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언을 일삼는 자에 한해서 민 형사적 책임을 물을 것...」
지난 5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신라 말 역성혁명 없어…….
박씨 왕가는 조작된 것」이라는 기사와 부산일보 2007년 5월 12일자
「남산은 알까, 신라의 진실을…….」의 기사가 실어졌다.
기사의 주 내용은 12일 부산외국어대학교 권덕영 교수가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 논문의 내용으로
“신라 53대 신덕왕(神德王)으로부터 경명왕(景明王) 경애왕(景哀王)은
박씨가 아니고 김씨라는.”것이다.
터무니없고 어처구니없는 논문내용을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가
수천 년 전의 역사를 근거없이 주장 발표한것에 성손들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어
부산외국어 대학교 총장에게 항의문을 발송하고
전직 전·능(殿·陵) 참봉협의회 회장 박명준 참봉외 원로 종친 4名과 사)신라오릉보존회
부산광역시 본부 박정학 회장외 임원 5名은
2007년 7월 27일 장본인인 권덕영교수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자기의 한국고대사 논문에 대하여 사과를 받고 직접 자필로서 사과문을 받은바 있다.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 박기상 이사장은 이건에 대하여
“이후 이같이 망언을 일삼는 자에 한해서 민 형사적 책임을 묻고
조직적으로 대처 할 것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신라 시조대왕은 고대사나 현대사에 이르러 전세계적으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왕권 계승의 기틀을 잡은 유일한 분이신데 역성이 없다고 하여
터무니없는 망언을 일삼는 권덕영과 같은 사람은
다시는 나타나질 않길 바란다.<부산외국어대 권덕영 교수 연락처 051-640-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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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영교수의 자필 사과문
/박상섭 취재팀장(parkss1012@hanmail.net)
출처: 한빛신문 제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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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박씨 왕가 출현은 고려의 혈통변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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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7-05-08 18:08] |
권덕영 교수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의문'에서 주장
(서울=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신라는 박ㆍ석ㆍ김의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이어가다
나물왕(내물왕)대부터 김씨 세습제가 확립됐다.
그런데 신라 하대에 들어와 수백 년 동안 지속된
김씨 왕조가 갑자기 박씨 왕조로 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
제53대 신덕왕 박경휘와 그의 아들 박승영(경명왕) 박위응(경애왕)이 박씨 성의 왕이다.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출현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해 온 역사의 수수께끼였다.
그동안의 해석은 진골왕통이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와
원래 김씨였으나 후에 박씨로 성을 바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12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할 논문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의문'에서
신라 하대 박씨 왕의 등장은 후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권 교수는 신라 하대에 활동한 박씨 성의 관리와 사신, 유학생, 승려, 지방호족,
귀족여성 등을 살핀 뒤 "신라 하대 박씨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미미한 위치에 있었다"며
"박씨가 왕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군주제 국가에서 왕조가 바뀌는 일은 천지개벽과 마찬가지다.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문을 연 것으로 알려진 신덕왕이 역성혁명을 일으켰다면
어떤 형태로든 나말려초의 기록에 언급됐을 것이 확실하다.
권 교수는 "신덕왕이 역성혁명을 일으켰다는 어떤 근거도 발견할 수 없으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덕왕 경휘의 아버지 예겸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권 교수는 김씨인 신덕왕계의 성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뀐 이유를
고려 건국세력에게서 찾는다.
고려 건국자들이 신덕왕계의 혈통을 조작해 박씨라 하고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역성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권 교수는 "전대 왕조의 혈통을 변조하는 일은
중국 한나라와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도 나타난다"고 덧붙인다.
그렇다면 신덕왕 이후 세 왕의 성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뀐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현존하는 기록 가운데 박씨 왕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은 삼국사기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편찬될 시기 고려는 이미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권 교수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주목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 구삼국사의 내용을 대폭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 출처를 별도로 밝히지 않은 서술 가운데
국내 자료의 대부분은 구삼국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구삼국사의 편찬 시기는 고려 광종 연간으로 추정된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같은 시책을 통해 왕권강화에 힘쓴 군주였다.
권 교수는 "고려 왕실 만들기에 부심하던 광종이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천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신라 하대 박씨 왕가가 아닐까 한다"고
추정했다.
kind3@yna.co.kr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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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역성혁명 없어… 朴氏 왕가는 조작된 것”
<동아일보 2007. 5. 9>
신라 말기 박씨 왕가는 실제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려 건국의 정당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조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권덕영 부산외국어대 교수는 12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
신라 말기 박씨 왕가는 김씨 세습제가 끊긴 53대 신덕왕부터 시작해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졌고,
경애왕이 927년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하면서 끝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박씨 왕가의 등장을 진골 왕통이 끊긴 탓이라고 보거나,
국정 쇄신을 위해 김씨가 성을 박씨로 바꾼 것으로 해석해 왔다.
하지만 권 교수는 “기존 왕조를 다른 성씨가 장악하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전쟁, 반란과 같은 역성혁명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어느 문헌에서도 역성혁명을 찾아볼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권 교수는 “고려 건국자들은 신라 왕조 말기의 혈통을 박씨로 조작해
고려 개창의 정당성을 내세우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박씨 왕가를 무너뜨린 견훤은 왕건과 후삼국의 패권을 두고 다퉜던 인물”이라며
“고려 건국 세력이 적대 세력과 다름없는 견훤이 왕실의 정통성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까지
신라 말 왕가를 박씨로 조작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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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알까, 신라의 진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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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2007-05-12 11:51]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news.naver.com%2Fimage%2Fnews%2F2004n%2Fgo_newspaper.gif) |
권덕영 교수 "고려가 하대 3왕 김씨를 박씨로 조작" 주장
TV 사극이야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 과장이나 왜곡이 심하다지만
역사책에 씌어진 것은 그래도 객관적이지 않을까?
부산외대 권덕영(사진)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당대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비문도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조작과 왜곡이 행해진 것으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하물며 후대에 기록된 역사서야 이루 말할 게 있겠는가.
고대사학계의 오래된 수수께끼 중에 이런 게 있다.
수백 년 동안 김씨가 차지하던 신라 왕실의 주인이 53대 신덕왕대에 들어
3대에 걸쳐 갑자기 박씨 왕가로 바뀐 것.
학계에선 진골 왕통이 끊어졌기 때문이라거나,
국정 쇄신 차원에서 김씨가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 역시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동서 고금의 역사를 보면 역성혁명은 전쟁이나 반란 같은 진통을 수반하는데,
신라 하대엔 너무나도 자연스레 박씨에게 왕권이 넘어갔거든요."
그는 고려 건국 세력이 정당성과 명분을 얻기 위해 성씨를 조작했을 것이란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12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에서다.
그는 "신라하대의 박씨 인물들은 대부분 왕권 획득과는 거리가 먼 미미한 위상을 갖고 있었고,
신라 하대 3명의 박씨 왕들의 가계를 분석하면 실제론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다"고 했다.
"만약 왕실의 성이 바뀌었다면 당대의 여러 자료에 최소한 암시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내놓은 설명이 고려 왕실이 새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라 하대 박씨 왕계를 조작했다는 정치적 이론이다.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주체세력들이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해
앞 왕조의 혈통을 왜곡 조작한 숱한 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여불위의 숨겨둔 아들이라며 진나라 왕실의 혈통을 조작한 중국 한나라,
고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고 조작한
조선 개국 세력들이 그런 사례들입니다."
이날 토론에선 "박씨 왕가를 무너뜨린 게(경애왕 피살) 왕건과 패권을 다퉜던 견훤인데,
고려 건국 세력이 견훤이 왕실 정통성을 바로잡았다는 사실을 부각하면서까지
신라 말 왕가를 박씨로 조작했을 리는 없다"는 반론도 나왔다
.
권 교수는 '견훤'이 폐위시킨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폐위'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역사만들기가 더 쉬워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고려는 '김씨 혈통 변조를 통한 박씨 이성(異姓) 왕조 수립-박씨 왕을 폐위하고
박씨 왕조 타도-김씨 진성(眞姓) 왕조 복구-김씨 진성 왕조로부터
선양'이란 교묘한 패턴으로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도 경남 산청의 전(傳) 구형왕릉이 이름없는 돌무더기에서
구형왕릉으로 확정되어간 과정을 추적하면서 '만들어진 역사'의 일단을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역사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서 현재적 입장에서 다시 만들어진다고 본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란 책처럼 우리 역사에서 '발명된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악해 책으로 낼 작정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장보고 부활 프로젝트, 연개소문 영웅만들기 등등.
물론 권 교수 자신도 고려왕실이 신라의 역사를 조작했다는 엄청난 혐의에 대해
자신하진 못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해석할 수 있구나 하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받아들여주길 바란다"고 슬며시 꼬리를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도 도처에서 역사만들기가 진행되고 있는 중인데….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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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학회 발표문(2007, 5, 12)
신라 하대 朴氏 王家의 의문
권덕영(부산외국어대학교)
1. 머리말
역사에는 오늘날의 통념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사실들이 허다하다.
곰이 사람이 되고 피가 우윳빛으로 변했다는 등의 신화 ․ 종교적인 이야기는 그만두고라도,
扶桑國 동쪽에 여자들만이 사는 女人國이 있었다든지,
키가 세 길이나 되고 톱니 이빨에 갈퀴 손톱을 가진 長人 이야기 등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다.
그러한 불가해한 역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임무이거니와,
이를 위하여 역사가들은 끊임없이 자료를 찾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출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는 건국초기에 박 ․ 석 ․ 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잇다가
나물왕대부터 김씨 세습제가 확립되었다.
그후 비록 내부적으로 나물왕계, 무열왕계 혹은 원성왕계 등으로 分枝化되어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하고 경쟁하였으나, 변함없이 김씨 왕족이 신라 왕실을 장악하고 이끌어 갔다.
그런데 제53대 神德王代에 들어와 수백 년 동안 지속되던 김씨 왕조가 갑자기 박씨 왕조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왕조를 다른 성씨가 장악하는 행위를 역성혁명이라 하고,
그 결과 출현한 새로운 왕실을 역성왕조라 한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성혁명은 전쟁이나 반란과 같은 대내외적인 진통을 거쳐 나타난다.
그런데 신라 하대 왕실의 주인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뀐 역성왕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현전하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어떠한 갈등과 투쟁도 없이
박씨가 김씨를 대신해 왕이 되어 3대에 걸쳐 신라를 통치하였다.
보통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신라 하대의 왕조교체에 대한 의문이 바로 본고의 출발점이다.
사실 신라 하대 박씨왕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나름대로 해석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는 진골왕통이 끊어졌기 때문이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원래 김씨였으나 후에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 박씨 왕가에 대한 의문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자는 박씨 왕가가 후대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우선 신라 하대 박씨 왕가에 대한 기존인식을 살펴보고,
각종 자료에 등장하는 박씨 인물들을 찾아내어 신라 하대 박씨 세력의 존재양태를 추적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개창자라 할 수 있는 신덕왕의 성씨 계보를 분석하여
이른바 박씨 왕가의 실재여부를 고찰하고, 이러한 연구 결과를 기초로 박씨 왕가의 허구성을 타진해볼 생각이다.
많은 가르침을 바란다.
2. 박씨 왕가에 대한 인식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신라 하대 박씨 왕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삼국사기>>이다.
고려 인종 때 편찬된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에 의하면,
912년 4월에 효공왕이 죽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고
乂(銳)謙의 아들인 朴景暉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제53대 신덕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신덕왕이 6년 동안 재위하다가 죽자 그의 아들 昇英(경명왕)과 魏膺(경애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여
박씨 왕가를 이어나갔는데,
927년에 견훤이 경주를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金傅(경순왕)를 왕위에 앉힘으로써
박씨 왕의 시대가 끝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등장을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왕위교체로 인식하였다.
<<삼국유사>>의 박씨 왕가에 대한 인식 또한 <<삼국사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는 <<삼국사기>>의 관련내용을 보다 논리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사실 <<삼국사기>> 박씨 왕가에 대한 기록에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신덕왕이 박씨인 까닭은 예겸의 아들이고 아달라왕의 원손이기 때문이라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겸은 헌강왕대에 대아찬으로써 侍中을 역임한 김씨 진골귀족이고,
아달라왕은 후사가 없이 죽었다.
그럼에도 신덕왕을 아달라왕의 후손으로 박씨라 한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그러한 모순을 비교적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신덕왕의 계보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검토하겠거니와,
<<삼국유사>> 왕력편 신덕왕조에서 예겸은 신덕왕의 생부가 아닌 義父라 하였다.
그리고 그가 박씨인 까닭은 외증조부 元鄰 角干이 아달아왕의 원손이기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삼국사기>>에서 범한 모순의 일단을 해소시켜준 셈이다.
어찌되었든 <<삼국유사>>에서는 신덕왕과 그 이후의 두 왕이 박씨였다고 함으로써 박씨 왕가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을 박씨라 한 고려시대의 박씨 왕가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삼국사절요>>는 신덕왕이 박씨임을 간결하고 분명한 어조로 말하였고,
<<동국통감>>은 아달라왕에게 후사가 없었음에도 신덕왕이 그의 먼 후손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표하면서도
신덕왕의 성을 박씨라 하였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편찬된 <<동사강목>>에서도 아달라왕에게 후손이 없었다는 기록을 상기시키며
의문을 제기했으나 신덕왕이 박씨인 점만은 분명하게 인정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서도 아달라왕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으나 역시 신덕왕을 박씨라 하였다.
이 외에도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신덕왕을 박경휘라 하고
경명왕과 경애왕 역시 박씨라 하였으며, 趙觀彬은 <<회헌집>>(권17)에서
박씨의 근원은 경명왕에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처럼 <<삼국사기>> 이후 조선후기까지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실재를 인정하였다.
간혹 신덕왕과 아달라왕과의 관계에 가벼운 의문을 표시하기는 했으나,
신덕왕이 박씨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가 과연 아달라왕의 후손일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한 궁금증 이상의 고민은 아니었다.
고려 중기부터 이어진 신덕왕 이후 세 왕이 박씨였다는 인식은
조선 후기 신라 왕릉 비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지금의 경주시 배동 남산 서록의 삼릉계곡 입구에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의 능이 같은 묘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들 왕은 각기 현재와 전혀 다른 위치에 묻혔거나 화장해 散骨함으로써 왕릉 자체가 없었던듯하다.
아달라왕릉의 소재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신덕왕릉은 竹城 혹은 箴峴 남쪽에 있다 하였고,
경명왕의 경우는 황복사 북쪽 혹은 거기서 화장하여 省登仍山 서쪽에 뼈를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경애왕은 남산 蟹目嶺에 묻혔다고 한다.
죽성, 잠현, 성등잉산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황복사는 경주시 낭산 동북쪽 기슭에 그 터가 남아 있고,
해목령은 남산의 서봉으로 윤을곡과 포석계의 경계지점이다.
따라서 지금의 경명왕릉은 황복사 북쪽과 방향이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거리도 멀기 때문에 경명왕릉이라 할 수 없고,
경애왕릉 역시 해목령에서 여러 계곡과 구릉을 사이에 두고 2km 이상 떨어져 있어
경애왕릉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신덕왕릉은 내부구조가 천정이 높은 횡혈식 석실분이고
분구의 규모와 축성 상태가 삼국통일 전후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신덕왕릉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1730년에 경주의 신라 왕릉을 비정할 때 이들을 동일한 능역에 일괄 비정하였다.
그 이유는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이 박씨로서 동일 혈연집단이라는 종전의 인식을
비판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덕왕을 비롯한 네 왕의 능을 현재의 남산 삼릉골 입구에 모아 비정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아달라왕의 원손이라는 인식으로 일괄 그곳에 비정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존재는 조선후기까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인식되었는데,
그러한 사실은 각종 사서와 문집 그리고 왕릉 유적으로 나타났다.
근대 역사가들도 신라 하대 박씨 왕가에 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今西龍은 신라사를 개관하는 과정에서 박씨 왕가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 이후 前間恭作, 池內宏, 末松保和, 井上秀雄 등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는데,
서로간 다소의 해석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실재를 인정하였다.
특히 井上秀雄은 신덕왕의 원래 성이 김씨였는데,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와의 결혼과 침체한 신라를 중흥시키려는 개혁의지의 표현으로 박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신덕왕의 성이 원래 김씨였다가 즉위 후에 박씨를 칭했다면,
비록 似而非이기는 하나 그러한 왕실 역시 박씨왕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井上秀雄 역시 박씨 왕실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하겠다.
한편 한국에서는 1970년대 이후 박씨 왕가를 다룬 논고가 단속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대체로 실제 박씨가 김씨를 대신해 신라의 왕실을 접수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우선 李鍾恒은 신라의 진골왕통이 헌강왕대 이후에 滅絶되었으므로 신덕왕은 김씨 진골일 수 없고,
그의 원래 성은 분명 박씨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범환, 김창겸, 이명식은 신덕왕이 박씨라는 전제하에서 3대에 걸친 박씨 왕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추이를 고찰하였고, 이기동은 박씨 왕의 등장을 김씨 왕통의 단절을 넘어
신라 골품제국가의 종말이라 하였다.
또한 문경현은 하대의 박씨왕가는 순수한 씨족으로서의 박씨가 아니라
김씨 왕족에 붙인 씨명에 불과하다고 하면서도, 박씨를 칭한 왕가가 존재했음을 은연중에 수용하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 박씨 왕가를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박씨 왕가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한국사 개설서를 비롯하여 각종 백과사전과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제7차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편찬된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사>> 부록편의 역대 왕조 계보도에,
신덕왕을 아달라왕의 원손이라 표기하고 경명왕과 경애왕을 포함한 이들 세 왕을 박씨라 명기하였다.
결국 <<삼국사기>> 편찬 이후 지금까지 비록 그 성격에 관해서는 상이한 견해가 있지만,
신라 하대 박씨 왕가가 실재했다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다고 하겠다.
3. 하대의 박씨 인물
1) 관리와 사신
국내외의 문헌자료와 각종 금석문 등에는 신라 하대에 활동하던 많은 박씨 인물들이 산견된다.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분야별로 나누면 관리와 사신, 유학생과 승려, 지방호족,
신라 왕비를 비롯한 박씨 여성 등으로 대별된다.
우선 박씨 출신의 관리로서 들 수 있는 사람은 朴居勿이다.
박거물은 황룡사찰주본기와 삼랑사비문을 찬술한 문인으로,
당의 빈공급제자로 추정된다.
그리고 황룡사찰주본기를 지은 872년 당시의 관직은 侍讀 右軍大監 兼 省公이었다.
시독은 신라하대 문한기구의 하나인 한림대의 관원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의하거나
국가의 중요 문서작성을 맡았던 관직이다.
그러나 우군대감과 성공의 직임과 성격은 알 수 없다.
어쨌든 박거물은 신라 하대 문한기구의 한 관원이었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다음의 朴邕은 헌강왕대에 시독 한림으로 있으면서,
왕의 부름을 받고 경주에 왔다가 산으로 떠나는 낭혜화상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지은 송별시집의 서문을 지은 문사이다.
이덕무의 <寒竹堂涉筆>에 그때 박옹이 지은 글이 소개되어 있거니와,
거기에 따르면 당시 박옹은 侍讀翰林郞 兼 崇文臺瑞書院直學士로서 관등은 薩湌이었다고 한다.
박옹 역시 당의 빈공과 급제자로 추정된다.
朴仁範은 일찍이 당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한 문인으로,
귀국 후 신라에서 한림학사, 수예부시랑, 서서학사 등을 역임하였다.
당에서 황소의 난이 한창이었을 때 박인범은 원외랑으로서 당나라 내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探候使로서 입당하였고, 도선국사가 죽은 후 효공왕의 명을 받아 玉龍寺道詵國師碑文을 지었으며,
곧이어 澄曉大師碑文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현재 그의 시문으로는 찬문 2편과 칠언율시 10편이 남아 전하는데,
이규보가 <白雲小說>에서 박인범, 최치원, 박인량은 시로써 중국에 울렸다고 했듯이
그는 특별히 시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朴充과 朴求(球) 역시 당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한 인물로 생각된다.
만당의 문인 張喬가 신라로 돌아가는 박충과 박구를 위해 지은 송별시에서 박충을 侍御라 하였고,
박구를 碁待詔라 하였다.
시어는 어사대 소속 시어사의 약칭이고 기대조는 한림원 소속의 관원이므로
그들은 당 왕조에서 관리생활을 했다고 하겠다.
당의 빈공과 급제자들이 신라로 돌아오면 신라는 으레 그들을 관리로 임용하였다.
이런 점에서 박충과 박구 역시 귀국 후 신라 조정에서 관리로 복무했을 것이다.
평산 박씨의 시조 朴赤烏(積古)와
성덕대왕신종의 제작자인 朴從鎰, 朴韓味, 朴賓奈, 朴負缶 역시 신라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박적오는 일찍이 北京都尉을 역임하고 죽주로 들어가 察山侯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북경도위와 찰산후 같은 관작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보이지 않으나,
추정컨대 북경도위는 北小京(명주)의 도위이고
찰산후는 죽산의 태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박종일, 박한미, 박빈나, 박부부는 각각 大博士와 次博士의 직임을 가지고
성덕대왕신종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비록 대나마와 나마 그리고 대사라는 비교적 낮은 관등과 박사라는 기술직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엄연히 신라의 관직체제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이들 역시 신라의 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朴仁遠, 朴儒는 고려 왕조에 봉사한 관리였다.
박인원은 왕건이 즉위한 직후에 일길찬으로서 白書省卿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박유는 光海州 사람으로 처음에 궁예를 섬겨 員外와 東宮記室이 되었다가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숨었다가 왕건이 즉위한 후에 세상에 나왔다.
왕건은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機要를 관장시켰는데, 공이 많았으므로 왕씨 성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는 진철대사 利嚴의 재가제자로서, 이엄의 탑비 건립에도 조력하였다.
한편 朴如言과 朴術洪은 신라 견당사로, 朴巖은 고려의 사신으로
그리고 朴正長은 일본 견당사의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박여언은 애장왕대 초에 하정사의 임무를 띠고 당에 들어가,
貞元(785-798) 연간에 편찬된 최신 의학서적 <<廣利方>>을 베껴 돌아왔다.
그리고 兵部郞中 박술홍은 경애왕 4년(927)에 부사로서
大使 병부시랑 張芬과 함께 후당에 들어가 당으로부터 어사중승의 관직을 받았다.
그리고 춘부소경 박암은 동광 원년(923)에 고려 사절단의 부사로서 광평시랑 韓申一과 함께 후당에 파견되었고,
박정장은 일본의 승화 견당사와 동행하여 신라 역어 곧 신라어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朴王式은 신라시대에 조산대부였고, 경애왕 朴魏膺은 상대등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박위응은 후술하듯이 김씨였으므로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박씨 인물들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1>과 같다.
<표1> 관리와 사신
인명 |
관등, 관직 |
활동 |
전거 |
기타 |
朴居勿 |
侍讀右軍大監 兼 省公 |
황룡사찰주본기와 삼랑사비문 찬술. |
황룡사찰주본기, 삼국사기26 |
빈공과 급제자로 추정 |
朴邕 |
沙湌, 侍讀翰林郞 兼 崇文臺瑞書院直學士 |
낭혜화상 贈行詩 서문 작성 |
성주사낭혜화상비, 청장관전서68 |
// |
朴仁範 |
翰林學士, 守禮部侍郞, 瑞書學士, 員外郞 |
당 빈공과 급제, 징효대사비와 도선국사비 찬술, 탐후사로 입당 |
징효대사비, 옥룡사선각국사비, 계원필경10, 백운소설, 삼국사기46 |
詩作에 능함 |
朴充 |
侍御使(唐) |
당 관직 역임, 당 문인 張喬와 교유 |
전당시638 |
빈공과 급제자로 추정 |
朴求(球) |
碁待詔(唐) |
당 관직 역임, 당 문인 張喬와 교유 |
문원영화283. |
// |
朴赤烏(積古) |
北京都尉, 察山侯 |
평산 박씨 시조 |
박경인묘지명, 박경산묘지명 |
|
朴從鎰 |
大奈麻, 大博士 |
성덕대왕신종 鑄造 |
성덕대왕신종명 |
|
朴韓味 |
奈麻, 次博士 |
// |
// |
|
朴賓奈 |
奈麻, 次博士 |
// |
// |
|
朴負缶 |
大舍, 次博士 |
// |
// |
|
朴仁遠 |
一吉湌, 白書省卿 |
왕건 즉위 직후 임용 |
고려사1 |
|
朴儒 |
員外, 東宮記室, 機要職, 王子太相 |
궁예에게 출사, 은거, 왕건 즉위 후 기용, 王姓 하사, 진철대사탑비 건립 주청 |
고려사1, 92, 광조사진철대사탑비 |
|
朴如言 |
賀正使 |
견당사로 입당, 최신 의학서 廣利方 필사 귀국 |
劉賓客文集17, 전당문603 |
|
朴術洪 |
兵部郞中, 副使 |
張芬과 함께 후당에 파견, 당으로부터 시어사 받음 |
삼국사기12, 책부원귀976 |
|
朴巖 |
春部少卿, 副使 |
韓神一과 함께 후당에 파견, 당으로부터 朝散郞 試秘書郞 받음 |
신오대사74, 오대회요30 |
고려사에는 “吳越文士”로 지칭 |
朴正長 |
新羅 譯語 |
일본 承和견당사 동행 |
입당구법순례행기1 |
|
朴王式 |
朝散大夫 |
朴僕射의 7대 할아버지 |
朴僕射墓誌銘 |
|
朴魏膺 |
伊湌, 上大等 |
신덕왕의 아들, 경애왕으로 즉위 |
삼국사기12 |
김씨 |
2) 유학생과 승려
신라 하대에는 서학 구법과 도당 유학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들 유학생과 구법승의 활동과 신분 그리고 역할 등에 관해서는 다양한 연구가 있거니와,
그들 중에는 박씨 인물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우선 들 수 있는 사람은 朴季業과 朴亮之이다.
박계업은 일찍이 당에 들어가 국자감에서 공부하다가 헌덕왕 17년(825)에 견당사 김흔과 더불어 귀국하였고,
박량지는 金允夫 ․ 金立之 등과 함께 박계업이 귀국할 때 입당해 국자감에 입학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권5)에서 이들을 빈공급제자라 했는데,
당시 빈공급제자가 돌아오면 대부분 신라의 문한직에 임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박계업과 박량지 역시 귀국 후 신라 조정에서 문한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계업과 박량지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해 금의환향했다면 朴處士는 그렇지 못하였다.
만당의 시인 顧非熊이 지은 송별시 <送朴處士歸新羅>에
“어려서 고국을 떠나와서 이제 돌아감에 늙은이가 다 되었네”라는 구절이 있다.
고비웅의 시에 등장하는 박처사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언제 신라를 떠나 당에 들어갔는지, 당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했으나
빈공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다 늙어서 귀국길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 무종 연간에 진사로 급제하여 正言과 太常博士를 역임한 당나라 문인 馬戴의 시에 등장하는
朴山人도 박처사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로 보인다.
다음으로 신라 하대 박씨 출신의 승려로 우선 들 수 있는 사람은 원랑선사 大通이다.
대통은 字는 太融으로 헌덕왕 8년(816)에 通化府 仲停里의 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통화부 중정리가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의 어머니가 取城郡 출신인 점으로 아마 그와 가까운 지역인 듯싶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벼슬을 멀리하며 소박하게 살았는데,
출가하여 聖鱗과 낭혜화상 무염을 스승으로 삼아 공부하다가
856년에 중국에 들어가 앙산 징허대사에게서 선을 배운 후 866년에 돌아왔다.
귀국 후 경문왕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월악산 월광사에 주석하다가
883년에 입적하였다.
적인선사 慧徹 역시 속성이 박씨였다.
그의 집안은 원래 경주에 있었는데,
선조는 대대로 유교와 도교에 심취해 세속의 영화와 명리를 멀리 하였다.
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고 삭주 善谷縣에 거주하며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고 한다.
혜철은 15세에 출가하여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후 당으로 건너가 지장대사의 心印을 받고 신라에 돌아왔다.
혜철은 동리산 대안사에 머물며 대중을 교화하였고,
문성왕의 요청으로 정치의 要諦를 담은 封事 약간 조를 올려 조정을 도왔다.
쌍봉화상 道允은 박씨로 한주 鵂巖 사람으로 어머니는 高氏이다.
그의 집안은 누대에 걸쳐 웅호한 가문으로 조고가 관직에 나아가 활동한 것이 郡譜에 상세히 전해진다고 한다.
나이 18세에 귀신사로 출가하여 화엄학을 배우고 당에 건너가
남천 普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무종의 폐불 사태를 만나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楓岳에 머물며 대중을 교화하고 경문왕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받았다.
함통 9년(868)에 71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요오선사 順之는 浿江 사람으로 속성이 박씨였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변방의 장수로 활동하였고 가업이 雄豪하였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출가해 오관산과 속리산을 거쳐 858년에 입당하여
앙산 혜적선사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고 돌아왔다. 왕건의 조모인 원창왕후와 아버지인
위무대왕의 배려로 오관산 龍嚴寺에 거주하였고,
신라 경문왕과 헌강왕의 존경을 받았으며, 진성왕의 요청으로 경주에 가서 문무백관들에게 불교를 설법하였다.
그 얼마 후 순지는 65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惠居國師는 명주 박씨로 川寧郡 黃驪縣 사람이다.
그는 914년에 우두산 개선사에서 출가한 후 선운산 선불장에서 명성을 떨쳤고
경애왕과 경순왕의 초청으로 분황사와 영묘사에 머물며 계단을 세우고 법회를 개최하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혜거를 세차례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다가 정종이 王師로 봉하고 초청하자
개경으로 올라가 弘化寺에 주석하였고, 광종 때에는 廣明寺로 옮겨 거주하였다.
그는 국사에 책봉되었는데, 만년에 水州府 갈양사로 내려와 생을 마감하였다.
이 외에도 징효대사 折中 역시 박씨였을 가능성이 높다.
절중은 한주 휴암 출신으로, 오관산사에서 출가하여 부석사, 장곡사, 장담사를 거쳐
도담선원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헌강왕 8년(882)에 곡산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사자산 흥녕선원에 머물자,
헌강왕이 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켜 우대하였다.
후에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고자 했으나 거절하였는데, 효공왕 4년(900)에 74세로 입적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박씨 출신의 유학생과 승려들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2>와 같다.
<표2> 유학생과 승려
인명 |
출신지 |
활동 |
전거 |
기타 |
朴季業 |
|
입당 유학, 825년 귀국 |
삼국사기10, 동사강목5 |
빈공과 급제 추정 |
朴亮之 |
|
825년 입당, 국자감에서 수학 |
// |
빈공과 급제 추정 |
朴處士 |
|
입당 유학, 늙어서 귀국, 당 문인 顧非熊과 교유 |
문원영화281, 전당시509 |
이름 不明 |
朴山人 |
|
입당 유학, 당 문인 馬戴와 교유 |
문원영화232 |
이름 不明 |
圓朗禪師 大通 |
通化府 仲停里 |
字 태융, 성린과 무염을 스승, 입당 징허 문하에서 수학, 월광사에 주석, 경문왕의 각별한 호의 |
월광사원랑선사탑비 |
|
寂忍禪師 慧徹 |
朔州 善谷縣 |
화엄사에서 공부, 입당하여 지장의 심인을 받음, 대안사에 주석, 문성왕에게 封事 약간조 헌납 |
대안사적인선사탑비 |
|
了悟禪師 順之 |
浿江(鎭) |
어머니는 蘇氏, 입당하여 앙산 혜적 문하에서 수학, 왕건의 조모 원창왕후의 배려, 경문왕, 헌강왕, 진성왕의 예우 |
서운사요오화상탑비, 조당집17 |
|
雙峯和尙 道允 |
漢州 鵂巖 |
어머니는 高氏, 귀신사 출가, 입당하여 보원 문하, 풍악에 거주, 경문왕의 은혜 |
조당집 17 |
|
惠居國師 |
川寧郡 黃驪縣 |
어머니는 김씨, 개선사에서 출가, 경애왕과 경순왕의 초청에 응했으나 왕건의 초청에 불응, 정종 때 王師 광종 때 국사, 길양사에서 입적 |
갈양사혜거국사비 |
명주 박씨, 父 允榮 |
澄曉大師 折中 |
漢州 鵂嵓 |
오관산사 출가, 도담선원과 흥녕사 거주, 신라왕실의 예우 거절 |
흥녕사징효대사탑비 |
박씨로 추정 |
3) 지방호족
잘 알려져 있듯이,
신라 하대에는 각지에서 크고 작은 호족들이 발호하였다.
그 중에는 박씨들도 다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평산 박씨 집안의 사람들이다.
나말려초 평산 박씨의 가계와 활동에 관해서는 鄭淸柱의 자세한 연구가 있거니와,
평산 박씨가 지방의 호족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중엽 朴直胤 때부터였다.
박직윤은 앞에서 소개한 朴赤烏(積古)의 아들로,
죽산에서 평주로 옮겨가 관내 八心戶의 읍장이 되었고
고구려의 장군직에 해당하는 대모달을 칭할 정도로 토착 군사력을 가진 지방세력가로 성장하였다.
패강진 관내의 평주에서 세력기반을 다진 평산 박씨는
박직윤의 아들 朴遲(智)胤 대에 와서 명실상부한 패서지방의 호족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궁예가 세력을 키워 패서지방을 위협하자 박지윤은 궁예에게 귀부해 태봉의 지지세력이 되었고,
왕건이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는 다시 왕건 휘하로 들어갔다.
고려왕실에서 三重大匡까지 승진한 박지윤은 그의 딸을 왕건과 혼인시켰는데,
그녀가 바로 聖茂夫人이다. 그의 두 아들 朴守文 ․ 守卿 형제 역시 고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후에 정치적으로도 출세하였다.
특히 박수경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군사적 활동은 <<고려사>>(권92) 박수경 열전에 자세하거니와,
그러한 무공으로 박수경은 역분전 200결을 받았고 평주를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딸을 태조의 왕비로 들여보냈다. 그 후 정종 즉위시 내란을 평정하여 大匡이 되었고,
서경의 왕성 축조사업과 功役者 攷定事業을 주관하는 등의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나,
광종의 호족억압 정책 와중에서 화병으로 죽었다.
박수문은 왕건의 명을 받고 劉權說과 함께 태흥사로 내려가 진철대사 利嚴을 개경으로 모셔와
舍那內院에 안치하였고, 태조가 죽을 때 재신으로서 廉相, 王規와 함께 태조 곁에서 마지막 유조를 들었다.
그리고 박수문의 딸 역시 태조의 왕비로 들어가 月鏡院夫人이 되었다.
박수문과의 혈연적 연관성은 알 수 없으나 朴質榮 역시 패서지방의 호족이었다.
박질영은 918년에 왕건이 즉위한 직후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동왕 5년에 서경으로 사민되었다.
패강진 지역을 기반으로 한 평주박씨 외에도 혜성군의 朴述熙,
승주의 朴英規 가문 등도 신라 하대의 호족이었다.
박술희는 대승 得宜의 아들로, 18세에 궁예의 위사가 되었다가 후에 고려 태조를 섬겨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대광이 되었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언으로 혜종을 옹립하여 국정을 장악했으나,
왕규와의 대립 과정에서 岬串에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후에 그는 沔川 박씨의 시조로 받들어졌다.
승주지방의 호족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로 후백제 건설에 조력하였다.
그런데 935년에 신검이 반역하여 견훤을 내쫒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자,
고려와 내통하여 후백제를 무너뜨리는데 기여하였다.
이에 왕건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좌승을 제수하고 밭 1,000경을 주었으며,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박영규는 뒤에 관등이 삼중대광에 이르렀고, 두 딸을 왕건과 정종에게 각각 출가시켰다.
이 외에도 지금의 울산지방인 興禮府에는 스스로 神鶴城將軍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행사하던 朴允雄이 있었다.
그는 울산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국내외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이른바 해상세력 출신 호족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토사 법경대사 玄暉의 재가제자로서 현휘 사후 탑비건립을 후원한 元尹 朴謙은 정토사가 있는 중원부
곧 지금의 충주지방 호족이었고, 朴仁碩의 9대조이고 朴全之의 13대조인 朴奇悟와 영태 2년(766)에
지금의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의 미륵당 석탑을 처음을 조성한 朴氏는
모두 죽주지방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박씨 출신의 지방호족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3>과 같다.
<표3> 지방호족
인명 |
출신지 |
활동 |
전거 |
기타 |
朴直胤 |
竹山(州) |
평산에 정착, 八心戶 읍장, 대모달을 칭함 |
박경산묘지명, |
박적오의 아들 |
朴遲(智)胤 |
平山 |
궁예에 투항, 왕건에 협조, 삼중대광 승진, 딸을 왕건에게 출가, 삼한공신 |
박경산묘지명, 고려사92 |
박직윤의 아들 |
朴守卿 |
平山 |
후백제에 무공, 역분전과 식읍 분급, 딸을 태조에 출가, 원윤, 원보, 대광, 태사 삼중대광 승진, 태위 겸 시중 |
고려사92 |
박지윤의 아들 |
朴守文 |
平山 |
진철대사 利嚴 영접, 태조의 마지막 유조 청취, 딸을 왕건에 출가, 원윤, 태위, 삼중대광 승진 |
광조사진철대사탑비, 고려사2, 88 |
// |
朴質榮 |
浿西地方 |
왕건 즉위 후 시중, 서경으로 사민, 大丞 |
고려사1 |
|
朴允雄 |
興禮府 |
神鶴城將軍 |
동국여지승람22 |
|
朴英規 |
昇州 |
견훤의 사위, 고려와 내통 투항, 태조, 정종에게 딸을 출가, 좌승, 삼중대광 승진 |
삼국사기50, 고려사92 |
|
朴述熙 |
槥城郡 |
궁예의 위사, 왕건에 봉사, 혜종 옹립, 岬串에 유배 |
고려사92 |
得宜의 아들 |
朴謙 |
中原府 |
元尹, 법경대사비 건립 후원 |
정토사법경대사탑비 |
|
朴奇悟 |
竹州 |
삼한공신, 大保 삼중대광 |
박인석묘지명, 박전지묘지명 |
|
朴氏 |
竹州 |
불탑 건립 |
영태2년탑지 |
|
4) 박씨 여성
국내외 각종 자료를 살펴보면, 신라 하대에 박씨를 칭하는 여성들도 다수 발견된다.
그들은 크게 왕실 여성과 비왕실 여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왕실 여성은 다시 王母와 王妃로 구분해볼 수 있다.
우선 왕의 어머니로는
원성왕모 繼烏夫人, 흥덕왕모 聖穆太后, 희강왕모 包道夫人,
민애왕모 貴寶夫人, 신무왕모 眞矯夫人, 경문왕모 光和夫人이 있고,
왕비로는
흥덕왕비 章和夫人, 애장왕비 박씨, 문성왕비 박씨가 있다
.
이들의 성씨에 관해서는 井上秀雄, 문경현 등이 고증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상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박씨를 칭하는 왕모와 왕비 대부분의 실제 성은 김씨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주장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개략적인 취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舊唐書>>에서 “신라 사람들은 김씨와 박씨가 많은데,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라 하였고,
<<新唐書>>에서 “왕족은 第一骨로 처 역시 그 씨족으로 삼는데,
자식은 모두 第一骨이 된다” 한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한편 왕실 여성이 아니면서도 박씨를 칭한 여성으로 우선 들 수 있는 사람은
법경대사 慶猷의 재가제자인 大匡 康公萱의 처 박씨이다.
知基州諸軍事上國이었던 강공훤은 소백산에 은거하던 여엄에게 귀의하여 그를 왕건에게 추천하였고,
927년 9월에 견훤이 신라를 습격했을 때 당시 侍中으로서 왕건의 명을 받고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또한 936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大相으로서 기병 3백인과 군사 1만4천7백을 거느리고 출전해 神劒 등의
항복을 받는데 크게 기여한 지금의 경북 풍기지방의 호족이었다.
강공훤의 처 박씨 역시 풍기 인근의 호족집안 여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대경대사 麗嚴, 진경대사 審希, 광자대사 允多, 통진대사 慶甫, 원감대사 玄昱의 어머니도 모두 박씨였다.
여엄은 성이 김씨이고 경주의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에 관직을 따라 藍浦에 이사한 이래 줄곧 그곳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벼슬하지 않고 이름을 숨기며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즉 여엄의 가문은 일찍이 낙향하여 중앙 관직과 무관하게 살았다.
이런 점에서 여엄의 어머니 박씨는 중앙의 명문거족 혹은 지방의 대호족 출신은 아니었던 듯하다.
진경대사 심희와 광자대사 윤다의 어머니 박씨 역시 여엄의 어머니와 비슷한 家格을 가지고 있었다.
심희의 가문은 임나 왕족의 후손으로 신김씨를 칭했는데,
그의 아버지 盃相은 자연을 벗삼아 놀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윤다는 경주 출신의 김씨로, 선조들이 대대로 벼슬을 했으나 난리로 가문의 기록이 없어짐으로써
그러한 사실이 구전으로만 이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심희와 윤다 가문은 오래 전에 이미 가세가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문과 결혼한 두 박씨 여성의 집안도 또한 그렇게 번성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통진대사 경보와 원감대사 현욱의 어머니 박씨는 이들보다 처지가 나았던 듯하다.
경보는 속성이 김씨로 鳩林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益良은 閼粲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는 것이 內政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육은 김씨로서 신라의 명족 출신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廉均은 관직이 병부시랑에 이르렀다.
익량과 염균이 각각 아찬과 병부시랑의 관등과 관직을 가지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은 6두품 정도의 신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의 처 박씨 역시 이에 걸맞는 가문 출신이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박씨 여성들을 정리한 것이 아래의 <표4>이다.
<표4> 박씨 여성
인명 |
신분, 출신지 |
가계, 활동 |
전거 |
비고 |
繼烏夫人 |
진골귀족(?) |
원성왕모, 일명 知烏夫人, 시호 昭文太(王)后, 이찬 昌近의 딸 |
삼국사기10, 삼국유사 왕력 |
김씨(?) |
包道夫人 |
|
희강왕모, 일명 美道夫人, 深乃夫人, 巴利夫人, 시호 順成太(大)后, 대아찬 忠衍의 딸 |
삼국사기10, 삼국유사 왕력 |
|
貴寶夫人 |
진골귀족 |
민애왕모, 일명 貴巴夫人, 시호 宣懿王后, 惠忠王(仁謙)의 딸 |
삼국사기10, 삼국유사 왕력 |
김씨 |
眞矯夫人 |
진골귀족 |
신무왕모, 일명 貞?夫人, 시호 憲穆太后, 禮英의 손녀 |
삼국사기10, 삼국유사 왕력 |
김씨 |
光和夫人 |
진골귀족 |
경문왕모, 시호 光懿王大后, 신무왕의 딸 |
삼국사기11, 삼국유사 왕력 |
김씨 |
聖穆太后 |
진골귀족 |
흥덕왕모, 金神述의 딸, 당에서 申氏와 朴씨로 책봉 |
삼국사기10, 삼국유사 왕력 |
김씨 |
章和夫人 |
진골귀족 |
흥덕왕비, 일명 昌花夫人, 소성왕의 딸, 시호 定穆王后, 당 박씨로 책봉 |
삼국사기10, 삼유사 왕력 |
김씨 |
애장왕비 박씨 |
진골귀족(?) |
아찬 金宙碧의 딸(?), 당에서 박씨로 책봉 |
삼국사기10 |
김씨(?) |
문성왕비 박씨 |
진골귀족(?) |
시중 金陽의 딸(?), 당에서 박씨로 책봉 |
삼국사기11 |
김씨(?) |
康公萱의 처 박씨 |
지방호족 |
풍기지방 호족의 처, 법경대사 慶猷의 재가제자 |
오룡사법경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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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鏡大師모 박씨 |
藍浦 거주 |
김씨 麗嚴의 모, 思義의 처 |
보제사대경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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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鏡大師 모 박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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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김씨 審希의 모, 盃相의 처 |
봉림사진경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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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慈大師 모 박씨 |
경주 거주 |
김씨 允多의 모, 성품이 곧고 정결, 佛事를 닦음 |
대안사광자대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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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眞大師 모 박씨 |
경주 거주, 6두품 |
김씨 경보의 모, 아찬 益良의 처 |
옥룡사통진대사탑비 |
|
圓鑒大師모 박씨 |
경주 거주, 6두품 |
김씨 玄昱이 모, 병부시랑 廉均의 처 |
조당집17 |
|
4. 박씨 왕가의 의문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시대의 왕위는 막중한 자리이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부자 형제간에도 殺戮이 빈번히 자행되었고,
왕위를 보위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정치적 갈등과 투쟁이 수반되었다.
특히 역성왕조 성립기에는 그러한 정쟁이 더욱 심하였다.
그럼에도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수립과 운영 과정에는 정치적 갈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전근대의 왕위는 동일한 혈족집단에 의하여 계승된다는 점에서
왕권의 획득과 보위에는 동일 씨족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라 하대 박씨 인물들은 대부분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미미한 위치에 있었다.
김씨 인물들과 비교하면 특히 더하였다.
즉 관리로서 활동한 사람들은 文翰職을 중심으로 한 중견관료 혹은 그 이하였고,
지방 호족 역시 큰 힘을 과시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박씨 승려와 여성들은 거의 지방에 근거지를 둔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비록 박씨를 칭한 다수의 왕모와 왕비가 있었으나, 실상 그들의 김씨 진골귀족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라 하대에 박씨족이 과연 왕권을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신라 하대 박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다는 신덕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박씨 왕가의 실재에 대한 의문은 더욱 증폭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덕왕 경휘의 아버지는 乂兼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이다.
그리고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遠孫으로 박씨라 하였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예겸은 박씨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듯이, 예겸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덕왕 경휘는 박씨일 수 없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신덕왕의 아버지로 생부 文元과 의부 銳兼이 있다 하고,
외조와 외증조인 順弘과 元隣이 아달라왕의 원손이라 하여 어머니 정화부인을 박씨라 하였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文官이라 하였다. 아달라왕에게 후사가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그만두고라도,
신덕왕이 박씨가 되기 위해서는 모계보다도 부계인 문관과 문원이 박씨여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모계가 아달라왕의 원손 곧 박씨였음만을 강조할 뿐
부계의 성씨에 관해서는 아무른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기서는 예겸과 문원이 박씨가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
신라 하대의 성씨는 부계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왕족 사이에 근친혼을 행하던 신라 왕실이 근친혼을 혐오하는 당과의 관계를 고려해
임시방편으로 아버지와 다른 성씨를 표기한 예가 있기는 하나, 그러한 ‘虛姓’을 제외하면 모두 부계를 따랐다.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부계의 성씨를 따랐음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진감선사 혜소는 어머니가 顧씨임에도 최씨라 하였고,
요오선사 순지는 어머니가 蘇씨였으나 박씨를 칭하였다.
그리고 낭혜화상 무염은 어머니가 華씨였으나 아버지 範淸의 성씨를 따라 김씨를 칭하였고,
낭공대사 행적은 어머니가 薛씨였음에도 속성이 최씨라 하였다.
신덕왕의 경우 비록 그의 어머니 성이 박씨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의부 예겸은 물론 생부 문원이 박씨가 아니었으므로 신덕왕 역시 박씨가 아니었다고 하겠다.
만약 신덕왕이 박씨로서 김씨 신라 왕실을 계승했다면,
그 직후에 작성된 나말려초의 금석문이나 고문서 등에 어떤 형태로든 언급되었음직하다.
왜냐하면 왕실의 성이 바뀌는 것은 왕조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자료에는 신덕왕을 비롯한 경명왕, 경애왕이 박씨를 칭했다거나
역성왕조를 열었다고 암시한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태자사낭공대사비>에는 신덕왕이 黃閤에서 거처하다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였고,
<봉림사진경대사비>에는 경명왕이 대업을 물려받고 나라의 기틀을 이었다고 했다.
더욱이 후삼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尊王의 명분을 강조하던 견훤과 왕건이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신덕왕계가 역성왕조이고 박씨왕가였다는 사실을 전혀 시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른바 박씨 왕가는 종전의 김씨 왕실과 구별되는 異姓王朝가 아니었다고 하겠다.
신덕왕이 박씨가 아니라면,
비록 노쇠한 왕실이기는 하나 당시 신라 왕통을 이을 씨족은 김씨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몇몇 전적에는 경명왕을 金朴英이라 하여, 당시 신라 왕실의 주인이 김씨였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井上秀雄은 신덕왕의 원래 성씨를 김씨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신덕왕이 후에 박씨로 성을 바꾸었는데,
改姓한 이유는 신라 말에는 중국의 동성불혼 의식이 확산되었고
후삼국 항쟁기 속에서 침체된 신라의 정국을 혁신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덕왕이 개성했다거나 심지어 그것을 신덕왕의 개혁의지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은
주관적인 추론에 불과하다.
신덕왕의 개성과 신라의 정국안정이랄까 정치개혁 사이의 상관성을 밝혀줄 직접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덕왕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꾸었다는 주장은 선뜻 용납되지 않는다.
이처럼 신덕왕 이후 경명왕, 경애왕은 원래 박씨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들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꾼 합리적인 이유도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당대인들조차 그들을 박씨왕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후대인들이 거짓으로 신덕왕계를 박씨 왕가로 칭한 것은 아닐까?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주체세력들은 종종 역성혁명의 정당성과 명분을 얻기 위하여
앞 왕조 말기의 왕실 계보 혹은 혈통을 왜곡, 조작하였다.
秦을 무너뜨리고 건국한 漢은 무제 때에 이르러 진나라 왕실의 혈통을 조작하였다.
사마천이 그러한 과업을 떠맡았다. <<史記>>(권85) 열전 呂不韋傳에 의하면, 장사로 많은 돈을 번 여불위는
진 昭王의 태자인 안국공의 아들 子楚 곧 莊襄王에게 자신의 씨앗을 잉태한 조나라 여인을 몰래 바쳐 政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진시황이라 하였다.
그런데 진나라는 시황제 이후에 胡亥, 子嬰을 거쳐 멸망하고 劉邦이 한나라를 건국하였다.
건국 초기 각종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한 왕조는 무제의 개혁정치를 통하여
왕실 안정과 왕조 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무제 때 진나라 왕실의 혈통을 여불위와 연결시킨 것은 진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한나라 건국의 정당성과 명분을 획득하기 위함이었음직하다.
조선을 건국한 세력들도 고려 왕실의 혈통을 조작, 유포하였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자세히 소개된 이른바 ‘禑昌非王說’은 고려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우창비왕설이 허구라는 사실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거니와,
이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일파가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낸 왕통 조작사건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집권한 이성계 일파는
신돈의 아들 우왕과 창왕이 고려 왕조를 도둑질했다고 하여 그들을 죽이고
神宗의 8대손 瑤 곧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이 감당할 수 없어 왕위를 이성계에게 넘겨주었으므로
그것을 받아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이다.
신라 하대 박씨 왕가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박씨가 아니었을 뿐더러 스스로 박씨를 칭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후대 史書에는 그들을 김씨와 다른 박씨왕조라 하였다.
漢과 조선의 건국세력들이 앞 왕조 말기의 왕통을 조작하여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추구하려 했듯이,
고려 건국자들도 신덕왕계의 혈통을 조작하여 박씨라 하고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역성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내세우려하지 않았을까 한다.
고려왕조 성립과정이 한과 조선왕조의 개창 시나리오 곧, 혈통 변조를 통한 異姓 왕조 수립--왕을 廢位하고
이성 왕조를 타도--眞姓 왕조를 복구--진성 왕조로부터 禪讓을 받는다는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건국세력들이 신라 하대의 박씨 왕실을 정치적 의도에서 만들어 냈다면 그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현전하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박씨 왕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것은 <<삼국사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200여년 후에 편찬되었다.
이 때는 이미 고려왕조가 안정되어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전왕조의 왕통을 바꾸면서까지 건국의 당위성이랄까 명분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른바 <<舊三國史>>의 내용을 대폭 수용하였다.
<<삼국사기>>에서 자료의 출처를 별도로 밝히지 않고 쓴 서술 가운데 국내 자료의 대부분은
<<구삼국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구삼국사>>는 대략 고려 광종 연간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종은 호족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해 강건한 고려왕실의 건설을 추구한 군주이다.
이를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같은 여러 시책을 폈는데,
그 중에는 史館을 설치해 앞 왕조의 역사를 정리 편찬하는 사업도 포함되었다.
<<구삼국사>>는 바로 광종의 왕권강화와 개혁정치의 산물이었다.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고려 왕실 만들기에 부심하던 광종은 <<구삼국사>>에서
고려 건국의 당위성을 천명했음직한데,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신라 하대 박씨 왕가가 아닐까 한다.
5. 맺음말
자연과학과 달리 역사는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역사는 끊임없이 연구되고 새롭게 씌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실이 변형되기도 하고
사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고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역사에서 사실의 왜곡과 변형 그리고 조작이 불가피하다.
이글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신라 하대 박씨 왕가는
혹시 후대인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10세기 초 신라에서는 수 백년 동안 지속되던 김씨 왕조가 아무른 투쟁이나 갈등 없이 갑자기 박씨에게로 넘어갔다.
이는 동서양 왕조시대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물론 당시 박씨세력들이 실제로 김씨 왕실을 타도하고 박씨 왕가를 건설했으나,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누락됨으로써 오해를 불러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 박씨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 숫자가 김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히 미미하거니와
그들의 정치, 사회적 지위가 중견 관료와 지방의 小豪族 정도여서 신라 왕실을 차지할 정도의 세력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박씨 왕들의 가계를 분석해보면,
그들의 실제 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다. 그렇다고 하여 정치쇄신이랄까
정국혁신을 위하여 신덕왕이 즉위와 더불어 자신의 성을 김씨에서 박씨로 바꾸었을 개연성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당대인들도 이른바 박씨 왕실을 김씨 왕실과 다른 역성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박씨 왕가의 존재는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처럼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원래 박씨가 아니었을 뿐더러
김씨에서 박씨로 개성한 것도 아니었으며, 당대인들조차 박씨 왕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후대 史書에는 그들을 박씨 왕이라 하였다.
역성왕조의 건국세력들은 종종 새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앞 왕조의 혈통을 변조하였다.
漢과 조선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고려 역시 이들과 마찬가지로 왕통 변조--폐위--왕통 복고--선양의 순서로 왕조 개창의 명분을 세우고자 했음직하다.
고려 광종은 왕실 안정과 왕권강화를 정력적으로 추진한 군주이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광종은 앞 왕조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 편찬케 하였는데,
이때 정치적 의도에서 신라하대 왕실의 혈통을 변조해 박씨 왕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왕실이 신라의 역사를 왜곡 혹은 조작했다는 엄청난 혐의를 제기하면서도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해 불안한 심정이다.
물론 현 시점에서는 신라 하대 박씨 왕가가 고려 초에 만들어진 ‘허구’라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왜곡과 조작의 관점에서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존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추후에 보다 유익한 자료의 발견을 기대해본다.
출처 ; 한국고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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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영,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의문」 토론
김 창 겸(한국학중앙연구원)
토론자가 평소 학문적 열정과 신실한 인품에 경외하는 권덕영 선생께서 이번에 매우 흥미있는 발표를 했다.
사실상 조상에 대한 숭배심이 강한 한국의 독특한 정서에서
특정 성씨의 조상과 그에 관련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글을 발표한다는 것은
그 파장이 학문적 순수성을 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여기에 따르는 어떠한 고난과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극복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용기가 필요하다.
권덕영 교수께서 최근에 이 힘든 길을 택하여 역사의 비정작업을 하고 있다.
역사는 비록 과거의 사실이라 할지라도 후대에 기록하는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주관과 목적이 더해지면서 간혹 윤색되거나 심지어 변조 내지는 조작된 이른바 ‘만들어진 역사’가 있을 수도 있다.
이 글도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사례를 들어 그 가능성을 제시한 연구이다.
신라 하대의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은 원래 박씨가 아니었을 뿐더러
김씨에서 박씨로 개성한 것도 아니었으며, 신라 말기의 박씨왕가는 후대인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시기는 고려 광종이 신라왕조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 편찬케 하면서,
정치적 의도에서 신라 하대 왕실의 혈통을 변조해 박씨 왕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참으로 놀랍고도 과감한 발상이며 주장이다.
그러나 발표 내용 중에는 토론자에게 쉬이 납득이 되지 않고 동조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몇 가지 이야기해 보겠다.
1. 설령 발표자의 주장대로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이 본디 박씨가 아니고 김씨라고 해도,
왜 하필이면 이 3명의 왕을 변조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이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겠다.
바로 직전에 재위한 왕으로 출생과 신분에 의문이 있는 효공왕 嶢를 변조의 대상으로 택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ꡔ삼국사기ꡕ에 의하면,
‘헌강왕이 사냥하러 가다가 길가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좋아하여, 野合하고 아들 嶢를 낳았다.
진성여왕이 듣고서 대궐로 불러 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내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불룩하게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다.”고 하고는,
진성여왕 9년(895) 겨울 10월에 헌강왕의 庶子 嶢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고 하였다.
이처럼 정식혼인이 아니라 야합으로 태어나 궁궐 밖에서 자란 까닭에,
혈통과 출신성분이 불확실한 요를 진성여왕이 등의 뼈를 만져보고 골법의 특이성을 근거로
헌강왕의 아들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도 이러한 요를 김씨왕족으로 인정하기에는 미심쩍었을 것이고,
후대인들이 그는 김씨왕족이 아니라고 몰아 부치거나 변조하기에 제법 적합한 인물이다.
어쩌면 효공왕이야말로 고려말에 공민왕의 아들로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신씨로 변조된 우왕과 아주 유사한 인물이다.
그런데 ꡔ삼국사기ꡕ에서 효공왕은 굳이 김씨왕족임을 강조하여 드러내고,
이보다 변조하기에 어려운 조건을 가진 신덕왕을 선택하여 박씨로 변조했다는
발표자의 견해는 납득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2. 또 신덕왕·경명왕·경애왕이 본디 박씨가 아니라고 해도,
신라 김씨를 박씨로 바꾼 주인공이 왜 하필이면 고려 광종이고,
그 시기인가? ꡔ구삼국사ꡕ가 반드시 고려 광종 때 편찬되었다는 확증이 없다.
또 광종대는 고구려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시기였는데,
왜 신라의 왕통을 이 시기에 변조했다고 하는지?
그리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여
영화와 수를 누리다가 978년(경종 3)에 죽었다.
그러므로 광종대(943~975)에 아직 경순왕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그 앞 대 세 명의 왕을 김씨인 것을 김씨가 아니고 박씨로 변조한다는 것은 곤란했을 것이다.
더욱이 ꡔ삼국유사ꡕ 왕력에서도 신덕왕을 박씨라 하면서 친부와 의부를 제시하여 보다 합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발표자의 견해대로 이것이 변조된 것이라면
ꡔ삼국유사ꡕ 왕력의 찬자가 ꡔ구삼국사ꡕ를 전제했다는 주장이 되지만,
ꡔ삼국유사ꡕ 왕력이 ꡔ구삼국사ꡕ를 답습했을 가능성은 약하다.
ꡔ삼국유사ꡕ 왕력은 최치원의 ꡔ제왕연대력ꡕ이나
최근 공개된 무구정광탑 중수기에 보이는 「王代曆」을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결국 김씨가 박씨로 변조되었다기 보다는
ꡔ삼국유사ꡕ 왕력의 기록대로 어머니가 개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설령 변조의 가능성을 인정해도, 아마 그 시기는 좀더 후 시기일 것이다.
어쩌면 고려왕실의 혈통을 모계를 통해 신라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친신라적인 성격으로 변하는 고려 현종대가 오히려 더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
3. 변조의 이유를 고려가 왕조 개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통 변조 - 폐위 - 왕통복고 - 선양의 순서로 명분을 세웠다고 했다.
이것은 전왕조와 후왕조가 연속성을 가질 때 간혹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고려의 개창은 신라왕조와 직접적인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고려는 궁예정권과 직접적인 연속선상에 있다.
다시 말해 고려 왕건은 신라 경순왕에게서 선양을 받은 왕이 아니었다.
경순왕이 927년에야 즉위하는데 태조 왕건은 이미 918년에 즉위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고려가 신라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내세우려면 경순왕으로부터
신라의 영토와 인민을 넘겨받은 것만을 강조해도 충분할 터인데,
억지로 무리하면서 없는 박씨왕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왕통을 변조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4. 잘 알다시피 박씨인 경애왕을 시해하고
김씨인 경순왕을 옹립한 것은 후백제 견훤이다.
발표자의 견해를 빌리자면, 이 사건은 가짜인 박씨왕의 폐위와 진짜인 김씨왕을 세워 왕통을 복고한 것으로
고려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 고려의 직접적인 역할은 없다.
그 행위의 주체는 고려의 경쟁자이자 적대국인 후백제의 견훤이다.
그럼에도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김씨 왕통을 복고시켜 정통을 바로잡아 준
정의로운 심판자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까지, 고려가 신라의 왕들을 박씨로 변조했겠는가?
더구나 그 시기가 광종대라면 일찍이 견훤을 이리와 승냥이같은 존재로 표현했던
경순왕과 신라인들이 생존하여, 고려정권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형편에서
고려가 견훤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강조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5. 오늘날 성씨를 보면,
박씨는 대부분 그 근원을 신라 왕족에서 시작된 후손이라고 한다.
그 중에는 파사왕의 후손(우봉박씨, 해주박씨, 니산박씨, 강릉박씨)과 경명왕의 후손이 가장 대표적이다.
경명왕 후손에는 9개 본관(이른바 8대군파와 국상공의 후손),
즉 밀양 박씨(시조: 경명왕의 1자 彦忱), 죽산 박씨(경명왕의 4자 彦立, 아들 朴奇晤),
함양 박씨(경명왕의 3자 彦信), 순천 박씨(원조:경명왕 7자 彦智, 시조:朴英規),
고령 박씨(경명왕 2자 彦成), 상주 박씨(경명왕 5자 彦昌),
전주 박씨(경명왕 6자 彦華)와 울산 박씨(경명왕 9자 交舜의 후손 朴允雄) 등이 있다.
그리고 경애왕의 후손도 1개의 독립된 본관을 가진 박씨로 하여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고려시대 이후 박씨로서 신라 경명왕과 경애왕의 후손으로 자부하며 긍지를 가지고
맥을 이어온 본관과 성씨들에게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본래 김씨이기에 김씨가 옳다고 한다면
그 누가 인정하겠는가?
다시 말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박씨를 칭한 인물들은 잘못 알고 그렇게 인식하고 생활했지만,
오늘날 후손들은 실제는 김씨의 후손이니, 이제라도 성씨와 조상을 바꾸어야 한다면,
이는 엄청난 혼란만 가져올 뿐이지, 그것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는가?
거의 일천년 동안 그렇게 믿고 살아온 그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 속에 나름대로의 역사적 근거와 진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6. 고려사 권2 태조 14년 여름 5월 정축조에 “(고려 태조) 왕이
신라왕과 太后와 竹房夫人 및 相國 裕廉 ……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新羅敬順王殿碑」에는 “…… 28세 경순왕은 경애왕 박씨를 이어 즉위하였다. ……
왕의 前妃 朴氏는 3남 1녀를 낳았고, 後妃 王氏는 5남 2녀를 낳았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ꡔ慶州金氏世譜ꡕ에는 “竹房夫人은 경애왕의 妹“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순왕의 왕비는 ‘경애왕의 누이 죽방부인 박씨’이다.
그러므로 발표문의 ‘<표 4> 박씨 여성’에는 죽방부인이 누락되었다고 하겠고,
또 이에서 진짜 박씨 왕비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표 4>에서 井上秀雄의 견해에 따라, 발표자는 애장왕비 박씨를 아찬 金宙碧의 딸로 보고
원래 김씨인데 당으로부터 박씨 왕비로 책봉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주벽의 딸은 왕비가 아니라 後宮이었다.
즉 애장왕비 박씨와 김주벽의 딸인 후궁은 각각 다른 여인이다.
또 문성왕비 박씨를 김양의 딸로 보고 원래 김씨인데 당으로부터 박씨 왕비로 책봉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성왕비 박씨가 당으로부터 왕비로 책봉된 것은 문성왕 3년 7월이고,
김양의 딸은 문성왕 4년 3월에 납비되었다.
즉 왕비가 되기 전에 미리 왕비가 될 것을 알고 책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성왕비 박씨와 金陽의 딸은 각각 별개의 인물이므로,
문성왕비가 김씨일 여지가 있기는 하나,
명확하게 박씨가 아니고 김씨라고 하기는 어렵다.
결국, 발표자 권덕영 선생께서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의문을 풀려고 노력하였지만,
왜곡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주변적인 정황과 혐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을 뿐이지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기에
신라 말의 박씨왕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향후 보다 유익한 자료를 발굴하여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 주기를 고대하면서,
다시 한번 발표자의 학문적 용기와 열정에 존경의 말씀을 드린다.
출처 : 한국고대사학회 http://www.koreaancienthistory.net/modules/bbs/index.php?code=pds&mode=list&id=&page=21&___M_ID=31&sfield=&s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