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한국 시니어과기협회 회원 2023년3월 30일
1. 이승만과 독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보가 수립되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대마도 등 실지(失地)를 회복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사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역사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많으나 일본이 1905년 1월 근거도 없이 내각회의 결정으로 시네마현에 편입시켜 다케시마라 명명하고 일본영토라 주장해 왔다. 일본은 한국 독도(무인도)를 한국이 모르는 사이에 훔친 거나 다름없는 짓을 한 것이다.
그 뒤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도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령(SCAPIN) 제677호를 통해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그런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해야 할 한국 영토에 제주도 등 4개 섬이 포함되어 있는데 독도가 빠졌다. 그러나 한국에 3,000개 이상의 섬이 있어 다 기록할 수 없어 대표적인 섬들의 이름만 명기한 데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실지 회복 의지가 강해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었는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소식에 격분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발효일인 1952년 4월 28일로 되어 있었는데 이 발효일이 지나고 나서 우물쭈물하면서 국제적으로 일본영토로 인식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로 전쟁하고 있었고 세계서 가장 가난한 약소국 중의 하나이어서 국제적으로 협상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정책을 잘 읽고 국제상황분석에 관해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를 미리 알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직전,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는 해양주권 선을 설정하고 평화선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평화선 안에서 어업에 종사하려면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어기면 처벌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했다.
일본은 당황한 것은 물론이고 팔팔 뛰며 항의했다. 한국전쟁을 함께 수용하던 미국도 이승만에게 취소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승만 대통령이 인접국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만든 선이라 해서 이승만 라인이라 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전쟁 휴전에 강력히 반대하던 이승만 대통령을 자극하며 휴전 협상이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한국 편을 들어준 것이 되었다. 그 결과 독도가 한국 땅으로 인정되었고 지금까지 실질적인 지배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독도를 미국 폭격훈련지에서 제외시킨 1952년 2월부터 일본인들이 침범해 오고 동년 8월에는 불법 상륙하여 일본영토로 표시해 놓았다. 1953년 4월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특무상사 홍순칠씨와 45명의 울릉도 청년들이 독도 의용수비대를 조직해 경비를 시작하고 일본영토 표시를 완전히 제거했다.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천명하기 위하여 그 상징물로서 1954년 독도등대를 설치했는데 최초 점등 일은 1954년 8월 10일이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1954년 11월 독도에 불법 접근한 1,000톤급 일본 순시선 3척과 항공기 1대와 전투 끝에 일본인 16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격퇴시킨 공적도 달성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약 3년 8개월간 수비 하다가, 1956년 12월 한국 경찰에 경비 업무를 정식 인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혜안(慧眼)으로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로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 정치 토착화를 위해 애쓰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도 수호를 위해 애를 썼던 것이다.
2. 박정희와 독도
한일국교 정상화는 동아시아지역에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미국의 주요 안보 과제이기도 하지만, 한국은 국민자금이 전혀 없는 상태여서 국민자금 조성이 절실한 때였다. 이 돌파구가 한일 국교 정상화였다. 그래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동시에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평화선이 폐기되었다. 평화선을 일방적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협상 테이블에서는 폐기되어야 할 사항이었다. 이를 두고 한국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을 질타(叱咤)했다. 한편 일본은 이에 만족 못하여 한일 협정 협상 중에 일본은 물밑으로 한 명의 특사를 박정희에게 보낸다. 고토 마사유키는 일본 육사의 박정희 선배이며 일본 정계와 재계를 연결하던 최고의 우익 로비스트이자 다혈질적인 협상의 달인이었던 자이다. 고토의 임무는 단 한 가지였다. 박정희를 만나 여러 가지 한국에 유리한 안을 제시하고 독도를 일본으로 이양받아 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어려운 시기여서 독도문제 해결을 낙관적인 분위기가 일본 정계 내에 팽배해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맞나 한국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독도를 일본에 넘길 것은 종용(慫慂)했다. 박정희가 말했다.
"이봐 당신. 나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사람이요. 나에게 명령하는 것이요.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조국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요. 그것이 독도이던 돌 한 덩어리던 내 조국의 것이라면 나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요. 군인인 내가 조국에 할 수 있는 것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소."
순간 박정희의 기세에 고토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수많은 야쿠자 그리고 수많은 정치깡패를 상대하면서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을 고토는 이 작고 깡마른 체구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박정희는 말했다.
"나와 부하들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난 덕분에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요. 사나이로서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겠소. 선생. 돌아가서 전하시오. 다들 목숨을 걸고 조국을 부흥시켜 일본 못지않은 나라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계집애같이 앵앵거리지 말자고 말이요.“
후에 고토의 회고에 의하면, ”고토는 웃다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 앞에서 자신에게 계집애처럼 앵앵거리지 말라고 말하는 박정희의 눈빛에서 사나이의 의미심장함을 느꼈다.”라고 한다. 동경으로 돌아온 고토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군은 조국을 위해서 죽기로 했다고 말했소. 당신들 면상을 보아하니 어느 누구도 죽을 각오를 하고 다케시마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요.“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조국 근대화 의지와 독도 수호 의지를 알아주는 한국 사람은 드물어서 여러 반대에도 무릅쓰고 동분서주(東奔西走)한 외로운 선각자였다.
3. 김대중과 독도
국제적으로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서 12해리까지는 자국의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독도가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1998년 9월 맺어진 신(新)한일어업협정 때이다. UN 해양법협약에 따라 연안 200해리가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설정되면서 한일 양국 간 EEZ가 겹치게 된다. 두 나라의 해역은 400해리가 채 안 되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1996년 시작된 양국 간 어업협정 개정 협상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1998년 9월 타결되었다. 이때 독도가 공동수역(일본명 잠정수역)으로 결정되었다. 애국 단체들과 야당은 ⌜굴욕 협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기점을 당연히 독도로 했어야지 왜 일본의 요구대로 울릉도로 했느냐는 비판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어업협정의 문제일 뿐 영유권과 무관하다."라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실용적인 이유로 굴욕 협상 주장을 반박했다. 정부는 ”독도를 기점으로 고집하지 않는 대신 동해의 황금어장으로 불리는 대화퇴(大和堆) 어장에 대한 양보를 얻어냈다.”라고 항변했다. 이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도 다뤄졌는데 헌재는 2001년과 2009년 "신어업협정이 EEZ 경계 획정이나 영토 문제와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며 "독도 주변을 중간 수역으로 분류한 한일 어업협정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고 결정했다. 그러나 영토로 확실히 한정 짓기 위해서 독도 주변 12해리를 설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냥 넘어갔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호한 독도가 어업협정이라고 하지만 공동수역으로 지정하니 애통한 일이다. 공동수역은 공동으로 들락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05년에 한국 독도(울릉도의 부속 도서)를 한국이 모르는 사이에 시마네현에 편입시켜 한국 땅을 도둑질하고 공용 사용하는 것으로 한 것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르고 했는지 아니면 박정희 대통령 때 일본이 김대중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에 보답해 주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