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를 클릭하라.
칼 맑스(Karl Marx)가 통렬하게 관찰한 바 있듯이, 역사는 "처음엔 비극으로, 두번째엔 희극으로"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2012년 7월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가 뇌졸증으로 쓰러진 이후의 태국 사태는 전투적이고 완고한(=다이하드) 성향의 왕당파가 시도하는 미숙하고 더듬거리는 시도들로 점철되어왔다. 이들은 '옐로셔츠 운동'(PAD)이 2008년 [보수진영 전체의] 공조를 통해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1935~2009) 총리와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1947년생) 총리로 이어진] 친-탁신계 '국민의 힘 당'(PPP) 정권을 전복시키고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를 총리로 앉혔던 일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 이 [왕당파] 공룡들은 자신들이 직면할 즉각적인 멸종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들은 파편화되고 무기력한 상태로 벅찬 과제들과 대면했다. 이미 상실해버린 명분을 군 수뇌부가 지지하지도 않을 터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옐로셔츠 반정부 시위 지도자였던]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 역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쁘라윗 웡수완(Prawit Wongsuwan: 1945년생)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이후, [보수진영에] 그다지 조력하려 하지 않았다.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1967년생) 총리와 그녀의 정부는 태국인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집권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 태국을 위한 당)에 대한 불만도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 역시 자신의 시대가 오기만 기다리며 조용히 권력을 응축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는 여전히 자신이 자유인으로서 귀국할 수 있는 방안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탁신은 '레드셔츠 운동'(UDD)이 지닌 적법한 불만과 그들이 겪은 엄청난 고초와 희생을 계속 착취하고 있었다.
반면, 왕당파 기득권층은 탁신이 다음 단계로 전진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냉소를 자아낼만한 비민주적 방법들을 사용하며 법치주의를 갉아먹고 있었다. 앙숙지간인 태국의 엘리트 분파들은 국가의 분열을 치유하거나 국민 다수가 직면해있는 문제에 대처하는 데는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탐마삿 대학'의 정치학자] 차이랏 짜런신오란(Chairat Charoensin-o-larn)은 금년(=2013년) 초에 발표한 논문 논문 <2012년의 태국: 진실, 화해, 그리고 지속되는 분열>(Thailand in 2012: A Year of Truth, Reconciliation, and Continued Divide)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12년 태국의 전반적 정치 상황은 협상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양측 진영 모두 정치적 갈등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상대방을 뿌리뽑을 전면전을 위한 적절한 시점만 기다리고 있다. 패권의 구축 과정에서 진실과 화해란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중 략) 진실과 화해의 정치는 공포와 증오의 정치를 통해 위험한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피탁 사얌' 단체의 시위
2012년 11월,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과 연계된 노년층 강경파들이 단체를 구성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피탁 사얌'(Pitak Siam, พิทักษ์ สยาม: 태국의 수호자)이라 칭하면서 앞뒤도 못가리는 방식으로 정권퇴진 운동에 나섰다. '피탁 사얌'을 이끈 것은 분럿 깨우쁘라싯(Boonlert Kaewprasit: 1942년생 [역주] 현 태국 복싱연맹 회장) 예비역 육군대장과 차이 수완나팝(Chai Suwannaphap) 예비역 해군제독이었다. 쁘렘 의장의 충직한 조수와도 같은 추밀원 위원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1943년생) 장군은 바로 이들과 '군사예비사관학교'(AFAPS: [역주] 고교과정의 통합사관학교) 1기생 동창이었다. 이 단체의 또 다른 주요 멤버인 프라짠 땀프라팃(Phajun Tamprateep) 예비역 해군제독은 과거에 쁘렘 장군의 개인 비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또한 오랜 기간 극과격 왕당파의 모사가로 활약해온 쁘라송 순시리(Prasong Soonsiri: 1927년생) 예비역 공군 중령도 여기에 참여했다.
이 늙은 음모의 기획자들은 군사 쿠테타를 공개적으로 촉구했고, 분럿 깨우쁘라싯은 부패 정치인들을 솎아내고 덕망있는 인사들이 정권을 맡을 때까지 5년 동안 민주주의를 "동결"시키자고 말하기도 했다. '피탁 사얌'에는 소규모 무리이긴 했지만 비번인 군인들 및 폭력배들까지 동참했다. 이들은 11월24일에 정부청사(=총리 관저)를 향해 행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잉락 총리 정부는 가두시위라는 태국의 전형적인 정치 무대가 폭력사태를 촉발 시도로 이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방책으로서 11월22일 '국내보안법'(ISA)을 발동시켰다.
(동영상) 잉락 친나왓 총리의 대국민 TV 연설 모습. 그녀는 방콕 시내 두싯(Dusit), 프라나콘(Phra Nakhon), 폼쁘랍 삿뜨루파이(Pomprap Sattruphai) 구 등 3개 구들에 대해 국내보안법(ISA)이 발동된 이유를 설명했다. 방송시각 2012년 11월 22일(목) 오후 8시50분경.
'피탁 사얌'이 선거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것은 분명 위헌적이고 비민주적 일이었다. 하지만, [보수 야당] '민주당'(Democrat Party) 총재 아피싯 웻차치와 전 총리는 그들과 공조를 취하면서, 11월 25~27일 사이에 국회에서 불신임안(=탁핵안)을 심의할 것을 요구했고, 11월28일을 탄핵안 표결일로 정했다. '민주당' 소유의 위성채널 '블루 스카이 채널'(Blue Sky TV)은 '피탁 사얌'을 공공연히 칭송했고, 왕당파 성향 주류 언론들도 분럿에 동조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정부가 '국내보안법'을 발동해 폭압적인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잉락 정권은 과거의 시위들로부터 교훈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효과적인 전술을 채택했다. 정부는 폭동진압 방호복과 방패로 무장한 잘 훈련된 경찰병력 2만명을 정부청사 주변에 배치했고,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도 둘러쳤다.
11월24일 시위가 시작되자, 시위대 규모가 '피탁 사얌'이 기대했던 규모보다 엄청나게 적다는 사실이 금새 드러났다. 정부청사로 행진한 군중은 2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들은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 바리케이드에 막혀 '마카완 다리'(Makkawan bridge)와 '미사콴 사거리'(Mitsakwan intersection)에서 멈춰섰다. 바리케이드 뒤에는 폭동진압 경찰이 도열해 있었다.
그러자 '피탁 사얌'이 동원한 일부 도발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며 싸움을 걸었다. 그들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경찰을 향해 깡통 최루탄과 사제 폭발물을 던졌고, 경찰들의 얼굴에 고춧가루 스프레이를 뿌리는가 하면, 새총을 발사하면서 경찰 대오를 향해 6륜 트럭을 돌진시키기도 했다. 경찰 수십명이 부상했지만 경찰 대오의 규율은 유지됐다. 시위대는 계속해서 도발했지만, 경찰 병력의 대오는 굳건했고 과도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동영상) 현장의 CCTV 화면. 2012년 11월 24일 오전 8시40분경 발생한 최초 충돌 모습. 이 충돌 직후 시위대는 경찰이 사용한 최루탄이라면서 중국제 'GT6-ARA1CS' 형 최루탄 깡통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경찰은 해당 최루탄이 시위대 쪽에서 날아왔다고 말했다. 이 동영상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활영된 CCTV 화면을 이어붙인 것으로, 18초 및 54초 무렵에 경찰 대열에 최루탄이 터지는 장면들이 담겨 있다.
이런 사악한 판토마임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분럿과 그의 동지들은 방콕(Bangkok)에 주둔하는 군 지휘관들에게 계속해서 휴대폰을 걸어댔다. 그들은 경찰이 독재정권을 보호하면서 평화 시위대에게 야수 같은 짓을 벌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질서회복과 학살방지를 위해 군대가 개입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군대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마침내 황혼 무렵이 되자, 분럿은 시위중단을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부상을 입어 이미 슬프다.
'피탁 사얌'의 에피소드는 왕당파들의 측은한 실패 사례로 끝나고 말았다.
(사진: Bangkok Post) '피탁 사얌'의 지도자인 분럿 깨우쁘라싯(중앙) 예비역 대장은 반정부 시위 하룻만에 중단을 선언했다.
사면법 파동의 시작
탁신은 기득권 진영과 화해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지만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는 당근 전략이 실패하자 회초리를 드는 쪽으로 나아갔다. 탁신은 군부와의 마찰은 피하면서, '민주당' 지도부인 아피싯 웻차치와 및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을 노렸다. 그는 타릿 펭딧(Tharit Pengdit)의 조력을 동원했다. 타릿은 나약하고 무원칙한 관료로서,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유사한 기구인 '특수수사국'(Department of Special Investigation: DSI) 국장을 맡고 있다. 아피싯 총리 정부 시절, 타릿은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육군사령관로부터 '2010년 4~5월의 레드셔츠 유혈항쟁' 당시 군대가 연루됐다는 내용을 빼달라는 압력을 받았었다. 탁신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대리로 집행하는 찰름 유밤룽(Chalerm Yubamrung: 1947년생) 부총리를 시켜, 타릿에게 아피싯과 수텝에 대한 정파적 사법 공세를 강화할 것을 압박했다.
2012년 12월, '특수수사국'은 아피싯과 수텝에 대해 사전 계획에 의한 살인 혐의로 입건한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혐의는 2010년 5월 15일 군인 한명이 택시 운전수였던 판 캄꽁(Phan Khamkong, 당시 44세)을 사살한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탁신은 2010년의 유혈진압과 관련하여 그 진실규명 과정을 지원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하면 진실이 완벽히 밝혀질 경우, 자신도 [일부 폭력사태에] 연루됐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패 혐의 유죄판결을 백지화시켜줄 사면안을 야당 지도부인 아피싯과 수텝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적용될 살인죄 혐의를 이용하려는 것 뿐이었다. 또한 탁신은 아피싯의 최측근인 꼰 짜띠꽈닛(Korn Chatikavanij: 1964년생)에 불리할 가능성이 있는 정보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꼰은 장차 '민주당'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탁신은 꼰의 과거 비지니스 거래들을 살펴보기 위해, 최소 1곳 이상의 국제적인 탐정회사를 고용했다.
아피싯과 수텝은 이미 오래 전에 도덕성 문제를 후안무치하게 폐기해버렸었지만, 이제 다시금 도덕적 우위를 점유하고자 반항적 모습을 연출하며 대응했다. 즉, 자신들은 탁신과는 달리 법치주의를 존중한다면서, 겁쟁이처럼 해외로 달아난 후 사면을 추구하는 방식을 택하지도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또한 자신들은 혐의를 벗기 위해 싸울 것이라면서, 설령 사형 판결을 받게 될지라도 사법부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은 듣기엔 좋은 소리였지만, 사실 무의미한 것이었다. [사법부가 보수진영 인사들로 구성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락 정부가 탁신의 귀국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자, 탁신 진영 내에선 '몇 가지 형태의 사면법안들'이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사전에 의도된 잘못된 지시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한 법안 중 하나가 2013년 3월 국회에 제출됐다. 이 법안은 사뭇쁘라깐(Samut Prakan) 도 지역구 출신인 워라차이 헤마(Worachai Hema: 1954년생) 의원을 대표 발의자로 하여, 집권 '프어타이 당' 소속 의원 42명이 발의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정치 지도자들은 대상에서 제외시켰고, 2006년 9월부터 2011년 5월 사이에 발생한 모든 정치적 위반행위들을 일괄 사면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은 주로 부당하게 수감돼 있는 레드셔츠 지지자 수백명의 석방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아피싯이나 수텝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내용이라든지 탁신에게 유리한 내용은 배제된 것이었다. '레드셔츠 운동'은 워라차이 법안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또한 2010년 유혈사태에서 사망한 레드셔츠 지지자의 유족들은 그 밖의 사면법안들에 대한 반대의사도 분명히 했다.
2013년 4월 29일, 잉락 친나왓 총리가 몽골에서 개최된 '민주주의 공동체'(Community of Democracies: CD) 국제회의에 참석해 연설했다. 그녀는 이 연설에서 태국의 왕당파 기득권 진영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명시적인 비난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7년, 태국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헌법은 국민들이 참여하게 작성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의 신기원이 마침내 도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신기원이란 더 이상 주기적 쿠테타가 발생하지 않는 시대를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2006년 [군사 쿠테타가 발생하자] 2번이나 국민 다수의 투표로 선출됐던 정부가 전복됐습니다. 태국은 궤도를 벗어났고, 국민들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민주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소모하고 있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은 제가 말하고 있는 정부가 바로 제 오빠인 탁신 친나왓이 총리가 이끌던 정부란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정당하게 총리로 선출된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모르는 많은 분들은 어찌하여 불만을 갖느냐고 말씀하시겠지요? 정권이 교체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단지 저와 제 가족들 뿐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태국은 [여러 과정들의] 차질과 국제 신인도 상실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태국의 법치주의는 파괴됐습니다. 제 오빠의 정부에서 발의했던 사업들과 계획들은 국민들의 바램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모두 사라졌습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가 그릇되게 박탈당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태국'(Thai)이란 국호에는 '자유'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고, 태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2010년 5월에 있었던 레드셔츠 시위대 유혈진압
은 방콕의 상업 중심가에서 91명이 사망하는 결과로 끝났습니다.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저격수들의 총에 사살됐고, 레드셔츠 운동은 그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면서 조직이 부서졌습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의 정치적 희생자들이 감옥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계속 압박했고, 결국 [이전의 아피싯 총리] 정부는 자신들이 상황을 조작할 여지도 생각하면서 총선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의지는 부정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민주적 정권의 분파는 아직도 존재합니다. 2006년 쿠테타 군사정권 하에서 제정된 새로운 헌법은 민주주의를 제한하기 위한 기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가령 상원의원의 절반 정도만 선출직이고 나머지 절반이 임명직이라는 점이 좋은 예입니다. 게다가 마땅히 국민들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할 소위 독립성을 지닌다는 각종 기구들이, 태국 사회 전체가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사진: Reuters) 잉락 친나왓(좌측) 태국 총리가 2013년 4월 28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개최된 '민주주의 포럼'에서 연설을 마친 후, 차히아긴 엘베그도르지(Tsakhiagiin Elbegdorj: 우측) 몽골 대통령과 나란히 앉아 있다.
잉락 총리의 연설 내용은 분명 21세기 태국 정치사를 정확히 요약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발언은 태국의 전통적 기득권층을 격분시켰다. 그들은 원래 이미지와 "체면"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이들이므로, 잉락 총리가 국제무대 연설을 통해 자신들을 악역으로 정확하게 묘사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을 보자 견디지 못했다. 탁신 전 총리 및 잉락 총리의 반대파들은 국제적인 포럼에서 자국의 더러운 비밀을 거론하는 것은 "태국인답지 못한 일"이라면서, 그녀의 연설내용이 매국적이라고 주장했다. <타이랏>(Thai Rath) 신문의 만평가 솜차이 까딴냐따난(Somchai Katanyutanan: 1941년생, 예명-차이 라차왓[Chai Ratchawat])은 초과격 왕당파 성향의 인물인데,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논평을 올렸다.
제발 이 점을 알아야만 한다. 창녀들은 악마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몸만 팔 뿐이다. 하지만 악마 년은 자신의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
기득권 진영의 야심과 이집트 사태
워라차이 헤마가 제출한 국가화합 법안의 국회 심의는 8월7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후 법안 통과까지는 몇달 동안의 입법과정을 거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옐로 진영의 잔존세력은 잉락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 한번 배후에서 공조 노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력에는 귀족들, 기득권층의 '푸야이'(poo yai: 고위인사)들, 예비역 군인들, 중상류층의 도덕지향적 방콕 시민들, 민주당 정치인들, 왕당파 [주류] 신문들이 포함된다. 그들은 워라차이 법안이 탁신 친나왓의 사면을 위한 연막이라고 (정확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어떤 댓가를 치를지라도 그러한 일을 막고, 2013년 말까지는 잉락 정부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2013년 10월 현재] 옐로 진영의 각본은 잘 진행되고 있다. 그들은 2008년의 모델을 좇아 국회의 의사일정을 방해하면서, 가두시위와 사법부의 개입을 병행하고, 편파적인 신문 보도와 왕실 측근 인사들의 음큼한 계략도 동원할 작정이다. 이러한 전술을 통해 잉락 정부의 이미지를 그릇되게 만들면서, 국정 장악 능력 및 정권의 적법성을 상실하게 만들 요량인 것이다.
기득권 진영이 태국의 대다수 국민들의 호흡과 얼마나 울적할 정도로 접촉이 단절됐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정권을 쓰러뜨리고 태국의 민주주의를 3~5년간 유예시킬 수 있을 것이란 망상적 믿음에 집착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국왕이 임명하는" 원로 정객들로 구성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만든 집권기간 중에 친-탁신 세력을 정계 및 군부에서 완전히 뿌리뽑고, 일반 유권자들에 대해서는 해외에 망명 중인 그릇된 선지자를 지지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도록 광범위한 세뇌 공작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그것은 일찌기 손티 림텅꾼이 주창했던 "새정치"(New Politics)의 새로운 버전이었고, '피탁 사얌'의 지도자 분럿 깨우쁘라싯이 주창했던 [민주주의의] "동결"이기도 했다.
게다가 옐로셔츠 동맹세력이 입 밖에 내지 않는 희망사항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유예된 기간 중에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이 자연사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추밀원'이 제출한 차기 국왕 후보를 이전보다 얌전해진 국회가 순순히 승인하면서,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라마 10세로 즉위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만일 늙고 병든 푸미폰 국왕이 그들이 선거를 실시해야만 하는 2018년 이전의 어느 시점까지도 여전히 생존해있다면, 태국에서 "탁신주의"(Thaksinism)라는 재앙을 제거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만 할 것이고, 국회 역시 협조적인 상태로 남아 있어 줘야만 할 것이다.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그들의 계획이다.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은 [국민들로부터] 선출된 적이 없었음에도 두번이나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잉락 총리가 실각할 경우 자신이 국왕의 임명을 통해 총리 헤트트릭을 달성해보려는 운동에 열심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득권 진영 인사들은 다른 후보를 선호한다. 그 후보는 바로 국방장관을 역임한 쁘라윗 웡수완 장군으로, 보수적인 태국 귀족들이 가장 최근에 선호하는 인물이다.
한편,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발생한 사태가 태국의 기득권 진영을 대담하게 만들어주었다. 원래 '아랍의 봄'(Arab Spring)이 주는 교훈은 소셜 미디어 시대에 민주주의를 유예시키는 것이 자살행위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설령 군부까지 공조한다고 해도, 태국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를 억제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국민적 저항과 국제 언론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2013년 7월 3일, 이집트의 세속주의 군부가 배후조종한 무슬림 정권 반대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한 후, 군부는 정권을 잡았다. 이집트 군부는 이후 총리를 구속하고,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의 대규모 시위를 잔혹하게 짓밟는 작전을 전개했다. [본고를 작성하는] 2013년 10월 현재 수천명이 살해됐고,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집트 사태는 태국의 보수 왕당파들과 군부 매파들이 지닌 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태국의 봄' 운동
2013년 5월 반-탁신 대중운동 2개가 출현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론 중립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락 총리 정권을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들 역시 보수 기득권 진영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들이다.
5월4일, 극우 왕당파 운동의 백전노장들인 와싯 뎃꾼촌(Vasit Dejkunjorn: 1929년생)과 깨우산 아띠포티(Kaewsun Atibodhi: 1951년생)는 자칭 "태국의 봄"(Thai Spring, 타이 스프링)이라는 운동을 출범시켰다. 이것은 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쓰러뜨렸던 온라인 행동주의를 모방한 것이다. 옐로셔츠 진영의 신문들은 이들의 돈키호테적 모험을 대단히 호의적인 논조로 보도했다. 이들의 활동이 [잉락 총리 연설을 주관했던 국제기구] '민주주의 공동체'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지지하는 온라인 청원운동을 그 기본 형태로 한다는 것은 금새 명백해졌다.
이 공개서한은 잉락 총리의 연설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많은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우선 와싯이나 깨우산은 21세기 태국 사회나 온라인 행동주의에 관해 전혀 이해가 없는 늙은 광신자들일 뿐이었다. 그들은 잉락 총리 연설에 대한 격분과 속빈 민족주의적 수사법을 단도직입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마치 새로운 기록이라도 작성하려는 듯한 불운한 노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외국인들이 태국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해서는 깊은 고려를 하고 있었다. 공개서한 원본은 너무도 터무니가 없어서, 그것이 그들(=기득권 왕당파 진영) 스스로의 자기풍자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와싯과 깨우산에게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공개서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잉락 총리가 자기 가문의 지배력을 지속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집권을 한 것은, 김정일이 자기 가문으로 하여금 북한을 계속해서 지배토록 한 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잉락 총리의 임기는 전적으로 그녀의 오빠인 탁신 친나왓의 희망사항과 명령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귀빈 여러분, 여러분은 잉락 총리의 물리적 모습을 보고 계시지만, 그녀의 생각과 발언은 모두 아득히 멀리서 조종하면서 요구사항도 많은 그녀의 오빠로부터 나온 지령입니다.
[2011년 7월 실시된] 지난 총선에서 [그녀가] 성공을 거둔 일은 이 권위주의 가문이 권력을 거머쥔 후 이 나라를 종속시키는 일을 절차상 합법화시킨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 귀빈 여러분들이 보다 사려깊게 살펴보신다면, 친나왓 가문이 소유한 '프어타이 당'(Puea Thai Party)에 국회의원 탈을 쓴 꼭두각시들이 가득 차 있다는 점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당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태국 언론들은 모두가 유사하게 굴종적 모습을 보이면서 친나왓 가문의 지배를 받고 있고, 개인의 우상화 및 그 가문에 대한 대중들의 경배를 증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태국 언론들은 북한 언론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북한을 방문해보신다면, 그 나라 지도자의 초상화가 모든 곳에 설치돼 있음을 목격하시게 될 것입니다. 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명이지만 한마음인 [탁신과 잉락의] 가문은 사회 각계각층에 자신들의 꽃다발을 보내왔고, 그 토대까지 침투해있습니다.
총선의 지분만이 민주주의를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가 될 수 없다는 점은 인류 역사가 명확하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계의 많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의 외관을 걸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친나왓 가문의 통치가 부도덕하며, 민주주의의 망토를 걸친 초-자본주의적 권위주의라는 것을 단언코자 합니다.
우리는 친나왓 가문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문이 태국을 어둠의 심연으로 끌고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가문은 태국 사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태국인들의 마음과 영혼에 탐욕스럽고 오도된 정보, 그리고 분노와 증오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민주주의 및 평화적 환경으로부터 태국을 매 순간 떨어져나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수백만명의 태국 국민들은 여러분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개서한은 사실적 설명과 해명을 통해, 태국의 여성 총리가 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작성된 것입니다. 또한 그녀가 진실의 대표자도 아니며, 태국 국민들의 책임있는 대표가 전혀 아니란 점도 설명하고자 합니다.
태국의 기득권 진영이라는 공룡은 명백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즉, 태국 국민들이 지불하는 비용을 통해 엄청나게 부유해지는 사익추구형 가문이 존재하며, 그 가문이 순종적 언론들과 편재(偏在)하는 초상화들을 통해 북한식 개인 우상화를 조장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문이 친나왓 가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역주: 즉, 왕실임) 또한 그들이 잉락을 탁신의 꼭두각시라며 맹비난했지만, --- 비록 그들이 푸미폰 국왕의 바램을 묵살하면서까지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왕위계승을 방해할 계획을 갖고 있긴 하지만 --- 정작 자신들이 왕실의 꼭두각시라는 점에는 자부심까지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친나왓 가문이 "태국을 어둠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는 주장은 마치 으스스한 "깔리육"(กลียุค)의 또 다른 주문(呪文)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본 논문의 초반에서 설명했듯이] '깔리육'이란 초과격 왕당파들이 두려워하는 암흑기를 말하며, 푸미폰 국왕의 사후에 펼쳐질 시간들을 말한다.
'브이 포 타일랜드' : 화이트 마스크 운동
2013년 5월 말이 되면 '태국의 봄' 운동만큼이나 기묘한 단체가 또 하나 출현한다. 그들은 바로 '화이트 마스크 운동'(white masks)이라고도 알려진 '브이 포 타일랜드'(V For Thailand)이다. '브이 포 타일랜드'는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세계 점령'(Occupy: 발단은 '월가 점령') 시위와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가 사용한 상징들과 신화들을 차용했는데, 특히 [유명 만화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주인공 브이(V)가 착용했던] 가이 포크스 가면(Guy Fawkes mask)을 착용한다는 점과 공식적인 지도부나 위계질서를 갖고 않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브이 포 타일랜드'는 자신들이 폭군정치와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권에 대항해 들고일어났다면서, 소셜 미디어에 익숙한 평범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은 과거 '옐로셔츠 운동'(PAD)의 핵심 멤버였던 삼란 위롯(Samran Viroj)이 조직한 완고하고도 반동적인 왕당파 운동이었다. '브이 포 타일랜드'는 2005~2006년 사이에 '옐로셔츠 운동'이 취했던 전략과 마찬가지로 방콕의 중산층과 화이트 컬러 직업군을 움직여 반-탁신 전선을 형성하려 했다.
(사진: Bagkok Post) 방콕에서 시위 중인 화이트 마스크 운동 지지자들. '화이트 마스크' 시위는 태국의 수꼴 보수진영이 가진 표현의 감수성을 본격적으로 발산하는 최초의 계기였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2014년 5월20일 쿠테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태국의 중상류층 시위대는 심지어는 현금 투척 시위를 포함하여, 해괴망측하면서도 럭셔리하기까지 한 갖가지 시위 형태를 보여줬다. 아마도 이들이 보여준 "돈지랄"과 "예술적 감각"의 시위 형식은 이제 인류의 역사에서 두번 다시 찾아보기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기상천외한 럭셔리한 감각이야말로, 이들이 자국의 보통사람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계층인지를 다시 한번 인식시켜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크세]
이 "화이트 마스크들"은 자신들이 차용한 <브이 포 벤데타>의 반란적 성격과는 모순되게, 사회적 질서와 위계질서를 신봉하고 권위도 존중했다. 그들은 소수의 특권층 엘리트들이 장악한 권력에 저항하는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탁신과 결부된 신흥 엘리트들이 자신들을 대변하는 구시대 엘리트들의 손에서 권력을 낚아채가고 있다는 것에만 반대할 뿐이었다. 화이트 마스크들은 "원 퍼센트"(1%)의 특권과 권력에 대항해 싸우는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이 바로 태국의 "원 퍼센트"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빈곤층의 정치적 영향력 성장을 두려워하던 상당한 수의 중산층 인구가 가세한 집단이었다.
옐로 진영의 신문들은 다시 한번 이 운동을 위한 열정적인 치어리더들로 변했고, 화이트 마스크 운동의 지지율과 영향력을 체계적으로 과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페이스북'에는 집에서 만든 가면을 착용한 소수의 교포들이 홍콩과 시드니에서 시위를 벌인 사진들도 올라왔다. 그러면 언론에서는 이 운동이 "국제화됐다"고 떠들어댔다. 그리고 라차부리(Ratchaburi), 람빵(Lampang), 수랏타니(Surat Thani) 도에서 몇명 참가하지도 않은 시위들이 개최되기라도 하면, "화이트 마스크" 운동에 대한 지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2013년 6월, <방콕포스트>(Bangkok Post)가 1면 머릿기사로 내세운 "윗지방에서도 수십명이 화이트 마스크 시위에 동참"(Dozens take part in upcountry white mask protests)이란 문구는 의도치 않게도 그 달의 가장 우스꽝스런 제목이 되고 말았다. 태국 인구는 6700만명이다. <방콕포스트>의 스타급 컬럼니스트 워라나이 와니찌까(Voranai Vanijaka)는 6월6일자 기고문에서 화이트 마스크 운동의 선전선동을 부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가 여지껏 알고 있는 한에 있어서, 가이 포크스 운동은 참신성과 호감도를 지니고 있으며, 커먼코즈(common cause)(역주)에 관해 생각이 완전히 일치된 시민들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이들에겐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없고, 거액의 입금계좌도 없으며, 미심쩍은 컨넥션도 없다. 아직까지 어떤 인격성을 숭배한다는 이야기도 선언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새로운 술책을 사용하려는 옐로셔츠들일 뿐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데 개의치 않고, 그들은 쇼셜 네트워크 상에서 출현한지 불과 2주일만인 지난 일요일(6.2) 방콕의 거리에 약 700명의 군중을 결집시켰다. 그들은 가면을 쓴 채 단결과 저항의 쇼를 펼쳤다. 이 운동은 모두 '페이스북' 키드들이 시작했고, 간호사 복장의 귀여운 모습에 이르면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역주) 커먼코즈(common cause): "돈과 정치의 결탁을 철저히 막는다'는 취지로 미국의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던 존 가드너가 1970년에 만든 단체. 워싱턴의 정치인들간에는 '민간 중앙정보국'(Civil CIA)이라고 불린다. 커먼 코즈는 선거제도 개선, 선거자금 제한, 정치헌금 규제, 공직자윤리기준 강화 등에 활동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정부나 노조, 기타 외부단체의 보조를 일절 사절한다는 행동강령을 정해 회원들의 헌금으로 모든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워싱턴에 본부가 있고 주별로도 지부가 있는데 회원은 무려 25만 명에 달한다." ---- [출전: 경제용어사전] *. 여기서는 "부패 방지를 위한 정치적 결사체" 정도의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그 사이 화이트 마스크 운동과 연계된 해커들이 잉락 총리의 공식 웹사이트를 해킹하여, "전 난잡한 바보 천치예요"(I’m a slutty moron)라는 문구를 올려 홈페이지를 훼손했다(우측사진).
태국 관련 외신 보도의 문제
방콕 주재 외국 기자들 거의 대다수는 진짜로 진행 중인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태국외신기자클럽'(Foreign Correspondents Club of Thailand: FCCT)은 보수적인 고참 기자들이 주도했고, 그들은 왕당파에 호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아난 빤야라춘과도 매우 친했다.
FCCT의 주도적 회원인 도미니크 파울더(Dominic Faulder)는 아난 전 총리의 요청을 받고 태국 왕실을 찬양하는 양장본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디디에르 밀레(Didier Millet)의 편집을 거쳐 2011년에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한 인생의 사업>(King Bhumibol Adulyadej: A Life’s Work)이란 제목으로 출판됐다. 파울더 말고도 여기에 기고한 외국인 글쟁이들에는 니콜라스 그로스맨(Nicholas Grossman), 줄리안 기어링(Julian Gearing), 폴 웨델(Paul Wedel), 리차드 얼릭(Richard Ehrlich), 로버트 혼(Robert Horn), 조 커밍스(Joe Cummings), 로버트 우드로우(Robert Woodrow) 같은 자들이 포함된다. 그것은 형편없고도 부정직한 책이었다. 대충 만든 찬양서가 마치 푸미폰 국왕의 재위기에 관한 최종적인 학술적 설명인 것처럼 출시된 것이다. 이 책이 태국의 기득권층과 중산층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엄청나게 팔려나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편집을 맡았던 디디에르 밀레는 아난 빤야라춘의 자만에 찬 전기도 2014년에 출판하기로 약속했고, 이 책 역시 집필은 파울더가 맡았다. 아마도 이 책은 윌리엄 워렌(William Warren)이 저술한 쁘렘 장군의 전기 <쁘렘 띠나술라논: 군인이자 정객>(Prem Tinsulanonda: Soldier and Statesman)처럼 굽신거리는 논조의 동화책이 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푸미폰 국왕의 전기와는 달리] 별로 팔리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밀레에게 그것은 아난이 제법 돈이 되는 푸미폰 국왕 전기의 출판을 자신들에게 맡겨준 데 대한 보답의 성격은 될 수 있을 것이다.
FCCT 패거리 안팍의 언론인들은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을 두려워하며, [본 논문이 작성되고 있는] 2013년까지도 그들 중 대다수는 태국 정치에 관해 정확하게 보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겁을 먹어 심지어는 '형법 제112조'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조차 거부했고, 2013년 1월 태국인 저널 편집인 솜욧 프룩사까셈숙(Somyot Pruksakasemsuk: 1961년생)이 자신이 직접 작성하지도 않은 게시물 2건 때문에 왕실모독죄 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선고받았을 때, FCCT는 그를 대변해주는 일에서 수치스러울만치 실패했다. 그것은 태국의 언론자유 일반에 최악의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태국 상황에 관한 외신들의 보도 수준은 여전히 슬플 정도로 피상적이고 오도된 상태로 남아있다. FCCT 회장인 아나수야 산얄(Anasuya Sanyal)이 2013년 6월 '채널 뉴스 아시아'(Channel News Asia)에 리포트한 내용은 태국 관련 보도에서 외신들의 가장 주류적 보도 태도가 지닌 최악의 수준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산얄은 '브이 포 타일랜드' 단체가 주장하는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빨아들인 후, 이 운동이 다양한 목적을 지녔지만 주로 부정부패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운동이라고 공손한 논조로 보도했다. 물론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그녀의 보도는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하지만 태국의 옐로셔츠 진영은 자신들의 적법성을 날조하기 위해 그녀의 무능한 보도내용을 끊임없이 인용하곤 했다. 산얄의 보도는 심지어 잉락 총리의 웹사이트 해킹에 사용됐던 "난잡한 바보 천치"라는 문구까지 그대로 보도했다. 아마도 '채널 뉴스 아시아'도 자국인 싱가포르 지도자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진 않을 것이다.
(동영상) 아나수야 산얄이 '채널 뉴스 아시아'를 통해 소개한 '화이트 마스크 운동'에 관한 보도.
화이트 마스크 운동의 특징
'브이 포 타일랜드' 운동이 지닌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는, 과거의 왕당파 운동들과 달리 초기에는 왕당파 성향을 감추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과거의 운동들은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허세에 가까운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천명하곤 했다. 화이트 마스크들이 착용하는 가이 포크스 가면의 주인공은 원래 4세기 전 영국에서 국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던 인물이다. 물론 '브이 포 타일랜드'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착용한 것은 왕당파 성향을 감추려는 전략의 일환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무지의 표현일 뿐이었다(역주: 즉, 가이 포크스가 누군지도 몰랐다는 것). 실제로 필자가 금년(2013) 5월과 6월에 걸쳐 이 운동의 지지자 중 한명인 사까판 "껭" 에암엑둔(Sakapan “Geng” Eamegdool)과 '페이스북' 상의 논쟁을 벌였을 때, 그러한 점은 충분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들이 왕당파 성향을 감추려 했던 첫번째 목적은 자신들이 태국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이 모인 새로운 단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패한 친나왓 일족의 해로운 통치로부터 태국을 구하려는 원칙적 결단 앞에서, 태국인 모두가 단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2008년 '옐로셔츠 운동'의 국제공항 점거와 폭력적 모습 때문에 실추됐던] 반-탁신 행동주의의 이미지 쇄신 노력이었지만, 또 하나의 울적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대부분의 "화이트 마스크" 시위 참가자들이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지닌 극과격 왕당파적 견해를 공공연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진) 푸미폰 국왕을 찬양하는 배너를 들고나온 '화이트 마스크' 시위대. 국제적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옐로셔츠 운동'(PAD)의 새로운 변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크세]
페폿(PEFOT), 공산당, 그리고 '민주당'의 담청색 셔츠
2013년 8월, 워라차이 헤마 의원의 국가화합 법안의 국회 심의 예정일(8.7)이 다가오자, 옐로 진영의 3번째 단체가 출현했다. 이들은 '탁신체체 타도를 위한 국민 민주세력'(People Democratic Force to Overthrow Thaksinism)이라는 단체로, 스스로를 '페폿'(PEFOT)이란 약칭으로 부르길 더 좋아했다. PEFOT은 '피탁 사얌'의 부활이었고, '피탁 사얌'과 동일한 인적 구성과 배후세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추밀원 의장 쁘렘과 가까운 예비역 군인들이 주축이었다. PEFOT은 '사남루웡'(Sanam Luang)에 상설 집회장을 설치했다.
그런데 또 다른 4번째 단체가 이 집회장에 합류했다. 이 4번째 단체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태국 공산당'(Communist Party of Thailand: CPT)을 대표한다는 수십명의 늙은 공산당원들이었다. PEFOT의 캠프에 합류한 늙은 공산당원들은 국왕에 대한 지지를 소리 높여 천명했다. 공산당원들이 동참한 것은 쁘렘 장군의 측근인 수라윳 쭐라논 장군 때문이었다. 수라윳의 아버지는 과거 '태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또한 늙은 공산당원들은 1980년대 초 '태국 공산당'이 무너졌을 때, 자신들을 사면해준 당시 총리 쁘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결국 PEFOT과 마찬가지로 늙은 공산당원들 역시 쁘렘의 사람들이었다.
이 끔찍한 동맹세력에 이제 5번째 단체가 합류했다. 이들은 [보수야당] '민주당'이 창설한 새로운 가두시위 단체로서, "담청색 셔츠"(Light Blue Shirts)라고 불렸지만, 공식명칭은 '사이 러 퍼'(Sai Loh Fah) 혹은 '번갯불 같은 회초리'를 사용했다. '민주당'은 이제 정치집회 때 군중을 동원함에 있어서 [암살미수 피해자인] 손티 림텅꾼의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독자적인 대중운동 조직을 창설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이 다양한 반정부 시위 단체들은 자신들이 보다 확장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몇몇 핵심 주제들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자신들이 반-탁신 반-와치라롱꼰 진영의 외형상의 분파들일 뿐이란 사실은 감추려 했다. 그들은 잉락 정권이 폭압적인 "의회 독재"를 하면서 태국을 몰락의 길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어타이 당'에 투표했던 태국의 다수 국민들은 전반적 관점에서 잉락 정부가 꽤 괜찮게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말 그대로 뉴스(새로운 소식)였다. 반정부 시위대는 잉락 총리가 오빠인 탁신의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비난했다. 그러한 주장은 대체로 진실이었지만, 그것은 다수 국민이 잉락 총리에게 투표한 첫번째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는 자신들의 다양한 집단 모두의 배후가 적개심에 가득찬 영향력 있는 늙은이들이란 사실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반정부 시위대는 또한 잉락이 지능이 낮다며 모욕을 가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역효과만 낳았다. 잉락 총리는 태국 및 미국의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지만, 푸미폰 국왕이나 시리낏 왕후, 그리고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어디서도 학위를 취득한 적이 없었다. 더욱이 반정부 시위대는 영어로 구호나 표어를 작성하는 데도 무능함을 보였다. 이러한 일은 그들이 잉락 총리의 영어 구사 능력을 조롱할 때 설득력을 약화시켰다. 시위 지도자 중 어느 누구도 그러한 문구들을 원어민에게 교정받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마치 자신들이 너무 똑똑해서 영어 문장의 문법적 교정 따위는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가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탁신체체 타도를 위한 국민 민주세력'(People Democratic Force to Overthrow Thaksinism: PEFOT)의 경우, 심지어 자신들의 단체명까지도 올바른 영문으로 구사하지 못한 사례에 속했다. 그것은 가장 유명한 반-탁신 성향 '페이스북' 계정인 '집중된 시민을 위한 잉락 혐오'(Dislike Yingluck for Concentration Citizen) 계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금년 5월에 '페이스북' 상의 대화를 통해 이 계정 지지자 중 한명에게 어찌하여 그것이 기묘한 명칭인지 설명해주려 한 적이 있다.)
극과격 왕당파들이 '피진 영어'(pidgin English: 토착화 혹은 단순화된 영어)로 잉락 총리의 교육적 신뢰도를 조롱하는 위선은, 이전에 생겨났다 사라진 반-탁신 운동의 또 다른 버전인 "멀티컬러 셔츠"(multi-coloured shirts: 혹은 '무지개 셔츠') 운동이 게양했던 악명높은 배너들을 연상케 만들었다. 2010년 4월, 당시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 정권의 친정부 시위대였던] '멀티컬러 운동' 시위대는 실롬 가(Silom Road)에서 친-탁신 반정부 시위대(=레드셔츠)와 대치한 바 있다. 그들은 [당시의 반정부 시위대였던] '레드셔츠 운동'을 "무식한 사람들"(uneducate people)이라며 당연한듯 조롱하곤 했었다.
(사진) 2010년 4월, 실롬 가에서 친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는 '멀티컬러 운동' 시위대. 당시 이들은 정부와 군대가 방콕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레드셔츠들을 빨리 강제진압(=학살)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전신인 '옐로셔츠 운동'(PAD)은 2008년의 시위과정에서 국제공항을 점거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 국제적으로 이미지가 실추됐다. 이후 이들은 2010년 4월 레드셔츠 시위에 대한 맞불집회를 위해 재결집했는데, 이미지 개선을 위해 '멀티컬러 운동'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마치 '제3의 중도세력'인냥 기만전술을 펼쳤다. 2013년에 출현한 다양한 반-탁신 반정부 시위대는 바로 '멀티컬러 운동'의 또 다른 변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크세]
국왕 부처의 행차
옐로 진영 지도부가 '네트워크 군주제' 지지자들을 동원해 시위를 벌이려 했을 때, 그들은 중대한 문제에 봉착했다. 그것은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 모두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시리랏 병원'의 대형 개인 병실에만 고립된 상태로 있다는 점이었다. 푸미폰 국왕의 노망 증세는 지난 몇년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또한 '궁내청'(Royal Household Bureau, RHB: 왕실청)이 시리낏 왕후의 건강상태에 관한 진실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가 2012년 7월에 쓰러진 이래 거동불능 상태가 됐다는 사실이 왕당파 진영 내에 널리 퍼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잉락 총리 정권에 대한] 반정부 공세에서 국왕이나 왕후를 이용해 왕당파 지지자들을 고무시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특히 옐로 진영의 수뇌부라고 할 수 있는 쁘렘 띠나술라논, 아난 빤야라춘, 쁘라윗 웡수완 같은 이들에겐 극도의 곤란함이 발생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 자신들이 푸미푼 국왕의 권위를 대행하면서 왕실의 지시를 받드는 것처럼 행동해왔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 및 태국 전체에 확신을 주기 위해 대단히 이례적인 움직임을 연출했다. 그것은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가 여전히 뜻을 같이하면서 아직도 [자신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2013년 7월 말, 궁내청은 국왕과 왕후 부처가 자신들의 지병으로부터 괄목할만한 회복세를 보였다면서, 더 이상 '시리랏 병원'에 입원할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다. 시리낏 왕후의 듬성한 백발은 새까맣게 염색됐고, 덜 헝클어진 모습처럼 보이기 위해 가발도 부착했다.
8월1일, 국왕 부처는 '폭스바겐'(VW) 승합차를 타고 '시리랏 병원'을 나와 쁘라쭈웝키리칸(Prachuap Khiri Khan) 도, 후아힌(Hua Hin) 군에 위치한 왕실의 여름 해변 별궁인 '왕끌라이깡원 궁전'(Wang Klai Kang Won Palace: '근심이 없는 궁전'이란 뜻)을 향해 행차길에 나섰다. [왕당파 성향] 국민들은 이 기쁜 행사를 맞이하여 '시리랏 병원' 바깥과 후아힌까지의 연도변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국왕과 왕후 모두 노쇠하고 노망이 든 모습이 역력했고, 깃발을 흔드는 군중들 사이를 지날 때도 멍하니 창문 바깥만 바라볼 뿐이었다.
시리낏 왕후는 자신의 왼손만 기계적으로 흔들어, 오른쪽 반신이 아직도 마비상태임을 증명해주었다. 왕후의 좌석은 직각으로 세워져 있었고, 또 다른 보조 좌석이 받치는 가운데 발 아래에도 받침대가 설치돼, 그녀가 차량 안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있었다. '시리랏 병원'의 의사들은 보도진에게, 국왕과 왕후가 도움 없이도 걸을 수 있는 상태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병실에서 차량까지 휠체어를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냉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또 한번의 판토마임이었다. 사실 그것은 태국의 연로한 국왕과 왕후가 여전히 건강하며 왕당파 기득권 진영을 지휘하고 있다는 망상을 창조해내기 위한 연극이었다. 이날 촬영된 사진들 중 가장 잊혀지지 않는 사진을 보면, 시리낏 왕후가 창문 밖으로 이해하지 못할 시선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으스스하게 입을 벌린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아마도 웃음을 지어보이려 했던 것 같다.
(사진) 2013년 8월 1일 후아힌으로 이동하는 시리낏 왕후의 모습. 2014년 5월 현재까지, 시리낏 왕후의 공개석상 등장은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크세]
아직! 윗 글을 읽지도 않았지만, 우리 울노님의 노고는 말로, 글로 표현치 못 할 만큼!! 경의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홧팅!! 울트라-노마드!! 진 짜 홧 팅 !
로컬식당에서 저녁먹고 시방 삼실 도착! 깔리육 13편!!! 등장.... 취중이라 미안하지만, 이글 올리고 샤워하고...반드시 완편보고 잘 것입니다.
로컬식당 중에 올드마켓 바로 옆에 Father Restaurant 이 있습니다. 대장은 Langdy(Face Book 검색해 보세요!)라는 지난 2월에 네덜란드 넘과 결혼한 여성인데요, 중국계 크메르가족입니다. 펫북보시면 알겠지만, 깔끔한 인상에 매우 똑똑해서 중국, 한국, 일본 가이드북에 이름이 올라갔어요! 아!! 낼 다시 연결하겠습니다.
휴~ 이집트는 다시 군정으로 복귀하는 형식을 거의 다 마쳐 가네요! 실명으로 다 까발려 져버린, 외신기자들! 그들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기자로서의 신뢰는 많이 상실했다고 봐야겠지요.
현재의 쿠데타 상황과 비자런이 안되면서 많은 태국교민들이 문의해 옵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교해 달라고....! ㅎㅎ 리차드가 뭘 아는게 있습니까만, 이들의 전화통화가 점점 늘어 나니 좀 걱정이 됩니다. 캄보디아 교민사회도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되구요, 이미 많은 태국교민들이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또 한가지 걱정거리가 늘어난 셈이지요! "희망터글지기"님! 무탈하시고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왕비의 사진이 많은 것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왕실 내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계도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사실 아직도 잘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것이... 왕실과 주변의 역학 관계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왕은 왕세자가 차기 왕이 되기 원하는데 왕세자는 탁신과 친분이 깊어 왕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고, 왕비도 왕세자가 왕이 되기를 바라긴 하는데 차라리 왕의 아들이 차기 왕이 되어 섭정을 하려던 마음이었다가 몸이 망가진거고, 왕당파와 추밀원의 패거리들은 둘째 공주를 내세워 막후에서 대대손손 영향력을 발휘하게끔 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요?
첫댓글 이제 마지막 한편이 남았고요..
이번 편에서 중요한 점은
태국 수꼴 진영이 이집트 사태에서 자극을 받아 대담해졌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유사시에 몇천명 탱크로 깔아뭉길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이죠..
둘째는 태국을 다루는 외국인 언론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긴 합니다만..
그냥 실명으로 다 까버렸네요.. ㅎㅎ
아직! 윗 글을 읽지도 않았지만, 우리 울노님의 노고는 말로, 글로 표현치 못 할 만큼!!
경의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홧팅!! 울트라-노마드!! 진 짜 홧 팅 !
로컬식당에서 저녁먹고 시방 삼실 도착! 깔리육 13편!!! 등장....
취중이라 미안하지만, 이글 올리고 샤워하고...반드시 완편보고 잘 것입니다.
로컬식당 중에 올드마켓 바로 옆에 Father Restaurant 이 있습니다.
대장은 Langdy(Face Book 검색해 보세요!)라는 지난 2월에 네덜란드 넘과 결혼한 여성인데요,
중국계 크메르가족입니다. 펫북보시면 알겠지만, 깔끔한 인상에 매우 똑똑해서
중국, 한국, 일본 가이드북에 이름이 올라갔어요! 아!! 낼 다시 연결하겠습니다.
"쏨또 찌란~~~~ 퍽 스라 하으이..."
죄송합니다. 시방 취했어요!!
세상만사 돌아가는 일들이 오늘 하루 우째 맨 정신에 잠을 들게 하겠습니까??
휴~ 이집트는 다시 군정으로 복귀하는 형식을 거의 다 마쳐 가네요!
실명으로 다 까발려 져버린, 외신기자들!
그들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기자로서의 신뢰는 많이 상실했다고 봐야겠지요.
현재의 쿠데타 상황과 비자런이 안되면서 많은 태국교민들이 문의해 옵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비교해 달라고....! ㅎㅎ 리차드가 뭘 아는게 있습니까만,
이들의 전화통화가 점점 늘어 나니 좀 걱정이 됩니다.
캄보디아 교민사회도 점점 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예상되구요,
이미 많은 태국교민들이 이주를 시작했습니다. 또 한가지 걱정거리가 늘어난 셈이지요!
"희망터글지기"님! 무탈하시고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태국 사태로 술먹는 회수가 거의 4분의1로 줄어들었었는데요...
깔리육 한편 내보내고 나니, 어제 밤엔 안 마실 수가 없더군요..
날씨도 너무 좋고..
좋은 뮤지션들이 난장에서 연주도 하고 있길래
아침까지 마시고 들어와서 자다가 이제 일어났습니다..
회원님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
마지막 왕비의 사진이 많은 것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왕실 내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계도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사실 아직도 잘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것이... 왕실과 주변의 역학 관계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왕은 왕세자가 차기 왕이 되기 원하는데 왕세자는 탁신과 친분이 깊어 왕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이고,
왕비도 왕세자가 왕이 되기를 바라긴 하는데 차라리 왕의 아들이 차기 왕이 되어 섭정을 하려던 마음이었다가 몸이 망가진거고,
왕당파와 추밀원의 패거리들은 둘째 공주를 내세워 막후에서 대대손손 영향력을 발휘하게끔 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요?
뭐.. 대충 그러한 셈이죠..
하지만 변수는 남아 있습니다.
왕세자의 아들들이 존재하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