역사, 경전은 물론 수십년전 돌아가신 노스님의 열반일과 그 전날 무슨 말씀을 했는지 등 줄줄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스님의 비상한 기억력은 물론 타고난 영특함도 있겠지만 늘 공부하는 자세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 영화 끄달리면 헛된 삶”
마음의 근원 찾는 노력은 욕망껍질 벗는 과정
“스님, 오늘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저를 좀 편안하게 해 주십시요.”
“그대, 그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너라. 내 그대를 편안케 해 주리라.”
보리달마와 혜가사이에 주고받았다는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問)’의 한토막이지요. 시대가 복잡해질수록 번뇌의 풍랑이 사나워져 가는 듯합니다. 까닭모를 불안과 번민에 시달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어두운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불행한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이니 ‘자아상실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물질적 풍요와 함께 정신적인 허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낭만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눈부신 과학 발달이 엄청난 변혁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원초적 고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과에 의해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가야 하는 이 실존적인 고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바가 없습니다.
산천도 옛 모습을 잃었고 흐르는 구름 또한 옛 구름은 아니로되 이 잿빛 고뇌는 여전히 중생들의 삶을 꿰뚫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착하기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버리고서도 만족해하는 존재요, 악하기로 말하자면 동전 한 닢에도 목숨을 앗아가는 잔혹한 존재가 아닌가요. 도대체 어떤 것이 우리의 진실한 모습일까요.
옛부터 큰스님들은 이 ‘마음의 근원’을 찾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아낌없이 내던졌습니다. 이 수행자들을 흔히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하지요. 이들은 흐르는 물처럼 떠도는 구름처럼 천하를 유행(遊行)했습니다. 남루한 누더기에 걸망 하나가 그들의 전재산이었습니다. 버리려 해도 버릴 것이 없고 가려해도 가야할 곳도 없는 그 지극한 오도(悟道)의 세계를 향한 나그네였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법구경>에서 스스로를 가리켜 ‘영원한 구도의 나그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나그네 길(旅路)’이야 말로 우리 수행자들이 숙명처럼 걸어야 할 삶의 길이란 뜻입니다. 비록 형극(荊棘)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부처님이 사셨던 것처럼 생명의 불꽃이 남아있는 한 정진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선의 마음은 진여(眞如)의 마음입니다. 마치 명경(明鏡)이 삼라만상을 비추듯이 마음의 거울 또한 모든 것을 비추어 줍니다. 이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 이를 부처라고 합니다. 반면에 마음의 근원을 망각하고 헛된 욕심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이들을 중생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진여의 마음이라고 해서 번뇌와 무명심(無明心)을 떠나 다른 경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와같은 이분법이 바로 무명입니다. 내안에 진실이 있는 것을 외면하는 마음이 중생심이지만, 중생을 떠나 불심을 얻으려는 노력 또한 불행한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선의 아이러니가 있지요. 일상심을 붙잡아서도 안되지만 버려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논리의 모순에 부딪칠 때 비로소 화두의 세계가 열립니다. 언로(言路)가 막힌 곳에 비로소 심로(心路)가 열리게 됩니다. 이성이 다한 곳에 드디어 이성을 뛰어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가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선’의 원류는 본시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坐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싯달타가 평범한 인격에서 붓다(깨달은 자)로 승화되었던 것이지요.
그후 45년 동안 광막한 인도대륙을 배경으로 숱한 교화활동을 펼치셨습니다. 때로는 바다와 같은 침묵으로, 혹은 날카로운 현실비판으로 불교라는 위대한 종교를 탄생시켰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 ‘선’의 가르침이 하나의 종파로서 일세를 풍미하게 된 것은 중국에서의 일입니다.
인도에서 건너온 보리달마의 파격적인 가르침은 한마디로 ‘마음의 그림자’를 찾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육조 혜능에 이르기까지 실로 기라성같은 조사 큰스님들이 ‘마음의 법(心法)’을 이어왔습니다. 흔히 오종칠가풍(五宗七家風) 이라고 부르는 이 중국선종의 흐름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라말엽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은 바로 이 ‘마음’에 대한 참구(參究)를 구현한 실례였습니다. 이같은 전통을 이은 우리나라의 선종은 보조국사 지눌의 시대에 이르러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획기적인 가풍이 수립된 것이죠.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16국사가 이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우리 불교로 봐서는 역사적인 질곡이었던 조선시대에도 선종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습니다. 특히 서산대사의 출현은 꺼져가는 선맥의 법등(法燈)을 다시 일으켜 세운 쾌거였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선’이란 말은 산스크리트의 드흐야나(Dhyana)라는 말의 음역입니다. 선나(禪那)라고 썼던 것을 후에 나(那)가 생략되고 선(禪)이라고만 쓰이게 된 겁니다. 이 말은 ‘정려(靜慮)’ ‘자기제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정신의 자기집중’ 내지는 ‘내면에의 침잠’이란 의미를 띠고 있지요.
사람에게는 다소의 외부지향적인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일종의 컴플렉스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이 확대되면 언제나 진리는 바깥에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저 하늘에 뜬 무지개빛 이상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을 거듭하게 되는 겁니다.
절의 외벽(外壁)에는 소를 탄 목동의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심우도(尋牛圖)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이가 소를 타고 앉은 채 소를 찾아 헤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진 이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련한 자여, 소를 타고서 소를 찾는구나.”
내 마음의 진실과 그윽한 가능성을 외면한 채 바깥만을 응시하는 현대인에게 경종이 될 수 있는 고사가 아니겠습니까.
선은 이 나의 무한한 가능성을 되찾으려는 수행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의지와 결단으로 이 험난한 세파(世波)를 건너갈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 내 삶이 좌우된다는 생각은 지나친 자기 기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은 이 내면을 증득(證得)하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상속의 자기는 언제나 6근(六根)의 작용으로 움직여집니다. 그러나 6근이란 결코 본래적인 자아일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6근의 감각기관에는 어떤 절대적인 가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6근을 통괄하는 어떤 주체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식(唯識)불교에서는 이를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릅니다. 선가에서는 이를 ‘마음’이라고 총칭합니다. 우리들 육신은 이 마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본래적인 마음을 회복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자유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감각과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실한 대도(大道)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겁니다. 그때의 나는 결코 별개의 ‘내’가 아닙니다. 오히려 감각적 자신이 극복되고 원래의 자신을 회복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지요.
현대를 자아상실(自我喪失)의 시대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선’으로부터 많은 시사를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나’이기 위한 노력, 껍데기의 내가 아니라 진실한 내가 되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목표여야 할 것입니다. ‘선’이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거룩한 경지는 아닙니다. 홍진(紅塵) 속에 놓여진 이 일상이야말로 바로 선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전통적인 것, 한국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퍽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사이 지나치게 우리들의 의식구조나 생활패턴이 서구적으로 변모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일 따름입니다. 개나리가 노랗고 진달래가 붉듯이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이 한국인의 마음이 바로 지금은 잊혀져 가는 ‘선의 마음’입니다. 자연에 대한 외경,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 그리고 인고(忍苦) 등을 한국인들은 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 선의 마음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사찰입니다.
새벽녘에 도량석 소리는 한결 청아(淸雅)하게 들립니다. 무명(無明)을 깨우는 죽비의 질책이기도 하고 끓어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잠재우는 다정한 법음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진실한 나를 찾기 위한 정진에는 쉼이 없습니다. 삭발한 스님들의 이마 사이로 또다시 햇살이 내려 비치고, 그들의 어깨 위로는 대장부의 기개가 역력하지요. 정적을 깨는 장군죽비의 소리만이 고즈넉한 산사에 울려 퍼집니다.
어느덧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며 우리는 또다시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지는 해처럼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영원 속에 안주하는 내 마음의 주인공을 찾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무의미한 삶이겠습니까.
이제 21세기라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긍정적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다가오는 시대가 태평양시대일 것이며, 우리 한국은 그 주역이 될 수 있다고도 합니다. 반면 부정적 입장에 선 이들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이 더이상 발전을 이루기는 어렵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의 미래가 바로 우리들의 의지에 달려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유마경>에서 말씀하신대로 ‘心淨卽佛土淨(마음이 맑으니 불국토가 청정하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결단과 실천이 올바를 때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미래의 한국은 윤리·도덕의 회복을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산업사회는 불교의 윤리로부터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결코 가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야수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근원적인 자아를 확립하고 이 덧없는 실존 속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삶의 질적 고양이 필요합니다.
정보화사회로 접어든 오늘 교통과 통신은 나날이 발전해 이제 지구촌이란 말이 낯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근본 고뇌인 삶과 죽음의 번민은 여전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지요. 불교의 윤리는 그런 면에서 강한 생명력으로 우리 곁에 다가섭니다. 참다운 인간의 길, 우리는 이제 그것을 찾아나서야 하겠습니다.
우리 불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 철학을 지탱해 온 핵심이었습니다. 불교문화의 부흥은 곧 한국 정신의 회복임을 우리 불자들은 알아야 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시대는 명백히 다원종교의 시대입니다. 어느 특정한 종교가 국교로서의 권위를 지닐 수가 없지요. 이제 종교인들은 서로의 영역을 넓히려는 발상보다는 서로의 공통분모를 확인하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고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과 미래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고대사회의 종교인은 사회를 이끄는 선두주자였지만 이제 그 몫은 과학자들의 것이 됐습니다. 이제 종교에서 남은 영역은 도덕적 완성, 윤리의 청정성이 된 것입니다.
불교는 수도(修道)를 생명처럼 삼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 윤리적 귀의처로서 불교는 언제나 존재의 당위를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적인 영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가치있는 삶을 영위하는 근원으로서 우리 곁에 살아있습니다.
“주어진 일 열심히 하면서 얽매이지 않아야 자유인”
내곁의 모든 이웃은 인욕정진 가르치러온 불보살님
며칠 전 점심을 하려고 단지를 열었다가 쌀봉지가 하나 달랑 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쌀이 단지 속에 가득 있을 때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고마움이 그 순간 느껴졌습니다. 또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고마운 것인지 쌀의 존재가 새삼 되새겨 지기도 했습니다. 행복이란 이런 겁니다. 넘치듯 가득 차 있으면 소중한 것을 모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조금 모자라는 듯 하면 그 존재의 소중함, 고마움을 깨닫게 되고 그 존재가 있으므로 해서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자는 남보다 적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生)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비록 남보다 가진 것이 적어 힘들게 살더라도 항상 기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밝게 살아가는 이가 진짜 부자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겠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라는 <유마경>에 보면 이런 귀절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만족할 줄 알라.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편안하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록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이가 행복도 누릴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각자 다른 처지에 놓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그릇에, 제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 그것이 복된 삶을 사는 지혜의 첫걸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조그만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넉넉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이들은 주위 사람들까지도 기분 좋게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자신은 물론 이웃까지도 편안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항상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사는 이들은 늘 얼굴을 찌푸리고, 신경질을 내다 보니 자기와는 상관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럼 그의 주위에는 점점 사람들이 멀어져 갈 것이고 그는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좀체로 자신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어떤 신도가 노스님을 찾아 뵙고는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고기 먹고, 술마시는 일이 옳은 일입니까? 그른 일입니까?”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야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니 중에게 와서 물을 일이 아니오. 다만 먹고 마시는 일을 절제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될 것인즉 그리 아시오.”
노스님의 이 말씀은 복이라는 것이 어디서 갑자기 호박 덩어리처럼 굴러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복스런 일을 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박복한 짓을 하면 굴러 들어오던 복도 돌아서 나갑니다. 복이라는 한자의 모양에서도 작고 소박한 것에서 복이 온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옷의 변(衣)에, 한일 자(一), 입구 자(口), 그리고 밭전 자(田), 옷 한 벌에 먹을 만큼의 양식을 거둘 밭 한때기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복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살면서 헤아릴 줄 알아야 할 것은 이 일이 내게 복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가게에 가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이것이 내게, 우리 처지에 꼭 필요한 것인가를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돈이 있다고 해서, 남들이 사니까 나도 산다는 식으로 물건을 사는 것이 내 삶을 소비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과소비 풍조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라고 개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난의 덕을 배워야 할 그런 단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미덕으로서의 맑은 가난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청빈, 거룩한 가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취하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단촐하게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이르는 말입니다. 옛날 선비들은 이런 덕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요즘은 시대가 그래선지 청빈이라던가, 거룩한 가난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또 귀 기울여 들으려는 이도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맑은 가난, 청빈의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맑은 가난, 거룩한 가난이란 자기 자신을 텅 비우는 일입니다. 온갖 집착으로부터 홀가분하게 벗어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성서에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거룩한 가난입니다. 모든 욕심에서 벗어나면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됩니다. 맑은 바람이 우리의 심신을 깨끗하게 정화해 주며 지나가는 듯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꼭 필요한 것만 가지는 미덕으로서의 가난한 삶, 청빈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에게 복이 찾아감은 당연지사입니다. 많은 것을 차지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텅빈 충만감이 청빈한 삶에는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 생활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가치의 선택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는 물질에 의해 판단될 일이 결코 아닙니다.
주방은 주부들의 수련장입니다. 사랑이 깃드는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절이나 교회, 성당만이 심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 한식구로 만난 인연은 소중한 것입니다. 물론 살다 보면 자식이, 남편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 일도 많을 겁니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솔뚜껑 운전수를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허무해지고, 만사가 귀찮아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자신의 삶을 보다 한층 고양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달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를 이렇듯 허무하게 만드는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실은 살아 계신, 그래서 생생한 법문을 펼쳐주고 계신 부처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란 개념을 고정 시키지 마십시오. 부처님은 불단 위에 노랗게 금물을 들인 채 앉아만 계신 분으로, 부처님 오신 날 연등 몇 개 밝혀서 공양 올리면 그만인 그런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내 곁에,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한 생각 돌이킴으로 깨달아 보십시오, 저들이 나를 괴롭힌다고 그를 미워 하고, 원망 해서는 안됩니다. 저들은 내게 인욕 정진을 가르치러온 불 보살님입니다. 설령 내 잘못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은 몇 생을 두고 더 갈등하는 인연을 짓게 만드는 과보가 될 뿐입니다. 시덥지 않게 생각되는 사람일수록 그들 불 보살님이라 여기고 공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욕 정진의 첫걸음입니다.
요즘 어머니들이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옥만 있을 뿐 자꾸만 사라져가는 가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핵가족화 현상으로 몇 안되는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흔지 않은 요즘 세상에는 가옥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족이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이들입니다. 가정을 지키는 일은 물론 어머니 혼자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만 우선은 어머니들부터 노력을 기울여 보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하루에 단 한 시간만이라도 아닌 단 30분만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겁니다. 그럼 지금 내가 해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본래 내가 지녀왔던 따뜻한 가슴을 다시 되찾게 됩니다. 한 집안의 중심인 어머니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그 어머니가 자신이 처한 위치에 대해 바로 알게 되면 다른 가족들도 차츰 변해가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따뜻한 가슴의 사람들이 꾸미는 가정, 그것이 바로 극락입니다. 늘 복되고, 평안이 깃든다는 세상, 극락은 어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사를 많이 하고, 보시금을 잔뜩 낸다고해서 극락을 약속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절에 와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부처님 앞에서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뒤돌아 보고,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다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초하루니까. 고 3짜리 자녀를 위해 기도하러 절에 나오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 행위일 뿐입니다.
<채근담>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복은 일이 적은 것보다 더 큰 복이 없고, 화(재앙)는 마음 쓸 일이 많은 것보다 더 큰 화가 없다.”
또 옛 선사들은 “무사시 귀인이라” 법문을 하고 계십니다. 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일이 없다는 것은 일거리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귀인이요, 자유인이라는 겁니다. 일이 많다고 힘들어 하는 것은 이미 그 일에 얽매여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떻게 정성 들여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의무감 때문에 할수 없이 일을 하자니 일도 많고, 힘이 들어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라 해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했는가에 따라 업이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여러분에게 제가 숙제를 한 가지 내드리겠습니다. 이 숙제는 권유사항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는 일주일에 하루는 텔레비젼을 보지 않는 날로 정해 지키는 겁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 나 혼자만이라도 실행에 옮겨 보십시오. 둘째는 하루에 단 한시간이라도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라면 더더욱 독서를 해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식들과는 달리 어머니들은 항상 그 자리라면 아이들이 그런 어머니를 무시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공부란 학생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교과서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사 주간지가 아니라 좋은 책으로 독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자는 겁니다. 세째로는 보름에 한끼씩은 단식을 해보시라는 겁니다. 불과 한끼지만 스스로 마음을 내 단식을 하면서 이 세상에 굶주린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이제 우리나라에는 굶주리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만 지구 저편에는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배를 주리고 있고, 심지어는 아사를 당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또 가까이는 북한의 우리 동포들이 식량이 부족해서, 요즘 들어서는 홍수로 굶주리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들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을 지녀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목소리로 낮추시라는 겁니다.
외국을 나가 보면 우리나라 사람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곁에 사람이 있건 없건, 장소가 어디든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사실 부끄럽습니다. 말을 하는 데에도 예절이 있는 법입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이웃 사람들에게 행여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항상 조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는 지금까지 지녀 왔던 것을 놓아야할 그런 때가 옵니다. 생을 마치는 그 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생에 대한 애착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이때만큼은 살아있는 동안의 그 숱한 애착은 물론 육신까지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내 생명을 잉태시켜준 어머니의 몸을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내 생명을 잉태시켜준 어머니의 몸을 버렸습니다. 또 살면서도 끊임없이 버리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당해서는 이 몸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에서 시작해서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러나 버린다는 행위는 새것을 얻기 위한 몸짓이라는 사실, 보다 본질적인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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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윤거사님, 수고하셨어요. 송광사와의 추억, 한 편 올리려고합니다. 기대해주세요._()_
감사드립니다............아미타불...................()()()
합장 함니다..
마음의 근원 찾는 노력은 욕망껍질 벗는 과정.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