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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기차 여행 이야기를 하기 전에 기차와 나의 인연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사실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무려 일주일간의 여행을 결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는 학교를 따라 경상북도 임기라는 작은 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다. 하루에 버스가 예닐곱 번 들어오는 그 산골 마을은 언덕배기에 영동선 기찻길이 놓여있었고, 소박한 간이역사가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빠앙~’, 조용한 산촌을 깨우며 거대한 철마가 산을 휘감고 들어올 때면 나는 밖으로 나와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곤 했다. 사람과 자연 이외에는 딱히 볼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그 거대한 기차는 나에게 경외의 대상이었고, 명절을 맞이해서 기차를 타고 타지로 나갈 수 있는 날이면 안방 서랍에 넣어둔 기차표를 시간 날 때마다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기차를 타는 꿈에 부풀어 있을 정도였다.
그 기차를 보면서 나는 커서 기차 승무원이 될 것이라 결심했지만, 부모님께 그 말을 하지는 못하고 남몰래 짝사랑(?)했던 기차였기에 그 기차를 일주일간 마음껏 탈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여행의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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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행에서 한반도를 반시계방향으로 크게 돌아볼 생각이었다. 예상 이동거리는 약 1,500km. 우리나라 크기를 생각할 때마다 서울~부산 400km를 떠올리던 나에게 1,500km는 참으로 길게 다가왔다. 또한 여행을 하게 되면서 1,500km라는 거리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 문화를 실감할 수 있었고, 1,500km 거리만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이 있는 대한민국을 만나볼 수 있었다.
첫 번째 목적지인 광주에서는 광주오미(光州五味 : 송정리 떡갈비, 광주김치, 오리탕, 보리밥, 한정식)를 푸짐하게 누려보고 싶었다. 광주송정역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송정리 떡갈비, 저녁에 같은 학과 친구 어머님께서 사주신 오리고기, 다음날 아침 어머님께서 챙겨주신 광주김치와 보리밥으로 우리는 광주오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볼 때마다 많은 과거를 담고 있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던 광주. 나는 무궁화호 열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멀어져가는 광주를 바라보며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5•18, 김대중, 무등산, 기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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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전남보성에서는 녹차밭과 해수욕장을 가볼 생각이었다. 녹차밭 관광으로 유명한 보성의 대한다원은 눈과 몸,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곳으로 그 곳에 있는 동안만큼은 한 여름의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대한다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율포 해수욕장은 사람이 많지 않아 여름날의 태양을 피해 휴식을 즐기기에 참으로 적합한 곳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기울어질 때 나는 전남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수는 시내에서 조금만 빠져나오면 밤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 밤이 낭만적인 곳이다. 여수의 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오동도와 돌산공원에서 제법 사진작가처럼 삼각대를 펼치고는 사진을 찍으며 그곳의 소중한 야경을 담았다. 그리고는 여수의 한 찜질방에서 둘째 날 밤을 아쉬움에 고이 접어 보내며 또 한 글귀를 적어 내려갔다. “이 밤이 끝나지 않았으면…”
셋째 날 아침, 대한민국의 3대 일출 명소인 향일암에 갔지만 아쉽게도 해돋이를 보지 못하고 진주로 향했다. 그 곳에서 군 시절 선임병을 만나 관광 안내를 받으며 한나절을 보내고는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만에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넘어오니 ‘문화적 시차’가 느껴질 정도로 말투나, 음식, 사람들의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밀짚모자에 여행가방, 카메라용품 가방을 주렁주렁 메고 영락없는 여행자 행색으로 찾아간 해운대에서 아는 형을 만나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었다.
넷째 날, 동해남부선을 타고 도착한 경주에서는 자전거로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보문단지, 안압지, 첨성대, 대릉원 등등. 사시사철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그 곳에서의 자전거 여행은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밤에 찾아간 경주 안압지에서는 전문가용 카메라를 메고 다니는 나에게 어떤 할아버지께서 가족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하셨고 그 분께 소중한 가족사진을 찍어드리는 가슴 따뜻한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사진을 인화해서 우편으로 보내드렸는데, 잘 받으셨는지 모르겠다.
다섯째 날, 조용한 도시 영주와 제천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여섯째 날 아쉽게도 구름에 갇혀 볼 수 없었던 정동진 일출을 뒤로 한 채 돌아온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은 지난 한주간의 무더위를 씻어 주듯이 시원스러운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청량리역 플랫폼 벤치에 걸터앉아 분주한 도시인들 틈에 끼여 여행 수첩에 마지막 구절을 적어 내려갔다. “지금 내리는 비는 마치 여행이라는 연극의 막이 되어 여행과 현실의 경계선을 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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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행이란 수많은 미지의 타자(他者)와의 소통’이라고 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몇 년간 같이 살았던 옆집 사람도 모르는 삭막한 세상이지만, 여행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고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아저씨를 만났을 때 경험하게 되는 어색한 정적은 왠지 모르게 우리를 위축되게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된 버스 옆자리의 아저씨와는 어느새 한국 야구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는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관계성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먼저 열어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메고, 까무잡잡하게 타버린 피부에 카메라를 챙겨든 청년을 경계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행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보며 ‘우리나라는 참 따뜻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단절해 버린 채 살아가는 도시 생활에 대해 반성해볼 수도 있었다. 수많은 미지의 타자와의 인연 만들기. 그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싶어 하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기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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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 기차여행의 묘미는 기차시간표라는 ‘규칙성’과 일주일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우연성’에 어우러져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누구나 계획을 짜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계획의 여행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디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여행이 더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계획 없이 떠나는 것은 가지고 돌아올 수 있는 추억보다 무모하게 시간 낭비할 위험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일로’ 기차여행에는 지켜야할 것이 있다. 다음 코스를 위해서 정해진 시간에 기차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러나 만약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다음 열차라는 몇 시간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여행의 장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지켜야 할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은 계획과 우연을 미묘하게 조합시킬 수 있는 매력을 가진 여행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측 불가능한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내 여행에 몇 차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둘째 날에는 동행했던 친구들이 서울에서 걸려온 급한 연락을 받고 여행을 끝마쳐야 했고, 작렬하는 한여름 더위는 혼자서 여행을 끝마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홀로 남겨진 것이 이 여행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내 마음이 가는대로 우연히 들렀던 곳에서 그 어떤 경험보다 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에서는 우연히 들어가게 된 안압지에서의 귀중한 만남. 기차 시간이 남아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도착한 제천의 달빛 가득한 어느 공원에서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삶의 감사한 것들을 깨닫게 된 그 순간. 그 아련한 추억들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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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와 전국일주라는 막연한 동경심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던 ‘내일로’ 기차여행을 통해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의 이색적인 여행에서 돌아온 후 여전히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과 함께 가장 힘들다는 고시 공부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가끔씩 여행에서 찍은 사진과 여행 후기를 읽어볼 때면 그 곳에 다시 간 듯, 꿈결 같은 행복감에 빠져들곤 한다. 여행이란 한번 갔다 온 것이 끝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그곳에 대한 기억의 방을 만들어 놓고 언제든지 다시 가볼 수 있도록 한 조각 추억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을 요즘 들어 알게 된 것 같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언제나 동경하는 꿈같은 젊은 날의 추억에 대해서 말했다. 일주일의 기차 전국일주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 여름의 작은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언제나 동경하는 그것들은 편안한 일상의 자리를 과감히 털어버리고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항상 도전과 새로움의 연속이다. 그것이 매우 힘들어 지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성장이 없고, 성장이 없다면 우리 삶은 정말 무미건조한 삶이 될 것이다. 이 여행은 이런 인생의 진리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내게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내일로 향하는 기차여행을 다시 한 번 떠나보고 싶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미지의 그 곳을 찾아서…
첫댓글 올해 내일로 여행수기 수상작인가 봐요?
네 올해 여행 수기 수상작입니다 ㅎㅎ
와우ㅋㅋㅋㅋㅋㅋ 멋져요 ㅋㅋㅋㅋㅋㅋㅋ
담아갈께요 :) 글도 그렇고 참 멋지시네요 '-'ㅋㅋ
와 멋지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