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전쟁과 21세기의 세계질서
진보평론 제1호
구춘권(서강대학교 강사/정치학)
* 필자는 코소보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마부르크에 유학중인 평화연구가 허광과 이메일을 통해 거의 매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좋은 정보와 예리한 분석을 전해준 허광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한다.
1. 서론
지난 6월 10일 76일에 걸친 나토(NATO)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이 멎었다. 나토의 폭격기들은 이 기간 동안 총 35,219번의 출격을 감행, 1만5천여톤의 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인구 일인당 1.5킬로그램의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폭격으로 인한 유고의 사망자는 서방측의 추정에 의하면 약 5000명, 그리고 유고정부의 발표에 따라도 462명의 군인, 114명의 경찰, 2000여명의 민간인들을 포함한다 (반면 나토측의 인명피해는 연습비행 중 사망한 미군조종사 두 명을 포함, 세 명에 불과하다). 또한 3월 24일의 공습시작 이래 코소보에서는 86만여명의 난민이 발생함으로써, 공습이 코소보의 상황을 완화하기는커녕 극도로 악화시켰음을 보여준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듯이, 나토의 폭격기들에 대응할 수 없었던 유고군대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과 축출로 답변했던 것이다. 공습에 의한 민간시설 및 사회하부구조의 파괴 역시 괄목할만한 것으로, 여기에는 폐허화된 34개의 교량, 11개의 철교, 주요 산업 및 정유시설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1)
나토의 유고공습은 생태계의 파괴라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판체보를 비롯한 유고슬라비아 주요 공업도시의 산업시설들에 대한 폭격은 대량의 독극물질의 유출로 이어졌다. 도나우강에는 파괴된 정유시설들로부터 흘러나온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기름띠가 떠다녔으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에서조차 유고의 화학공장들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고 있다. 폭격에 사용된 무기 역시 생태계에 위협적인 것으로―국제연합은 1975년 자연환경을 군사적 목적으로 파괴대상에 포함시키는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했었다―, 예를 들어 우라늄폭탄은 폭격주변지역의 수질과 토양을 오염시킴으로써 장기적인 폐해를 줄 것으로 예측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런 엄청난 재난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가? 6500만의 인명이 살해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금세기 말의 인류에게조차 전쟁은 여전히 "정치의 연속"인가? 그렇다면 "코소보전쟁"으로 불리는 이번 나토의 유고공습에는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가? 또한 냉전의 종식 이후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21세기의 세계질서와 코소보전쟁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글은 코소보전쟁의 원인들을 분석하면서, 이 전쟁을 통해 드러난 "현존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질서의 특징을 조망하려 한다. 우선 2장에서는 코소보전쟁의 원인을 유고슬라비아 분쟁의 구도라는 보다 장기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찾아볼 것이다. 3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코소보전쟁의 문을 열었던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유고정책의 변화를 추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코소보전쟁을 통해 가시화된 유럽에서 독일과 미국의 헤게모니경쟁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또한 미국과 나토의 새로운 전략이 어떻게 국제연합의 분쟁조정능력을 마비시키며 21세기 세계질서를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지에 대해 주목할 것이다.
2. 코소보사태와 유고슬라비아분쟁의 구도
평화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한가지 단순한,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전쟁을 준비하거나 수행하는 당사자들의 공식적 설명은 어떤 경우에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면 모든 전쟁에는 이를 합리화하는 정치적, 도덕적 선전이 동원되며, 실제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은 보도의 제한 및 금지를 통해 진실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코소보전쟁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토의 가맹국들이 모두 파시스트국가라는 밀로세비치의 선전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코소보전쟁이 "인종청소"에 대항한 "인권수호"를 위한 "인도주의적 전쟁"이었다는 나토의 주장 역시 큰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만약 정말로 인도주의가 문제되었다면, 서방측은 이미 수 년 전부터 잘 알려진 코소보지역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억압, 그리고 이 곳의 폭발적 상황에 대해 대응했어야 했다. 그러나 서방측은 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어떤 예방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보스니아내전의 비극을 경험한 뒤에조차 코소보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1995년 보스니아내전을 종식시킨 "데이튼협정"은 코소보분쟁에 대해 유고연방 내부의 주권문제라는 이유로 거론조차하지 않았다). 비폭력적인 정치적 타협노선을 추구한 코소보 알바니아인들(루고바와 그 지지자들)의 노력은 수 년 동안 서구로부터 하등의 지원을 받지 못함으로써, 코소보문제는 베오그라드의 일방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런데 미국과 나토는 왜 유고슬라비아라는 한 엄연한 주권국가를 초토화하면서까지 코소보사태에 개입했던가? 뒤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인종청소"라는 잔혹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라는 나토측의 주장은 일면적이다. 더욱이 이러한 잔혹행위가―보스니아내전이 보여주었듯이―한쪽 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공습의 도덕적 정당성은 더욱 약화된다. 유고군대와 경찰, 그리고 코소보해방군 중 누가 더 잔혹한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임은 물론이고, 또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다. 왜냐하면 독립적인 언론매체들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 이 지역에서 추방되었고, 매체들을 통해 유포되는 사진과 화면들은 대부분 전쟁당사자들을 통해 나누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코소보전쟁의 성격을 논의하기 앞서 우리는 코소보에서 전개된 종족갈등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갈등은 1989년 이후 가속화된 구 유고슬라비아의 분쟁 및 붕괴과정의 연속선상에 서 있으며, 이 분쟁의 구도를 이해하는 것은 코소보사태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 주목할 수 있다.
1. 잘 알려져 있듯이 구 유고슬라비아는 여섯 부류의 종족, 다섯 개의 공화국, 네 종류의 언어, 세 가지의 종교로 구성된 다종족, 다언어, 다종교의 국가이다. 문제는 이 다양성이 역사적으로 일정한 갈등과 반목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코소보는 1389년 오스만투르크의 북진을 저지하기 위해 세르비아인이 큰 희생을 치렀던 곳으로, 그리스정교의 수많은 교회와 유적들이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측면이 과장되어서는 안되는데, 왜냐면 우리는 보스니아지역에서 지난 500년 동안 카톨릭계, 유대계, 모슬렘계, 그리스정교계의 네 종족들이 큰 문제를 일으킴이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카라산은 이 지역의 이러한 공존적인 "문화모델"이 전쟁들을 통해 해체되었다고 지적한다. "1941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전쟁, 그리고 1991년에서 1995년의 전쟁을 통해 (공존이라는) 이 사회의 기본원칙은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파괴되었다. 귀속성의 다양한 형태들은 민족에의 귀속성이라는 유일한 형태에 의해 판단되었고, 개인적 정체성의 모든 차원과 요소들 역시 민족에의 소속이라는 유일한 요소로 환원되었던 것이다."2)
특히 2차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지역에 들어선 극우적 우스타샤(Ustascha) 정권의 유대인, 모슬렘, 그리고 세르비아인에 대한 혹독한 탄압은 종족반목에 깊은 골을 패이게 한 기록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현재의 갈등을 구성하는가? 과거의 역사는 분쟁의 한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점이 절대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발칸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는 실제 무수한 전쟁의 역사이며, 지속적인 평화가 가능했던 시기는 냉전구도 아래의 지난 반세기뿐이었다.3) 수백 년 동안 싸운 독일과 프랑스는 그 반목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유럽통합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지 않았던가? 또한 과거 티토 아래서의 유고슬라비아 역시 소위 "사회주의권의 스위스"로 불려졌던 잘 기능하는 다민족국가가 아니었던가?
2. 따라서 유고슬라비아를 내전으로 몰고 간 분리주의 혹은 퇴행적 민족주의의 등장은 1980년대 이후 유고식 "현존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보다 특수한 계기와 관련되어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유고는 과거 "현존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 자본주의권에 가장 포섭된 경제를 가졌고, 따라서 생산부문은 물론 특히 금융부문에 있어 세계시장의 직접적인 영향력에 노출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시장을 겨냥한 유고산 가전제품이 한국, 대만 등의 저가공세에 밀려 세계시장에서 점점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또한 유고는 서방의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1인당 외채의 규모는 1980년 이미 지불불능을 경험한 폴란드의 규모보다도 더 큰 것이었다 (1985년 인구 3900만의 폴란드의 외채가 300억불이었던 반면, 인구 2400만의 유고슬라비아의 외채는 210억불에 달하고 있다4). 80년대 초반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가 끌어올린 국제금융시장의 살인적인 고금리는 유고를 거의 파산의 상태로 내몰았으며, 이 나라는 그 이후 외국의 채권자들에 의해 강요된 "개혁"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 "개혁"이 산업기반의 붕괴, 실업률의 급격한 상승, 사회보장체계의 점차적 해체 등을 통해 경제의 심각한 폐허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외채의 차환(借換)에 있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내건 조건들은 각 공화국들로 하여금 외환수입의 대부분을 독자적으로 처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연방정부와 공화국들간의 긴장을 유발했음은 물론, 공화국들 사이의 기존의 경제적 격차를 더욱 벌여 놓았다. 1980년에서 1989년 사이 유고는 지속적인 경제위기를 경험하며―연평균 96.7%에 이르는 인플레이션, 실질임금의 급격한 하락, 외채이자지불의 부담 등등―,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불만은 급속도로 확산된다.
경제위기는 또한 자치, 집단소유, 비동맹, 독립, 그리고 자결로 표상되는 구 유고슬라비아의 이상을 허물어뜨렸으며, 그 무너진 자리는 점차 퇴행적 민족주의5)로 채워지고 있었다. 1980년 유고연방의 정치적 지주로 기능했던 티토(Tito)의 죽음 역시 이러한 과정을 가속화시켰음은 물론이다. 한때 티토의 충실한 수행자를 자임했던 수많은 당관료들은 외채위기와 페레스트로이카의 80년대를 거치면서 분리주의 및 퇴행적 민족주의의 신봉자로 변신한다. 이 과거의 기득권 세력은 대중의 경제위기 및 생활수준 하락에 대한 불만을―반동적, 퇴행적으로 정의된―"민족문제"로 돌리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 공고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밀로세비치는 세르비아민족주의를 강력히 선동하였으며, 자신의 집권을 위해 이를 도구화하였다. 슬로베니아의 쿠찬, 크로아티아의 투치만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권력에 올랐고, 코소보해방군(KLA) 역시 코소보민족주의를 대대적으로 부추기고 있었다. 쵸스도프스키는 1980년대 유고에서 분리주의의 발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종족적, 사회적 차별에 기초한 분리주의적 경향들은 바로 유고주민들이 급격히 빈곤화되던 시기에 힘을 얻었다. (...) 경제위기는 정치적 안정을 위협했으며, 암묵적인 종족적 긴장을 강화했다. 유고의 공적, 상업적 채권자들과의 차환계약을 동반한 (1980년의) 개혁은 유고슬라비아 연방국가를 약화시켰으며, 수도 베오그라드와 다른 공화국정부들, 그리고 자치주와의 긴장을 유발했다. (...) 1990년 초반에는 전체 산업노동자의 20%에 해당하는 50만의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못했다. (...) 실질임금은 끝없이 하락하고 있었으며, 사회프로그램들은 붕괴되었고, 산업계의 파산열풍은 광범위한 실업을 창출하였다. 이 모든 것은 주민들을 절망과 사회적 회의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 '민족적 혁신'을 꿈꾸던 공화국들의 지배자들은 전쟁과 초인플레이션을 동반할 공동의 유고슬라비아시장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이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전쟁은 경제적 파국의 진정한 원인들을 숨기게 될 것이었다."6)
3. 그러나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나라들로 쪼개지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합리적 대안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당시 서방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그렇지 않아도 당시 유고는 인구 2400만의 조그만 나라였는데, 이를 나누는 것은 국내시장을 분절하는 경제적 어리석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발칸에서 분리주의의 득세는 유사한 종족갈등을 갖는 터키, 그리스 등 주변지역 국가들에서 정치적 불안을 강화할 것이 충분히 예측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독일이었다. 독일은 통일과 함께 자신을 둘러싼 국제정치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이를 계기로―기존의 경제적 강국으로서 뿐만 아니라―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유럽의 헤게모니국가로의 복귀를 시도한다. 따라서 유고분쟁에의 개입은 통일 독일의 대외정치적 영향력의 첫 시험무대가 된 셈이다.7) 독일은 1991년 12월 미국은 물론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인정하며,8) 이는 유고분쟁의 구도를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독일의 결정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지역의 분리주의 세력에게도 마치 불에 끼얹은 기름과 같은 것이었으며, 이 지역의 갈등이 증폭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요약해보자. 구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는 1980년이래 경제위기의 심화, 그리고 이 상황 아래서 분리주의, 퇴행적 민족주의의 득세, 또한 대외정치적 영향력 확보의 입장에서 이 분리주의를 인정한 외세(특히 독일) 개입의 결과였다. 월러스틴 역시 유고연방의 분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민족적으로 얽히고 설킨 발칸지역에서 아마도 옛 유고연방은 내부의 평화뿐만 아니라 최대의 경제성장을 보장하는 최적의 구조였다. 그러나 옛 유고연방은 분열됐다. 이는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몇 차례의 중요한 고비들이 있었다. 하나의 전환점은 밀로세비치가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유고민족주의나 공산주의보다는 세르비아민족주의 위에 건설할 것을 결심하고 2년도 안돼 코소보의 자치권을 억압하는 길로 나갔던 87년이다. 이는 분리주의 흐름을 확산시키는 빌미가 됐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그 다음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뒤이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의 분리이탈 시도, 그리고 마침내는 코소보로 이어졌다. 물론 발칸 외부세력, 특히 크로아티아의 독립 구상을 지지한 독일이 일정한 구실을 담당했다9).
3. 전쟁으로의 길: 미국의 유고정책의 변화
그렇다면 코소보사태는 왜 전쟁으로 발전했던가? 보다 정확히 얘기해, 코소보해방군(KLA)10)을 중심으로 한 코소보의 분리주의운동과 이 운동에 대한 세르비아민족주의의 억압이―엄밀히 말해서 주권국가 유고 내부의 문제이다―무슨 이유로 미국과 유럽열강의 국제적인 무력행사를 가져왔던가? 지난 몇 년간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억압이 있었으며, 이는 대부분 유고의 군사력과 경찰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유감스럽게도 코소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며 동시대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11) 따라서 유독 코소보에서 "인권"과 "인도주의" 때문에 무력행사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이는 미국의 유고정책이 코소보의 실질적인 사태전개와 큰 관련 없이 급격히 변화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미국은 지난 해 10월 이전만 하더라도 코소보해방군을 "테러조직"의 범주에 넣고 있었고, 밀로세비치는 이를 코소보해방군을 제거해도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12) 따라서 밀로세비치는 한편으로 코소보해방군을 탄압하고, 그리고 코소보에 자치권의 재도입을 협상하기 위해 온건한 알바니아계 지도자인 루고바에 접근하는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정부 역시 이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음은 1998년 10월 미국의 유고특사 홀부르크와 밀로세비치 간의 협약이 성립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협약에서 유고는 코소보해방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아래 코소보에서 일부 병력의 철수를 약속했고,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평화감시단에게 정전상태의 감독을 위임하기로 합의했다.13)
그러나 같은 시기, 미국의 유고정책에 있어 변화의 조짐 역시 드러나고 있었다. 10월 8일 미 외무장관 올브라이트(Albright)는 런던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코소보의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1199호 결의14)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나토의 유고공습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시사했다. 이때부터 미국의 유고정책은 급격히 변화하는데, 당시 미국정부의 유고전문가 힐(Hill)이 작성한 코소보분쟁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문건은 이 변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15) 지금까지 미국의 유고정책이 코소보를 유고연방의 틀 내에서 유지한다는 원칙아래 기본적으로 밀로세비치의 노선(자치권 협상 + 코소보해방군 탄압)에 동조하는 것이었다면, 이 새로운 안에 나타난 미국의 전략은 코소보를 나토의 실질적인 보호령으로 유고로부터 떼어낼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은 밀로세비치는 물론 어떤 유고의 정치가라도 이와 같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계산한 듯 하다. 미국은 이후 두 번에 걸친 랑부예의 협상과정에서 점점 더 날카로운―협상이라기보다는 치밀하게 준비된 협박에 가까운―외교적 칼을 유고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유고 측이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공습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랑부예 평화조약" 7조의 부속조항 B는 다음과 같이 다국적 주둔군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 부속조항은 공습이 시작된 이후에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6항: a) 나토는 민사, 행정, 형사 등 모든 분야의 소송절차에서 치외법권을 누린다. b) 나토에 소속하는 요원들은 유고연방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사-, 행정-, 형사사건은 물론 그들의 모든 범죄행위에 대해서 언제 어떤 경우에도 분쟁당사자들의 재판권으로부터 면책특권을 보유한다. 분쟁당사자들은 나토의 작전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자국의 요원에 행사하는 재판권에 협조해야 한다. (...)
7항: 나토요원은 유고연방당국에 의한 어떤 형태의 체포, 수사, 감금에 대해서도 면책특권을 갖는다. 과실에 의해 체포, 감금된 나토요원은 즉시 나토당국에 인도되어야 한다.
8항: 나토요원은 유고연방의 영공과 영해를 포함하는 전지역 내에서 차량, 선박, 항공기와 군장비를 무료로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며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있다. (...)
10항: 유고연방정부는 영공, 항만, 도로 또는 공항을 통과하는 나토의 인원, 차량, 선박, 항공기, 군장비, 또는 보급물자의 수송을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나토항공기의 이착륙 또는 영공항해에 대해서는 어떤 지불도 요구할 수 없다. 나토선박의 항만사용에 대해서도 관세, 사용료 또는 어떤 비용도 부과할 수 없다. 나토작전에 사용되는 차량, 선박 또는 항공기는 허가, 등록 또는 사적인 보험의 의무가 없다."16)
위의 부속조항은 나토군이 코소보의 평화를 감시하기 위해 유고연방 전지역에 주둔할 수 있는 권리는 물론, 유고의 법률에 전혀 구속받지 않고 군사적 활동권을 갖는 일종의 점령군의 지위를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요구에 "초등학교를 마친 세르비아인이라면 누구라도 서명하지 않을 것"17)임은 자명하다. 왜냐하면 미국이 요구한 지위란 패전국의 항복문서에 쓰여질 수는 있어도, 평화협상의 내용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랑부예조약은 조약체결 3년 후 국제회의를 소집해 "코소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확정"하며, 이때 "전체 주민의 뜻에 기초해야 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선거의 결과에 따라 코소보가 유고로부터 분리, 독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항 역시―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가 다수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유고 측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미국은 유고정부가 랑부예조약의 서명을 거부할 경우 공습을 하겠다는 위협을 되풀이했다. 유고는 협상에의 참여를 거부했고, 미국과 나토는 3월 24일 폭격을 개시함으로써 코소보전쟁의 문을 열었다. 나토의 폭탄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 세르비아 측의 새로운 잔혹행위들, 이제는 민간시설까지 겨냥한 나토의 더 많은 폭탄들, 세르비아 측의 더 깊은 증오와 탄압으로 이어지는 추악한 폭력의 나선운동이 공습시작 이후 코소보에서 86만명의 난민을 새로 발생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4. 코소보전쟁의 성격과 21세기의 세계질서
다시 강조하지만 미국과 나토의 전쟁 개시는 "종족청소"에 대항한 "인권수호"의 차원으로서는 설명될 수 없다. 물론 공습 이전에 코소보에서는 유고군경과 코소보해방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나토의 유고에 대한 일방적 폭격의 이유로 정당화되는 세르비아계 무장력에 의한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체계적인 종족청소"가 자행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미미한 것이다.18) 오히려 공습이 종족청소 및 다른 잔학행위들을 첨예하게 확산19)하였다는 사실은 코소보로부터의 대규모 난민행렬이 3월 24일 이후에 시작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20)
설령 코소보에 "종족청소"와 유사한 억압이 있었다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하는 공습으로 답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다. 한 인간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다른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전근대적, 반문명적 발상이 아닌가? 더욱이 전쟁은 생존권과 주거권을 파괴하며 가장 첨예하게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알트파터는 유고공습의 반(反)인권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민간하부구조, 방송언론매체들, 수도 및 전기공급시설들, 교통연결시설들에 대한 폭격이 주민들보다는 정부에 타격을 줄 것이라는 나토의 확신은 사람을 조롱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도 공갈협박적인 대규모의 인질극이다. 첫째, (폭격을 통해) 한 인간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물질적 전제들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수적인 피해'는 측정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산될 수도 없다. 둘째, 결핍과 빈곤의 사회에서 시민사회적 단초들은 발전할 수 없는데, 바로 이것들이 파괴되었다. 도시들이 파괴된다면, 활력 있는 시민사회가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토론장인 공공성 역시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폭탄들은 정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반대세력에게 타격을 주었다. 서구의 폭격기들이 도시와 농촌을 황폐화하고, 생산기지들을 폐허화하며, 아마도 전체지역이 거주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파괴를 야기한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서구적 가치공동체'의 편에 설 것인가? 이는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코소보 전지역에 지뢰를 놓는 것보다 결코 우월한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세련되고, 5000미터 이상의 상공에서 피를 볼 필요도, 고통의 신음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었지만, 전쟁의 야만화는 나토 측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21)
코소보전쟁은 "인권수호전쟁"이 아니며, 또한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침략전쟁이란 있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코소보의 실제적인 상황전개와는 큰 관련 없이―자신의 유고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는가? 구체적으로 미국은 왜 코소보해방군을 무장해제한다는 1998년 10월 홀부르크와 밀로세비치 간의 협약을 깨고 유고를 점령하는 방안으로 돌아섰는가? 흥미롭게도 3월 23일 미대통령 클린턴의 개전 연설은 이 전쟁에서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의 동맹관계가 문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22) 곧, 미국의 코소보 개입은 유고나 발칸이라는 지역적인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관계라는 보다 중대한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나토의 유고에 대한 군사적 침략은 전유럽적 차원에서 중대한 정치적 결과들을 가져올 것이며, 바로 이것이 미국에게는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운명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전략적 이해를 배경으로 코소보전쟁을 시작했는가? 미국이 코소보개입에 성공한다면, 이는 발칸에서 독일의 헤게모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게 할 뿐 아니라,23) 유럽에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결정적으로 강화할 것이다. 더욱이 세계화폐 달러에 대항하는 단일화폐 유로(Euro)의 출범, 그리고 미국과 유럽간의 점증하는 무역갈등을 고려할 때, 미국의 지휘아래 수행되는 전쟁은 유럽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고, 나토동맹의 일체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나토의 성공적인 전쟁수행은 냉전의 종식 이후 그 존재의미를 잃었던 나토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질서의 중심 축으로 재건하는데 기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21세기 세계질서에 있어 미국의 지배적 지위를 공고화할 것이다. 이상의 측면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4-1. 유럽에서 독일과 미국의 헤게모니경쟁
코소보전쟁은 냉전의 종식, 동구권 "현존사회주의"의 붕괴, 독일통일, 유럽통합의 진전으로 인해 급격히 변화된 유럽의 세력관계에 대한 미국의 공세적 대응으로 파악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유럽 최대의 경제강국 독일은 미소 양극체제의 붕괴 및 통일과 더불어 다극적 세계질서의 한 축이 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독일의 노력은 유럽에서 자신의 경제적 우월성을 정치군사적 헤게모니로 확대하는 시도로 표현되며, 이는 이미 1990년대 초반이래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나토와 서유럽동맹(WEU) 사이의 일정한 긴장·경쟁관계를 통해 표현되어 왔다.24)
구체적으로 나토는 1991년 11월 로마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동맹의 새로운 전략구상"에 합의했다.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붕괴로 존재이유를 상실한 나토는 자신의 과제를 공격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존속의 새로운 근거를 찾으려 시도했던 것이다. 나토의 신구상은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모든 방향들로부터 오는"―도발들과 위험들을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중요한 자원들의 공급중단", "테러 및 사보타지행위들", 그리고 "종족적 갈등과 국경분쟁들"이 포괄되고 있다.25) 한때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막"으로서만 존재했던 나토는 이제 이론적으로 지구의 모든 위험에 간여할 수 있는 군사기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독일 역시 나토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나토로부터 독자적인, 자신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군사조직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의 대외정치전략은 1991년 12월 마스트리히트조약의 체결과 함께 서유럽동맹(WEU)이 유럽연합(EU)의 정치군사기구로 격상됨으로써 보다 급속히 틀을 갖추게 된다. 서유럽동맹은 1992년 6월 "페터스베르크선언"26)을 통해 자신의 전략적 구상을 드러낸다. 독일의 지대한 영향력 아래 작성된 이 선언은 서유럽동맹의 위상을 강화하고, 나아가 이 동맹의 활동반경을 "역외(out of area)"로 확장할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선언은 또한 서유럽동맹의 새로운 과제를 "인도주의적 임무 및 구호목적의 출동, 평화유지적 과제, 평화를 유도하는 조치들을 포함한 위기관리를 위한 전투들"로 정의함으로써, 나토의 신전략에 버금가는 광범위한 개입을 지향함은 물론, 서유럽동맹이 나토로부터 독립적인 군사적 조직으로서 존립할 것임을 표명했다.27)
1990년대 유럽의 정치군사적 구도는 미국(나토)의 기존의 주도적 위치에 독일(서유럽동맹)의 암묵적인 도전으로 특징지어진다. 독일은 서유럽동맹의 활성화를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대외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나토의 동구로의 "선택적" 확장이라는 구상을 관철시킴으로써 나토 내부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28) 냉전시대 나토를 통해 유럽에서 확고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이러한 변화가 불안한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미국은 독일과 서유럽동맹을 견제하는 보다 적극적인 대유럽전략을 수립하며, 이는 특히 보스니아내전 단계부터 미국 역시 적극적으로 유고분쟁에 개입하는 사실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곧, 미국으로서는 독일의 독주를 방관할 때, 유고가 서유럽동맹의 틀을 내세운 독일의 헤게모니 지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국의 유고분쟁에 대한 개입은 일단 성공적이었는데, 그 결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데이튼협정"에서 유럽연합 또는 서유럽동맹이 아닌 나토의 보호령으로 확정된다.
우리가 코소보전쟁에서 주목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바로 이 전쟁의 배후에서 일어나는 미국과 독일의 유럽에서 헤게모니경쟁이다. 코소보전쟁이 소위 "도발"과 "위험"에 대비해 "역외 개입"을 정당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독일은 같은 입장일지라도, 그러나 이 뒤에 숨어있는 이해관계는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한 중요한 이유가 독일과 서유럽동맹을 견제하며,29) 나토를 통해 유럽에서의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유지하는데 있었던 반면,30) 독일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코소보전쟁의 해결에 가능하면 러시아를 끌어들여 유럽에서 미국의 주도권을 약화하고, 궁극적으로 서유럽동맹을 강화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1)
4-2. 나토의 신전략과 국제연합의 무력화
코소보전쟁은 그러나 유럽적 차원의 전쟁 이상의 것이었다. 이 전쟁은 동시에 미국의 전지구적 전략의 시험대였는데, 여기에서도 역시 나토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토가 1991년 로마회담의 새로운 전략구상을 통해 방어적 집단안전보장체제에서 공격적 위기관리기구로 변신하려 함은 이미 지적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토의 전략이 바르샤바기구의 재래식 전력의 우월을 가정한 채, 중거리핵에서 이 열세를 보완하는 핵을 통한 균형을 추구했다면, 신전략은 재래식 전력에서 도저히 비교되지 않고, 핵무기 역시 소유하지 않은 나라들이 대부분인 "남으로부터의 위험"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구상되어온 이러한 나토의 신전략이 현실에서 검증되는 것은 미국이 유고슬라비아분쟁에 개입하면서부터이다. 주지하듯이 유고의 "종족갈등"과 "국경분쟁"은 나토의 공격적인 군사적 개입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고 있다. 더욱이 유고슬라비아는 지정학적으로도 나토동맹국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왜냐하면 바로 유고에 의해 서쪽의 대서양에서 동쪽의 터키에 이르는 나토의 가맹국들 및 "친선국들"의 지리전략적인 연결고리가 끊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토는 자신에 친화적인 정권이 유고에 들어서는 것에 대해 큰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미국은 무력과 음모를 통해서라도 이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유고공습을 통해 보여주었다.32)
그렇다면 코소보전쟁은 "현존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새롭게 형성되는 세계질서의 어떤 측면을 드러냈는가?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이 나토를 국제연합을 포함한 어떠한 국제기구에도 구속되지 않는 전지구적이고 보편적인 위기관리기구, 즉 새로운 세계질서의 중심축으로 격상시키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토에 속한 19개의 국가들은―전세계 군사지출의 절반, 무기수출의 80%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겨우 1/10에 불과하다. 더욱이 2차대전 이후 세계가 경험했던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평화는 나토때문이 아니라, 바로 국제연합(UN)의 존재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평화는 국제연합의 창립이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고, 만약 국제연합이 없었더라면 지구는 이미 "핵의 겨울"을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파국을 두 번이나 경험한 금세기의 인류가 국제연합을 통해 침략전쟁의 금지에 합의한 것은 정치적이나 도덕적으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국제연합은 전쟁을 대단히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국제연합헌장에 의하면 "정당한" 전쟁이란 방어전쟁의 경우이거나, 국제연합의 기구―무엇보다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평화의 강제 혹은 보장을 위해 결의되었을 때뿐이다. 국제연합이 "정당한" 전쟁을 이렇게 협소하게 정의한 것은 전쟁수행의 권리가 한 국가 혹은 몇몇 국가들의 동맹체에 의해 침탈되는 것을 방지하고,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원국들 혹은 총회를 통한 이해조정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랑부예협상의 실패 이후 국제연합헌장 7조가 명시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없이도 유고에 무력제재를 가하겠다는 위협을 되풀이함으로써, 코소보문제 해결에서 국제연합을 배제하기 시작했다.33) 뒤이은 나토의 유고공습은 국제연합과 여러 국가들의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침략전쟁으로, 전후의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국제법적 합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은 물론이다. 유고는 나토국가에 대해 하등의 공격을 하지 않았으므로, 나토의 공습이 어떤 경우에도 방어전쟁으로 합리화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나토는 코소보의 "인권보호"라는 명분으로 유고공습을 시작했지만, 코소보는 유고연방의 일원이지 국제연합에 속하는 주권국가가 아니며, 따라서 코소보를 지원하기 위해 유고를 공격할 수 있는 국제법적인 근거가 없다. 물론 국제연합헌장은 주권국가 내부의 문제가 국제안보에 위협이 될 때 무력개입을 허용하는 예외조항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경우 안전보장이사회의 위임권에 의해서만 정당화된다. 그런데 유고공습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침략전쟁이다.34)
코소보전쟁에서 미국은 나토의 신전략의 관철을 위해 유고의 주권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연합 및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같은 국제기구의 분쟁조정능력을 무력화하려 시도했다.35) 특히 국제연합을 분쟁해결에서 배제하는 것은―이는 향후 지구적 갈등의 조정에 있어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의 역할을 주변화하겠다는 의도임은 물론이다36)―21세기 세계질서를 불안정성 속으로 이동시키는 중대한 정치적 오류이다. 한 국가 혹은 몇몇 국가들의 동맹체에게 자의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도대체 앞으로 누가 "정당한" 전쟁을 결정할 것인가?37) 21세기의 세계질서는 다시 야만적인 "힘의 논리" 속으로 복귀하는 것인가?
5. 결론
유고공습이 한참 진행되던 지난 4월 24일 워싱턴에서는 나토설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19개의 나토가맹국들은 물론, 나토와의 "친선국들"이라고 불리는―발틱 3국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타치키스탄에 이르는―구 소련에 속했던 국가들 역시 참가하였다. 앞으로 나토에 가입하게 될 이 예비후보국들에는 러시아, 중국,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거의 모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다.38) 이는 확실히 나토가 대서양과 유럽을 넘어선 전지구적인 전략구상을 가지고 있으며, 21세기 세계질서의 중심 축으로 변신하려 함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코소보전쟁은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팽창이 여러 불안정 요인들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약소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강대국의 패권주의적 "힘의 논리"는 21세기 세계질서에서 수많은 갈등을 준비할 것이다. 또한 평화에 대한 전후 세계적 합의의 상징인 국제연합의 분쟁조정능력을 차단하는 것은 보다 많은 전쟁과 무력충돌이 21세기 세계질서를 동반할 것이라는 불안한 조짐으로만 보인다. 특히 나토를 통한 미국의 패권주의가 러시아, 중국, 인도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나갈 경우, 이 국가들 사이의 2각 혹은 3각 동맹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39) 이 경우 지난 시기의 냉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새로운 냉전과 군비경쟁이 등장할 것이다.40)
위와 같은 상황에서 독일과 유럽연합의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미국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나토라는 틀 안에서 전략적인 협조관계를 유지하며 미국 중심의 단극적 세계질서의 틀에 안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대안으로서 독일(유럽연합)은 유럽통합을 확대해 러시아와 동구권을 포괄하며 다극적 세계질서의 한 축으로 나설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안의 실현은 나토의 확대라는 미국의 전략과는 일정한 갈등을 내포하고 있지만, 좀 더 평화로운 21세기의 세계질서를 위한 현실주의적 희망이기도 하다.
코소보전쟁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코소보전쟁과 함께 한반도의 주변상황 역시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은 일본에서 수년간 논쟁되어 온 "미일안보 가이드라인"이―유고공습이 시작된 지 채 한 달이 안 돼―중의원을 통과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해교전"의 경험, 그리고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미국과 일본에 의해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으로 이해되는 현실은 한국의 사회운동과 평화운동에게 중대한 과제를 부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각주
1) {{위에서 제시된 숫자들은 독일의 저명한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 1999년 6월 12일자 보도에 따른 것이다.}}
2) {{Dzevad Karahasan, "Das Ende eines Kulturmodells," Frankfurter Rundschau, Dokumentation, 1999년 3월 27일. 위의 인용문은 물론 앞으로의 인용문들에서 괄호 안에 든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삽입한 것이다.}}
3) {{"냉전은 국제상황을 얼어붙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임시적인 사태인 것을 안정시켰다. (...) 싸움들은 그것이 초강대국간의 전쟁―즉 핵전쟁―을 촉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의해서 통제되거나 억제되었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 (까치, 1997),353쪽.}}
4) {{IMSF & ASK (ed.), Die Dritte Welt in der Schuldenkrise - Rolle der Bundesrepublik - Diskussion um Alternativen (Frankfurt: IMSF, 1986), p.260.}}
5)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원래 한 사회가 더 이상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으로만 규정되지 않기 시작했을 때 등장했다. 유럽에서 민족이란 개념의 일반화는―상품생산과 상품교환을 통해 자본주의적으로 변화해 가는 경제를 배경으로―한 지역에서 공동의 '정치적' 조직이 문제될 때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에서 민족이란 개념은 명백히 정치적 공통성과 관련되어 사용된 것이다. 민족주의가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을 강조하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구별하는 퇴행적 이데올로기로 변질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의 기원과 민족주의의 역사적 변질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einhard Kühnl, Nation, Nationalismus, Nationale Frage (Köln: Pahl-Rugenstein, 1986), pp.69~90.}}
6) {{Michel Chossudovsky, "Die Zerschlagung des ehemaligen Jugoslawien und die Rekolonialisierung Bosniens. Eine Ökonomische Analyse," Marxistische Blätter Special (NATO-Krieg und Kosovo-Konflikt. Hintergründe-Zusammenhänge-
Perspektiven) 1999, pp.19~26.}}
7) {{Bruno Schoch, "Anerkennen als Ersatzhandlung. Ein kritischer Rückblick auf die Bonner Jugoslawienpolitik," Peter Schlotter(ed.), Der Krieg in Bosnien und das hilflose Europa. Plädoyer für eine militärische UN-Intervention, HSFK-Report 5-6, (Frankfurt am Main, 1993), pp.37~53.}}
8) {{Thomas Paulsen, Die Jugoslawienpolitik der USA 1989-1994: Begrenztes Engagement und Konfliktdynamik (Baden-Baden: Nomos, 1995), p.58.}}
9) {{이매뉴얼 월러스틴, <유고공습의 '진짜' 이유>, <한겨레신문>, 1999년 4월 12일.}}
10) {{지하무장조직인 코소보해방군은 1994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조직이 결정적으로 세력을 확대한 것은 1997년 3월 알바니아 주민 대부분이 복권사기사건에 휘말리면서부터이다.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전국적인 봉기는 부패한 베리샤(Berisha) 정권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75만 정의 소련제 소총 칼라시니코프를 민간에 유통시켰다. 코소보해방군은 이와 같이 알바니아 군대에서 흘러나온 무기와 장교들을 흡수해 무장활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알바니아 북부에 근거지를 둔 코소보해방군은 1998년부터 세르비아계 경찰력을 배후에서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벌여 40%에 이르는 코소보지역을 장악하는 기세를 올린다. 이때부터 세르비아계 무장병력과 코소보해방군은 일종의 내전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11) {{나토동맹국인 터키의 예를 들어보자. "극히 보수적인 추산에 따르더라도, 90년대 터키의 쿠르드족 탄압은 코소보의 범주에 들어간다. 터키의 탄압은 90년대 초반 정점에 달했다. 이를 입증하는 하나의 지표는 90년에서 94년 사이 터키군대가 농촌지역을 초토화하면서 백만명의 쿠르드인이 농촌으로부터 쿠르드의 비공식적 수도인 디야르바키르로 이주한 사실이다. 94년은 두 가지 기록을 남겼다. 94년은 조나단 랜달(Jonathan Randal)이 현장에서 보도했듯이 '쿠르드 지방에서 최악의 탄압이 자행된 해'였고, 터키가 '미국 군사물품의 단일 최대 수입국가이자 결국 세계 최대의 무기구입국'이 된 해이다. 터키가 촌락을 폭격하면서 미국 제트기를 사용했다고 인권조직들이 폭로했을 때, 클린턴 행정부는―인도네시아나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무기인도를 보류할 것을 요구하는 법률을 피해가는 길을 찾았다." Noam Chomsky, "The Current Bombings: Behind the Rhetoric," Z., April 1999 (http://www.zmag.org/chomsky에서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쿠르드인의 학살에 동원된 탱크의 상당 부분은 통일 독일이 터키에 헐값에 팔아 넘긴 구 동독 인민군의 탱크들이었다.}}
12)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유고특사(Robert Gelbard)는 1998년 3월 베오그라드를 방문했을 때 코소보해방군을 "테러조직"으로 지칭하였다. 미국의 유고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고완의 연구가 잘 추적하고 있다. Peter Gowan, "Die NATO-Mächte und die Balkan-Tragödie," Z.(Zeitschrift Marxistische Erneuerung), Nr.38, Juni 1999, pp.53~87.}}
13) {{이 평화감시단은 원래 6000여명의 요원들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한 가지 비극적인 사실은 나중에 유고의 공습과 파괴, 그리고 재건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지출할 용의가 있는 국가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평화감시단의 할당량을 채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14) {{이 결의는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휴전, 밀로세비치와 거명되지 않은 알바니아계 지도자들과의 평화회담, 민간인들에 대한 무장력 투입의 종식, 그리고 알바니아계 지도부가 모든 형태의 테러행위를 비난하며,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오로지 평화적인 수단만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15) {{Gowan, 앞의 글.}}
16) {{랑부예조약의 전문은 여러 웹사이트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영어로 된 전문은 http://www.auswaertiges-amt.de 혹은 http://www.zmag.org 등에서 찾을 수 있으며, 독일어로는 http://www.blaetter.de 등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또한 Die Blätter für deutsche und internationale Politik 5월호, Frankfurter Rundschau 4월 16일자 Dokumentation은 이 조약의 주요부분을 싣고 있다.}}
17) {{Der Spiegel, 1999년 5월 3일.}}
18) {{코소보사태에 대한 나토 개입의 중요한 계기로 1999년 1월 15일 코소보 라차크에서 일어난 세르비아군의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학살사건이 지적된다. 코소보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럽안보협력기구 요원들은 1월 16일 라차크 마을에서―여자가 셋, 아이도 하나 포함된―40여구가 넘는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독일 녹색당 출신의 외무장관 피셔(Fischer) 역시 라차크 사건이 자신의 결정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Die Zeit, 1999년 5월 12일.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셰프란은 이 학살사건을 둘러싼 의혹을 자세히 추적하고 있다. Jürgen Scheffran, "Zweierlei Massaker? Wie ein US-Diplomat im Kosovo-Dorf Racak den Dritten Weltkrieg auslöste," Wissenschaft und Frieden, 2/1999, 17. Jg., pp.20~23.}}
19) {{Noam Chomsky, "Kosovo Peace Accord," Z, July 1999 (http://www.zmag.org/chomsky에서도 읽을 수 있다).}}
20) {{"코소보로부터의 대량축출과 대규모의 난민행렬은 3월 24일 (공습시작) 이후에서야 시작되었다. 나토의 전략가들이 유고군대의 반응 및 유사군대 집단들의 소란을 그들의 각본에 고려하지 못했을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이를 감수했던 것이다." Elmar Altvater, "Menschenrechte und Bomben," Frankfurter Rundschau, Dokumentation, 1999년 7월 8일}}
21) {{Altvater, 위의 글.}}
22) {{Gowan, 앞의 글.}}
23) {{발칸반도에서 독일의 경제적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는 물론 보스니아-헤르쩨고비나에서도 독일마르크는 기본통화처럼 통용되고 있다.}}
24) {{Werner Ruf, "Aussichten auf die neue Welt-Un-Ordnung," W. Ruf (ed.), Vom kalten Krieg zur heissen Ordnung. Der Golfkrieg - Hintergründe und Perspektiven (Münster: Lit Verlag, 1991), pp.83~96.}}
25) {{Hermann Scheer, "Vom unaufhaltsamen Aufstieg der NATO," Frankfurter Rundschau, Dokumentation, 1999년 4월 21일.}}
26) {{"Petersberg-Erklärung der Außen- und Verteidigungsminister der WEU-Mitgliedstaaten vom 19. Juni 1992 in Königswinter," Text, Auswärtiges Amt (ed.), Außenpolitik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Dokumente von 1949 bis 1994 (Köln: Verl. Wiss. und Politik von Nottbeck, 1995), pp.862~867.}}
27) {{물론 이는 서유럽동맹이 단기간에 나토를 대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서유럽동맹은 나토와의 협력아래서 압도적으로 우월한 나토의 군사적 자원을 활용하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28) {{1990년대 나토와 서유럽동맹의 협력·경쟁관계는 여기서 서술하기에는 대단히 복잡한 것이다. 나토의 동구로의 확장문제와 관련해서도, 미국은 원래 기존 동맹의 틀을 유지하려고 했던 반면, 독일은 나토의 동구로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이 확장은 동유럽 국가들이 서유럽동맹에 가입하는 것과 연계되어 진행되었고, 이는 기본적으로 독일의 구상이 관철된 것이다. 1990년대 독일 대외정책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Kwang Huh, Die militärischen Dimensionen der deutschen Außenpolitik nach der Wiedervereinigung, unveröffentlichte Magisterarbeit beim Fach Politikwissenschaft an der Philipps-Universität Marburg, September 1998.}}
29) {{이는 곧 서유럽동맹이 유럽연합의 군사기구로 정비되어 유럽에서 나토의 존재이유가 사라지기 전에 나토(미국)의 주도권을 먼저 확보하고 유럽연합의 군사적 확대를 저지한다는 의미이다. 월러스틴 역시 특히 이 측면에 주목한다. "(코소보전쟁을 시작한) 클린턴의 진짜 목적은 유럽을 갱신된 나토조직에 묶어두는 것이며, 나토 이외의 단일한 유럽군 출현을 막아보자는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코소보사태 손익계산서>, <한겨레신문>, 1999년 7월 19일. 그런데 이점과 관련해 미국은 코소보전쟁에서 결코 이긴 것이 아니다. 6월 4일 종전협상을 위해 쾰른에서 열린 유럽연합의 정상회담과 관련해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다음해 말까지 위기들을 예방하고 처리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사적 수단을 강구하려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지금까지 덜 주목되었던 전후동맹인 서유럽동맹(WEU)을 유럽연합의 구조들 안으로 편입하기로 목요일 쾰른에서 열리는 이틀간의 정상회담에 참여하기 위해 온 15명의 국가-, 정부수반들이 합의하였다." (필자에 의한 강조) Frankfurter Rundschau, 1999년 6월 4일.}}
30) {{"유고에 대한 공습을 통해 지난 수 년 동안의 추상적 논쟁에서 해명되지 않았던 문제가 결국 밝혀질 것이다. 냉전의 종식이후 유럽에서 나토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바로 그 문제이다." New York Times, 1999년 3월 29일.}}
31) {{따라서 서방측의 평화안이 독일 외무장관 피셔에 의해 처음으로 제출되고, 독일이 "G8 합의"를 주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평화안을 두고 일어난 독일과 미국의 갈등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허광, <유고 전쟁의 향방, 8개국 협상에 달렸다>, <시사저널>, 1999년 5월 27일.}}
32) {{이미 여러 신문들은 클린턴이 유고공습 중에 미 중앙정보부(CIA)의 밀로세비치 제거작전을 승인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난 7월 12일자 타임(Time)지는 공습이 끝난 이후 미국이 진행하고 있는 공작을 "더러운 속임수(dirty tricks)"라고 표현하며, 이 공작에 밀로세비치의 해외재산의 추적 및 압류, 반정부세력에 대한 자금지원, 유고정부 내 요인의 포섭, 국경주변의 방송시설을 통한 심리전 등이 포함되고 있음을 밝혔다.}}
33) {{미국지도부의 국제연합에 대한 도구적 관계는 이미 골프전쟁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물질적 혹은 정당성의 이득이 기대될 때, 국제연합에서 자신의 정치에 대한 지원을 찾았지만, 반면 국제연합이 미국의 정치를 지원할 의도가 없을 경우, 국제법적인 규정들 혹은 법적 절차들을 주저하지 않고 무시했다. 즉, "미국은 국제연합의 규정들은 수용하지 않은 채, 단지 국제연합이 부여하는 정당성만을 원했던 것이다." Norman Paech, "Die Vereinten Nationen und ihr Krieg," W. Ruf (ed.), ibid, p. 66.}}
34) {{핵무기 및 생화학무기를 반대하는 변호사 및 법률학자들의 국제적 모임인 IALANA는 유고공습이 어떻게 여러 나라의 국내법 및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는지 상세히 분석한 글을 제출한 바 있다. IALANA, "Eine Botschaft, die von oben und unten kommen muß," Frankfurter Rundschau, Dokumentation, 1999년 3월 31일. 이 모임의 독일 대표 베커(P. Becker)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다음에서 읽을 수 있다. 페터 베커, <유고가 인종 청소한 증거 없다>, <시사저널>, 1999년 6월 10일.}}
35) {{독일의 입장은 물론 다른 것이었다. 알트파터는 코소보전쟁에서 독일 외교정책의 한 긍정적 측면이 협상과정에서 러시아를 배제하지 않았고, 국제연합의 해당기구, 특히 안전보장이사회를 갈등해결에 포함시키려 했던 점이라고 지적한다. Altvater, 앞의 글.}}
36) {{무엇보다 미국 그리고 영국은 코소보전쟁 중에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였다. 반면 독일을 비롯한 유럽대륙의 국가들은 반드시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베오그라드의 중국대사관이 폭격당하면서 미국(영국)과 유럽사이에는 발칸전략을 둘러싸고 긴장조차 감돌았다. 음모론적인 해석에 동의하지 않지만, 독일이 주도했던 "G8 합의"가 발표된 지 하루만에, 또 독일정부가 유럽연합을 대표해서 "G8 합의"를 중국 측에 알리는 일정을 바로 앞에 두고 중국대사관이 나토의 폭격을 받았다는 것은 아무튼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 폭격으로 독일의 슈뢰더 총리는 3박4일로 예정된 중국방문 일정을 하루로 줄여야만 했다.}}
37) {{Henning Voscherau, "Wer entscheidet künftig über den 'gerechten' Krieg?," Frankfurter Rundschau, Dokumentation, 1999년 5월 14일.}}
38) {{나토를 중앙아시아로 확장하려는 미국 의도의 배후에는 중동의 석유자원이 2050년쯤 고갈된다는 예상아래 카스피해에 묻힌 석유, 천연가스 자원을 개발한다는 구상이 있다. 이 지역에는 1630억 배럴의 석유, 337조 입방피트의 가스 매장량이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최소 1조에서 수조달러의 금액에 상응하는 양이다. 그런데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곳이기 때문에 자원개발, 수송로부설 등의 투자를 위해선 정치적 안정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것이 미국지도부의 판단일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 지역의 자원을 독점할 경우, 특히 중국, 인도와의 갈등은 예정되어 있다. 세계 인구의 1/3을 차지하는 이 두 나라는 매년 자원소비량이 20~30% 증가하고 있고, 따라서 전세계 연료의 1/4을 소비하는 미국의 자원독점을 방관할 수만은 없는 처지인 것이다. Rainer Rupp, "Anfang vom Ende? Die Aggression gegen Jugoslawien und die neue NATO," Junge Welt, 1999년 4월 6일.}}
39) {{러시아와 중국은 유고공습의 진행 중 서로의 관계를 향후 전략적 동맹관계로 발전시킬 것임을 누차 밝혔다.}}
40) {{이 경우의 "신냉전"은 "가상전쟁"이기 보다는 "현실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보다 농후할 것이다. 캘도는 동서냉전을 "가상전쟁"으로 탁월하게 분석한 바 있다. Mary Kaldor, Der imaginäre Krieg. Eine Geschichte des Ost-West-Konflikts (Berlin: Argument-Verl.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