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7대왕인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
배경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第)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하여 도와 줌)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즉위 3년(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12년에
황룡사 구층탑을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현존하는 신라 석탑의 가장 오랜 작품
그러나 세간에서는 '여왕통치'라는 허약성을
선입견으로 갖고 있었기에 부처의 힘을 빌고
국가의 어려움을 없애며 선덕여왕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 절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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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 몫 했을
석재들의 방치된 모습
이것이 '분황사(芬皇寺)이다.
일명 왕분사(王分寺)라고도 하였다. 선덕여왕 3년에
세워진 것으로 당나라에서 계율(戒律) 한 자장(慈藏)을
분황사에 머물었으며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등 많은 책을
남겼다. 이곳 분황사의 명물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국보 제30호로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뒤에 몇 차례 보수되었고, 지금의
탑은 1915년에 수리한 모습이다. 1단의
석축기단을 만든 다음, 그 중앙에는 1단의
화강암 판석(板石)을 밑에 깔고 안산암(安山岩)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탑신을 쌓아올렸다.
기단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1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다. 내륙을 바라보는 서쪽의
두 마리는 사자이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두
마리는 물개의 모습이다.
9층으로 추정되는 목탑 양식의 석탑
◆
목탑의 양식을 따라 돌로 만든 분황사의
모전석탑
탑의 1층 네 면에는 목탑(木塔)의 뜻을 살린 듯
입구가 열려 있는 작은 방인 감실(龕室)을
만들고 양쪽에 화강암으로 인왕입상(仁王立像)을
각각 1구(軀)씩 세웠다.
반라의 인왕상은 전체적으로 불법을 지키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탑의 옥개(屋蓋)는 전탑(塼塔)을
닮아 상하에서 단층(段層)을 이룬다.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붕괴되어
현재는 3층만 남아 있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또한 분황사 본전 북쪽 벽에는 천수대비
그림이 있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인 희명(希明)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도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6만6천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황룡사에 모셔진
장육존상이 4만7천근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시대상 힘들었을 선덕여왕의 작품
◆
서쪽을 향한 곳에 배치해놓은 사자모양의
동물상
유물은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경내에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과
당간지주가 남아있고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석재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한편 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었다.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덕이라하고, 유언에 따라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
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켰고 구휼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하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으며, 첨성대(瞻星臺)·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건립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찬란한 신라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왕의 존재.
물론 이 당시 여자들이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지니며 행세했다지만 남자들이 세상을 통치하던
시대에 태어나 여자의 몸으로 한 나라를
통치하며 겪었을 시련과 마음의 고생을 이것
분황사에서 짐작해본다. 당시의 상황에
힘들었을 선덕여왕에게 같은 여자로서 애달픔과
박수를 보내본다.
◆
입구에서 왼쪽에 있는 대종각.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목어는 원효 예술제 때
이용된다.
여행메모 위치 : 경북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가는길 : 경주 국립박물관 앞의 삼거리에서
정면의 길로 가서 철길을 지나 좀 더 가면 황룡
사터가 보이고 100여m 더 가면 오른쪽에 분황사가
있다.
삼룡변어정(우물)의 전설 :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에는 청지, 동지 그리고 분황사에 한
마리씩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뢰니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되찾아 세 곳에 놓아주어 살게 하였다. 그
뒤부터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남아 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