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백석의 삶과 문학 세계
[명인기인 열전] - 천재시인 백석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이다. 온갖 상실과 망각과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다시 아물고,덧난 상처의 자리이다. 남북 분단은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어 놓았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孤立無援(고립무원)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夫餘(부여) 渤海(발해) 女眞(여진)과 같은 나라 이름이며, 흥안령 아무르 송화강 같은 지명과 강 이름들…. 그것들은 저 「바깥」에 있다. 대륙과 단절된 半島(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들이 끊긴 섬이다.
그 섬에서 잊혀진 한 시인의 이름을 떠올린다. 白石(백석.1912∼63). 이 천재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중은 거의 없다. 그의 시를 읽은 사람은 더더구나 드물다. 소수의 문예연구자들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다. 식민지 시대의 이 뛰어난 서정시인은 남쪽에서는 잊혀졌고, 북쪽에서는 문인 인명록에서조차 삭제된 채 고독과 질곡의 시간들 속에서 그의 이름은 화석이 되었다.
눈이 내린다. 북방 산간지방의 눈은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몇날 며칠을 연이어 내린 눈은 사람 키를 넘어버리고, 길들을 지워버린다. 먹이를 찾아 내려왔던 산토끼들이 눈구덩이에 갇혀 있는 일도 흔하다. 국수집도 겸하고 있는 산간지방의 旅人宿(여인숙). 윗목에는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히 쌓여 있고,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목침들은 새까마니 때가 올라 있다.
「박을 삶는 집/할아버지와 손자가 오른 지붕 위에 한울빛이 진초록이다/우물의 물이 쓸 것만 같다//마을에서는 삼굿을 하는 날/건넌마을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왔다//노란 싸릿잎이 한불 깔린 토방에 햇츨방석을 깔고/나는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었다//어치라는 산새는 벌배 먹어 고흡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앓던 배를 아이들은 열배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여우난골」)
여우 우는 소리가 차가운 산간의 겨울 하늘을 훑고 지나갔다. 사나이는 불현듯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방꾼이 아래윗마을로 방을 외치고 지나가고 어둠을 향해 짖는 마을개들의 소리가 빈 하늘을 공허하게 흔들었다. 낮에 새잡이 그물에 걸린 꿩을 삶고,아버지는 산 너머 국수집에 밤참 국수를 받으러 갔다. 아이는 할머니의 돋보기를 쓰고 앉아 산 너머 마을에서 가축을 노리고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쫓으러 울려대는 꽹과리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 다.
백석이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여우난골로 불리었다. 명절날이면 인근의 친인척들이 몰려 왔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이 났다. 집안은 근동에서 몰려온 친척들로 북적댔다. 노인들이 그득히 모여 있는 방에선 새옷 내음이 났고, 집 안팎에는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찰떡이며 나물 볶는 냄새가 진동했다.
백석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부친인 水原(수원) 白氏(백씨) 時璞(시박)과 모친 丹楊(단양) 李氏(이씨) 鳳宇(봉우)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백기행. 부친은 개화한 인물로 당시에는 드물었던 사진기술을 가지고 있던 이였다. 백석은 五山高普(오산고보)를 나왔는데, 특별히 문학과 영어에 소질을 보였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졸업했으나 집안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었다.
이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백석은 조선일보 사진반장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권유로 계초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도쿄의 명문대학인 청산학원(靑山學院)으로 유학을 떠났다. 청산학원 영어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조선일보사의 교정부에 입사했다.
1937년 겨울, 함흥 영생고보 영어선생이었던 백석은 함경도 산간 오지에 홀로 와 詩稿(시고)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바로 전해 백석은 시집 「사슴」을 출간한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사슴」은 대학 졸업후 신문사에 입사한 뒤 신문사 일과 틈틈이 번역 일을 하며 준비했던 백석의 초기작 33편의 시들을 담은 처녀시집이다. 청년의 가슴에는 시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두해나 다니던 조선일보사 교정직을 작파해 버리고, 함흥으로 올라온 것도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 그는 삶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랑시스 잠과 陶淵明(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며 눈 덮인 함경도 산간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시초」를 비롯하여 여러 시편들을 썼다. 가슴 한편은 허전했다. 두해 전 친구 허준의 결혼 피로연에서 잠깐 만났던 이화고녀 학생이던 「蘭(란)」이란 처녀며,지난 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 만난 「子夜(자야)며,영생고보 학내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갔다. 소뿔등잔에 아주까리 기름을 먹은 심지 불꽃이 춤을 출 때 그의 그림자도 바람벽에서 춤을 추었다.
1939년. 29세 때 백석은 영생고보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내려와 조선일보사에 재입사했다. 그 무렵 조선일보사 사진반장으로 있던 부친은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조선일보 동료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방문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란을 만나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렸고, 혈관은 펄떡거렸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미인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는커녕 재입사한 지 열달만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렸다. 백석은 친구 소설가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일백편을 건져오리라」고 했다.
1940년 1월 만주 신경에 도착한 백석은 우선 집을 얻었다. 신경시 東三馬路(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 黃氏方(황씨방)이 그곳이다. 곧이어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이겨 그 자리를 그만둘 때까지 그는 詩作(시작)과 직장일에 충실했다. 친구와 함께 살았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같은 집이어서 주말마다 신경 근교의 러시아인촌으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녔다. 그때 북만주 산간 오지의 원시부족들과도 친교를 맺었고, 밤이면 시 일백편을 건지기 위해 시작에 몰입했다.
30세의 백석은 이미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 같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들은 발표될 때마다 화제였고,그의 시가 실린 잡지들은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백석의 명편 「南新義州(남신의주) 柳洞(유동) 朴時逢方(박시봉방)」을 실었던 「학풍」 1948년 10월호 후기에서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라고 백석을 극찬했다.
그의 시는 아름다운 북방언어의 보고이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톺 양지귀… 하며, 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와 같은 이제는 들을 수 없는,그리고 낯설어 소통이 되지 않을 북방 정서가 깊이 배인 말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혼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남신의주 유동박시봉방」). 몇번의 결혼과 실패,방랑… 일제의 수탈로 거덜나버린 참담한 민족 현실 앞에서 절망한 시인은 서서히 꺾이어 갔다.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돌았다(「북방에서」). 백석은 만주국 경제부 자리를 그만둔 뒤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안동세관의 세무공무원으로, 다시 월북하는 등 「보래구름」처럼 떠돌다가 평양에 정착한다.
광복 후 북쪽에 남은 백석은 고당 조만식 선생의 통역을 맡는 등의 사회활동을 하며, 러시아 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격동하는 시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북한의 어느 문학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연금, 집필금지 등의 수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 이후 북한 문인인명록에서조차 이름이 삭제되고, 그의 삶의 궤적은 증발해버린다. 1930년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석은 북한에서 금지되고, 남한에서는 기피된 채 잊혀져갔다. 1963년, 52세로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알려졌을 뿐이다. ( 98년 05월 18일) 글 장석주 작가
● 백석 시작품 감상
여우난 곬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後妻)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 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오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 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 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우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육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 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 곬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백석 시는 초기에는 대체로 평북 사투리와 토속적인 소재의 선택으로 농촌 공동체의 원형적 정서를 그려 내다가, 후기에는 여행을 통한 풍물시와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시는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명절날의 풍경을 통하여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기 화자의 순진 무구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기 위해서 산문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속에 구수한 사투리와 다양한 이미지 수법을 개입시킴으로써 푸근한 고향 정서를 환기시켜 주는 한편, 문장 종결형을 현재 시제로 하여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독자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우선 이 시는 유년의 '나'가 체험하는 명절날의 풍속을 시간적 경과에 따라 순차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적인 시간 구성을 지니고 있다. 즉 명절날 유년의 화자가 '엄매 아배를 따라' 큰집으로 나서면서부터 저녁과 밤, 다음날 아침까지의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시간적 경과에 따라 서사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화자가 부모님과 같이 큰집으로 명절 나들이를 떠나는 모습으로, '개'까지 따라 나선 명절날의 유쾌하고 들뜬 분위기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단락은 큰집에 도착하여 명절날에 한데 모인 일가 친척들의 모습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단순히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회화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 모습과 표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그들의 성격, 취미, 행위, 사는 곳, 삶의 내력까지도 낱낱이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친척들 개개인에 대한 성격을 창조하면서도, 그들의 인생 역정과 삶의 정황을 압축된 서사로 표출함으로써 한결같이 평탄치 못한 친척들의 인생을 가늠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와 다른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닌, 우리 모두의 평범한 이웃이 되기에 충분하다.
셋째 단락은 이러한 일가 친척들이 안방에 모여 있는 모습과 명절날 풍성하게 장만된 음식물에서 느끼는 유년의 정서를 다채로운 감각적인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여기서 표출되는 감각적 이미지는 후각과 촉각인데, 이 가운데서 특히 후각적 이미지 구사가 돋보인다. 즉, 명절날 설빔으로 입은 옷의 느낌을 '새옷의 내음새도 나고'라고 함으로써 시각을 후각으로, 여러 음식물을 '…… 내음새도 나고'와 같은 후각적 이미지로 표출함으로써 명절날 특유의 신선한 분위기와 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넷째 단락은 저녁밥을 먹고 난 후 아이들끼리 흥겹게 노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단락은 밤이 깊어 일가 친척들이 방안에 모두 모여서 엄매들은 엄매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각기 모여 앉아 즐겁게 노는 모습을 서술한 다음, 유년의 화자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새벽까지 잠이 드는 모습을 서술하면서 명절날 겪은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명절을 즐기는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다양한 시적 대상을 동원하여 표현함으로써 끈끈한 인간적 체취를 물씬 풍기게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고향을 상실한 일제 암흑기에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원초적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 <백석 약력>
본명 백기행(白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
1929년 오산 고보 졸업, 동경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 공부
1934년 귀국 후 조선일보사 입사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여 등단
함흥 영생 여고보 교사
1942년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
1945년 해방 후 북한에서 문학 활동
시집: {사슴}(1936)
● 백석의 대표작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수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한 이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짗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 여승(女僧)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가지취 : 취나물의 일종. * 금전판 : 금광. * 섶벌 : 재래종 일벌.(시집 {사슴}, 1936)
백석이 가지고 있던 공동체적인 공간에 대한 시적 관심은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가족적인 유대나 유년기의 체험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민중들의 생활 세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함으로써 민중들의 삶을 위협하는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는 커다란 힘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이 <여승>과 <팔원>은 바로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백석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시로 거론되고 있다.
이 시는 한 여승의 비극적 삶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해 파괴된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를 찾아 '금점판'을 떠돌다가 급기야는 어린 딸마저 잃고 여승이 되어 버린 한 여인의 기구한 인생을 4연 12행의 짧은 구성으로 밀도 있게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가족 공동체마저 철저히 파괴해 버린 식민지 현실과 민중들의 고난은 백석의 시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유년의 체험과 공동체적 향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으로, 가족 사이의 유대와 사람과 사물 사이의 친화 관계가 완전히 해체된 것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해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힘, 즉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파행적 역사 과정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나 그를 찾아 떠돌다 끝내 자식마저 잃어버리고 여승이 된 여인이나 모두 그러한 역사 과정에서 희생당한 민중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역행적 구성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1연은 여승의 현재 모습이며, 2∼4연은 그녀가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더듬고 있는 부분이다. 거의 모든 시행을 하나의 문장으로 배치함으로써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짧은 작품 구조로써 그녀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표현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비록 불교에 귀의한 여인이지만, 화자인 '나'의 눈에 비추어진 여승의 모습은 여전히 현실적 고뇌를 극복하지 못한 서글픈 모습으로, 마지막 두 시행에서 보여 주고 있는 '섧게 우는 산꿩'이나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여인의 머리오리'가 바로 그녀의 내면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향(故鄕)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ㄹ 아느냐 한즉 /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삼천리 문학} 2호, 1938.4)
이 시는 <여우난 곬족>의 연장선에 선 작품으로 백석 특유의 고향 정서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백석의 시는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원초적인 고향 개념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시가 보여 주는 토속적 사투리와 현대적 가족 제도, 풍물의 세계는 단순한 풍물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이 개입된 풍물로, 그는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민족 정서가 점차 상실되어 가는 일제 치하에서 더욱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백석의 시 세계의 주인공은 항상 공동체의 품속에 깊이 침잠해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공동체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는 시인의 현실적 세계와 대립됨으로써 고향이라는 공동체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이 시가 환기시키는 정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그 고향이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정이다. <여우난 곬족>에서는 고향을 무대로 그 곳에서 벌어지는 토속적이고 원형적인 삶의 모습을 서사적 구조를 통해 고향 정서를 보여 준 데 반해, 이 시는 인물들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와 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기법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7행의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타향인 '북관'에서 병을 앓아 '의원'을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단락인 1·2행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부분으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는 화자가 병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도 각별해진 향수를 느끼게 해 준다. 둘째 단락은 3·4행으로 화자가 의원을 찾아가 첫 대면한 '의원'의 풍모와 인상을 시각적 묘사로 표출하고 있다. 5행부터 15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의원'이 화자인 '나'를 진맥하는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서술은 화자의 주관적 감정을 최대한 억제한 채,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표정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의원'과의 극적이고 생생한 대화를 통해 전개시키고 있다. 넷째 단락은 16·17행으로 화자의 내면 세계를 보여 주는 독백 부분이다. '의원'에게서 부드럽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된 화자가 마침내 그에게서 고향과 아버지를 느끼게 되었다는 감정의 토로는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는 평범한 서술로 나타나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직접적인 감정 토로는 특별한 시적 수사 없이도 절실한 감동의 울림을 주고 있다. 그것은 셋째 단락에서 화자를 진맥하는 의원의 행위와 그와 함께 나눈 대화를 통해 그러한 정서가 충분히 환기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삿 :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 딜옹배기 :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 북덕불 : 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학풍} 창간호, 194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