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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에세이포럼
22기-8차시
일시 : 2024년 4월 9일 (화) 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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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1 | 가짜 돈 진짜 돈 | 김연희 | 4 | 예수백 |
2 | 얼굴에 다시 분 바르다 | 배정순 | 5 | 이혜경 |
3 | 지 팔, 지 흔들기 | 민창현 | 6 | 권춘애 |
4 | 너무 나이가 많아서 | 이경자 | 2 | 김순향 |
5 |
합평순서 / 권춘애 김순향 김선애 김연희 김인옥 민창현
박동조 박희자 배정순 예수백 이경자 이혜경
1. 가짜 돈 진짜 돈 /김연희4
1.김 할머니는 치매로 입소하신 분이다. 할머니는 베게 밑에나 이불 밑에 돈을 숨겨두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할머니는 돈 이만 원이 없어졌다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찾고 있었다. 급기야 특정 직원을 꼭 찍어 가져갔다고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2. 해결 방법을 고민한 끝에 만 원짜리 가짜 돈을 만들었다. 지폐를 똑같이 만드는 것은 위법이라 현 지폐보다 작게 복사했다. 돈의 뒷면에는 이면지 도장을 찍었다. 특정 어르신의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작은 글씨로 어르신의 이름도 적었다. 할머니에게 가짜 돈 이만 원을 건넸다. 할머니는 사용할 수 없는 가짜 돈을 어딘가에 숨길 것이다.
3. 나는 노인 시설을 20여 년 넘게 운영하면서 요양원에 입소한 노인이 재산은 많아도 본인이 사용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사용할 수 없는 돈은 가짜 돈과 마찬가지이다. 치매나 뇌졸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꼭 치매나 뇌졸중이 아니라도 나이가 들면서 노화는 진행되고 뇌도 노화된다. 다양한 질환으로 스스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면 자녀들이 돌보기 어려워 요양원에 입소하게 된다.
4. 대부분 사람들은 여유로운 노후 생활을 꿈꾸며 현금이나 부동산을 모아둔다.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원에 입소 하게 되면 재산은 대 다수가 자녀들이나 친지에게 상속한다. 유병 기간은 길다. 우리 요양원에도 십 년 넘게 계시는 분들이 많다. 상속받은 현금이나 부동산은 부양비용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상속받은 재산을 오래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양의무자인 상속자들은 몇 년 사이에 이런저런 사연으로 재산은 사라질 수 있다.
5. 어떤 할머니는 큰 저택에서 살았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면서 우울증이 왔고 이후 치매로 진행되었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집에 몇 번 불을 낼 뻔했다. 자녀들은 어르신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요양원에 입소를 권유하여 입소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처분하여 자녀들이 나누어 갔다.
6. 할머니는 1인실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1인실을 사용하려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자녀는 혼자 자면 외롭다는 이유로 1인실 사용을 한사코 말렸다. 할머니는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4인실 방을 사용해야만 했다. 4인실 방에서는 어떤 어르신은 뉴스를 보고 싶어 하고 어떤 어르신은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한다. 아침잠이 많으신 분, 초저녁에 잠들고 싶은 어르신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다.
7. 할머니는 치매 초기라서 요양원에 입소하고도 평소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변비가 있다고 유산균을 배달시켜 드시고 싶어 했고, 미용실에 가서 파마도 하고 싶고, 가끔 외식도 하고 싶어 했다. 개인 화장품도 사서 사용하고 싶어 했다.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려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데 할머니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진짜 돈이 없다. 부양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녀들은 가끔 와서 농담삼아 “노친네 살 만큼 살았다.” 한다.
8. 부동산이나 현금은 자녀들이 한꺼번에 상속받아 갈 수 있는 돈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속해 버린 돈은 어르신이 사용할 수 없는 가짜 돈이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노인들에게 진짜 돈은 연금같이 매달 나오는 돈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국민연금이나 주택연금 같은 것은 당사자가 죽을 때까지 매달 나오는 돈이다. 매달 나오는 돈은 자녀들이나 친지들이 한꺼번에 가져갈 수 없는 돈이다.
9. 어떤 노인은 주택연금과 국민연금 등 매월 나오는 연금이 입소비를 내고 조금 남는다. 남는 돈으로 손자들이 면회를 오면 용돈을 준다. 요양원에서는 용돈 관리가 안 되는 어르신을 위하여 용돈 관리도 해 드린다. 겨울이 되면 배추쌈이 먹고 싶다고 하면서 배추를 사 달라고 하거나 보약을 지어달라 하기도 하신다. 철마다 외출복도 사 입으신다. 영양제도 사고 화장품도 구매하고 가끔 외식도 한다. 어르신은 언제나 당당하다.
10. 매달 나오는 돈도 본인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예도 있다. 백 세가 넘은 어떤 할머니는 가까운 가족이 없어 동생의 손자가 보호자로 되어 있다. 직계 가족이 없어서 입소비도 면제된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기초연금이 올해 기준으로 매월 삼십삼만 원 정도 나온다. 기초연금은 본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지만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친지가 관리하고 있다.
11. 할머니는 변변한 외출복 하나 없다. 얼마 전에는 영양제와 유산균을 드시고 싶다고 하였다. 손자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손자는 바쁘다는 이유로 몇 년 동안 얼굴 한번 내밀지 않는다. 우리는 어르신 돈 관리는 요양원에서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주장해 보았지만 묵묵부답이다. 어르신은 그 돈을 사용할 수 없다.
12. 부동산이나 현금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관리할 수 없으면 사용할 수 없으니 베게 속에 넣어둔 가짜 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매달 나오는 현금이 있어도 친지라는 이름으로 당사자를 위해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사용할 수 없는 가짜 돈이다.
13. 유병장수 시대, 노후를 위해 진짜 돈이 필요하다. 젊은 날 노후를 위해 준비한 돈들이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진짜 돈이 되길 바라본다. 만일 치매가 오더라도 내 돈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고 삶의 질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해 본다. (14.6)
2. 얼굴에 다시 분 바르다/ 배정순 5
1. 단체장 취임식 날, 평소와 달리 다들 머리나 옷 얼굴화장에 정성을 들여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초청 인사들의 지루한 하례 인사가 끝나고, 새로운 회장님과 인연 따라 사진 촬영이 이어졌다. 분위기에 동승해 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2. 집에 돌아와 모바일로 배달된 사진을 훑어보았다. 화사한 얼굴 속에 흰 쌀에 뉘처럼 우중충한 노인 한 사람, 가까이 보니 그 얼굴의 주인공은 나였다. 자신의 늙은 모습 보고 기분 좋은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고 이미 지난 일을 돌이킬 순 없는 일, 오늘 같은 날은 화장이라도 좀 할 걸 싶은 뒤늦은 아쉬움이 일었다.
3. 코로나 이전에는 나도 화장 안 하면 밖에 못 나가는 줄 알던 사람이다. 지난한 세월 마스크가 생필품으로 자리하면서 어느결에 색조화장품이 화장대에서 사라졌다. 괴질이 물러가자 다들 마스크를 벗고 분을 발랐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 나이에 누가 봐줄 거라고 귀찮게 화장할지 하는 마음에, 또 나이 들면 외모보다는 마음 다스림이 먼저라고 했던 들은풍월도 민낯으로 다니는 데 한몫했다. 생각해 보니 얼굴에 분 바르지 않은지가 몇 년은 된 것 같다.
4. 해묵은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서유럽 여행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호기심 찬 눈으로 거리를 걷다가 두 여성의 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검은색 단정한 정장 차림에 주근깨 송송한 얼굴, 화장기없는 젊은 여성이 담배 피우며 거리를 활보하는 전경이 이채로웠다. 서류 가방을 들고 가는 것으로 보아 사무원 같았다. 밝은 대낮에 여자가 끽연을 즐기며 걷는 모습!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현상이어서 놀라웠다. 이상한 건 놀라 쳐다보는데도 대화에 열중할 뿐,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들의 무관심한 태도다. 분명 비호감을 느낄 요소인데, 나에게는 자기 일에 충실한 당당한 여성상으로 비쳐 신선해 보였다.
5. 숙소가 프랑스 루르드 성모 성지 곁 호텔이었다. 들고 나면서 보니 근처 카페에 노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곱게 단장한 노인들의 환담을 즐기는 모습이 민낯인 젊은 여성들과는 상반된 상황이었다. 의아해서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여기에서는 곱게 화장한 사람은 젊은 사람이 아닌 노인들이라고 했다. 할 일이 많은 젊을 때는 일에 열중하고, 늙은이는 나라에서 지급하는 연금으로 그간 돌보지 않은 나를 곱게 가꾸며 유유자적 노년의 여유를 즐긴다는 것이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6. 선진국 다운 합리적인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은 젊음만으로도 예쁜데 굳이 바쁜 시기에 외모 치장에 시간과 돈을 쓰는 건 낭비로 여겼을 수도 있다. 노년에 들면 원치 안아도 삶이 헐거워지기 마련, 카페 노인들의 모습에서 그 여유를 읽을 수 있었다. 노인이지만, 화장 덕인지 노인 특유의 궁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7. 내 나이가 지금 그 연배쯤 되리라. 그때 나도 그 노인들처럼 멋진 삶을 살리라 다짐했었다. 한데 노년에 이르는 동안 그 다짐을 까무룩 잊어버렸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화장기 없는 모습이 이 나이에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진 한 장에 충격받는 걸 보면 그 다짐이라는 것, 영혼 없이 다음에 밥 먹자는 약속만큼 믿을 게 못 되는 것 같다. 당장 삶 속에서 부실함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8. 때맞추어 요즘 유튜브 창에 나 같은 사람을 겨냥해 오린 것 같은 메시지가 떠 있다. ‘나이 들수록 내면보다 외모가 우선인 이유’라는 제하의 글이다.
9. “아무리 잘생긴 사람도 관리하지 않으면 관리받은 못생긴 얼굴보다 못하다. 링컨이 40세가 넘으면 자신 얼굴에 책임지라고 했던 말은 외모가 현재를 살아가는 경쟁력이라는 것과 외모 관리에 중요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스트레스 해소, 자신감에도 외모 가꾸기가 영향을 미친다. 살아온 삶은 고스란히 얼굴에 흔적을 남긴다.”
“늙을수록 외모가 현재를 살아가는 경쟁력이다!” 이 말은 백세시대를 살고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현인이 하 답답해 던지는 일갈 같다. 오래 살려면 외모 관리도 중요하다는 강한 설득력이 느껴진다.
10. 게으름에 빠진 마음을 추스른다. 노년의 화장은 남에게 외모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내 정신 건강의 관건인 자신감 있게 사는 방편으로. 하긴 정성들여 화장한 주위분들의 얼굴을 보면 내 마음도 밝아진다. 하물며 내 얼굴 임에랴 말 해 무엇할까. 한데 나에게 쓰는 5분의 시간이 아까운 것이다.
11. 요즘 TV화면이나 거리에서 보면 노인 같지 않은 노인이 많다. 그 덕에 주위가 밝아진 느낌이다. 화장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선을 넘어 타자에게도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잠깐의 수고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12. 외출하는 날, 화장품을 점검한다. 색조화장품은 유효기간이 지나 버리고 없다. 우선 지인이 건네준 분 셈플을 짜내 주름진 얼굴에 꼼꼼히 펴 바른다. 검은 얼굴에 흰 가면을 쓴 느낌이다. 화장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리라. 이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으니.
3. 지 팔, 지 흔들기* / 민창현 6
1. 남자들이 퇴직을 하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다. 부부가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기는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늘어나게 된다.
2. 퇴직하고 얼마 지난 남자들이 만나게 되면 공통 주제가 등장한다. 부부간 이런저런 문제들이 어떤 원인으로 생기고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3. 아내들의 주된 불만은 몇 가지로 간추려진다. 시간이 있음에도 남편이 밖으로만 돌고 집안일을 잘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외출도 안 하는 삼식이 남편들도 많아 매끼 식사 준비에 대한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다.
4. 처음에는 실업급여 타면서 취미 생활이나 하고 여생을 보내겠다며 제2의 인생을 희망차게 시작한다.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찬 백수 생활도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5. 남편이 퇴직을 하면 그간의 노고에 대해 아내가 부드러운 눈길과 달콤한 위로의 말을 던진다. 이 허니문 기간은 보통 육 개월 정도다. 수고했으니 이제 좀 쉬어라고 한다. 몇 개월이 지나면 아내의 잔소리가 늘어나면서 눈빛이 바뀌기 시작한다. 연민의 눈빛이 서서히 짜증의 눈빛으로 변해간다.
6. 백세 시대란 요즘, 아직 살아갈 세월이 한참 남았는데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없으니 아내는 불안해진다. 누구 아빠는 어디에서 일을 다시 한다는 안방 뉴스가 귓가를 때리기 시작한다. 남편은 체한 듯 가슴이 갑갑해져 온다.
7. 남자들도 몇 개월 쉬어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집에 있으니 아내와 자꾸 부딪치게 되고 밖에 나가자니 만날 사람도, 소일거리도 딱히 없다. 또 나가면 돈이다. 지갑을 열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8. 어차피 돈 벌 재주는 없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돈 안 드는 취미 생활을 찾아 나선다. 도서관으로, 복지관과 동사무소로 다니며 문화 강좌도 들어보고 운동도 해 보지만 마음을 온전히 기댈 것이 잘 잡히지 않는다. 우울해진다.
9. 아내들의 사회생활은 아이들 성장과정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형성되어 간다. 산후조리원 동기부터 시작하여,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많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진다.
10. 남편이 퇴직할 때쯤이면 이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아내의 생활 패턴은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에 남편이란 존재가 느닷없이 끼어들게 되자 불편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11. 직장 상사나 동료로부터 이에 관한 사례를 종종 들어왔다. 직장 생활 중이라도 잦은 해외 출장이나 파견으로 부부가 오랜 기간 떨어져 생활해 온 경우나 자녀 교육 등으로 따로 생활을 해야 하는 기러기 부부도 같은 상황이었다. 나이 들어 부부 모두 생경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잘 헤쳐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휩싸인다.
12. 나이 든 부부 경우, 관심이나 취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 살면서 대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데 공통 관심사나 취미를 공유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결혼 전부터 가져왔다.
13. 총각 때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결혼하면 아내와 뭐든지 함께 하리라 생각했다. 막상 결혼 후 이리저리 퍼즐을 맞춰 봐도 공통분모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미 개발에 들어갔다.
14. 아내의 첫발을 떼게 하는 것이 힘들었다. 시부모 모시고, 직장 생활하며 아이들 키우는 고단한 삶에 취미 생활을 위한 체력과 시간을 내고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사실 쉽지 않았던 탓이었다.
15. 어떤 것은 레슨까지 받도록 해 가며 테니스, 탁구, 수영, 볼링 등 여러 가지 운동을 접해보도록 도왔다. 영화, 연극, 뮤지컬 관람 등 예술 활동으로도 폭을 넓혀 나갔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바둑, 장기도 가르쳐보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에는 취미가 없었던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 계속 함께 할만하다 싶으면 그만둬 버리고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16. 혼자 자전거를 타거나 등산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도서관에 갈 때 제일 부러운 게 있다. 부부가 함께 하는 광경을 볼 때다. 그런 연유로 얼마 전까지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하고 이것저것을 맞춰 봐 왔다. 거의 없다는 걸 재확인하고는 각자의 취향대로 생활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17. 지난번 문학 강좌 멤버 중 여성 철인 3종 경기의 광역시 대표를 한 젊은 커리어 우먼이 있다. 체력을 바탕으로 아이들이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게 자립심을 심어주는 교육 방법을 실천해 오면서 관련 책도 출간하고 교육 사업도 하는, 깨어있는 워킹맘이다.
18. 이 문우로부터 얼마 전 카톡에 사진이 날아왔다. 교육생인 젊은 엄마들과 함께 찍은 영남 알프스 7봉 완등 사진이었다. 다섯 개 산 연계 산행 코스 35km를 당일 일곱 시간 반 만에 주파하고 그 전날 오른 두 개 봉 등정 사진과 함께 보내왔다.
19.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에 대해 응원의 박수를 보냈더니 답이 왔다. 아이 교육과 자신의 교육사업에 대해 남편의 지나친 간섭이 없음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덧붙이기를 본인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으나 쉽지 않았는데 도리어 이것이 각자의 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20. 역시 요즘 사람은 똑똑하다. 부부간의 이 중요한 진리를 일찍 깨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냈다.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노년의 좋은 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려울 경우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21. 두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가 '지 팔, 지 흔들기'를 잘 하면 나이에 관계없이 풍요로운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제목 '지 팔, 지 흔들기'는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의 경상도식 표현.
4. 너무 나이가 많아서/이경자2
1. 사람들은 자신의 나이를 제대로 인식하며 살고 있는가에 요즘 의문이 든다. 나부터도 그렇다. 팔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나는 현실감이 떨어진 생각으로 사는 것 같다.
2. 지난날의 일이다. 수십 년 동안 하던 일을 접고 제 2의 인생에 도전을 할 때였다. 쇼트커트 머리에 당꼬 바지를 입고 등에 백을 메고 다시 대학교에 들어갔다. 열아홉, 스무 살의 새내기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끝낸 후 돌아 와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때 같이 탄 젊은 여인이 어린 딸에게 “할머니께 인사를 해야지.”라고 했다.
3. 처음 들어 본 할머니란 말에 화들짝 놀랬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 만 해도 열아홉 살짜리 대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던 내가 할머니란 소리를 들었으니 금방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실 그 때 나는 손자들 셋이나 둔 할머니였다. 그러나 손자는 손자이고, 남에게 할머니 소리를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고 그냥 싫었다.
4. 그 무렵 어느 날 택시를 탔을 때였다. 목적지에 다 되어 올 때, ‘할매요! 여기서 내리면 되요!‘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놀랬다. 내가 그리도 늙은 사람으로 보였나 싶었다. 기사의 뒤꼭지를 보았다. 반백도 넘은 머리카락을 보니 그도 할배였다. 순간 속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할배요! 여기 내려주세요‘라고 하면 그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부글거리는 마음을 다스르기가 힘들었다.
5. 그 뒤로 일상에서 언뜻언뜻 할머니란 용어 뒤에 늙음이란 뜻이 쌍둥이 같이 계속 따라 붙었다. 나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줄 알았는데 고교동창인 친구들 역시 거의 다 거부감을 느꼈다. 어느 친구는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 ‘할매요! 이것 사이소’하면 그 앞을 쌩하니 지나서 ‘아주머니’하는 곳에서 물건을 산다고 했다. 같은 말이래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내가 할머니란 단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나 자신의 신체적인 노화와 마음의 노화가 비례하지 못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6. 세월 따라 나이가 들고 늙음을 스스로 인정 하게 되었고 또한 마음도 무뎌져서 할매든 할머니든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얼마 전 또 한번 내 나이와 현재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 며칠 전 감기몸살 증세로 약을 지어먹어도 났지 않고 더 심해졌다. 코로나를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병원에 갔다.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에게 코로나 검사를 하러 왔다고 했다. 간호사는 나의 병원 이력 카드를 훑어보더니 ‘너무 나이가 많아서 코로나 검사비가 일반 환자보다 싸다’고 했다. 검사비가 싸다면 돈을 적게 내니 마땅히 좋아해야 하거늘 이 묘한 느낌은 뭐지 싶었다. 멍하니 간호사 얼굴을 보다가 비실비실 뒷걸음을 쳐서 같이 온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는 이제 사람이 아닌가 봐요.”
남편은 대뜸, 그걸 몰랐나. 어디를 가나 우리는 퇴물이고 사람으로 치지도 않는다며 내 말을 받았다.
8. 할머니든 할매든 늙음도 다 받아 들여서 내 마음도 정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많다는 말 앞에 ‘너무’라는 부사가 달린 것이다. 너무란 말은 어떤 한계치를 뛰어 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제 다른 계층의 사람이다. 젊은이가 와글거리는 커피점에도 발 디뎌 놓기가 주저되고 전산화된 음식점의 메뉴판 앞에서 카드를 넣었다 뺏다하다 보면 뒷사람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물러선다. 그 때의 난감함과 낯 뜨거움은 옛날 글자를 몰라 쩔쩔 매던 문맹자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9.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해 가는데 우리는 아날로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세상이 바뀌고 젊은이들이 우리를 폐물 취급을 하든 말든 다시는 그 시절로 가고 싶지 않다. 이제는 아침에 눈 뜨면 허둥지둥 옷을 입고, 그 날의 일을 하기위해 정신없이 살지 않아도 되고 불어터진 라면도 시간이 없어 못 먹는 그런 고달픔도 없다.
10. 나이가 많다고 해서 가슴까지 식었겠는가. 봄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마음이 부풀고 가을바람에 낙엽이 날리면 코트 깃을 세우고 그 바람 속으로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11. ‘나이가 많아서’ 앞에다가, ‘너무’라는 왕관을 얹고 보니 모든 사물이 바로 보여서 좋고, 세상만사 자질구레한 다툼도 없어져 이 또한 좋은 것이다. 느릿느릿한 아날로그 삶일지라도 그것 또한 생각하기 나름이다. 너무 늙은 몸으로 우리에게 광속의 빠름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싶다.
‘너무’ 나이가 많아서 가장 좋은 것은, 지금 이 나이에 누리고 있는 평안과 무한한 자유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