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3
그때였다.
산방의 문이 열리면서 유형원과 박지화가
불쑥 들어왔다.
"선생님, 오늘 강의는 끝난 줄 알았는데요?"
박지화가 심통난 얼굴로 말했다.
"자네들은 웬일인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는데 지함이 오질않아서."
유형원이 대답했다.
"지함에게만 특별히 해주실 강의가 따로 있습니까,
선생님?"
박지화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과거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니 물러가게."
"제가 과거 보자고 온 게 아니잖습니까?"
박지화가 화담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대들 듯이물었다.
산방의 학인들은 대부분 대과를 준비하는수험생들이었다.
다만 이지함과 박지화는
원래부터도가를 수련하기 위해
화담 문하에 들어온사람이었다.
그런 그로서 화담이 지함에게만 남몰래강의를 하는 것에
시샘이 날 것이 당연했다.
"형님."
"그만 두게.
자네가 혼자서만 들어야 할 강의가있단 말인가?"
지함이 팔을 잡아당기자 박지화는 홱 뿌리치고
산방을 뛰쳐나갔다.
"선생님, 제가 따라가서 위로하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지화는 성미가 원래 불 같아서
조금지나면 저절로 수그러든다네.
하여튼 술자리가 있다니어서 가보게.
여보게, 유형원."
머뭇거리던 유형원이 뒤돌아섰다.
"예."
"대과에 나올 이야기가 아니니 섭섭히 생각 말게.
그저 황진이가 다녀간 것을 들어 이지함이 묻길래
대답한 것일 뿐이네.
자네들도 과거란 짐을 벗거든실컷 얘기하세."
"예, 알겠습니다."
이지함은 유형원과 함께 산방을 나섰다.
"여보게, 지함."
그때 화담이 다시 지함을 불렀다.
"오늘 이야기가 별 것 아니니 마음에 두지 말게.
세상 이치를 밝힌다는 것은 끝이 없다네.
그 몇마디로 세상을 통째로 안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화담은 이야기를 하면서 지팡이로 산방 바닥을 세번 두드렸다.
지함은 산방을 내려가 학인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는주막으로 갔다.
박지화는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마시고있었다.
지함이 다가가 술 한잔을 가득 부어서 권하자
박지화는 못 이기는 척 받았다.
"형님, 황진이를 어떻게 했는지 여쭈러 간 것인데
그러십니다.
형님두, 참."
박지화가 지함을 쏘아보다가 술잔을 털어붓듯이 마셨다.
"이봐, 지함. 정말인가?"
"그럼요. 정말이 아니구요."
"그래 황진이를 어떻게 하셨대?
삼삼한 물건을 왜그냥 보내셨다는 거야?"
"우리가 엿듣고 있었기에 그러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실없는 소리. 맘만 있으면 붙들어 두었다가
우리가 물러간 뒤에 같이 자면 되지.
보내긴 왜보내나."
"아이구, 형님두. 그래서 서운하신 게로군요.
그렇지만 두 사람은 이미 기를 나누었답니다."
"무슨 소리?"
박지화가 지함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학인들도술잔을 들다 말고
지함을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늙으셔서요.
그래서 마음으로만 취했답니다. 허허허."
"이런 젠장할. 그래도 그렇지,
한번 품기라도해야지 굴러온 떡을 그냥 보내?"
박지화가 아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질펀한 음담패설이 오가고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박지화도 어느새 산방에서 있던 일은 다 잊고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술자리가 파하자 지함은 처소로 일단 갔다가
잠을자지 않고 삼경이 되기를 기다렸다.
화담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번 두드린 것은
삼경에 다시 오라는뜻이었던 것이다.
삼경이 되자 지함은 깜깜한 계곡을 타고
산방으로 올라갔다.
역시 화담이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선정에 들어있었다.
"선생님. 지함입니다."
"들어오게."
화담은 지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글이 빽빽히 적혀있는 종이를 펼쳐놓고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만 전할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보게 지함.
정휴 행자가 읽는다는
금강경의공(空)이 바로 기(氣)라네.
기가 한번 움직이면 색이 나오고,
색이 돌아오면 기가 되네
일묘연(一妙衍)만왕만래(萬往萬來)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이라고했다네.
하나에서 우주 삼라만상이 다 시작된 것이어서
나갔다가 들어왔다 한다는 것이라네.
그러나 아무리많은 모양으로 하나가 변해도
그 근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네.
바로 이 하나와 삼라만상이
색즉시공일세.
하나가 공이라면 삼라만상이 색이라네.
그러면 이 하나는 무엇인가.
태극이고 기라네.
하나와 삼라만상이 씨줄 날줄처럼 얽혀 북질을 하고있는데
그것이 무슨 힘으로 이루어지는가.
바로기라네."
"그렇다면 삼라만상은 알겠는데
하나인 근본은어디에 있습니까?"
화담이 빙그레 웃었다.
"내가 자네에게만 은밀하게 말해주는 것이니
정신차려 듣게.
다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곧 알게 되네.
그건 그렇고, 자네가 물은 것부터대답해 줌세.
하나인 근본이 어디냐?"
"......"
"내가 오늘 그걸 말해줌세."
"명심하여 듣겠습니다."
"색즉시공이라고 했지 않았는가?
바로 삼라만상을알고 있으면 하나도 알고 있는 것
삼라만상이 하나 아닌가.
선가(禪家)의 공안중에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一歸何處)라는 말이 있는데,
무슨뜻인가?"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간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공안입니다."
"맞네. <천부경(天符經)>으로 들어가세."
"천부경>이 무엇이옵니까?"
"선후천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라네
이 땅에 생명이나고 나라가 서던 때부터 있었던
하늘의 책이지."
"설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하늘이 하는 말이니
한마디도 놓쳐서는 안 되네.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하고,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난다네."
"시작했으나 시작하지 않았고,
끝났으나 끝나지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들어보시게. 자네가 묻는 그 근본은
시작이라고는하지만 시작됨이 없고,
끝이라고 하지만 끝남이 없는것이라네."
"그것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의
이치이옵니까?"
"그렇다네. 정휴나 황진이가 색을 보았다면
자네는공을 보았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완전한 하나는아닐세."
지함은 화담의 말에 넋을 잃어갔다.
화담은 붓을 들어 천부경 여든한 자를 바람처럼써놓았다.
화담은 진지하게 천부경을 설했다.
" 일시무시일 석삼극 무진본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천일일 지일이 인일삼
일적십거 무궤화삼
천이삼 지이삼 인이삼
대삼합육 생칠팔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櫃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운삼사 성환오칠
(運三四 成還五七)
일묘연 만왕만래 용변부동본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본심 본태양앙명 인중 천지일
(本心 本太陽昻明 人中 天地一)
일종 무종일(一終 無終一)
지함은 고개를 들어 눈을 번득이며 화담의 강의를들었다.
만물이 비롯되고, 혼이 비롯되고,
모든 학문이 비롯된 원천이라는 천부경.
화담은 학인들에게는 한번도 가르친 적이 없는경전을 놓고
지함에게만 설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나는 우주 만물의 시원.
이 하나의 시원은무(無)하여
자연히 본래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것이지.
어느 무엇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네.
그러므로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없어지지 않는 게지.
쪼개고 쪼개다 보면 작용이 각기 다른 것으로
나누어볼 수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그 근본은 변하지않는다네
. 변하게도 하고 변하지 않게도 하는 것,
그 속에 기가 작용하는 것이라네.
셋으로 나누어진 것은 하늘이 그 하나이고첫번째네
. 땅이 그 하나이고 두번째요,
사람이 그하나이고 세번째라네.
우주의 시원인 하나가 여러 가지 활동으로 주름을잡아
삼라만상으로 수없이 불어나도 근본인 하나는줄지 않고
얼마든지 불어나게 할 수 있지.
그불어나게 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천지인(天地人) 셋이라네
.이 셋이 서로 관련된 작용을 하여 그리 되는 것일세.
천지인 셋이 어떤 관련을 가지며 작용하는가?
천지인 셋에도 각각 음양이 존재하네.
이에 따라 두기(氣)가 있어
서로서로 음과 양이 어울리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작용하게 된다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천지인 셋이지만
천이라는 하나속에도
음양과 천지인 삼극(三極)이 다시 포함되어있어서
천을 나누면 천천(天天), 천지(天地),
천인(天人)으로 되어 있네.
이것은 지와 인에서도마찬가지라네.
지천(地天), 지지(地地), 지인(地人)이 있고
인천(人天), 인지(人地), 인인(人人)이 있는것이지.
천이 지와 어울릴 때,
천 속에 잘게 나누어진천천(天天)의 양과
지(地) 속의 그 지천(地天)의 음이서로 끌어당겨
인(人)속의 인천(人天)을 발동시켜함께 어울리게 되네
. 인(人) 속의 인천(人天)이 한몫끼게 되자마자
천인(天人)과 지인(地人)이 움직여서,
인인인지(人人人地)와 천지와 지지도 다 따라
관련을가지게 되지.
이렇게 어울리는 경우에는 이 세상에 성인이 나타나
크게 활동하는 때가 될 것이네.
이것은 하나의 예를 간단히 든 것이지만,
삼극이각기 특정한 작용을 하여도 하나가 움직이면
다 따라움직이게 되는 것일세
왜 그런가 하면 근본이하나이기 때문일세.
그러므로 우주 속의 모든 것은 그 근본의 몸이하나라네.
하나 하나의 움직임이 서로 빠짐없이
영향을 주고 받게 되어 있지.
이런 점을 살펴보면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에
인과 응보의 법칙이 있게된다는 것을 이해할 만하고,
순간적인 생각 하나도함부로 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야.
크게 쪼갠 것으로 볼 때 3이지만
음과 양으로 나누어 볼 때는 6이 된다네.
이 6에 천지인 중에서 또어느 하나가
먼저 변화의 활동에 관련을 갖는 그순간에 7이 생하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8과 9가생하게 되네
.물질의 성질과 모양과 가지수가불어나는 것을
간단히 밝힌 부분이라네.
9에 하나가또 더해지면 10이지.
이제까지는 수량이 많아짐을 말하였네.
이제나타나게 된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3과 4가하고,
완성되어 여물게 하는 일은 5와 7이 한다네.
10까지의 수가 나타나면 나타난 그 수가 또 일을 하게되네.
3과 4는 기계적 조직과 순차적 차례에 작용하여
움직이게 하는 일을 맡는다네.
사람의 몸으로 치면
상중하의 3절과 팔다리의 4지가 있어 움직이게 하고,
일년을 보면 3개월씩 4절기로 돌아가고 있지 않는가.
5와 7은 성장 발전하여 내용을 여물게 하는 일을하지
예를 들면 사람에게 오장이 속에 있어 안의일을 맡아 하고
얼굴에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한입, 이렇게 하여 일곱이 있지
.이 일곱이 사람의 밖의일을 하여
하나의 인격을 성숙시켜가는 것과 같은것일세.
우주 속의 물질에는 오행의 원리가 들어있고,
태양의 빛에는 7색이 그에 관련하여
만물을성숙시키고 변천시키는 것도
그 한 예일 것이야.
하루를 새벽, 오전의 낮, 점심, 오후의 낮, 저녁으로
나누어 쓰지.
그 사이를 새벽에 일어나 아침 먹고,
오전에 일하고, 점심 먹고, 오후에 일하고
저녁 먹고잠을 자는 일곱 마디로 살아감으로써
삶을 여물게하는 것이니
이것이 5와 7을 쓰는 이치라네.
일묘(一妙)는 삼극(三極)의 근본.
우주 삼라만상의근본인 하나를 말하는 것일세.
표현하기 힘든 것을묘라고 하지.
이 일묘가 활동을 펴서
만번 되풀이변화를 일으켜 사라져가고,
또 그렇게 변화를 일으켜나타나서
작용은 변하여도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네.
어느 무엇에 의해서도 늘지도 줄지도 않는 이치인것일세.
본(本)은 마음(心). 사람의 마음 속 마음인 참마음이
우주의 본인 하나(本心)라네.
태양도 그 마음의 밝은 특성을 본받아
밝은 광명을 내는 일을하게 된 것이야.
그러니까 마음은 사람(人)의알맹이(中).
천과 지에서도 그 본바탕을 찾아보면'하나'인 것이지.
하나는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없어지더라도 남게 되는 마지막이라네.
그러니 영원한것이라고 할 수 있지.
하나는 곧 마음이니 만물의 본일세.
이 하나는 어느무엇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네.
본래 그냥그대로 스스로 있는 것이야.
그러니 다른 무엇이그것을 없앨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고 변질시킬 수도 없다네.
모양이 없으면서도 영원히 살아 있는 것.
모양이없으면서도 모양 있는 모든 것을 나타내고,
모양이없으면서도 모양이 없으면서라고 말도 할 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천부경>이라네.
수(數)의 변화는 물상(物象)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
봄과 여름까지는 역수(逆數)로 자라고
가을과겨울에는 순수(順數)로 수장(收藏)하는 것이네."
"이것이 선천과 후천을 가르는 이치이옵니까?"
그렇다네. 여기에서 수가 나오고 만물이 나오네.
이 속에 자네의 친구 안명세가 있고,
정혼했던 여인이있는 것일세.
그들의 후천 세계를 바라보게.
헤아리고헤아리다 보면 언젠가 보일 날이 있을 것이네."
크게 감동을 받은 지함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화담에게 큰절을 올렸다.
화담의 강의는 그렇게고개숙인 지함의 머리 위로도
계속 떨어졌다.
산방에 돌탑을 쌓으라는 시험으로
지함의 가슴 속에남아 있던 미망을 털어낸
스승 화담 서경덕.
그는 지함이라는 큰 그릇에
도를 가득 담아 주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
오늘도 머리아픈 글이였죠?...
편하고 즐거운 회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