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협에 관심을 갖고 일하게 된 계기랄 것은 없어요. 그냥 선배가 생협에 있어서 그 인연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주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겨울방학 때 학교에서 나와 버스를 탔습니다. 승객이 그 선배와 저 둘밖에 없었어요. 심심하니까 말을 걸더라고요. 그렇게 만나서 겨울 내내 버스 타고 다니면서 만났죠. 둘이서 시내까지 20-30분 버스타고 나오면서 이야기를 내내 하다가 그 선배가 일했던 생활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선배는 원주생협에서 일을 했죠. 저는 다른 직장에 다니면서 모르고 지냈어요. 그러던 차에 농산물 유통에 관심이 생겼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귀농하려고 그랬나 봐요.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트럭을 사버렸어요. 농산물 유통을 하려고요. 농산물 유통은 못했죠. 그 선배를 만나서. 원주시 호저면이라는 곳에 호저생활협동조합이 생겨서 놀러갔어요. 연락이 되어서 만나러 갔는데 거기서 일하는 직원 4명이 전부 대학 선배인거에요.
당시 호저면에 87년부터 호저교회에서 계시던 한경호 목사님이 호저생협을 만들어서 그게 2000년부터 원주생협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어요. 그 목사님이 제 결혼식 주례도 서주셨어요. 감사한 분이죠.
그때 처음 생협이 뭔지 들었는데 뜻이 좋더라고요. 친환경 농사를 지어서 소비자들과 나누고 농촌을 살리는 게. 농촌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시작한 거죠. 에이. 농산물 유통 같은 거 나중에 하자, 일단 여기 일을 도와주어야겠다 싶어서 농산물 유통 하려던 트럭 끌고 내려가서 포장 등을 도우면서 생산자들과 교류하다보니까...... 어느새 그렇게 생협과 인연을 맺었어요.
초창기 때 서울의 소비자생협은 한살림 생협, 그리고 지금 두레생협이 된 수도권사업연합, 21세기생협연대(현 아이쿱)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생협끼리 굉장히 친했어요. 관계가 두터웠죠. 제가 홍천에 감자바우생협 설립 과정에 3개월 파견을 나갔다가 서울 아이쿱생협에 2000년 말에 일하러 올라갔는데, 가자마자 보름도 안 되서 창고에 불이 나서 전소되었어요.
불이 나면 왜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고 하잖아요. 다행히 대박이 났어요. 매출도 올라가고 조합원도 늘어나고...... 저는 이후로도 원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생산자분들과 지내는 일을 하면서 3년 정도 지냈어요.
생협 생산자분들을 만나고 사니까 나도 농사를 지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1년 정도 지났어요. 당시에 아이쿱생협 직원이었던 아내와 결혼을 했어요. 농사를 지으려니까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아이가 태어나니까 아내가 너무 힘들어해. 주말에 제가 왔다갔다 해야 하니까. 평소에는 없고. 그래서 3-4년만 서울에서 살다가 같이 귀농하자고 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죠. 서울에서 아내가 일했던 아이쿱에서 2년 정도 있다가 2009년 7월에 내려오게 되었죠.
강원도에서 일했는데 왜 경북 상주로 왔냐구요? 글쎄요. 제가 고향이 문경이에요. 그런데 아내 고향은 상주에요. 그러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거죠. 처가 식구들도 상주에 있으니까 상주로 오자 그렇게 된 거죠.
1년 동안 내려갔다가 왜 다시 올라갔잖아요. 귀농 실패지. 그리고 생협에서 만난 생산자들 중에 귀농자들이 많았어요. 농사만 짓겠다고 정리해서 오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나름 농사와 병행할 수 있는 직업/사업을 해야겠다고 찾아봤지. 그러다가 지금은 없어진 마을 간사 제도를 알게 되었어요.
마을 간사
시청에 마을 간사를 신청한 내서면 서원리 밤원마을에 마을 간사 자리가 있어서 그렇게 오게 된 거죠. 처음엔 마을 간사일이 어려웠어요. 마을회에 갔는데, 내가 있는데도 그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하더라고요. 마을 간사 월급이 100만원인데, 마을 부담이 12만원이에요. 그게 아깝다는 거지. 마을 간사가 필요 없다는 거에요. 취지가 이장 행정보조인데 마을 어른들이 이해를 못하시더라. 이장 혼자서 일 다 하는데 이장 보조가 왜 필요해 이러면서.
그러던 중 사건이 생겼어요. 마을 앞에 요양원이라고 생긴 곳이 정신병원이어서 마을에서 데모를 했어요. 데모한 사람들을 병원에서 고소를 했네. 경찰서에 어른들 모시고 가서 조서 쓰는 일 하고 어른들 도와 드리는 일을 했죠. 그리고 체험마을 선정도 되어서 그 서류일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일거리가 많으니까 의외로 빨리 적응되었어요.
마을 간사는 1년 6개월 정도 했어요.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일은 주로 이장이 하는 행정업무를 보조하는 거랑, 어른들을 찾아뵙고 마을 대소사 컨설팅이에요. 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을 알게 되죠. 짧은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과 상주에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런데 이번에 우리 마을에 체험마을 사무장까지 떠맡았어요. 게다가 마을 청년회 총무도 하지. 사실 우리 체험마을 사무장이 자꾸 바뀌고 관리에 문제가 있으니 마을에서 책임지자고 제가 말을 꺼냈다가 농사일도 하고 그것도 병행하기로 결정한 거에요. 체험마을 사무장 일이 힘든 건 아닌데 청년회 정기모임이랑 마을부역, 농민회 일 등 여러 가지를 하다 보니 쉽지는 않네요.
그래서 농사는 많지 않아요. 작년에 20마지기 논을 했는데 기계가 없으니까 빌려서 해야 되잖아. 쉽지 않았어요. 품앗이로 해서 700만원 정도가 나왔어요. 올해는 그 논 안해요. 골짜기에 있고 기계 없이 하니까 어려워서 올해는 포기. 대신에 감 농사를 늘리고 논은 1000평 정도만 하려고요. 밭은 하우스 100평짜리 한 동 300평 있고, 다른 밭 600평 있어요. 밭에는 주로 고추를 심었었고. 다른 것도 많이 심었어요.
올해는 농사를 많이 안하려고요. 체험마을 사무장 일도 있어서. 일을 줄였어요. 아, 그리고 한국농정신문 지역기자도 하기로 했어요. 아, 나 그리고 우유 배달도 해요. 마을 형님이 소개해 주셔서 하는 건데 일주일에 3일 해요. 월수금. 사는 마을 근처에서 내서, 화서, 화남, 화동면에 우유 배달. 보은 관기면까지 들어가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돌리면 아침 일곱시 반에 끝나요. 일찍 자면 일상에 불편 없으니까. 생활비는 그렇게 벌어서 먹고 살아요. 애들은 둘이 있어요. 큰 애가 아들 예준이, 2학년 다니고 둘째딸 예서가 다섯 살. 아내는 상주에 와서 편하다고 해요. 그래도 지금은 편하지.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로 쉽지 않았어요. 둘 다 일하다가 나 혼자 하게 되었으니까. 아내는 지금은 일해요. 모서면에 곰돌이동화어린이집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이 마을에 정착할 거냐고? 몰라요. 아직 전셋집에 살고, 농사짓는 땅도 임대니까. 땅을 알아보기는 하는데 땅이 너무 비싸요. 다른 곳보다는 싸지만. 그래서 차라리 골짜기 땅을 알아보는 중이에요. 근데 사려고 가면 가격을 더 올려. 그래서 알아보는 중인데 땅을 다른 동네 사면 그 동네 가서 살겠죠.
내가 시골에 잠깐 떨어져 있을때 아내가 서울에서 생태귀농학교를 들었는데 막상 내려와서는 농사 짓는 걸 잘 안해요. 지금은 제가 하도 바쁘다고 하니까 조금씩 거들어요. 저는 사람 많은 곳 가는 걸 안 좋아해요. 그런데 아내는 사람을 그렇게 잘 챙겨. 연락도 잘하고.
동화모임
상주에 한살림 소비자모임(cafe.daum.net/hansalimsj)이 있거든요. 아내는 거기서 동화모임 을 운영해요. 격주 목요일 저녁에 가서 3시간 정도하는데 정말 열심히 해요. 해모임도 있고 달모임도 있어요. 낮에도 모이고 밤에도 모이나봐요. 4명으로 시작해서 회원이 많이 늘어났어요. 짧은 담소 후 긴 토론.
아내가 바쁘니까 해달라고 해서 화령도서관 분관에서 동화책을 빌리러 자주 가요. 도서목록 대여를 신청하면 없는 책도 있고 상당히 주제가 어려워요. 직원이 주제별로 책을 빌린다고 전문가인줄 알고 나한테 물어보더라고요. 난 잘 몰라요. 처음엔 구연동화모임이었는데 요즘은 엄마들 토론 모임이에요.
첫댓글 참 보기 좋아요. 그냥 저는 귀농하고 싶은 꿈은있지만 두려움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귀농해서 사시는 분들 보면 너무 보기 좋아요. 파이팅~~~
보기 좋다는 말은 부러움 이시겠죠!
하지만 현실은 아마 생존일겁니다. 돈 쓰지마라! 정말 옳으신 말씀입니다.
저는 귀농해서 적어도 있는 돈을 깨 먹지는 말자로 정했습니다.
벌기는 어렵고 쓰기는 쉽지요.
귀농 그거 정말 어려운 겁니다. 단디 준비들 하십시오.
열심히사시는모습이보기에좋습니다~~~~~
귀농 준비생입니다 배울게 너무많네요 저희가족 아내.초등5학년 멘토가 되어주세여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