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배 동문 |
♣ 화랑무공훈장(1954.9.30.) |
* 생년월일 1932년 3월 1일
* 결혼기념일 1954년 11월 29일
* 본적 경북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415(출생지)
* 주소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811호계2차 현대
* 부친 故이병기(고성) 모친 故이우술
* 학력 매전초등학교 17회 졸업(1945.3)
* 건국대학교 정채대학 법학과 졸업(1964)
* 군복무 1950.8.19.~1954.2.7
- 1951.6~ 수도사단 대 전차공격 12인 특공대
- 1951.9~ 수도사단 기갑연대 직할수색대
- 1951.11.30~12.17 수도사단 지리산지구 공비 토벌작전 참가)
- 1952.1.6~2.2 백운산지구 공비 토벌작전 참가(하동 여순 순천지역)
- 1952.7.7 ~ 10.14 강원도 금화지구 수도형고지 중공군 12군단과 전투
수도사단 기갑연대 분대장으로 참가하여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을거쳐 대구 제27육군병원(삼덕국교)에 입원하여 총탄 제거
* 지방 병무청장 역임(1972~ )경북, 강원, 제주
* 대구, 대전 등
* 병무청 차장(별정직 1급) 퇴임(1991.8.14.)
* 서울종로구 은행나무 어린이집 원장(1992)
현. 서울새문안교회 원로 장로
아버님 이병기(李炳基) 회갑기념(1959.1.25.)
♣자서전 아름다운 흔적 발간 하면서
나의 故鄕은 慶尙北道 淸道郡 梅田面 溫幕里 415번지 온막 골 안이다. 나는 1932년(壬申) 1월 5일(음력) 아버지 諱 炳基씨와 어머니 慶州人 李又術씨와의 사이에 3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구와 진달래꽃을 따먹다가 철쭉꽃을 잘 못먹고 배가 아프고 얼굴이 부어 어머님께 꾸중 듣던 생각 오뉴월에 피는 감꽃도 그냥 두지 못하고 주워 먹던 일 한밤중에 내린 눈이 모두 쌀 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들 마을 앞 냇가에서 고기 잡고 버드나무 꺽어 피리 불며 놀던 생각 여름에 홈 골 방천에서 수영(다이빙) 하다가 머리에 상처로 된장 발랐던 생각 가을걷이를 마치고 들판에서 전쟁놀이 하던 생각 내 고향은 부모님 슬하에서 사랑을 받으며 친구들과 놀면서 자라난 곳이기에 더욱 동경이 된다. 1939년 3월 매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소학교 재학 기간 중 운동화 한 켤레를 배급받아 신어보고 검은 고무신 몇 족 외에는 손수 짚신을 만들어 신기도 하고 나무를 다듬어 개다(일본어)를 만들어 신기도 했다. 때로는 월사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여 학교를 가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일제말기에는 신을 신지도 않고 등교하면 교실 현관 입구에 발 씻는 곳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발을 적시고 교실로 들어갔으며 또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어린이들까지 동원하여 산에서 솔방울까지 솔굉이를 채취해 오게 하고
퇴비 증산도 하고 농가에 놋그릇과 교회당의 종을 심지어는 마을의 정자나무까지 수탈해 가는 것을 보았으며 소학교 어린이들을 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1945년 3월에 소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 기념사진도 촬영하지 못했으며 사은회도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 비행장 지하격납고 공사에 약1개월간 근로동원 되었을 때 심장판막 증세가 발작했다 그 연유로 인하여 한해 여름 아무 일도 못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놀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소학교를 졸업시킨 부모님의 높고 높은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이 글을 적으며 깨닫게 된다. 아버님은 청도 남성현 터널공사에 동원되었으며 그 해 여름에 비가 오면 방안 천정까지 빗물이 새어 떨어지고 그때 어머님은 가장이 없는 동안에 아이들을 거느리고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래서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면서 배워야 빈곤에서 벗으날 수 있으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가난한 환경 속에 흉년은 거듭되고 먹을 양식이 부족하여 보리 이삭이 영걸기도 전에 잘라다가 가마솥에 볶아서 방아에 찧어 껍질그대로 쑥과 함께. 범북죽을 만들고 먹었고 또한 산에 가서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죽을 쑤어먹기도 했다. 이런한 죽도 준비되기 전에는 굶게 된다. 이러한 때는 방에 조용히 누워 천정을 쳐다보면 천정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듯하고 어지럽고 얼굴이 붓기도 했다. 이렇게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보리 고개를 넘기기도 했다.
이렇게 굶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배고픈 것이 어떤 것인지 또한 끼니를 걱정하고 입을 옷을 염려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속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성장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에 실력을 높이 쌓아 남에게 베풀지언정 빚진 자가 되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하고 다짐도 했다. 나는 지방병무청장 재임시 생계곤란으로 병역 감면처리를 할 때 민원인의 편에서 처리하게 되었다 때로는 현지 확인을 통하여 처리하기도 하였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 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다(성경 시편126편)
1945년 해방후 좌익과 우익의 극려란 대립 속에 1949년 6월28일 매전면 온막동 묵들끝에 있는 정자나무 밑에서 一家 이재기, 이안기氏 2인이 입산공비 좌익분자들에게 참혹하게 피살되었고 이해기씨는 그의 자택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정국은 극도로 불안했으며 그해 여름에는 입산 공비의 만행을 피하기 위하여 젊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편안히 밤잠을 이루지못하고 집밖의 콩밭 등지를 여기저기 처소를 이동하면서 잠을 자기도 했다.
1948년. 온막교회 봄부흥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다.
나의 생할지표는 삼각형의 3변의 길이보다 1변의 길이가 짧다는 기하의 원리처럼 짧고 곧은 길을 택하며 살고자 했다.
1950년 6.25 전쟁 사변 발발 후 북한 인민군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해 7월 중순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사수하려고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등 전세는 극도의 불안과 공포 분위기 가운데 처했다. 대구로 피란온 기독교 대한구국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경직 목사와 함께 국방부 차관(장경근)과 먼저 협의하고 육군본분 관계자와 심사숙고 끝에 기독교 의용대 ‘십자군’을 창설했다. 처음에는 3,000명을 모집하여 1개 독립연대를 창설하기로 목표를 세우고 각 교회에 통문을 보내어 지원병을 모집했다. 1950년 7월 중순 18세의 나이로 모교회인 매전면 온막교회(1906년 창립)를 통하여 전달된 ‘십자군’ 모집 계획에 따라 100리 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대구 서문교회 십자군 부대 본부를 찾아가 지원 입대했다. 십자군의 병력이 2,000명가량 모집되었다. 8월초 대구역과 팔달교 부근에 적 포탄이 떨어지는 등 전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십자군 부대도 부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서면 마구간에서 가마니를 깔고 새우잠을 자면서 식사는 하루 한 끼에 주먹밥 한 개를 겨우 공급받아 먹었다.
십자군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 후 약7일이 경과되었을 때 미국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 폴 링 박사(세계기독교청년면려회장)가 십자군 부대를 방문하여 연설을 한 바 있고(통역 : 한경직 목사), 또한 그는 워커 제8군사령관을 면담하고 ‘십자군’의 장래 문제를 논의 하게 되었다. 워커 사령관은 전투경험 없는 ‘십자군’ 전선에 투입하면 소모전에 희생만 클 뿐이니, 전선배치는 특수 업무에 투입키로 작전을 세우고 육군본부에 ‘십자군’ 병력처리를 지시함에 따라 ‘십자군’ 은 당초의 뜻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채 해체 되게 되었다.
1950년 8월 15일 국방부와 미국측과 카투사(KATUSA)제도 시행을 합의한바 있다. 나는 그날 밤 부산 적기부두에서 큰 목선 편으로 1950년 8월 19일 아침에 일본국 시모노세키 항에 하선하여 기차 편으로 해저 터널을 통과하여 일분 큐슈 후코오카에 있는 미 제3사단 제10포병대에 입대하여 한국인을 뜻하는 K로 시작하는 K1135408의 군번을 부여 받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전선 소식을 듣고 우리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곧 남북이 통일되고 이어서 귀가 할 것이라고 좋아들 했었다.
1950년 10월 우리 국군 제6사단 7연대 제6중대가 초산 강변에 도착하여 압록강 언덕에 태극기를 계양하고 같은 날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도 원산에 상륙함에 따라 필자가 소속 미 제3사단도 일본국에서 출동하여 겨울의 거친 바다를 건너 원산에 상륙하여 함경남도 함흥, 신흥, 장진, 개마고원, 삼수, 갑산 등지의 작전에 임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 12월 14일 한국군 1군단 및 미 제10군단이 육로로 철수 할 수 없어 흥남에서 철수할 때 LST에 승선하여 다음날 오전 묵호항에서 하선했다.
1950년 12월 14일 미제3사단 제10포병대에서 대한민국 육군(제1군단)으로 전군 되어 강원도 명주군 옥계 헌병과 군단장 김백일 장군 경비병으로 근무했다.
1951년 6월 중순경 나는 헌병대에서 수도사단 전차공격대로 전속되었다. 그 당시 동해안에 인민군 전차가 출몰한다는 정보에 따라 헌병대에서 함께 한 전우 12명이 대 전차공격 특공대원으로 선발되어 3.5인치 로켓포 사격훈련을 마치고 기갑연대 동해안 전선을 누비기도 했다. 1951년 9월말 전세가 변하여 적군의 전차출몰이 없다는 정보에 따라 나는 대전차 공격 특공대에서 수도사단 기갑연대 본부중대로 전속되었다가 그해 10월 기갑 연대본부에서 직할 수색대로 전출되었다.
1951년 11월 사단이 지리산 지구 백운산 지구토벌작전에 출동함에 따라 송요찬 사단장은 민폐근절에 대한 특별군령을 하달하였다. 요지는 민폐를 끼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명령위반 죄로 공개 총살에 처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수색대는 지리산 산청군 구례군 등지에서 토벌작전을 수행 하였으며 우리 군이 광범위한 산악지대를 장악하고 수색을 실시하여 적의 사단장을 비롯하여 많은 인민군과 색출하고 주민을 구출하였다. 1952년 전선으로 이동하여 수도사단은 강원도 금하지구 수도형 고지 지형능선에 중공군 제12군단과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추계공세에 3개월간의 방어 작전에 치열한 공방전으로 그
고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1952년 9월 19일 새벽미명 어두움 속에서 우리중대는 적진을 접근하기 위하여 교통호를 통과할 때 중공군의 직사포탄이 집중적으로 투하되었다. 그 찰나에 나는 철모 위에 돌과 흙이 떨어지며 이곳저곳에서 비명과 위생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중대원들은 지휘관의 이합집산에 상황에 처했다. 그때 나는 인간의 생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를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나를 기다리시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상황에서 중대원들은 각자가 나름대로 은폐하고자 그 지점을 벗어나고파 사생결단 하는데 나는 급경사진 고지를 향하여 올라가는데 문득 내 앞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바로 중공군의 전초기지 였다. 그 지점에서 적은 내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참호에 가까이 밀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류탄은 내 등뒤에 떨어졌는지 그 순간 부상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적의 진지 유개호를 등지고 적의 진지 속으로 나도 수류탄을 투척한 후 부상당한 상처부위를 손으로 더듬어 확인한바 우측 대퇴부와 둔부에 출혈상태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진지를 향해 바라보니 우리군의 엄호사격 광경이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것 같이 야광탄의 불빛 줄기가 찬란하였다.
(글 과 사진은 이종배 동문님의 자서전 '아름다운 흔적' 발췌)
첫댓글 이종배 선배님께 전화드려 책을 받아서 내용중에 사진과 글을 발췌해서 작성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들을 고향동문들이 인정해주고 기억해주고
알아주는것도 애국이라 생각합니다.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이종배 선배님, 자랑스럽습니다.
네 우리 매전초등 총동창회가 친목을 넘어서
지역 역사 문화 인물을 재조명 하고 알리는 일도 중요한 역할인것 같습니다.
제가 대전에서 대대장으로 근무시(87~88년?)에 <이종배선배님>께서
당시에 대전지방병무청장으로 재직하고 계셔서 몇번 뵌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다시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당시에 하신말씀중 주요내용이
6.25참전기,
동원 및 예비군제도 관련내용,
특히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말씀은 <고성이씨>를 일부에서 <철성이씨>로 명명하는데
대해 뭔가 잘못된 표현이라고 무척 강조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네 이태승 부회장님과 그러한 인연이 있었셨네요
3월9일 이종배 선배님 참석키로 하였습니다.
화랑무공훈장을 수여식을 못했다고 하시는데 당일 행사때 수여식을 갖고자 합니다.
30 여년전 부산 병무청장으로 계실때 찿아뵈온적이 있는데
건강한모습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