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가요의 시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잘 대답하지 못하는 수가 허다하다. 그것은 민중가요역사가 암울한 시대에 전승되어 오면서 권력의 눈을 피해 고의로 숨겨지거나, 왜곡되는 수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민중가요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결코 그냥 지나쳐 갈 수 없는 것이 그 당시의 시대상황이다. 왜냐면 민중가요의 그 특별한 성질 때문이다.
그럼 민중가요의 시초부터 들춰보도록 하자.
주로 민중가요의 시초는 70년대 후반,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70년대 초반에 나온 김민기의 노래가 아니라, 70년대 후반에 그가 음반시장의 유통망을 벗어난 노래들을 작곡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독자들은 김창남 등이 모아지은 책, '김민기'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그 책을 우연하게 얻어 읽어보았는데, 정말 초기의 김민기의 노래와 후기의 김민기의 노래는 그 내용이 현격하게 틀린 것을 알 수 있었다.
70년대 후반, 그 시절은 당시 권력자였던 박정희의 장기집권 야욕으로 인해 점점 먹구름이 드리워지던 시절이었다.
2. 70년대 그때를 기억하는지... -민중가요의 탄생
'하늘이 그리도 어두웠었기에 더 절실했던 낭만. 지금 와선 촌스럽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신해철,「70년대에 바침」
70년대에 들어서자 우리 나라의 모든 정세는 엄청나게 급변하고 말았다. 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했고, 그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화의 원점회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으로 노동문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적 사고가 일어나는 등, 모든 국민들이 정세에 억눌려있으면서도 절실하게 개혁을 바라던 시기였으며, 그당시 학생운동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모든 대학생들이 집회를 참가하는 것을 하나의 교양수업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신선포 이후 긴급조치가 내리기 이전부터 갑작스레 정권은 학내집회에 까지 공권력을 투입하여 초기에 진압하는 등, 한마디로 운동권은 모두 싹슬이하여 구속하는 등 엄청난 탄압을 가한다. 이에 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운동, 즉 집회를 할 공간을 잃어버린 후 지하로 숨어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들은 '왜 운동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심각한 자성을 하게된다. 기실 그 당시까지의 집회는 한 사안에 그치는 '이슈 파이팅'의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력이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들은 그러한 고민을 하기 위해 지하에 사회과학 스터디 조직을 꾸리게 된다. 그 이후부터 학생운동 조직은 비밀지하조직처럼 세미나 그룹의 성격을 한동안 갖게된다.
물론 그 당시 학생회가 없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세미나에서 고민한 결과, 그러한 부조리가 일어나는 이유로서 사회 구조적 본원의 문제를 꼽고 정말 운동을 해야만 하겠다 라는 굳건한 신념을 갖게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까지도 중요시하게 여기는 '세계관의 극복'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은 생겨났으나, 또 하나의 문제점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그러한 세계관과 신념을 같이 공유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확보라는 것이었다. 그 문제 또한 고심한 결과, 운동권 사람들은 결국 인권의 자유가 보장되고, 공권력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그러면서도 사람이 많은 곳, 바로 '교회'와 '성당'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초기의 민중가요를 보면, 찬송가나 가스펠을 살짝 바꾼 형태가 많이 보이며, 가사에 '오 주여',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많이 보인다. 또한, 기독교, 천주교 쪽에서 실천신학, 민중신학, 해방신학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 태어나는 결과를 맺는다. 그래서 교회의 청년부, 학생부 등에는 운동권 세미나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나고, 그들은 그러한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되고 - 현재 운동권에게도 내려오는 하나의 수칙이다 - 거기에서 생겨난 노래양식이 민중가요이다. 당시, 민중가요는 현실은 암울해도 그것을 이기기 위해 밝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장조의 곡들이었다.
민중가요의 출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3. 80년대의 민중가요 - 80년 서울의 봄 ∼ 87년 6월 항쟁
(1) 광주 민주화 항쟁
'무엇이 두려우랴, 출정하여라. 영원한 민주화 행진을 위해...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
정세현, 「광주출정가」
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권총 피살사건은 80년 '서울의 봄'을 안겨다 주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며 들떠있었고, 김대중, 김영삼 등의 민주인사들도(물론 지금의 김 모씨의 아들, 모 영삼군은 옛날 같지 않다) 구속, 혹은 구금상태에서 풀려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민주인사들로 구성된 '국민 연합'은 신군부의 12. 12 쿠데타 이후 다가올 정세의 타개책 모색에 실패했으며, 상황에 매우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런 후 바로 신군부 세력에 의해 12. 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이듬해 5월까지 학생운동 지도부와 대립상태에 들어가지만, 당시 단계적 투쟁론(MC)을 옹호했던 서울의 학생지도부가 '서울역 회군'을 결정함으로 해서 힘의 일시적 공백상태가 조성되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군부는 5월 16일 비상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 선포하고 민주 재야 인사들을 모두 체포 구속하였다.
이에 맞서 5월 17일, 18일 광주의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거대한 저항이 '광주민주화 투쟁'의 시작이다. 하여간에 광주에 엄청난 수의 공수특전대를 파견하여 시민들을 학살, 진압한 신군부는 언론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등으로 해서, 모든 저항세력은 일단 억눌리게 되고 정국은 외면적으로 평온을 되찾는 것 같았다. 광주 항쟁 당시 불리웠던 노래들은 민중가요라고는 할 수 없는, 즉 정식으로 창작된 노래들이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일 많이 불리 워졌던 노래들은 「애국가」였고, 심지어 부를 노래가 없어 'YMCA'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하여간 그 당시 광주에 있었던 민주인사들은 광주 항쟁 진압이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함을 각성하였다. 광주항쟁 이후, 이 사건을 다룬 민중가요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기존의 초기 민중가요가 장조의 밝은 스타일인 것과 달리, 암울하고 비장한 느낌이 드는 단조의 행진곡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인데, 그것은 스튜디오도 아닌(당연하지만) 바로 당시 광주에 있었던 소설가 황석영씨의 2층 다락방에서 은밀하게 녹음된 - 녹취라고 해야 올바른 표현이겠다 - 것이었는데, 클래식 기타 한 대와 북 하나로 반주를 한 것이었다. 그 당시 노래를 부른 사람은 현재 MBC방송국의 모 아나운서라고 한다.
그리고, 또 나온 것이 '광주 출정가' 였다. 이 82년 당시, 또 하나의 특이점은 개인적인 의지를 담은 서정적인 단조가요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것으로는 `'타는 목마름으로', '의연한 산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이 있다.
83년 12월(가끔 84년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있다), 전두환 정권은 당시 너무나 억눌린시대 분위기를 풀어보자는 의미에서, 선심을 쓰듯이 '학원 자율화' 조치가 취해졌다. 그때부터 중, 고등학교에서는 교복 의무화가 없어졌고, 대학 안에서는 경찰이 교문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미 82년, 83년을 거치면서 나름대로 조금씩 복구되고 있던 학생 운동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한다. 당시, 야당의 세력도 84년에 들어 부상하고, 학생 운동 진영에서는 민족민주운동이 활발하게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84년에 와서 민중가요는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예로서, 「그날이 오면」,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있다. 이것은 비극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데,82년 당시의 그것에 비해 나아진 것은 운동의 대중적 정서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함께 부를 수 있고, 편안한 노래를 요구하는 시대 분위기에 편승하여 나온 곡들이다. 결국 이때에 와서는 은밀한 곳에서 고뇌하던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던 70년대에서 대중적이고, 비교적 조직적인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보하였다. 85년에는 이러한 정형을 깨버리는 엄청난 노래가 한 곡 노동자 진영에서 나오게 되는데, 그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민중가요에서는 파격적으로 보이는 '락(Rock)'을 도입한 것이었다. 그 곡의 제목은 바로 누구나 잘 아는 '불나비'라는 곡이었다.
(2) 87년, 6월 민주화 항쟁
점점 더 학생운동이 확산되고, 대중의 민주화의 열망이 상승하던 시점, 전두환 정권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다시 강경 일변도로 돌변하여 86년, 아시안게임 이후 재야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되고 민족민주세력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그리고 86년 초부터 '김근태 씨 고문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이 발생한다. 그러한 가운데 87년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발표는 야당과 재야세력의 민주화를 위한 개헌 노력을 무위로 돌렸으나 더불어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사게된다. 이러한 민중의 폭발의 도화선은 그 동안 은폐되고 왜곡되었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내막이 조작되었음을 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이 발표하고, 이어 재야와 통일 민주당이 연대하여 '호헌 반대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국민 운동 본부)'를 결성한 것이었고, 6월 10일 범국민대회를 국민 운동 본부가 개최하기로 결정하면서 6월 민주 대항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러한 투쟁의 기간동안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명이 거리로 나와 경찰 진압력의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이어 15일 명동성당 집회는 이러한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된다. 6월 항쟁의 초기,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숨지기도 하였으며, 6월 항쟁의 중반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부산에서만 3, 40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찰이 진압을 포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투쟁은 말기에 이르러 '넥타이 부대'를 출현하게끔 한다. 사무직 노동자들도 점심시간이나 외출을 나갔다가 같이 데모를 하고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등의 예전에는 없었던 모습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26일의 범대회는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하여 전국 38개 지역에서 140여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이로써 정권은 기만적인 '6.29 선언'으로써 일단 굴복하게 된다. 이것은 민중의 힘이 과연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민주화 역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동안의 민중가요는 원래의 도화선이 박종철 고문치사로 인한 '고문 추방'이 큰 테제였으며 투쟁 도중 열사가 았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추모적이며, 전투적이고 결의를 다지는 문예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 기간에 학생운동진영에서 나온 특별한 민중가요의 전형은 없으며 단지 투쟁가의 형태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3)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노동가요
원래 이 당시까지만 해도 민중가요라고는 식자 층의 노래들이 거의 다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서 6월 항쟁과 같이 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바로 87년 7,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다. 이 사건은 민중가요사에서도 큰 사건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는데, 그 이유는 이로 인해서 민중가요의 주류가 학생 운동 진영에서 노동자 진영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이제와서 볼 때, 현재 노동가요에 비하면 질은 학생 운동 가요는 질은 비슷해도 양은 그것을 절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당시 노동진영에서는 단조 행진곡과 흥겨운 뽕짝 풍의 노래와, 단조 행진곡의 정형을 보이면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곡으로 「진짜 노동자」, 「단결 투쟁가」,「동지여 내가 있다」 등등이 있다. 이 당시의 의의는 민중가요의 유통망을 학생에서 노동자에로 까지의 확장한 데에 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6공화국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다시 이야기를 조금 돌려보자면, 이 당시에 최초의 대중적 전문 노래패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앨범까지 내며 상당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이들은 대중적인 것을 감안해 1집에 있는 노래들은 자신들의 창작곡과 기존의 곡 을 실었는데, 기존의 민중가요 진영에서는 기본적인 정박을 일부러 지켜온데 비해서 노찾사는 대중성을 얻기 위해 디미니쉬 코드를 사용하거나, 싱커페이션 기법을 사용하여 약간은 대중가요 처럼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편곡, 가창하므로 해서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87년 10월에 처음 있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콘서트가 매회 1000석 완전 매진 기록을 세우며(통로까지 꽉 찼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대표 앨범인 2집을 70만장이나(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히트 앨범의 기준은 1만장 이상이다) 매상고를 올리리는 등, 민중가요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의의는 대중가요 유통망에 들어가서도 힘찬 노래운동을 펼쳐왔다는 점에 있다. 또한,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한 손쉬운 민중가요의 구입을 원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 91년에서부터 현재까지...
(꽃다지, 조국과 청춘에서부터 메이데이, 이스크라까지)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게 싸워왔잖아, 우리는 이렇게 당당하게 서있잖아...
인정할 순 없지. 쉽게 무너질 순 없어, 내가 있잖아... 내 오랜 동지...'
May-Day, 「同志에게」
(1) 민중가요의 전형에 문제점이 생기는 시기 (대중성의 상실기)
91년 이후, 민중가요의 양상은 91년 당시 강경대 열사의 열사정국과 더불어 투쟁가의 양식이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노래풍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92년에 들어서서 문민정부에 대한 막연한 희망은 당시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이라는 명백한 대치구조를 와해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사실, 당시 매년 불법으로 열리던 한총련 출범식을 당국은 쉽게 허가를 내주는 등, 강력한 투쟁 일변도로 달려왔던 민중가요의 진영을 굉장히 혼란스럽게 하는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안정된 정국에서 운동진영이 눈을 일단 돌릴 수 있는 곳은 학생운동 진영 중 민족주의 노선 진영은 '조국 연방제 통일'에, 좌파를 비롯한 노동자 진영은 노동자 끼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노래를 만드는 수밖에 없게 하였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정황속에서 새로운 민중가요의 전형이 탄생한다. 그것이 바로 흥겨운 '댄스' 음악이다. 예를 들기 전에 더 그 당시의 노래진영을 살펴보자. 92년에는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민중가요계를 이끌어 가는 두 전문 노래패를 탄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삶의 노래 예울림' 과 '노동자 노래단'이 병합되어 만들어진 이 시대 민중가요의 슈퍼스타, '꽃다지'와 현재 학생운동 진영에서 불리우는 모든 노래들을 창작, 보급하게된(물론 원칙적인 기조가 그것만은 아니다)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이다. 이 두 거목은 현재까지도 민중가요 진영에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여간 이 두 노래패가 생기면서 새로이 나타난 정형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댄스 음악을 선보이는데, 예를 들면 꽃다지는「바위처럼」, 조국과 청춘은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같은 경쾌한 댄스곡을 선보였다. 그 당시를 노래평론가인 이영미씨는 회고하기를 '너무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그들이 욕을 먹는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연예는 혁명의 적'이었으니, 최루탄 연기를 날려버린 그대 모습에 반해 버린 것이 불경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이 당시에는 자신의 신념을 서정적으로 더욱 굳건히 하려는 곡들이 매우 많이 쏟아져 나온다. 꽃다지의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창살 아래 사랑아」,「내일이 오면」, 「전화 카드 한 장」 등등이 있고, 조국과 청춘에서는 「사랑」, 「고목」,「약속」, 「빨치산의 밤」, 「벗에게」 등등이 상당수 나온다.
이러한 분위기는 95년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도중에 여러 노래패에서 공식음반도 나오고, 노동가요 합법음반도 민예총에서 출시되고는 했지만, 노래의 새로운 전형이 나타나질 않아 갈수록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려서 노래운동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는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 경쾌한 곡을 추구하되, 상업적인 댄스풍을 좇지 않으려 하다보니, 유아적인 노래까지 나오게 된다. 도중에 94년, 민중가요 최초의 락 그룹, '天地人'에 의해서 락 이라는 장르가 도입되지만 천지인의 락의 형식이 매우 어정쩡한 형태였고, 락 그룹이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 장르를 앨범에 싣는 등, 그다지 대단한 전문성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 민중가요가 해낸 큰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안치환을 비롯한 민중가요 진영의 가수들이 대거 대중가요 음반 시장에 뛰어들어 성공함으로 해서 대중가요의 심의 기준을 많이 낮추었다는 점, 그러한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대중의 진보적 인식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점, 이러한 대중 인식 수준 변화로 인해서 대중가요 진영에서도 수많은 진보적 가수들을 끌어내 왔다는 점이다(인기 듀엣 패닉이 한양대의 원봉을 뚫고 '양심수의 밤'에 참여하여 공연을 했다는 것은 다시 민중가요와 대중가요의 차이점을 모호하게 한다... 결국 이럴 경우에는 상업적인 면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가운데, 96년에는 민중가요진영에 엄청나게 큰 사건이 발생한다.
(2) 민중가요의 'Rock and Roll' 돌풍
96년 초, '조국과 청춘'의 5집 앨범이 출시되자 민중가요 진영의 사람들은 일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혹자는 민중가요 진영도 무너졌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걱정이었다. 조국과 청춘은 1집이후 4집까지 거의 비슷비슷하고 발전이 없는 노래의 전형에 대해 고민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민중가요의 실험적 장르로서 그 첫 번째로 선택된 것이 바로 저항성에 기반한 '락'이었다. 이들은 예전까지는 음악감독을 내부에서 해결했으나, 이번만은 민중가요 히트곡 제조기이며, 경험이 풍부한 꽃다지의 음악감독인 유인혁씨를 초대하여 앨범작업을 하였다. 그래서 앨범에 실린 11곡 가운데 락의 범주에 속하는 「장산곶매」등 6곡은 그 세부적인 장르도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새로운 풍의 발라드와 보사노바풍의 노래도 실려있는 등, 매우 새로운 형식을 안겨주었다. 이 앨범을 유인혁씨가 맡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꽃다지의 새 앨범도 락으로 많이 바뀌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역시 꽃다지도 락으로 많이 색을 바꾸어 나갔다. 콘서트 장에서 부른 신곡들 - 다음 앨범에 실릴 - 모두, 조국과 청춘과 같이 락과 발라드 등을 자신들의 색깔로서 전형화 한 것들이었다.
96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혁신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주 보는 노래책, '희망의 노래'를 만들어낸 민맥 출판사 사장인 원용호씨가 새로이 만든 민중가요 기획사(민중가요 그룹을 전문적으로 키워내는 국내 최초의 기획사이다), 'music center 21century'가 생겨났고, 그 안에서 예전 명칭이 '작은 하늘'인 'May-Day', 'Iskra'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전에도 있었던 락 그룹, '천지인'과 틀린 점은 천지인이 서정성이 농후한 락을 구사하는 데에 비해 이들은 정통적인 락을 구사하고 있고, '이스크라'의 경우는 흥미로운 것이 멤버들이 모두 투쟁경력이 없는, 즉 노래운동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메이-데이의 앨범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보컬의 창법이 '락'의 진수를 보여주는 훌륭한 것에다, 우리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든 매우 실력있고 안정된 밴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반주실력은 필자가 콘서트장에서 보고 반해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가사 또한 매우 '락' 답게 직설적이다. 보통의 민중가요 진영의 창작자들이 고정관념에 집착하여, 직접 내뱉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것에 반해 매우 '락' 답다.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에서는 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 현대 음반 주식회사라는 준 메이저급 대형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했다. 따라서, 같은 테잎이어도 녹음 수준이 거의 '넥스트'의 녹음수준에 육박한다.
하여간, 이 시대 95, 96, 97년에 들어서는 꾸준히 여러 가지 실험창작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민중가요의 새로운 전형은 곧 틀이 잡힐 것이다. 그 전형이 하나의 독자적인 틀을 이루고 계속 발전해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계속 합법음반이 나오는 추세를 따라 하나의 시장에 대중가요와 뭉뚱그려져 하나의 노래로서 발전해 나갈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