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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승
송수권
어느해 봄날 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을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누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 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송수권
1940년 전남 고흥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75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산문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다시 산문에 기대어> <우리들의 땅> <바람에 지는 아픈꽃잎처럼> 등.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문공부예술상, 한국시협상, 시와시문학상 수상.
첫댓글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 올립니다.
<남도의 맛과 멋> 이란 책을 읽으면서 송수권 교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남도 음식문화기행을 한 내용인데 어찌나 멋있고 맛깔스럽게 쓰셨던지 참으로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위에 소개했던 시인도 그렇지만 이 글을 올리면서 머릇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그리움의 존재를 생각해 봅니다. 갇혀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여승을
만나는 것이 ‘삶의 에너지’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