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 | 재위기간 | 왕 명 | 역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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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918~943 |
태조(太祖) |
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인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
2 |
943~945 |
혜종(惠宗) |
휘는 무(武). 태조의 맏아들 대광인 왕규(王規)의 음모에 신경 쓰다 병사함. |
3 |
945~949 |
정종(定宗) |
왕규의 난을 평정하고 불교를 숭상함. 서경(평양)에 왕성을 쌓고 천도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 |
4 |
949~975 |
광종(光宗) |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노비 안건법을 제정하고 후 주에서 귀화한 쌍기(雙幾)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실시함. |
5 |
975~981 |
경종(景宗) |
휘는 주인(寅), 자는 장민(長民). 광종의 아들 전시고를 제정함. |
6 |
981~997 |
성종(成宗) |
휘는 치(治),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유교를 국가 지도의 원리로 삼아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함. |
7 |
977~1009 |
목종(穆鐘) |
휘는 송(誦). 경종의 맏아들 전시과를 고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康兆)에게 피살됨. |
8 |
1009~1031 |
현종(顯宗) |
휘는 순(詢). 천추태후의 강요로 중이 되었다가 강조의 옹립으로 족 위항 거란의 침입으로 혼란하였으나 강화하여 국내가 안정되고 화가 발전함. |
9 |
1031~1034 |
덕종(德宗) |
휘는 흠(欽). 왕 2년에 천리장성을 쌓고 국사 편찬 사업도 완성함. |
10 |
1034~1046 |
정종(靖宗) |
휘는 형(亨).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고 장자 상속과 적서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음. |
11 |
1046~1083 |
문종(文宗) |
휘는 휘(徽), 자는 촉유(燭幽). 많은 법규를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닦음 학문을 좋아하고 서예에 능함. |
12 |
1083 |
순종(順宗) |
문종의 맏아들로 즉위한 해에 죽음. |
13 |
1083~1094 |
선종(宣宗) |
휘는 운(運), 문종의 둘째 아들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 송나라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오는 등 고려 문화의 융성기를 이룸. |
14 |
1094~1095 |
헌종(獻宗) |
휘는 욱(昱). 즉위하자 이자의(李資義)의 난을 평정하고 다음 해에 신병으로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줌. |
15 |
1095~1105 |
숙종(菽宗) |
문종의 셋째 아들 조카인 헌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함. 해동통보를 주소하여 화폐제도를 시작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룸. |
16 |
1105~1122 |
예종(睿宗) |
문휘는 우. 학문을 좋아하며 학교를 세우는 등 학문을 크게 진흥시켰음. |
17 |
1122~1146 |
인종(仁宗) |
휘는 해(偕).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겪었으나 선정을 베풂. |
18 |
1146~1170 |
의종(毅宗) |
휘는 현(現). 인증의 맏아들 무신을 천대하고 문신을 우대하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나 폐위되고 명종 3년에 경주에서 살해됨. |
19 |
1170~1197 |
명종(明宗) |
휘는 호(皓). 의종의 동생 정중부의 추대로 즉위하고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쫓겨남. |
20 |
1197~1204 |
신종(神宗) |
휘는 탁(晫).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최충헌이 옹립한 왕임. |
21 |
1204~1211 |
희종(熙宗) |
휘는 영. 신종의 맏아들 최충헌을 없애려다 오히려 쫓겨남. |
22 |
1211~1213 |
강종(康宗) |
휘는 숙(璹). 정. 오. 명종의 맏아들 명종과 함께 쫓겨났다가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오름. |
23 |
1083~1094 |
고종(高宗) |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로 천도한 뒤 28년 동안 항쟁하였으나 결국 굴복함. 불교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을 조판함. |
24 |
1094~1274 |
원종(元宗) |
휘는 정(禎). 몽고에 굴복을 당한 뒤 즉위 임연(林衍)의 난, 삼별초의 난 등으로 화평한 날이 없었음 |
25 |
1274~1308 |
충렬왕(忠烈) |
원(元)나라에 굴복하여 원의 제국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을 받았음 |
26 |
1308~1313 |
충선왕(忠宣) |
휘는 장(璋). 몽고 왕실의 딸과 결혼하고 1298년 왕위에 올랐으나 7개월 만에 충렬왕이 다시 복귀 이후 10년간 원나라에 머물다 다시 즉위하여 원나라에서 국정을 봄. |
27 |
1313~1330 |
충숙왕(忠肅) |
휘는 도(燾). 정사에 염증을 느껴 아들 충혜왕에게 양위하였다가 행실이 좋지 않자 2년 만에 복위 함 |
28 |
1330~1332 |
충혜왕(忠惠) |
휘는 정(禎). 행실이 좋지 않아 정사를 혼란에 빠뜨렸음. |
29 |
1344~1348 |
충목왕(忠穆) |
휘는 흔(昕). 원나라에 볼모로 있다가 8세에 원나라에 의하여 즉위함. |
30 |
1348~1351 |
충정왕(忠定) |
휘는 저. 12세에 즉위하여 외가 친척인 윤시우(尹時遇)와 배전(裵佺) 등으로 인해 정지가 문란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잦아 3년 만에 폐위됨. |
31 |
1351~1374 |
공민왕(恭愍) |
원나라 배척 운동을 벌여 친원파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여 국위를 떨침. |
32 |
1374~1388 |
우왕(禑)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
33 |
1388~1389 |
창왕(昌)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쫓은 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 만에 강화도로 쫓겨나 10세 때 시해됨. |
34 |
1389~1392 |
공양왕(恭讓)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
고려시대 918~1392년 473년간 총34대
고려 중엽 문종시기 1046~1083 --> 김해 허씨 시조 (허염) 가락군 삼중대광 역임
의종시기 1146~1170 ---> 정중부의 무신란 평장사 허홍재 살해 당함
고종~충숙왕 1243 ~ 1323 ->최충헌 집권기 (4세손 허연/충주사록, 밀직사사) 및 (5세손 허유전 문하시중) 원나라 간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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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서남부에 자리잡은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돌아나가는 곳에 자리잡아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으로 불린다. 마을의 주산인 화산 기슭에는 김해(金海) 허(許)씨, 광주(光州) 안(安)씨, 풍산(豊山) 류(柳)씨 등이 17세기 중반까지 함께 살았지만 점차 두 성씨가 사라지고 류씨의 집성촌이 됐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 인조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고려 중엽 허도령이 하회탈을 제작
고려 중엽 김해 허씨 웃골(거먹실) 정착
고려 중엽 광주 안씨 향교골에 정착
고려 말기 풍산류씨 공조전서 류종혜 선생이 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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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허씨(金海許氏) 시조 허염(許琰)
문종(文宗, 1019~83)
김해허씨(金海許氏)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皇后)의 35세손으로 전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역임하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허황후의 아들 중 일부가 허씨가 되었기 때문에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와는 같은 연원을 갖는 셈이다. 따라서 양 성씨는 동족으로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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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철회(학술회장, 운영자 / 양천허씨 상우당 종회 운영자) | 조회 17 |추천 0 | 2013.03.17. 11:55
고려시대의 양천허씨인물 중에서 양천허씨족보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지만 향토지나 고려사에 나오는 분이 바로 허경(許慶)이다.양천현읍지에는 인물조에
"고려 허경 관지 동중서 문하평장사 문학충청(高麗 許慶 官至 同中書 門下平章事 文學 忠淸)
고려의 허경은 벼슬이 동중서 문하시중 평장사까지 오르시고 문학은 충성스럽고 맑다.
출전: 양천현읍지, 읍지10- 경기도1,한국지리지총서, 아세아문화사, 1985, 196면
*나는 개인적으로 허경 문하시중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허경 선조가 비록 족보상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한국계항보(韓國系行譜)에는 부가적으로 기입되어 있어 주목된다.
타 성씨가 보기에도 귀중한 분을 놓지고 있다는 것은 큰 손실이다.고려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분을 족보상에서 배제한 것은 무슨 연고인가? 아마 후손이 끊기어 그런 현상이 나오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생각나는 것은 안동 하회마을에 허정승묘가 있는데 매년 풍산류씨들이 벌초와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이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밝혀야 한다.
원래 하회마을에는 허씨, 안씨가 세거하다가 풍산류씨가 들어와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허씨 중에서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안동 서후 저전이 고향인 원주 변씨노인도 하회마을에 풍산류씨이전에 허씨, 안씨가 거주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문헌에 나온다고 하니 저녁식사를 내겠다고 하신 적이 있다.그날 이분은 안동의 새로운 사실을 확인하고 재미있어했다.
[
한자 許慶 출처 : 고려사 , 고려사절요, 한국인명대사전
성별 남
생년 미상
몰년 1115년(예종 10)
본관 공암(孔巖, 지금의 서울 양천구)
대표관직(경력) 상서좌승(尙書左丞)
?∼1115(예종 10).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 지금의 서울 양천구).[생애 및 활동사항]
헌종 때 과거에 급제,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청렴하고 충직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숙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불러 부료(府僚)로 삼았으며, 즉위한 뒤 추밀원승선(樞密院承宣)을 제수받고 금중(禁中)에 출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1101년(숙종 6)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즉위사(卽位使)가 되어 당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곽상(郭尙)과 요(遼)에 다녀왔다.
예종이 즉위하자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吏部侍郎樞密院左承宣)에 제수되었으며,
1109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형부상서 추밀원사(刑部尙書樞密院使),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에 올랐다.
1113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檢校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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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홍재(許洪材) ?~1170(의종24)
고려의 문신. 1134년(인종12) 문과(文科)에 장원, 의종 초에 좌정언(左正言)으로 왕과 함께 국정(國政)을 의논했으며,
1164년(의종18) 좌승선(左承宣)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165년 국자 좨주·좌간의대부(國子祭酒左諫議大夫),
1169년 중서시랑평장사·판상서이부사(中書郞平章事判尙書史部事),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으나 이 해 무신(武臣)의 난 때 살해되었다.
한자 許洪材 출처 : 참고문헌(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열조등과록, 동문선, 동사강목 , 부천지사2002)
분야 역사/고려시대사
시대 고려 문신
생년 미상
몰년 1170년(의종 24)
관련사건 무신의 난
대표관직(경력)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
?∼1170(의종 24). 고려 중기의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134년(인종 12) 5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임원애(任元敳)가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 의종초에는 좌정언(左正言)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1164년에 좌승선(左承宣)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 좌간의대부(國子祭酒 左諫議大夫)가 되었으며, 1169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판상서이부사(中書侍郎平章事判尙書吏部事)로 승진되고 다음해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
문장을 잘하여 한뢰(韓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얻어 왕의 연락(宴樂) 때마다 배행하여 무인(武人)들의 원망의 표적이 되었는데, 1170년의 무신란 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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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공 허유전(忠穆公 許有全) 묘
인천광역시 지방기념물 제2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산297
허유전[許有全, 고종 30년(1243)∼충숙왕 10년(1323)]. 시호는 충목(忠穆),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의 호를 받았다. 본관은 김해, 초명은 안(安). 충주사록 연(延)의 아들이다.
원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 전라도안렴사·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도첨의참리·지밀직사사가 되었고 1321년 수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1303년에 여러 대신들이 세자 충선을 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박경량(朴景亮)·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세자의 위를 보전하였다. 이에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원나라 토번에 귀양간 상왕 충선왕의 환국을 위하여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 고(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묘는 1987년 공의 23세손 되는 허관구(75세) 선생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원래 선생은 강원도 홍천 태생으로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정년퇴임하신 분으로 두 내외분 꿈에서 현몽하
는 대로 오랜 기간 해몽하고 발품을 판결과 이곳 강화도에 까지 이르게 되었고 드디어 땅속에 묻혀있던 ‘허유전 묘’라는 표석을 발견하게 되어 오랜 기간 실전되었던 조상의 묘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1988년 6월 한국선사문화연구소 주관아래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묘가 땅속에 묻혀있던 관계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고려의 묘제 연구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선생은 1995년 아예 이곳으로 이사하여 재실에서 생활하고 계시는데 비가 주룩주룩 내라는 중에도 묘역을 안내해 주셨고, 따듯한 커피까지 대접을 받게 되어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몸이 다소 불편하신데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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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자료를 보면서 추측되는 본인의 생각은
1. 김해허씨 시조 허염(許琰) 문종(文宗, 1019~83)시기 삼중대광 가락군
2. 양천허씨 허경(許慶) 몰년 ?∼1115(예종 10) 상서좌승(尙書左丞)
3. 김해허씨 허홍재(許洪材) 몰년 ?~1170(의종24) 중서시랑평장사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무신난때 살해///
4. 김해허씨 허유전(許有全) 고종 30년(1243)∼충숙왕 10년(1323)] 父 충주사록 연(延)
김해허씨 시조 허염(묘?) 이후 -> 군언(2세1130년,병부시랑 묘?) -> 자(3세,1180년 병부상서 묘?) -> 연(4세, 1230년 묘? 충주사록) -> 유전(5세 1280년 묘 강화도 ) -> 영(6세,1330년 총랑 묘?) - -> 기(7세1380년 중랑장 묘? 경남 고성) -> 유신(8세 1430년 묘? 현감 경남 고성) -> 려(9세 1480년 묘 경남고성) 이후 부터 묘 확인됨.
공교롭게도 김해허씨 허염시조와 허유전 (5세손) 사이의 시기는 정중부의 무신난이 있었고 족보에는 없지만 김해 허씨인
허홍재 선조가 살해됨. 직계는 아닐지라도 단절됨을 의미하지는???
김해허씨 세거지는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시조 이후부터 보면 연(4세(이 충주사록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으며 유전(5세)은 강화도에 묘가 있다. 그리고 기(7세)부터 유배지인 경남고성에서
정착했고 기(7세), 유신(8세)의 묘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려(9세) 이후 부터는 묘지가 확인된다.
즉 시조 1세 ~ 6세(영)까지의 정확한 묘소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5세 유전은 강화도에 묘 = 강화도는 고려궁성지며 정승을 지낸 분이라 특수성 감안 김해허씨 세거지와 별도라 봄)
기(7세)분이 중요하신 분이라 생각된다. 이 분이 유배지로 이동하여 정착하신 분이기에. 기(7세)와 유신(8세)의 묘지는 경남고성의 어디인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이 두분의 시기는 일종의 과도기라 볼수 있다.
상기의 세대는 본인 예상 1세대를 50년으로 보고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대략적 활동시기는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안동 하회마을의 허정승 묘는 누구의 것일까?
혹시 김해허씨 시조의 묘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김해 허씨 허홍재공과 김해 허씨 시조 허염공은 대략 8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데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손자뻘 정도 된다.그리고 허홍재옹이 살해된 무신난 1170년과 허유전공이 태어난 1243년의
시간차는 73년이다. 1196년 이때는 최충헌의 100년최씨 무신정권기이다. 그 사이에 허유전공의 아버지인 허연공은 최씨 무신집권기에 충주사록 및 밀직사사를 지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혹시 고려시대 정중부의 무신난에 허홍재공이 살해되고 이의방, 정중부,경대승, 이의민의 무신혼란기에 김해허씨 가문에 시련이 찾아온건 아닐까?
안동 하회마을의 허정승이라는 분의 묘가 고려말기 정승을 지낸 허유전공의 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안동 하회에 있는 허정승묘가 허염이라는 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은 해 봄직 하다. 허홍재옹라는 걸출한 인물의 정중부의 무신란 살해와 허유전옹의 강화도 묘지 그리고 허기공의 경남 고성
낙향정착. 자동차가 없던 시절 후손들이 선조들의 묘를 관리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인근의 풍산류씨들이 벌초를 하면서 관리해 준다고 한다. 너무나도 고맙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해 허씨는 선대 충목공 허유전 묘의 후손의 현몽으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믿기지 않게 찾았다.
안동 하회마을은 김해허씨가 문을 열었다고 하며 허도령의 하회탈 설화도 유명하다.
허정승묘의 묘가 만약 김해허씨의 시조묘라고 한다면 이건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양천 허씨 허경공의 묘지일지라고 누구의 묘인지 알아 내고 그 후손들이 관리하는 것이 허씨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해허씨의 한 명으로서 안동 하회마을의 허정승묘가 김해허씨 허자 염자의 시조묘로 확인되면 정말 좋겠다.
그건 강화도 땅속에서 찾은 충목공 허자 유자 전자 묘에 버금가는 행복한 일이 될 것임엔 분명하다.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무덤의 유전자 검사... 이건 죄인가? 충목공의 대퇴부 뼈가 강화도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과 하회 허정승의 묘에 뼈가 나온다면 유전자 검사대조라도...
이건 입에다 담기만 해도 불효하고 소설같은 이야기 인가요
첫댓글 안동 허씨의 마지막 기록은 인조 1642년 동원록이 마지막입니다. 인조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전쟁 직후 입니다. 전쟁의 영향도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좋은 자료입니다.궁금증이 생기며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저도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