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민국시대(民國時代)란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대륙에 존재했던 시기인 1912년 ~ 1949년 까지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청나라가 망한 1912년부터 중국공산당에 의해 대륙이 통일되는 1949년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기는 우리의 해방후~정부수립까지의 공백기 처럼 중국역시 수구세력, 공산당, 국민당, 외국열강들이 치열하게 그 정치적 이해를 다투며 전 사회를 혼란의 극치로 몰던 아수라의 시기였다.
극심한 혼란기였던 만큼 그 인물군상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했으니 소위 이 시기의 '4대 미남' 으로 불리는 인물들을 보면 그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충분한 상징성과 그 시대적 반영을 함축하고 있음을알 수 있다.

1. 민국 제일 미남자 왕정위(汪精衛)
본명은 왕조명(汪兆銘). 정위(精衛)는 별호. 국민당의 혁명지도자 손문[孫文]을 도와 함께 일했다. 1920년대말에서 1930년대초에 국민정부의 지배권을 놓고 장개석(蔣介石)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1940년대에는 일본군이 중국 점령지에 세운 친일 괴뢰정권의 주석이 되었다.
일본에 유학 가서 서양사상을 공부하던 왕정위는 손문이 새로 만든 혁명당 동맹회에 가입하여 그 단체의 주요이론가가 되었다. 1910년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동맹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섭정왕 재풍(載灃 : 醇親王으로서 푸이[溥儀]의 아버지)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이 음모가 발각되어 그는 체포되었다. 섭정왕은 처형을 앞두고도 의연한 그의 용기에 감복하여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淸朝)가 무너지자 영웅이 되어 감옥에서 풀려났다. 손문은 1911년 이후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군벌정권에 불만을 품고 새로이 혁명 정당을 조직하려고 했으며, 1917년 왕정위는 그에게 다시 합류했다. 그후 7년간 왕정위는 손문의 개인적인 조력자로서 쑨원이 새로 조직한 국민당의 주요직책을 맡았다. 1925년 손문이 죽을 당시 국민당은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왕정위는 국민정부의 새로운 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북벌이 성공적으로 진척되어감에 따라 국민당 우파는 그보다 군대를 지배하고 있던 장개석을를 더 지지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들 우파는 중국 남부에 있는 남경(南京)에 독자적인 정권을 세웠다. 한편 국민당 좌파는 공산당과 연합하여 중국 중부에 있는 무한(武漢)에서 왕정위를 당수로 하는 정권을 따로 세웠다. 그러나 그는 공산당과의 합작이 점점 어렵게 됨을 깨닫고, 1927년 7월 공산당원을 숙청했다. 국민당 좌파의 대부분은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개석에게 다시 합류했다.
왕정위는 계속해서 반(反)장개석 운동을 이끌다가 1932년 2월에 이르러 그와 화해했다. 두 사람의 합의 아래 왕정위는 국민당의 주석이 되었고 장개석은 계속 군을 장악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왕정위는 1938년말 하노이로 도망가서 중국정부가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0년 3월 30일 일본의 협조를 얻어 그들이 점령한 이전 국민정부의 옛 수도 남경에 괴뢰정권을 세웠고, 그 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자신의 정권이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계속 점령지에 대해 강력한 군사적·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는 일본에서 지병을 치료하다가 죽었다.

<▲ 군부대 시찰중인 왕정의>

2.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주은래(周恩來)
외모적인 척도로 보면 다른 3명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내면적인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의 풍모는 단연 다른 3명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타인과의 대화나 대처에 있어서 그가 보여준 능력은 큰 매력으로 각인되고는 했다.
주은래는 천진의 남개대학(南開大學)을 문과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으며 재학 당시 학비를 면제받았던 유일한 학생이라고 전해질 정도이다. 남개대학 재학시 연극 '一文錢'에 여자로 출연해 상당한 호평을 받았을 정도로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항 방면에 재질을 발휘하였다. 졸업후 일본과 프랑스 유학시절 마르크스 이념에 빠져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갔다.
그가 유년기를 보낸 곳은 남방(소흥)이지만 청소년기를 보낸 곳은 북방(천진)이라 혹자는 중국의 남북 지역적 특색을 고루 갖춘 것으로 주은래를 묘사하는 즉, 외모는 남방의 준수한 모습이나 내면은 북방의 기질을 아울러 품고 있다고 평을 하기도 한다.
주은래의 전성기는 공산당 집권후 보다는 오히려 국공합작시기를 전후한 시절이 그의 재능이 제대로 발휘되던 시기였다. 서안사변 후 중경에서 공산당을 대표해서 국민당과 벌인 담판을 비롯한 숯한 협상과 회의테이블에서 주은래 특유의 온화한 카리스마가 원만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대인 및 대외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주은래의 능력은 공산당정권 수립후 총리겸 외교부장을 겸하면서 다시 한번 발휘되었다.
하지만 말년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으로 그 역시 혼란스러운 시대의 피해자였고 무엇보다도 1인자 모택동이 주은래의 지병(암)을 치료하지 말것을 은미히 지시하는 바람에 모택동이 죽기 직전 그가 먼저 세상을 뜨고 만다. 독설가들은 모택동을 옹립했지만 그에 의해 철저히 2인자로서의 우리에 스스로 갖혀지낸 우유부단하고 겁많은 사람이라고도 평하기도 한다.

3. 서안사변의 주인공 장학량(張學良. 1898.6.4~2001.10.14)
사람이 100세를 넘기며 천수를 누리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지만 그 인생의 2/3을 연금된 채 보냈다면 복이 아니라 복전위화(福轉爲禍)가 아닐까 싶다.
장학량은 그 부친인 동북군벌 장작림(張作霖)이 황구툰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폭탄에 기차가 폭발해 사망하면서 약관 21세에 중국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여인들은 이 젊은 귀공자의 등장에 가슴을 설랬고 남자들은 장학량의 외모와 배경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에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본래 만주의 마적단 두목인 장작림은 스스로 원세개에게 투항해 그의 신임을 얻어 동북지역의 군사지휘관으로 성장하고 원세개가 죽자 동북지역은 장작림의 왕국이 된다. 이 왕국의 욍자로서 장작림은 귀공자로 살다 부친의 급작스러운 사망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태생적으로 정개석과 비슷한 부류로 그와 연합하나 일본군의 침략으로 만주를 잃었지만 장학량은 장개석에 의해 공산당 토벌에 투입된다. 아직 그에게는 수십만의 부하들이 있었고 장개석은 그에게 육해공군 부사령관 및 동북변방사령관을 주었으니 군사적으로는 적어도 북방에서는 장개석을 능가하였던 것이다. 1933년 만주를 모두 잃자 실망한 그는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고 1934년 돌아왔지만 장개석은 계속 그에게 공산당 소탕을 지시한다. 이에 반발해 양호성과 함께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연금해 일본군에 대응하기위해 국공합작을 주문한다. 결국 이 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연금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다. 이때가 36세 이다.
그에게 여인의 기억은 2명이 특히 유독 의미있었다. 장개석의 처 송미령과 조일적(趙一荻)이 바로 그녀들 이다. 서안사변(1936년) 후 대노한 장개석은 장학량을 남경을 끌고 가며 말하길 "남경으로 가면 니놈 목숨은 어찌될지 나도 모른다."며 겁을 주었고 이를 듣고 송미령이 장개석에게 남경으로 돌아가면 장학량을 서안으로 돌여보내 줄것을 간곡히 요청하나 장개석은 거절한다. 이후로 송미령이 힘을 써 장학량의 안전을 보전할수 있었고 이에 대해 장학량은 매우 감동을 하였다고 한다.
조일적은 무도회에서 유부남인 장학량과 서로 한눈에 반해 불같은 사랑은 나눈다. 하지만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연금되자 그녀 또한 평생을 수절하며 그를 기다리다 세상을 떴다고 한다.

4. 경극대사(京劇大師) 매란방(梅蘭芳)
위의 세사람이 모두 정치적인 인물군 이었다면 매란방은 거기서 한발물러서 있던 사람이었다. 사회적으로 극도의 대동란(大動亂)의 시기였으므로 군사적인 인물, 이념적인 인물 등이 시대적 상징인물로 부각될수 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백성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손길은 정작 그들이 아닌 전적으로 예술가들의 몫이었다. 청나라 후반기에 비로서 정형화된 무대극의 형식으로 성장한 경극도 그런 의무를 충실히 수반한 일꾼의 하나였다.
1913년 상해 초연을 시작으로 강남지역에 그의 위명을 드날리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당시 시중에 "남자는 란방을 처로 삼고 싶고, 여자는 모두 란방과 같은 사람이 되어 시집각 싶다." 라거나 "마누라는 매란방이 최고요, 아이를 낳으면 주신방 같은 애가 좋디." 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모두 매란방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떠도는 말들이었다.
기실 매란방이 활약하던 시기의 경극은 청나라 후반에 정형화된 경극이 만개하고 현대회되어 과는 과도기였다. 따라서 그 역할에서는 아직 구시대적인 흔적이 남아 이었고 매란방이 그런 배역의 최고 절정이자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인물인 것이다. 즉, 당시만 해도 경극의 여자 역할(旦 이라 함)을 남자가 하게 마련인데 매란방은 이 분야에서 최고의 극적완성도를 보여준 인물이었고 이는 그 자신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극중의 역할로 인해 묻 남성의 총애(?)를 한번에 받는 상황을 연출했고 이는 후일 진개가의 영화 '패왕별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째거나 매란방의 활약으로 경극은 중국민족의 최대 문화적 극예술로 성장할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중국적 공연예술의 총화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침입으로 끊이지않는 전란과 내부적으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지칠데로 지친 백성들은 그의 노래와 춤사위에서나마 잠시 시대의 시름을 잊고 순간이지만 안식을 찾았던 것이다.
첫댓글 첫번째 사진은 왕정위가 아니라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