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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intersection」
0.
길을 걸으려는 자여,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고뇌하지 말라.
그것은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서 생각해도 충분하다.
─ G. Curious
1.
융통성 없는 해는 늘 동쪽에서 떠오른다. 덕분에 동쪽으로 창문이 나있는 내 방의 아침은 얄짤없이 햇살에 초토화 되어 버리곤 한다. 가장 큰 피해자인 나는 매일 아침마다 햇빛에 안면이 노출되기 때문에 찝찝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 오늘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라 쳇바퀴가 굴러가듯 변수라는 것은 없었다.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불쾌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꿈을 꿨던 것 같은데, 희미하게 이미지만 남아있기에 그 역시 불쾌함에 한 요소가 되었다. 아아. 내가 이렇게 삐뚤어지게 사는 건 해가 동쪽에서 뜨기 때문 일 거야. 하고 중얼거리고는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욕실으로 옮겼다. 잡념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이사한지도 어언 1년이 되었다. 1년은 365일. 기분 나쁜 아침도 365일. 365일 동안 해가 떠올라 그 지독하게 눈부신 빛을 동향창東向窓에 흩뿌리는 것이 일정한 시간에 이루어진 다는 것을 경험 ─일주일동안 기상 시각을 제어본 적이 있었다. 오차는 고작해야 ±5분 이었다─ 으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자명종 따위 필요 없이 칼기상하는 아침형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딱딱 떨어져 맞는 지구의 섭리 앞에 신께 경의를 표하고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뭐 사실 이렇게 크나큰 단점들이 넘쳐나긴 해도 장점도 없진 않다. 그래봤자 딱 하나긴 해도 어쨌든 덕분에 중학교에 입학할 때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었다. 실로 기묘한 일이라고 내 과거를 아는 사람이 들으면 탄성을 내뱉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독하게 아침잠이 많아서 지각은 내 벗이요, 스승이요, 그림자요 하던 몸이었다. 그러나 아침잠도 섭리 앞에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가보다. 작은 커튼을 달으려고 해도 창문이 너무 높이 나있어서 기각. 어머님께서는 정 그러면 기사를 부를까 했지만 사양했다. 뭐 그래도 나름 쓸모 있는 장점이 있으니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라고 했지만, 매일매일 아침에는 그와 상반되게도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며 신세를 한탄하다가 포기하곤 한다.
욕실의 불을 키고 들어선다. 초록색의 플라스틱 슬리퍼의 차가운 촉감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져왔다. 세면대가 붙어있는 정면의 벽의 큼지막한 거울을 통해 지그시 응시한다. 여자 여럿 울리게 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못생긴 편도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내 나이 또래의 얼굴. 다만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움이란 한 점 없이 무표정했다. 자세히 보면 한 줌의 짜증정도는 발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턱과 인중에는 검지도 하얗지도 않은 얇고 가는 청소년기의 수염이 흘끗흘끗 자라고 있었다. 머리는 방금 자고 일어난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맘껏 헝클어져있었다. 어머님 표현으로는 새집을 지었다라고 하던가. 머리숱이 많은 건 이래서 고생이다. 게다가 봄방학 동안 아무런 손도 대지 않아서 이리저리 쭉쭉 자라있었다. 진한 검은색 머리카락은 귀를 반쯤 덮었고, 구레나룻은 쭉쭉 뻗어서 귓불을 스쳤다. 음. 첫날이니 학년 주임이 보더라도 넘어 가겠지 하고 생각하며 치약의 뚜껑을 돌려 연다. 튜브를 살포시 눌렀다. 청록색이 치약이 쭈욱하고 나와서 칫솔 위에 몸을 맡겼다.
중학교 2학년. 생일이 지났으면 만 14세, 안 지났으면 만 13세. 사춘기인가 뭔가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때라고 하던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질 않았다. 정말로 초등학교 때 끝나 버린 걸까. 하고 고민해봤지만. 어찌되었건 상관없지 않은가. 하고 종결 내버린다. 사춘기보단 신학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이것이 내게 가지는 의미는 딱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교실의 구성원들이 두셋을 제외한 전부가 바뀐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수업의 수준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 이렇게 내 입장에서는 소소한 두 가지가 있다. 학년이 하나 올라간다고 해서 캐릭터의 레벨이 올라가는 것처럼 즉각적이고도 커다란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저 평균적인 키를 가지고 있으며, 평범한 성적을 가지고 있다. 수염은 여전히 거뭇거뭇 이고, 치약은 여전히 여린 청록색이다. 그리고 박하의 쓴맛이 난다. 다음은 딸기 맛으로 살까.
어느새 샤워까지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가볍게 교복을 입는다. 봄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복이다. 꽃샘추위라도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야. 검은색의 교복바지를 입고, 그 위에 대조적으로 하얀 와이셔츠를 입는다. 작고 동그란 단추를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끼운다. 그러다 중간에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빠르게 다시 풀어버린다. 그리고 조심조심 하나하나 확인하며 착착 끼워 넣었다. 옷깃이 목을 스친다. 넥타이 따위는 없다. 와이셔츠 위에 명찰이 새겨진 회색 조끼를 입었다. 그리고 마무리로 나름 두껍고 따뜻한 똑같은 검은색의 재킷을 입으면, 누가 봐도 학생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가 된다. 왼쪽 가슴위에 위치한 학교의 마크와 노란색 실로 수놓아진 이름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방의 구석에 놓인 거울 앞에 다가선다. 단정하고 바른 용모. 살짝 모범생적인 분위기를 풍길 정도로 흠 잡힐만한 곳은 없다. 그럼 되었다. 침대의 서랍에서 회색양말을 하나 꺼내 바닥에 앉아서 신었다. 책상 밑에 내려다놓은 평범한 가방의 지퍼를 열어서 교과서를 점검한 뒤 들어서 오른쪽 어깨에 걸친 후 일어섰다. 첫날부터 정상수업 하겠다는 미친 학교 따위 개나 줘버려라 젠장 하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려다 방문에서 멈춰서는 뒤로 돌아봤다. 방안은 평소처럼 모든 사물이 그 위치에 있었다. 늘 똑같았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도 똑같겠지. 검은색 도화지처럼 한 점의 다른 색 따위는 없는. 그런 평범한 하루가 될 것이다. …. 방문을 조용히 닫고는 거실로 나갔다.
거실탁자 겸 식탁으로 사용하는 테이블의 위에는 베이지색 봉지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인기척이란 전무. 어머님께서는 벌써 출근하신 모양이다. 썰렁한 냉기가 가득한 집안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곳은 오직 베란다와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있는 거실의 일부뿐이었다. 아침햇살에 뒷부분만 밝고 화면이 있는 앞쪽은 어두운 TV를 응시하다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몇 번 본적 있는 로고가 중앙에 찍혀있었다. 집근처에 새로 오픈한 빵집의 로고였다. 대형 프랜차이즈로 요새 열심히 확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즘 뜨는 여자 아이돌그룹과 계약을 맺고 TV광고도 찍고 달력 등을 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학교에서 보면 브로마이드를 받기위해 일부러 빵을 사는 놈들도 있던데. 그렇다면 이 안에 빵이 들어 있겠군. 하며 비닐봉지를 들었다. 제법 묵직했다. 저녁까지 이걸로 해치우라는 걸까.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일어났기 때문에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살짝 식욕이 후퇴하는 느낌이 들었다. 빵보단 국이랑 밥이 좋은데…….
봉지 안에는 여러 종류의 빵이 들어있었다. 크루아상과 베이글, 애플파이에서부터 소라빵, 슈, 그리고 단팥빵까지. 선택의 폭은 무척 넓었다. 어느 걸 고를까 하고 고민하면서 빵을 하나씩 꺼내다가 봉지의 구석에서 우유를 발견했다. 오오 나이스, 봉지 안으로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가 딱딱한 종이재질의 우유팩을 집어 꺼냈다. 우유는 일단 점찍어두고 다시 고개를 봉지로 돌려 어느 빵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크루아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실 그럴 리야 없지만, 왠지 크루아상이 끌리기에 크루아상과 우유로 낙찰! 나머지 빵들은 다시 봉투 안으로 집어넣은 뒤에 봉투를 구석에 처박아뒀다. 크루아상이 들어있는 작은 비닐을 열고 두 개 중 하나를 꺼내 먹는다. 처음엔 단맛이 나다가 퍽퍽한 맛이 느껴졌다. 빵을 내려놓고는 우유를 열어서 함께 먹는다.
투명한 비닐은 일반 쓰레기통에, 우유는 접어서 재활용 쓰레기통에. 한 쪽에만 걸쳐뒀던 가방을 완벽하게 맨 뒤에 현관구석에 있는 실내화 주머니를 들었다. 신발장을 열어서 하나밖에 없는 낡은 운동화를 신는다.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리니 딸칵 소리가 나다가 얼마 안 있어 열렸다. 밖으로 나오자 나름 쌀쌀한 공기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자동 잠금을 믿고 그대로 문을 놓으니 자연스럽게 문이 닫겼다. 역시 테크놀로지.
띵동,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서 조금 더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겨왔다. 로비의 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가면서 최단루트를 생각했다. 방학이라는 이름의 길고긴 휴가덕분에 학교를 안간지 대략 2개월 정도나 되었지만 역시 직업병인지 학교로 가는 길은 뇌리에 똑똑히 박혀있었다. 재학 중에는 여러 저러 생각을 하면서 걸어왔던 길. 아침의 공기는 나름 차가워서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코트를 괜히 안 입고 왔나 하는 후회도 살짝 들었지만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지각해버릴 것 같았다. 이래 뵈도 나름 걸음이 느긋한 편이다. 고로 후회만 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짹짹, 참새인가. 이래저래 평화로운 아침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흔히 보인다. 집에서 나와 좁은 골목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대로가 나오는데, 차들은 세월에 엷어진 회색 아스팔트 위를, 사람들은 이리저리 삐뚤삐뚤해져버린 보도블록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사이에 끼어서 천천히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보며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횡단보도 앞에 서고, 절묘한 순간에 신호가 바뀐다. 초록불이 되자 건너니 마침 타야할 버스가 이쪽으로 접근해온다. 뭔가 짠 것처럼 절묘하다. 음,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날이라도 될 것인가. 치익, 버스는 정지하고 문은 달칵하고 열린다. 계단을 텅텅 올라서서는 교복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휴대폰을 들고 가는 것은 교칙위반이지만, 안 걸리면 장땡이다. 게다가 어머님께 종종 어디 있는 지를 알려드려야 하기에. 여러모로 필수다. 휴대폰의 열쇠고리로 위장하고 있는 T머니로 요금을 지불한다. 삑, 학생입니다. 기사아저씨가 빙긋 웃는다. 마주 웃어주고 바로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내 뒤를 이어 쭈욱 탑승하기 시작했다. 배차간격이 5분정도 되는 나름 흔하지 않은 차라 그런가보다. 이내 승객은 만원이 되어 북적북적 거렸고 버스의 문은 스르르 닫겼다. 다시 치익하고 출발하겠다는 선언인 냥 소리를 내뱉더니 버스가 달리기 시작한다.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옛날노래가 시작했다. 멜로디에 손가락으로 차창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며 버스의 진동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나를 내려두고는 다시 떠나갔다. 히터가 빵빵한 포근한 버스에서 내리니 갑작스런 기온 변화에 살갗이 비명을 질렀다. 애써 무시하고 마치 첫 상경한 촌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10년이 아니라 1년이라도 충분히 강산이 바뀌는 시대지만, 유독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대로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상가가 나열되어있었다. 바로 가까이에 학교가 4곳이나 있기 때문인지 상점가의 2층과 3층은 죄다 학원으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학구열에 미친 정신병자들을 수용해놓은 빌어먹을 8학군 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걷는다. 중앙차로제를 시행하겠다는 입간판이 저기 보였다. 약간 귀찮아 지겠군. 하면서 속도를 붙여 걸었다. 저 가까이에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가 보인다. 여기저기 얼룩이 져있고 페인트가 벗겨진 낡은 육교. 지탱하는 두 개의 축 중 왼쪽 축의 밑을 지나가고 걷다보니 얼마 안 있어서 학교가 나왔다. 내가 다니는 학교의 반대편에는 세 개의 학교가 뭉쳐있다. 사립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라서 그런지 명문대진학률이 높다라나 뭐래나. 나름 알아주는 학교란다. 내가 다니는 남중의 발정 난 남캐들께서는 그딴 거 필요 없고 여중이 옆에 있는데도 왜 통합하지 않느냐고 난리다. 길고 커다란 도로와 두 겹의 방음벽을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의 꼴이랄까. 이쪽 라인에는 방학 때 새로 유리벽으로 된 방음벽을 만든다고 했는데 제법 반질반질하게 만들어 놓았다. 세금낭비. 하고 내뱉고는 교문에 들어섰다.
교문에는 아무도 서있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보통 이 시간대면 학년주임과 학생부의 선생님들이 두셋은 서있고 좌우에는 보스몹의 졸개들처럼 선도부가 여섯 정도가 툴툴거리며 나열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재학 중에 교문을 통과하면서 선도부들의 불만을 듣는 건 나름 재밌었다. 우리 학교의 선도부라는 녀석들은 대게 두 종류의 녀석들이다. 하나는 주먹 좀 꽤 쓴다는 놈들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신 가산점을 받기위해서 고난을 견디는 지독한 공부쟁이들이다. 안타깝다면서 혀를 찼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단체로 째버린 것 같았다. 흐음, 아니면 개학 첫날이라고 선도는 서지 않는단 걸까.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쪽 이론이 조금 더 그럴싸하기에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운동장은 고요했다. 사람은 오직 나 하나밖에 없어서,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 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저 학교건물들은 신기루인걸까. 것 참 거지같은 신기루군 그래. 불어온 바람에 흙먼지가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봄이니 황사가 시작되겠네.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무시하고 터덜터덜 걸으며 학교를 둘러보았다. 정문에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학교건물이 보인다. ㄷ자를 오른쪽으로 90도 가량 돌린 모양의 건물인데, 좌측에 하나, 중앙에 하나, 우측에 하나. 총 3개의 문이 있었다. 반 배정이 2학년 6반이었으니까, 중앙 문으로 들어가는 게 가장 가까웠다. 고로 운동장을 가로지르기로 했다. 방학 때 새로 지은 유리벽이 아침햇빛을 가득 머금어 사방으로 쏘아내며 빛나고 있었다. 유리로 만든 방음벽의 밑 부분은 벽돌로 쌓은 담처럼 되어있었는데 이상한 그림들이 벽에 붙어있었다. … 세계의 명화들이라도 되는 것일까. 학년 주임이 건의 했을 게 뻔하다. 미술 과니까. 오늘도 쓸데없는 상념에 빠지며 고비사막과도 같은 길고긴 운동장을 가로지른다. 용권풍은 왜 불지 않을까.
뚜벅, 철벅, 뚜벅, 철벅. 마른 걸음소리와 축축한 걸음소리. 왼발과 오른발이 번갈아가며 미묘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 오던 길에 어쩌다보니 한 발만 젖어버렸다. 운동장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쌓였다 녹아서 만들어진 웅덩이들이 잔뜩 있었다. 그러니까, 한 발정도 빠진다 해도 별 신기한 일은 아니다. 다만 하필 빠진 웅덩이가 너무 깊었기에 오른 발이 전부 젖어버렸을 뿐. 이라며 애써 별 거 아닌 것같이 치부하며 리드미컬하게 빠른 걸음으로 중앙 문으로 걸어갔다. 재수 없음의 징조라도 상관없다. 좀 전에 겪은 재수있음의 징조랑 상쇄 되었으니 오늘은 평범한 날이려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양말 전체가 젖을 정도라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리라. 잘못하면 지각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안 된다. 첫날부터 지각과 같은 특이한 행동을 하면 그 이후로 조금 고달파져버린다는 것을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빠르게 중앙 문으로 다가갔다. 신발을 털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랐다. 실내화 주머니를 열다가 보니 양말 또한 누렇게 변하진 않았을까 걱정한다. 검은 실내화 주머니에서 슬리퍼를 꺼낸다. 검은색의 본체에 흰줄이 세 개. 왼쪽 신발부터 벗는다. 차가운 슬리퍼의 감촉이 발을 타고 짜르르르 오른다. 반대쪽 신발도 벗는다. 회색양말은 본래의 색보다 진해져있었다. 다행히 크게 누렇게 변하지는 않았다. 마르면 괜찮을 것이다. 발가락 사이에 끼어든 모래의 이질감을 느끼며 오른쪽 슬리퍼도 신는다. 축축하다. 한 쪽 발만 이러니 기분이 묘해진다. 반만 젖은 한 켤레의 신발들을 집어 주머니로 갈무리하며 중앙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공기가 조금 따뜻해졌음을 느끼며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빠르게 걸었다. 수십 개의 각종 대회에서 학교의 이름으로 탄 트로피와 상장들, 학교를 빛낸 학생, 화분에 심겨진 관상수 여러 개, 그리고 큰 어항. 어항 안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틀어서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에 두 계단씩 오르기로 했다.
두 계단 오른다. 숨도 차 오른다. 3학년은 2층, 1학년은 3층, 2학년은 4층이다. 3학년은 말년이니 불쌍해서 가장 계단이 적은 2층이고, 1학년은 신입이니 불쌍해서 그 다음으로 편한 3층이다. 어디를 가나 중간대기가 고생이다. 2학년은 타 학년과 달리 많은 차별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이런 데서 그런 걸 누리니 참 입맛이 씁쓸하다. 용모를 단정히 하자라는 문구가 상단에 적힌 큰 거울이 아침빛을 머금어 여리게 반짝인다. 층과 층사이마다 붙어있어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첫 거울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고 두 번째 거울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고, 세 번째 거울이 반겨준다. 이 녀석은 다른 거울들과 틀리게 용모를 단정히 하지 말자 라고 적혀있다. 자에서 -를 긁어내고 하자는 허술하게 화이트 같은 것으로 쓴 듯 했다. 어느 학생의 나름 그럴싸한 장난이다. 덕분에 4층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거울은 3층과 4층 사이에 밖에 없다. 역시나. 계단은 끝나고 복도가 보인다. 빠르게 뛰어올라서 우측으로 꺾자 2-5라고 적힌 패가 보인다. 이쪽인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질주한다. 2-6이라고 적힌 패가 보였다. 새 학급에 대한 설렘이건 뭐건 없이 지각이 아니길 빌며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콰앙-. 전투기에서 낙하된 소형 폭탄이 대지에 투하되어 나는 듯 한 소리가 복도와 교실에 울려 퍼졌다. 이크, 너무 급해서 쌔게 열어버렸다. … 이로써 배드 엔딩이구나. 눈을 찔끔 감으며 빠르게 교실로 들어섰다. 앞으로의 일들을 대충 예상해보면서. 가장 먼저 일어날 일은 선생께서 친히 날 혼내는 일이겠지. 하고 담담히 맞서 싸우기 위해 눈을 떴다.
“어?”
아무도, …없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던 눈총과 꾸짖음도. 선생도, 학생도 없이 교실은 그저 책상과 의자들이 교실의 가장자리에 대충 쌓여있었다. 쓰레기들로 산을 쌓은 듯한 대충의 모양으로. 일렬로 쌓은 것도 아니고 번갈아가면서 쌓은 것도 아닌 그저 집어 던져놓은 모양새였다. 책걸상들이 치워짐으로써 난개발에 파헤쳐진 민둥산처럼 때가 탄 교실바닥을 내놓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간 을씨년스러운, 묘지와 같은 분위기. 무엇을 애도하는지는 모르겠다. 학생을 애도하기라도 하는 건가. … 이건 너무 중2병스러운데. 하고 걷다보니 발에 무언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려다보니 각종 쓰레기들이 내 발에 채여 나뒹굴고 있었다. 종이쓰레기, 교과서의 조각, 필기구, 먼지, 음료수 캔 그리고 담뱃갑. … 담뱃값이라. 말세군그래. 어딜 보면 꽁초도 있을 터였다. 나 같으면 라이터도 버려 뒀을 텐데. 책걸상의 산과 쓰레기의 바다. 시산혈해, 아니 목산폐해木山廢海인가.
다행히도 교실의 정중앙은 깨끗했다. 쓰레기도 한 점 없었고, 그저 세월에 부식되거나 때가 탄 나름 더러운 목재 바닥이 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여기 있군. 담배꽁초. … 역시 말세인 것 같다. 담배는 청소년기에 피면 뇌건 뭐건 할 거 없이 지독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보건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텐데. 뭐 지들 삶이니까. 그래도 그 몸에 포함되어있는 장기들이 불쌍하긴 하다.
갑자기 이제 곧 여기를 대청소해야 된다는 생각이 번뜩하고 스쳐지나갔다. 이어서 몽상회로 가동. 일단 선생은 들어와서 깜짝 놀라겠지. 여선생이라면 꺅이라던가 어머나라고 할까나. 남선생이면 조금 어처구니없어 하겠지. 그러고는 어떤 선생이건 학생들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할 거야. 저기 치워라. 여기 치워라. 쓰레기 주워라. 거기 다섯은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 꺼내 와라. 뭐 빗자루가 없다고? 그럼 학생부가서 받아와라. 대걸레 빨아 와서 싹싹 문질러라. 안되겠다. 일단은 정리만 해두고 대청소는 이번 휴일에 해야겠다. 각기 책상 끌고 와서 앉아라. 뭐 이런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아, 그러고 보니 교실이라면 시계쯤은 하나 있지 않을까. 망가진 놈이 아니라면 시간을 알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의 사면 벽들을 세세하게 살핀다. 뒤쪽은 당연히 없다. 게시판이니까. 좌측과 우측은 창문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서 창문들과 문 사이에만 여분의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시계는 없었다. 남은 것은 칠판 위의 빈 여백. 좌측부터 교훈, 태극기, 급훈이 액자에 들어가서 벽에 걸려있겠지. 1학년 때는 태극기와 급훈 사이에다가 시계를 놔뒀었다. 그렇다면, 하고 뒤로 돌아섰다. 교훈, 성실 건강 창조. 태극기, 건곤감리 그리고 음양. 그리고 시계!
아쉽게도 시계는 없었다. … 오늘은 되는 일이 없구나. 하고 탄식하면서 이런 날은 집구석에 짱박혀 있어야 간신히 그나마 재수 없는 일은 당하지 않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평범한 날은 개뿔, 불운이 곧 나락에서 기어 나온 망령처럼 스멀스멀 달려들겠지. 서있던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아아. 한 쪽 신발은 완전히 젖어버려서 새로 사야할 지경이고, 책가방 덜컹거리면서 일부러 운동장에 있었을 학생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달려왔는데, 날 반겨주는 건 고작 이런 쓰레기들뿐이구나. 비러머글. 하고 한탄했다. 하, 되는이리하나도없서나도햄보케지고시픈데, 라던가, 그런 농담을 지껄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젱장.
짤깍, 짤깍, 짤깍. 고개를 푹 숙이고 완벽하게 좌절자세를 취한다. 짤깍 짤깍 짤깍 그런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쭈그리고 있는 바로 아래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누구야. 남 신경 긁는 기계음 내는 작자가. 게다가 그것도 시계가 돌아가는 소리랑 무지 흡사하잖아! 어 잠깐 시계라면, 하고 얼굴을 감싸던 두 팔을 풀자, 바로 아래에 시계가 보였다. 오 만세. 신께서 날 버리시진 않았구나! 파란색 테두리의 평범한 원형 시계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선생이란 작자도 학생이란 작자들도 전부 지각을 한 것이라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헤에, 4시 42분이구나. 그럼 그렇지. 역시 새벽에 사람들이 등교할 리가 있…을까보냐! 망가진 시계는 지옥으로!
벌떡 일어서서 오른발로 시계를 걷어찼다. 탕, 치이이익 탁. 시계는 그대로 마룻바닥을 난자하며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내구성은 지독하게 좋은 녀석이구나. 가서 발로 밟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듯 솟아났지만 그냥 포기했다. 몸에 힘이 도저히 돋아나질 않는다. 아침의 욕실 가는 스텝과 같이 터덜터덜 걸어서 그나마 정상인 책상과 걸상을 찾아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풋.”
아아, 그래 풋. 풋. 풋이라, … 풋사과의 정령이라도 와서 비웃은걸까. 별 할 일 없는 녀석이군. 음. 근데 풋사과의 정령은 풋풋 거리는 게 일 일 테니까. 딱히 비웃는다 던가 그런 의미는 없지 않을까. 아니면 애초에 비웃는 것 자체가 주된 임무이기에 인간계를 떠돌아다니면서 바보짓아우라가 풍기는 곳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걸까.
“킥.”
이번엔 바나나킥의 정령이군 그래. 풋사과의 정령이랑 같이 피크닉 온 건가. 녀석들, 정령주제에 심각하게 노닥거리는구나. 아아, 그래도 지금은 냅둬 줘. 완전히 뻗어서, 정말로 좌절모드라고. 봐. 이렇게 망상이나 하고 있고…. 너무 피곤해. 콱 죽어버렸으면.
… 잠깐, 그딴 정령이 실존할 리가 없잖아. 난 뭔 생각을 한 거야!
재빠르게 고개를 불쑥 들고는 왼쪽으로 빠르게 돌렸다. 낡아서 삐걱거리는 창문, 색이 바래버린 커튼, 스톤헨지를 이루듯 나뒹구는 책상과 의자. 어딜 봐도 정령 두 마리 따윈 없어. 역시 내가 미쳐서 들어버린 환청이거나, 귀신의 목소리인건가. … 그럴 리도 없어!
턱, 하고 갑자기 오른쪽 어깨에서 촉감이 느껴졌다. 이것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각일가 아니면 진짜 귀신 일까하고 잠시 고민해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어?”
아쉽게도 귀신이라 던가 그런 아스트랄한 전개는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소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빨려드는 것과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무척 멍한 눈이었다. 평생을 풀만 뜯고 산 한 마리 죽을 때 다된 말년 염소의 눈이 이러할까. 과장을 조금 더 붙이면 산송장과 같았다. 단 한 점의 생기도, 활기도 보이질 않았다. 그때 갑자기 오른쪽 어깨에 이질감이 들었다. 소년의 왼손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마치 간질 환자가 발작 하는 것이 이럴까. 아니 그건 너무 심한 비약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들어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하다가 급제동을 걸었다. 소년의 손등이 손바닥에 느껴져 왔다. 부드러운 손등이 마치 얼음을 만지듯 무척 차가웠다. 아. 하고 작은 탄성 같은 것이 그때 귀에서 들려왔다. 시야가 자연스럽게 소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의 입이 작게 열려있었다. 뭐라 해야 할까. 마치 그건 새로운 경험을 접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나오는 탄성과 같았다. 음. 별난 녀석이구나. 하다가 자연스레 소년을 자세히 관찰해보기 시작했다. 방금 전엔 저 멍한 눈에 시선이 빼앗겨서 자세히 보지를 못했는데, 이 녀석 나름 예쁘장하게 생겼다. 평범 그 자체인 나의 얼굴과는 달리 커서 여럿 울릴만한 녀석으로 보였다. 중소 엔터테인먼트 사장님들이 우훗 좋은 얼굴 하면서 섭외하러 달려들 정도. 갈색 빛이 약간 도는 머리칼은 눈썹으로 그려진 경계선을 살짝살짝 넘나들려 하고 있었고, 피부는 단 하루도 햇빛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무척 하얗다. 그렇다고 해서 창백한 정도는 아니었다. 턱 선은 갸름하고 이목구비는 나름 뚜렷해서. 1학년 때 반에서 유명했던 오덕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오 병약 미소년이라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 얼굴 관찰을 끝내고는 명찰로 눈이 가려는 그 때에 소년이 갑자기 어깨에서 손을 빼냈다. 아차, 이제까지 붙잡고 있었구나.
소년의 표정이 다시 처음처럼 돌아갔다. 무척이나 멍한 표정. 마치 유체이탈을 하고 남은 빈껍데기 같았다. 나는 그런 소년의 얼굴을 쭈욱 바라본다. 신기했다.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라니. 축복받은 유전자인가 아니면 임금님옥체대우인가. 무척 신기했다. 마치 어느 남자를 무척 잘 그리는 여류 화가가 평생의 역작으로 남긴 그림과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이 소년이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헐, 동성 따위의 웃음이 보고 싶다니. 생각이 들자마자 속으로 변태인가 하고 자책했다. … 엄청난 마력을 가진 얼굴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말을 걸어 볼까 하고 입을 열려는 차에,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정적에 쌓였던 교실에 울려 퍼졌다.
“으이차- 1빠!”
개뿔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어?”
방금 등장한 우리의 정적브레이커께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교실의 풍경에 제법 놀랐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나와 소년을 발견하고서는 표정이 어두워진다. 뭐야. 개학 첫 날에 첫 번째로 도착해야 1년이 즐겁고 행복한 징크스라도 있는 비루한 놈인가. 하고 있는데.
“야 인마 내가 1빠 할 거였는데!”
하고 정적브레이커 2가 난데없이 등장했다. 1이면 충분한데 저런 무개념은. 정적어쩌구 2께서는 1을 밀치고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뻔 하게 1의 행동을 답습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리번두리번, 그러다 나와 소년을 발견하고는 좌절. 뭐야. 별 재미없는 놈들을 봤네.
“이럴 수가.”
“크흑.”
이번 학년의 반은, 심상치 않을 거 같았다. 이런 만담 콤비 같은 게 학급구성원이라니.
그리고 마치 거대한 댐에 단 하나의 구멍이 뚫리자 그 구멍이 점점 커져서 결국은 댐이 붕괴되듯 만담콤비를 이후로 여러 명이 몰아서 이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든 시작이 어려워서 그 이후에는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건가. 교실로 들어온 아이들은 뻔했다. 교실에 놀라다가는 이내 적응해서 들어와서는 왁자지껄하게 교실에서 떠들었다. 서로 아는 애들끼리 몇몇 개의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룹에 끼지 못하는 소수는 교실에서 멍하니 고개만 두리번거리다가 복도로 나가기 일쑤였다. 아이들의 무리 사이에서 앗 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니, 내가 담뱃값을 발견했던 위치였다. 발견했나 보군. 예상대로 그 아이는 담뱃값을 마치 적장의 목을 베었도다! 하는 듯 치켜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우와 거리고, 몇몇 아이들은 혀를 찼다. 이런 소소한 사건이 벌여지는 동안 학생들은 점점 차올랐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내게 말 걸지 않았다. 나 또한 아무에게도 말 걸지 않았다. 몇 백 광년의 거리가 사이에 있는 두 항성 같다. 아니, 나는 그저 소행성이고, 저들은 성단이다. 그것도 새파란 구상성단. 그렇게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내 뒤에 앉아있는 소년의 존재조차 잊은 채. 그러다 시간이 흘러 거의 이 복잡한 교실이 꽉 차서 터지려고 하는 타이밍에 선생이라는 작자가 등장했다. 그 후는 싱겁게도 내 예상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뻔 하디 뻔 한 전개가 이루어졌다. 이놈의 공교육은 변화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하고 TV에 나오는 진보진영 정치인의 명언을 되새기며 별 다른 일 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학교에서의 모든 일과가 끝나고 교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아차하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소년의 명찰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일상이라는 이름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또 중간에 잘못 끼우면 큰 일 인데.
2.
띵. 언제나 들어도 너무 전자레인지 주제에 방정맞은 소리가 가볍게 튕기듯 들렸다. 안에서 따끈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꺼내 식탁 겸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소비자 희망가격 이천 오백 원. 가볍게 꾸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후에 다시 식탁으로 걸어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냉장고 옆의 창문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뜨겁게 데워진 도시락을 식힌다. 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라왔다. 도시락세트에 포함된 플라스틱 숟가락을 한손에 들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나무젓가락을 뜯어낸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때늦은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반찬 중 하나인 김치의 냄새가 코끝에 느껴저와 식욕을 자극했다.
창 밖에서는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2층에 살고 있어서 이런 점에선 무척이나 좋았다. 빌라 앞에 홀로 심어진 단풍나무는 가을이 되어 빨갛게 변해 우리 집 창문을 통해 나에게 어여쁜 모습을 보여준다. 벌써 10월이다. 매년 최고기록을 갱신하는 여름의 폭서도 한 꺼풀 가라앉은 시기.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선 탄소배출량 줄이고 온실가스 줄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연일 tv에서는 토론을 벌이는데, 내가 보기엔 걍 탁상공론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십 년 후에 정말로 더워 죽을 지경이 돼서야 우와 그때 탄소 줄일 껄 하고 징징 댈 꺼다. 참 지독한 피다.
어느새 도시락이 그 끝을 보였다. 식욕은 최고의 조미료. 라고 Utory라는 학자가 그랬던 거 같은데.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다.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법? 2주 만 굶으면 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빈 도시락 껍데기 위에 올려놨다. 편의점 치고는 제법 고급 퀼리티였다. 총점은 별 다섯 개 중 네 개. 돈가스 도시락인가 머 그랬을 텐데, 나름 보급형이면서도 제법 속이 튼실했다. 김치는 딱 내 취향으로 간이 베었다. 밥 또한 그 닥 꼬들꼬들하지 않아서 적당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어묵의 간이 좀 미스였달까. 너무 싱거웠다. … 이러니까 마치 무언가 대단한 미식가 같잖아. 사바나의 개코원숭이가 텔미춤을 추는 맛이에요. 따위의 대사를 내뱉으며 리액션을 취해야하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깨끗하게 빈 도시락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소년이 떠올랐다. … 연관성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데서 이런 걸 떠올리는구나. 정 그럴싸한 가설을 세우라면 깨끗한 그의 안면 피부와 플라스틱 도시락의 하얀 면질의 유사성을 꼽을 수 있겠다. 어쨌든 생각해보니 그 날 이후로 소년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나날이 흘러갔기에, 나름 특이한 그 날의 기억조차도 내 뇌 속 저편 구석에 쌓여서 조금씩 부식되고 있었나 보다. 아. 학기 도중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있다. 이야기래 봤다 세줄 정도 되는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다. 반의 자칭 정보통이라는 녀석이 자기네 그룹 멤버들에게 말하길 ─물론 난 평소와 같이 멀리서 귀나 쫑긋 세우며 북한 통신을 도청하는 공군 요원처럼 듣고 있었다.─ 그 녀석이 서번트 증후군이래나 뭐라면서. 지능이 보통 사람들 보다 낮다고 했다. 아이들은 그렇군, 이라면서 별로 흥미를 가지지 않다가 이야기는 금세 시시껄렁한 연예인이라던가 게임 등의 주제로 바뀌었었다. 나는 서번트 증후군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그 뒤의 말에 주목했었다. 그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낀 백치미 같은 무언가가 그렇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갔다. 그러다 이제 와서 그래봤자 뭐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로는 그 소년과 대화해 본적도 없었고, 같은 반 이면서도 한 번도 우연찮게 마주치는 적이 없었다.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친구로 지낼 운명은 아닌가보다. 하고 잡념을 종결짓고는 다 먹은 도시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체는 재활용 쓰레기통에, 나무젓가락은 반으로 부러트려서 일반 쓰레기 통으로. 엇갈린 운명은 이리저리 툭 던져서 기억 저편으로.
3.
탁, 삼선슬리퍼와 돌 재질의 바닥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신발에서 재빠르게 발을 꺼내고는 ─학생들이라면 보유하고 있는 고유의 기술로─ 다시 슬리퍼로 안착한다. 신발을 집어서는 실내화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낡고 먼지에 찌든 계단을 오르며 한숨을 푹푹 내셨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크게 찌푸렸다. 아이들은 학교 설립이래의 최대의 운동회니 뭐니 하면서 심각하게 들떠있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저 다 누군가가 꾸며낸 지루한 연극 같아서 무척이나 귀찮았다. 짜피 내가 어느 한 종목에 큰 소질이 있는 나름 체육 잘하는 아이도 아닌데, 방과 후의 소중한 시간까지 짜내 남아서 운동회 예행연습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정말로 못마땅했다. 사실 운동회 따위의 것은 운동을 잘하거나, 그들의 행위에 쉽게 흥분하고 달아오르는 마치 무지한 군중 같은 아이들만의 축제 아닌가. 나처럼 거의 모든 것에 무감각한 놈팡이들에겐 무척이나 따분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 차라리 책이나 읽는 게 낫다. 도저히 이 망할 학교의 생각은 읽을 수가 없다. 덕분에 이번 주의 짜증지수는 -80. 다음 주도 더 하향 되었으면 하향 되었지 상향될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땀에 젖어 축축한 기분이 몸을 조여 온다. 회색의 운동복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나를 깊숙이 누른다. 가방을 교실에 두고 왔다. 덕분에 나는 가방을 들고 와 운동장 한 구석에 던져놓은 아이들과는 달리 교실까지 다시 왔다가야 하는 신세다. 오른손에 들린 열쇠가 찰랑거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내 귀에 속삭여주는 듯 했다. 짜증이 조금 더 차오른다. 계단은 왜 이렇게 많을까. 2학년은 왜 4층일까. 왜, 왜, 왜. 온갖 짜증이 담긴 문제들이 전자레인지에서 펑펑 튀며 불어나는 팝콘처럼 점점 늘어났다. 그리고 이윽고 4층에 도달했을 때, 누가 툭하고 건들어도 펑하고 터질 것처럼 무척 기분이 더러워져있었다.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걷는다. 그에 맞춰 손가락에 걸린 열쇠가 짤랑 거리면서 흔들린다. 호응해주는 것은 이 녀석 하나다. 여기저기 난잡한 작은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복도를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빠른 속도로 뛰어서 결국 6반에 도착한다. 문은 역시나 잠겨있었다. 주번이 철저하게 참구고 온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 녀석 또한 다시 이 4층까지 올라오기 귀찮았던 거겠지. 멍청하게도 교실에 책가방을 두고 와 다시 올라온 녀석은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거칠게 열쇠를 자물쇠에 꽂아 넣어서 돌린다. 탈칵 소리를 내며 자물쇠가 풀렸다. 문을 빠르게 열고는 내 자리로 다가갔다. 책상걸이에 얄미울 만큼 바르게 가방이 걸려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가방을 집어 나가려는 그 때였다.
“풋.”
풋사과의 정령이 나를 그리워해 또다시 맞으러 나왔나 보다. 하긴, 이것 또한 심각한 바보짓이니까. 비웃어주려고 나온 것이겠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 날과 같이, 한 점도 달라진 것이 없는 모습으로. 그 멍한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뀐 것은 단지 베이지색의 하복뿐이었다.
급작스럽게 의아함이 샘솟듯 솟아올랐다. 소년이 교실에 있었는데, 주번은 왜 문을 잠군 것일까. 게다가 소년은 왜 운동회 연습에 참가하지 않은 것일까. 첫 번째 의문이 떠올랐을 때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고, 두 번째 의문이 들었을 때는 약간의 짜증이 들었다. 그렇기에 바로 마음먹은 바를 행동하기로 했다. 춘삼월에 처음 만난 이후로 처음 말을 건다.
“어? 너 왜 여기 있어?”
내가 생각해도 적절한 문장이었다. 두 개의 의문을 모두 풀어낼 만한 질문. 그러나 소년은 내 문장의 중의적임 따위는 눈에 차지도 않는지, 아니면 내 말 자체를 듣지 못했거나 마치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었는지 아무런 변화도 없이 눈을 말똥히 뜨고는 나를 그 특유의 눈으로 여전히 보고 있었다. 목동이 양을 보듯이.
가라앉아있던 짜증이 심연에서 부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이마를 잠시 짚었다가 다시 물었다.
“왜 여기 있어? 응?”
그러나 소년은 묵묵부답,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내 존재 자체가 못마땅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들리지 않는 것인지. 그 무엇조차 내게 알리지 않고는 인간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지혜로운 현자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한계치에 달했다.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둘 사이의 작은 고요는 길게 이어졌다. 마치 침묵으로 대화하는 듯 하게 서로의 눈만을 뻔 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100을 세고는 그 때까지도 소년이 말을 안하면 나가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에게 화를 내는 것 보단 속으로 삭히는 게 낫다. 그 때, 뿌리 깊은 거목처럼 미동도 없던 소년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부산스럽게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갑자기 교복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거기서 내 손가락 한마디 두께의 종이뭉치를 꺼내는 게 아닌가. 소년이 그 길고 하얀 손을 뻗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를 툭툭 쳤다. 그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방금 전 그가 꺼낸 뭉치들 중 하나를 내게 보여주는 게 아니었는가. 그곳에는 마치 글을 처음배운 아이가 쓴 듯 한 반듯하지 못하고 중간 중간 끊겨있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읽기 시작했다.
- 나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 하고 나는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서 소년이 나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었구나. 괜스레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밀어 올라 짜증을 뒤덮었다. 오히려 소년을 무시하고 그냥 가버리려고 했던 나의 좁은 마음에 대해 혐오감이 들었다. 소년에게 미안해서 나는 평소에 잘 짓지 못하는 미소를 어설프게나마 지으며 물었다. 아마 입 꼬리가 어색하게 찌그러져있을 것이었다.
“아, 어 미안. 잘 몰랐어. 어, 아. 근데 음 오늘은 왜 못나온거야?”
되도록 친절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또한 이해하기 쉽게 천천히 말한다. 소년은 이번에는 금세 내 말을 이해했는지 들고 있던 대화 카드들을 뒤적이더니 또다시 한 장을 골라내 들었다.
- 아픕니다.
그러고는 또다시 뭉치를 뒤적이더니 한 장을 뽑아 보여주었다.
-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아파서, 못나온 것이었구나.”
마치 탄성이나 신음 같은 내뱉음 이었다. 단숨에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소년 또는 소년의 부모님은 아마도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는 양해를 구했을 것이고, 소년은 이래서 멀뚱하게 교실에만 남아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을 것이라. 나는 이제까지 체육시간에 소년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떠올렸다. 정확히는 소년의 존재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라. 소년의 존재감은 나처럼 그저 무척 옅은 것과는 다르게, 마치 유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나는 일부러 기척을 숨기는 약한 초식동물이나 암살자 따위와 비슷했다. 그러나 소년은 달랐다. 하늘에 달이 떠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안다. 그러나 달을 보지 않는 이상 달을 느낄 수는 없지 않는가.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남지 않는, 그런 스쳐지나가는 인연 같은 그러한 것. 그러한 소년은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소년은 내가 자신을 동정하는 줄 알고 상처 받을 것 아닌가. 장애우를 동정하면 안 된다. 나는 그렇게 배웠었다. 그렇기에, 재빠르게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일부러 끄집어냈다. 소년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렇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소년은 나를 바라보고 나는 소년을 바라봤다. 정적은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또한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적을 신기하게도 이 정적을 만들어낸 주체인 소년이 깨트렸다. 소년이 대화 카드를 꺼낼 때와 같이 갑작스럽게 자기 가방의 문을 열고는 거기서 노트를 꺼낸 것이다.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색 노트를 책상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소년은 교복주머니에서 몽땅 연필을 꺼냈다. 내가 잘못 본 것일까, 그 순간 소년의 눈이 갑자기 반짝하고 빛나는 것 같았다. 소년은 검은 공책의 겉장을 빠르게 넘기고는 오른손에 몽땅 연필을 짧게 쥐고 빠르게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대화 카드에 적힌 바로 그 글씨체였다. 그것은 빠르게 한쪽을 채우고, 또다시 넘어가고, 그리고 또다시 넘어갔다. 수십 장이 빠르게 넘어갔다. 나는 그저 멍하니 소년의 눈과 빠르게 움직이는 그의 손 그리고 공책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전과 달리 이번엔 내가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년의 눈을 봤을 때 그의 눈은 마치 붉게 타올라 결국은 터져버리는 항성처럼. 아니, 우주가 생길 때 이뤄졌다는 빅뱅처럼 환하게, 환하게 폭사하고 있었다. 활기가 돌았다. 그의 손은 경쾌하게 리듬을 맞추어 글을 쓰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소년은 글을 쓰고 있었다. 서번트 신드롬의 아이는, 신에 가까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그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소년은 글을 쓰고 있었다.
4.
시간은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간다. 이런 표현보단 시간은 빛살보다 빠르다 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애초에 시간이 빠른지 빛이 빠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엄청나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건 맞는 사실 아닌가. 상대성이론이건 뭐건 내게 있어서 운동회 준비의 시간은 무척 빨랐다. 벌써 1주일이 남았다. 아이들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과열되어서 터질 것 같이 불안 불안했다. 과부하는 좋은 게 아니다. 문제는 그걸 조절해야할 엔지니어인 선생들조차도 왠지 모르게 흥분해 있다는 것이었다. 흥분은 그 어떤 컴퓨터 바이러스들 보다도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서 마치 학교 전체를 잠식한 듯 했다. 큰 변화였다. 내게는 마음에 안 드는 변화였지만. 그래도 좋은 변화도 있었다.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다고 했던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체육복의 옷깃으로 닦아낸다. 발은 부지런히 계단을 오른다. 체육복은 신기하게도 흡수성이 좋았다. 이런 용도로 쓰라고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가정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소년과 만난 그날 이후로 줄곧 이렇게 연습이 끝난 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이렇게 단 둘이 만나러 가는 걸 보면 무언가 공인들의 밀월여행 같기도 했다. 중요한건 소년과 내가 중요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비밀의 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 이렇게 올라가고, 전진하는 것이었다. 반의 문을 덜컹 하고 열고 들어간다. 열쇠를 주번에서 얻기 귀찮아서 선생님에게 자청해 열쇠담당이 되기로 했다. 주변에선 오- 하는 소리가 들렸고 선생님은 뭔가 얼빠진 표정이었다. 하긴, 평소에 아무 짓도 안하던 무척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가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서 열쇠담당같은 무척 귀찮은 일을 하다니. 아이들도 놀라고 선생도 놀랐을 것이다. 내가 열쇠담당이 된 이후로 부터는 예행연습을 나간다고 해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 다시열기 귀찮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뭣 하러 잠그는 가.
“여어, 안녕!”
소년은 나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나는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웃으며 소년에게 다가가 내 자리의 의자를 뽑아 털썩 앉았다. 소년은 그 무표정으로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책을 꺼내더니 또다시 저작을 시작했다. 나는 그걸 그렇게 바라봤다. 그렇다. 이게 나와 소년 단 둘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었다. 나는 소년이 글을 쓰는 것을 안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나만 아는 그것, 그런 특별한 것이다. 게다가 소년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있으면 무척 아득한 느낌이 들고 빨려가는 것 같아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이렇게 짬을 내서 있는 것이다. 소년은 평소처럼 글을 줄줄 써내려갔다. 중간에 따옴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대사하나 없는 그런 소설이라도 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니면 서사 시려나. 아직까지는 단 한 번도 소년이 쓴 글의 내용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었다. 나는 그저 소년이 글 쓰는 것을 보는 걸 즐길 뿐이었고, 소년은 글 쓰는 것을 즐겼다. 나처럼 글을 쓰는 걸 봐라 봐주는 사람이 있는 걸 즐기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우리 둘은 이 주 전부터 시작해온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도 평소와 다르지 않는 평범한 날이었다. 열린 창문으로부터 가을의 미풍이 불어와 공책의 장을 넘기려고 애를 썼다. 소년의 긴 앞머리가 종이처럼 팔랑거렸다. 그 때였다. 소년이 갑자기 글을 쓰는 것을 멈추었다. 연필을 주머니에 넣고는 공책을 가방에 넣었다. 나는 의아스러웠다. 소년이 글을 쓰는 시간은 일정했다. 삼십분 내지 사십분. 마치 동향 창에 빛을 뿌리는 해처럼. 정확하게 딱딱 떨어졌다. 오늘은 아직 얼마 안 지났다. 글 쓰는 것을 멈추기엔 무척이나 이른 시간이었던 것이다. 소년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꺼내 소중한 듯 손에 꽉쥐었다. 그러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부르고는 손을 펴보라 했다. 나는 소년이 시키는 대로 손을 펴서는 책상위에 올려뒀다. 소년은 마치 아이에게 맛있는 사탕을 주며 칭찬하는 어머니처럼 내 손바닥에 꽉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손에 차가운 금속재질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쫙 펴서 보니 USB메모리칩이었다. 단순한 디자인의 삭막한 USB였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방구석에 내팽겨두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을 누르고는 얕은 흥분을 가라앉으려 노력하며 편안히 의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컴퓨터의 부팅소리가 클래식처럼 고요한 방안에 외로이 들려왔다. 디디디딩- 탁 하고 모니터의 전원스위치를 누르니 회색 배경화면이 나를 맞이했다. 본체에 USB메모리를 꽂고는 인식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다. 이내 인식이 되자 빠르게 내 컴퓨터를 실행해 USB의 폴더를 연다. 두근두근, 거의 최고조로 치닫는 심장이 팀파니의 그것처럼 빠른 운율로 북소리를 낸다.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안에는 그가 지은 글들이 들어있을 것이라.
USB메모리 안에는 메모장파일이 하나 들어있었다. 폴더도, 레지스트리도, 게임도, 아무것도 없이 오직 메모장이 하나 있었다. 마우스를 메모장위로 이끌어 더블클릭한다. 빽빽한 문자의 나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그 글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첫 문장에서부터 소년이 느껴져왔다.
운동회 3일전이었다. 나는 여전히 소년을 지켜보고 소년은 글을 썼다. 한석봉과 어머니 같기도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소년이 매일 하나씩 USB를 나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오직 하나의 메모장이 있으며, 한편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어떨 때는 슬프고, 어떨 때는 웃기며, 행복하고, 무섭고, 두렵고, 즐거웠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이야기를 짜고, 그것을 풀어내는 능력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셰익스피어, 괴테와 같은 대문호들이 그러했을까. 소년의 글은 그 글 하나로써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보물이었다. 나는 그러한 보물을 나 혼자서 보고만 싶은 이기심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소년은 마치 나비와도 같아서, 내게서 벗어나고 싶으면 어느 때나 그 작은 날개를 움직여 도망칠 것이다. 꽃이 나비를 영원히 붙잡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소년은 이렇게 여러모로 나에게 깨달음과 비슷한 것을 주었다. 나는 좀 더 밝게 웃게 되었고, 그 웃음을 본 어머님 또한 웃으셨다. 비관적으로 보는 습관은 줄었고, 짜증을 내기 전에 한 번 더 되짚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 동향 창은 따뜻한 빛을 내게 선물했다. 장점이 단점보다 많은 동향 창이었다.
그러나 일이 마냥 잘 풀려 갈 수 만은 없었다. 이 또한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섭리였다. 몇 개의 우연들이 맞아떨어졌다. 그저 평소처럼 운동회의 최종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지 우리 반은 다른 반들보다도 진도가 느렸기에 그날은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이었다. 아이들도 짜증이 나고 선생도 짜증이 났다. 그래도 연습이 거의 다 끝나가고 있기에 애써 억누르고 있던 때였다. 그 때, 한 아이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아이들은 그 아이에게 온갖 욕설을 내뱉었고 그로인해 선생이 결국 폭발해서 20분 동안이나 단체기합을 받았단 것 밖에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 조금 더 충격적이기에. 이만큼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이들은 전부 다리를 절며 선생이 교실에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했기에 계단을 올랐다. 오리걸음, 파도타기, 앉았다 일어섰다 등등, 지독하게도 괴롭혔다. 평소에 체력이 좋아 날아다니던 아이들도 맥을 치루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으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소년으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 그 날은 희한하게도 문을 잠그고 갔었기에 4층에 오르자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먼저 문을 열지 않으면 아이들의 불만이 모두 내게 쏠릴 것 같았다. 숨을 헉헉 내쉬며 교실의 문 앞에 도착해 열쇠로 자물쇠를 풀었다. 금방이라도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심각한 부상을 당한 패잔병처럼 힘들게 걸어가서 내 자리에 앉았다. 소년은 평소와 달리 먼저 글을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속속들이 교실로 들어와 나처럼 제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있어 지독한 욕설이 교실에 가득 찼다. 짜증과 불쾌함과 기분 나쁨의 침묵으로만 이루어진 곳 같았다. 그때였다. 내 뒷좌석에서 짜증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뭐냐?”
명백한 시비조의 말투, 불길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덩치가 큰 놈 두 명이 소년의 옆에 서있었다. 반에서 흔히 말하는 주먹 좀 쓴다는 놈들이었다. 그 중 옆에 놈보다 머리가 큰 놈이 소년의 책상을 발로 툭툭 치고 있었다.
“너 뭐냐고.”
아. 하고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놈들은 들어오자마자 자신들과는 달리 느긋하게 글이나 쓰고 있는 소년을 보고는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소년의 체격은 동년배의 아이들보다 왜소하고 또한 곱상하게 생겼기에 그들에겐 딱 적당한 상대였다. 큰 놈의 얼굴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소년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글에 몰입하고 있었다. 놈은 그걸 무시로 느낀 모양이었다.
“넌 뭔데 이러고 있냐고 새끼야!”
쾅 하고 교실 전체에 그의 발길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린다. 소년의 의자가 크게 덜컹거렸다. 소년이 가까스로 떨어지려는 공책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그 특유의 눈으로 놈을 응시했다. 도대체 무슨 방해냐는 듯. 그러한 말이 그의 표정에서 읽혀졌다. 이 당황스러운 일에 나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소년이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내가 나서서 말려야 했다. 그때였다.
“너 우리지금 쌩까냐? 어?”
이번에는 작은놈이 시작했다. 큰놈을 따라서 책상을 발로 한 대 차고는 침을 짝 뱉었다. 소년이 응시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필을 손에 쥐고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큰놈의 표정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조금만 협박하면 알아서 기며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켜야하는 벌레와 같은 놈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일어서서 빨리 말려야했다. 그런데,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 때, 큰놈이 드디어 폭발했다.
“야이 시X놈의 개X끼야!”
큰놈이 큰 팔을 쭉 뻗어 거칠게 소년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소년이 숨이 막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공책과 연필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내 말 쌩까냐고? 어? 말을 해봐? 그 주둥아리는 장식이냐?”
소년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그저 놈을 노려만 본다. 놈은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 때 작은 놈이 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주워들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소년의 안색이 달라졌다. 작은 놈이 히죽였다.
“이 책이 그렇게 소중한가보구나. 응? 좋아, 그럼 찢어버리면 되겠네. 히히.”
안 돼, 그래선 안 돼.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막아야했다. 막아야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계속된 무리로 다리가 맛가버린 거야. 아니야. 거짓말 하지 마. 넌 그저 피하고 있는 거야. 평소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있기 위해서. 무엇이 너를 그리 막은 거지. 응? 말해봐?
어둠속의 내가 물어왔다. 그 때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듯 한 느낌이 피부로 찔려 들어왔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물이 고인 흐린 눈에 멱살 잡힌 소년이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착각일까, 소년이 방긋 웃은 것 같다.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왼쪽 눈의 눈물을 모두 걷어내고 오른쪽 눈의 눈물을 걷어내려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작은 놈이 책을 찢어버리려는 때였다.
소년이 갑자기 상체를 숙이고는 오른 주먹으로 큰놈의 복부를 강타했다. 큰놈은 크억하고 소리를 내고는 뒤로 넘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작은놈에게 소년이 크게 발을 휘둘렀다. 작은 놈은 발차기에 맞고는 큰 놈처럼 칵하고 단발마를 내뱉고는 쓰러졌다. 소년은 자연스럽게 땅바닥에 떨어진 공책을 들어 올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새 연필을 꺼내고는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 꿈과 같은 일 앞에서 굳어있는 때에 문이 열리며 선생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침묵했다. 당사자인 두 놈은 서로 장난을 치다가 그랬다고 선생에게 둘러댔다. 거기에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한 점도 없었다. 무언가에 크게 질린 듯 한 표정이었다. 선생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본인 또한 귀찮았는지 아니면 늘 그런 장난인걸로 받아들였는지 빠르게 종례를 끝냈다. 학생들은 우루루루 빠져나가고, 빈 교실에는 나와 소년 단 둘이 남았다. 소년은 빠르게 글을 써내려가다가 이윽고 연필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유골함의 뚜껑을 닫는 것처럼 겉장을 닫았다. 그러고는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과 가장 많이 하고 또한 능숙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서로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 이 작은 몸에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소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실상. 내가 소년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괴감이 들어왔다. 도와줄 필요도 없는 소년을 도우지 못한 내게. 그에게 평범이라는 사기그릇이 깨질까봐 손 내밀지 못한 내게.
소년이 공책을 오른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내게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 책을 받아버렸다. 그러자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손에 들고는, 열려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렇게 소년은 공책을 내게 남기고 떠나갔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는 내게 웃어줬던 걸까. 다시는 그가 글을 쓰는 걸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Fine.
검은색 노트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앞면은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빛바랜 검은색이다. 종이가 삭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때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노트의 겉면은 원래 종이의 느낌과 달리 무척 부드러웠다. 반듯하게 제본되었을 속지의 모서리 또한 위편삼절이라도 했는지 둥그렇게 변해있었다. 무척이나 애정이 깃든 책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겉장을 펼쳤다. 첫 장은 그렇듯 백지였다, 다만 뒤에 회색 그림자가 투영되어 보였다. 한 장을 넘긴다. 빽빽한 검은색 글자의 나열이 갑자기 나타나 눈앞을 채운다.
지독한 악필이었다. 글자들이 마치 한 획으로 그은 듯이 일렬로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필기체로 휘갈겨 쓴 것 같다. 그 녀석이 짜리몽땅한 연필을 오른손에 쥐고 정성들여 쓰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내가 봐오던, 그 글이었다. 그가 내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
.
.
.
.
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글을, 나의 유일한 친구에게 바칩니다.
내게 처음으로 손내밀어주고 웃어준 그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상처입지 마세요.
당신은 내게 있어 무척 소중하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나 때문에 고심하지 않으셔도 되요.
부디,
그 닫힌 문을 내가 조금이라도 녹였으면 좋겠어요.
… 이 글을 나의 유일한 친구에게 바칩니다. 」
확산하는 회색의 눈물자국이 문을 녹였다.
Da Capo.
융통성 없는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오른다. 그러나 별로 큰 불만은 없다. 표정은 무표정해도 욕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여전히 털레털레 여도 상관없다. 그저 이러면 됐다. 딸기맛 치약은 생각해보니 별로였다. 나에게 어울리는 건 역시 박하 맛이려나.
차가운 와이셔츠가 맨살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섬세한 손을 부산히 움직여 빠르게 단추를 채운다. 중간에 하나를 잘못 끼웠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애교 포인트겠지. 교복을 황급히 입고는 거실로 나왔다. 잘못하면 지각이다 하면서 빵이나 먹으려고 하는 그때였다. 안방의 문이 스르르르 열리며 어머님이 걸어 나오셨다. 졸린 눈을 비비시더니. 아들, 학교가는거야? 하신다. 응. 하고 짧게 답하고는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빵을 찾았다. 누가 내 빵을 옮긴 거야. 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불러왔다. 아들, 미안하게도 오늘은 빵이 없어. 어? 하고 반문한다. 대신 오늘은 이 엄마가 태워주도록 할게 후후. 그러고 보니 어머님은 잠옷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셨다. 게다가 한 손에는 차키가 빙빙돌아가고있었다. 나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그래요 빨리 가요. 하며 어머님을 집밖으로 이끌었다. 빌라 앞의 단풍나무는 벌써 낙엽이 모두 져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곧 눈꽃이 필 테니. 어머님은 주차장에서 작은 빨간색 경차를 몰고 나오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탔다. 부릉, 하고 경쾌하게 시동이 걸렸다. 자동차는 구불구불 골목길을 빠져나와 이내 대로로 접어들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둡다. 우울한 목소리로 내게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신다. 아들, 저기 말이야 엄마가 어제…. 어머님의 말을 끊는다. 괜찮아요. 뭐 부도 직전이라면 짤리시는게 당연하잖아요? 직장은 새로구하면되요. 어머님은 한참 벙찐 표정을 지으셨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그야 tv에서 그렇게 요란하게 구조조정이니 뭐니 하는데 못 알아보는 게 용한 거다. 나는 방긋 웃었다. 소년에게서 배운 그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보자 어머니 또한 방긋 웃으셨다. 라디오에서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아아.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가. 마티즈의 부드러운 쿠션에 몸을 잠시 눕혔다. 자동차의 흔들림이 버스의 진동보다 좋다.
어머님은 과한 서비스로 교문까지 나를 내려다 주고 가셨다. 어머님은 한쪽 눈을 찡긋 하시면서 아들, 엄마 힘낼게. 그러니까 아들도 오늘 운동회 잘해! 하셨다. 어머나. 어머니. 어떻게 아들 운동회인줄 아셨어요. … 어머님도 나름의 정보통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나는 선도들의 따가운 눈총과 주임선생의 헛기침을 무시하고는 방긋 웃으며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말하자 학주가 벙찐 얼굴을 짓더니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운동회 열심히 해라. 선도들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계단을 타고 올라섰다. 학교는 들뜬 분위기였다. 그야 운동회 당일이니, 이런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3층의 거울을 보고는 실소를 머금으며 교실로 들어서려던 차였다. 발에 무언가 걸려왔다. 또 담뱃값인가, 역시 말세야 하고 농담이나 지껄이려는데, 자세히 보니 검은색 MP3였다. 오오 득템 하면서 재빠르게 주워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중에 주인을 찾아줘야겠다. 교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와 경쾌한 스텝으로 자리에 앉았다.
운동회가 시작했다. 나는 학교의 담장에 기대어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유리벽도 나름 괜찮구나. 적절한 그늘 겸 등받이가 되어주니 땡큐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몇 시간 전에 주은 MP3를 뒤져보고 있었다. 이번엔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계주의 차례라고 방송실에서 울려 퍼졌다. 운동장 가득 함성이 들이밀었다. 1등한 반한테는 무슨 뷔페를 보내준대나 뭐래나. 교장의 역작이었다. 때마침 MP3의 조작이 익숙해져 음악이 들어있는 폴더를 찾았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되어있는 제목이었다. 가볍게 터치해서 음악을 실행시킨다.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와 앞머리가 팔랑거린다.
그 때 우리 반이 모여 있는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금해서 MP3를 낀 채 다가가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계주인원 중 마지막 이었던 놈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큰일이었다. 이 날을 위해 따로 연습한 시간만 해도 24시간이 넘었다. 아이들은 초조해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나또한 그 초조함이 옮았는지 조금 목이 탔다. 계주에 참가하는 인원은 빠르게 운동장으로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방송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 그 때였다. 저 구석에 앉아있던 인영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온 것은. 그것은 내가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년에게 돌아갔고 소년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응답했다. 이윽고 소년이 바로 나의 반대편에 도달했다. 소년은 하얀 손으로 박수를 두 번 쳐서 시선을 모으더니 갑자기 나를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버렸다. MP3에서 전주가 끝나고 가사가 들리기 시작했다. 미약한 음이었다. 소년이 나를 응시한다. 아이들도 시선을 돌려 나를 응시했다. 2학년 6반 계주인원은 빨리 와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심장고동이 빠르게 뛰어왔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소년이 내게 손내밀어주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섰다. 운동장 중심에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고 형형색색의 바통들이 보였다. 두근, 하고 심장이 고동쳤다. 노래가 들려왔다. 소년에게 손 내밀어야 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한발 짝만 더 앞으로 내딛으면 되는데, 내딛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도대체 이 몸뚱아리는 왜 이런 걸까.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 때, 등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고동이 울려 퍼진다.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소년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자연스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등을 떠밀고 있었다. 아아, 소년이다. 내 뒤에서는 소년이 나의 문을 녹이고 있었다. 나의 문을 이렇게 밀어서, 열려고 하고 있다. 소년의 질문에 답해야했다. 그래, 나의 친구에게 이것을 바치자.
한발 짝 앞으로 걸었다. 노래는 최고조로 치닫고 고동은 분홍 물결을 부드럽게 은유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긍지를 버리지 마
자 망설이지 말고 가는 거다
공을 울리자.
용감하게 춤을 춰라 운명의 전사여
금색의 날개로 하늘로 날아올라라
물러설 줄 모르는 강철의 용자여
불타오르는 영혼이 명하는 그대로
지금이야말로 일어나라 운명의 전사여
번개의 검으로 적을 쓰러트려라
안식을 꿈꾸는 강철의 용자여
지켜야와 할 미래와 사랑을 믿으며
문을 열어라.」
─ 실로 잊지 못할, 어느 가을 운동회의 작은 교차였다.
─
졸작출격입니둥...
진이빠지네요 이거...으ㅏ
참고로 마지막 노래는 뭔지 아시는 분도 계실테지만 gong입니당. 해석판이에여<
저도 다른분들처럼 아무런 잡기술없이 주제를 표현하면 얼마나 좋을까여...
잡기술이 난장입니다.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ps. 어 이거 적어야 될거같아서 적어여 ...
운동회로 인해 주인공이랑 소년이랑 만나고 결국 애가 중이병탈출했으니
나름 주제에 맞겠지여!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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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퇴고 없이 ㅠㅠ
소설읽다가 울어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야 ㅠ.ㅠㅠㅠㅠㅠ..ㅠ..아유 수고하셨어요 퇴고따위 안해도돼요 이렇게 훌륭한 글인데 ㅠ.ㅠㅠㅠㅠ 읽느라 좀 고생했지만../흐엉어
창류님만세
길어요. ㅇㅁㅇ; 길었지만 가볍게 읽힐 수 있는 문장이니까, 재밌게 읽을 수 있었어요~~ 집중하게 되고, 순수한 결말이 매력인 >ㅁ< !!!!! 잘보고 갑니다아~
읽기기준
문체 6
묘사 9
문장력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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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요소
문단 9
분량 10
50점만점에 43점 되겠음.
와 이거 진짜 문체 정말 맘에 안드는데, 그걸 뒤집을 정도로 균형잡힌 문장력, 탄탄한 묘사, 문단 분량 적절함에 점수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