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령산·서리산(880m·825m, 경기도 남양주·가평)
녹색바다에서 물결치는 연분홍 철쭉
꽃을 찾아가는 여정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꽃은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바라보는 사람까지도 아름답게 한다. 숲이 순수하고 깊은 맛을 가져다준다면 꽃은 화려하고 향기로운 기운을 전해준다. 사람들이 꽃을 보면서 좋아하고 예술적 감흥을 느끼는 것은 바로 꽃의 세련된 풍모 때문일 것이다.
소풍가는 초등학생 기분이 된 나는 벌써 축령산의 철쭉꽃밭에 가 있다. 경춘가도를 따라 달려서 마석에 이르자 천마산이 가로막는다. 마석에서 천마산 자락을 돌아 수동방향으로 가는 길은 깊은 산골로 산과 계곡, 그리고 논과 밭이 소박한 시골풍경을 이루고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도회지 사람들의 별장이나 카페中가든 같은 유흥업소들이 곳곳에 들어서 시골의 소박함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집을 짓거나 도로를 내느라 여기저기 헐리고 있는 산의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프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산자락을 잘라내고, 터널을 뚫거나 아예 산을 없애버리는 일은 오늘날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면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 화를 초래한다. 상상을 초월한 폭우나 태풍,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재해가 바로 무자비한 환경파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정책을 되돌아보게 한다.
싱그러운 숲과 이름모를 야생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동계곡의 맑은 물은 우리를 축령산으로 인도한다. 축령산자연휴양림에 들어서자 계곡의 물소리가 청량하다. 울창한 숲과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이용하여 조성해 놓은 휴양림에는 통나무 집 등 여러 시설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길가에 핀 빨간 철쭉꽃이 세파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새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잣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 길이 상쾌하다. 비가 온 뒤끝이라 나뭇잎이나 풀잎이 더욱 푸르고 싱그럽다. 보라색으로 핀 현호색을 비롯하여 얼레지, 큰괭이밥, 괭이눈, 복수초 같은 여러 종류의 야생화가 봄의 축령산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암벽약수를 받아 마시니 간장이 서늘하다. 수종은 점차 활엽수로 바뀌고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에는 녹음이 짙어 활력이 넘친다. 능선에 올라서자 바람이 시원하다. 수리바위에 올라서서 긴 숨을 내쉰다. 나의 가슴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탐욕(貪慾)을 비우고 그 자리에 자연이 가져다주는 무욕(無慾)을 채운다. 그래서 산은 나에게 절집이고, 교회의 예배당이 된다.
옛날에는 축령산에 독수리가 많았고, 멀리서 바라보면 독수리 두상을 닮았다고 하여 수리바위라 불렀다. 바위틈에서 어렵게 지탱하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노송이 천마산-철마산-주금산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과 휴양림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수리바위를 지나자 암릉이 자주 등장한다. 암릉에는 오랜 세월 동안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자신을 아름답게 가꿔온 소나무들이 늠름하게 서 있다. 연분홍으로 핀 철쭉꽃이 간간히 수줍은 색시 마냥 순박한 얼굴을 내민다. 특히 바위틈에 핀 철쭉은 흑회색 바위에 연분홍 화장을 했다.
남이바위에 올라선다. 조선시대에 남이장군이 앉아서 심신을 수련하였다는 바위에 걸터앉아본다. 남이장군은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이곳에 자주 올라 지형을 익혔다고 한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시원스럽게 전망이 트이면서 산줄기들이 첩첩하게 다가온다. 수십 길의 벼랑을 이룬 남이바위에 핀 철쭉이 남이장군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것 같다.
정상으로 가는 길 또한 암릉과 철쭉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룬다. 흔히 철쭉은 군락을 이루었을 때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렇게 드문드문 한 그루씩 피어 바위나 신록과 어울린 모습에서도 색다른 멋을 찾아볼 수가 있다. 누가 볼세라 바위에 조용하게 핀 수줍은 연분홍색 철쭉은 그야말로 담백하다. 동쪽 산비탈을 장식하고 있는 짙은 녹음에서는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이렇듯 축령산은 숲이 울창한 육산이면서도 바위들이 아기자기하고, 활엽수의 녹음이 짙으면서도 철쭉이 예쁘게 피어 서로를 보완한다. 깊은 골짜기와 울창한 숲은 나에게 깊이 있게 살라하고, 곡선의 관능미를 드러내는 능선과 주변의 드넓은 전망은 나에게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라한다.
축령산 정상에서의 전망은 그야말로 사통팔달이다. 북쪽으로 운악산·명지산·화악산 같은 가평의 명산들이 그림 같고, 서쪽으로는 주금산에서 철마산·천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남쪽으로는 청평호 뒤로 유명산과 용문산이 하늘금을 긋는다. 북서쪽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서리산(825m)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이성계가 신신제 지낸 신비로운 산
산마루에 서있는 2m 높이의 돌탑이 정상임을 알려준다. 축령산의 무게는 이 산의 이름에서부터 느껴진다. 축령산이라는 이름에 얽힌 사연은 태조 이성계로 이어진다. 이성계는 조선을 창건하기 전인 고려말에 사냥을 왔다가 이 산의 산세를 살펴보니 웅장하고 신비로워 산신령에게 산신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산을 축령산(祝靈山)으로 불렀다.
축령산 정상을 지나자 산의 분위기가 바뀐다. 바위와 철쭉은 찾아볼 수가 없고 포근한 흙길에 활엽수림이 울창하다. 단풍나무가 많아 붉게 물든 가을 정취도 좋을 듯하다. 이런 숲길이 어머니의 품속 같이 포근하다. 숲이 인간에게 주는 가치는 수치로 가늠하기 힘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서 아픈 마음을 달랬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숲을 통해서 행복을 창조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가치는 금방 알 수 있다.
절고개를 넘어서자 5m 정도 폭으로 방화선이 이어진다. 넓은 길과 주변의 울창한 숲, 그리고 완만한 경사가 마치 나를 산보하는 기분으로 걷게 한다. 길은 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곳곳에 나 있다.
서리산에 올라서자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연분홍색 철쭉이 벨트를 이루고 있다. 주변의 신록이 이룬 녹색 바다 위에 연분홍색 파도가 물결을 친다. 색상이 진하고 강열한 이미지의 철쭉에 비하여 연한 색상의 철쭉은 맑고 청순하다. 철쭉꽃밭에 파묻힌 사람들은 나비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2~3m 높이의 철쭉은 수많은 꽃 대궐을 만들었다. 꽃 속에서 들려오는 연인들의 속삭임은 이미 감미로운 꽃의 노래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밟을 때는 이별의 아쉬움 같은 것이 밀려온다.
꽃 속에 파묻힌 것은 나의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미 내 마음은 곱고 청순한 철쭉꽃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여 내 가슴속에는 철쭉꽃이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내가 곧 철쭉이고, 철쭉이 곧 내가 된다.
꽃밭에서 바라본 북쪽 날등이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화채봉 삼거리를 지나자 울창한 신갈나무 숲이 잠시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철쭉이 화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의 철쭉은 굽은 듯 곧은 듯한 직곡(直曲)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낙락장송이 함께 어울려 색다른 운치를 가져다준다. 소나무의 강직함과 철쭉꽃의 부드러움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었다.
숲길을 걷다가 가끔 전망이 트일 때면 골짜기가 내려보인다. 물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흐르는 물소리가 곧 부처의 말씀이라는 뜻의 계류불음(溪流佛音)이라는 말을 음미한다. 어디 물소리뿐이겠는가? 새소리와 바람소리도, 아름다운 철쭉과 녹음 짙은 숲도 모두 부처의 설법이고 부처의 형상일 터인데.
(2004. 5. 11)
산행코스
-. 제1코스 : 축령산자연휴양림(1시간 20분) → 남이바위(30분) → 축령산(20분) → 절고개(40분) → 서리산(15분) →화채봉 삼거리(45분) → 자연휴양림 (총산행시간 : 3시간 50분)
-. 제2코스 : 축령산자연휴양림(1시간 20분) → 남이바위(30분) → 축령산(20분) → 절고개(40분) → 자연휴양림 (총산행시간 : 2시간 50분)
교통
-. 남양주를 지나 춘천으로 가는 46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마석(화도)에서 수동방향으로 좌회전한다. 362번 지방도로를 따라 수동면소재지를 지나 현리방향으로 가다보면 '축령산자연휴양림' 이정표를 만난다.
-. 청량리에서 330번 좌석버스를 타고 마석까지 간다. 마석에서 축령산 가는 버스는 하루 10회(06:15~22:00)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