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문인수 시인
문학에스프리 2021 겨울 제37호
홰치는 산에 긴 잠 들다
박상봉
문인수 시인은 해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다가오면 찾아뵙던 존경하는 선배 시인 중 한 분이다. 이제 그는 ‘없는 사람’이다. 지난 8여 년간 파킨슨병을 앓다가 올해 6월에 유명을 달리하여 경북 군위 카톨릭공원묘원에 긴 잠 들었다.
그는 나보다 열세 살 연상의 고등학교 선배로 지난 40여 년간 나의 시나 삶이나 직업관까지 영향을 미친 스승이고 멘토다. 대구고등학교 문예반 선배로 1980년대 중반에 처음 만나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줄기차게 만나왔으니 그와는 ‘길고 긴 뜨신 끈’ 같은 인연을 이어왔다.
저 흰 구름, 잘못 접어든 길
문인수 시인은 1945년생 해방둥로 경북 성주(星州)가 고향이다.
문인수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나는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시인의 생가를 먼저 찾아갔다. 성주군 초전면사무소에 들러 물어물어 찾아간 경북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630번지.
방올음산이 내려다보는 이 번지에 그의 생가가 있었다. 그 집은 “소잔등 둥두렷한 등성이 넘어 불쑥이//해 떠오르”(문인수의 시 「아버지」 중 일부)던 아버지의 집이요,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면서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달무리만 하게 놓이던”(「칼국수」) 흰 땅, 거기 지어진 어머니의 집이었다.
방올음산이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 시인의 생가는 이미 헐리고 빈터만 덩그러니 남았다. 시인이 나고 유년기를 오롯이 안겨 자란 옛집은 헐려 흔적 없고 잡풀만 무성해 시인의 ‘공백이 뚜렷하다.’ 길 안내를 해준 이 동네 김정호 이장은 누군가 땅을 매입해 새 건물을 지으려고 준비 중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문인수 시인에게 시적 영감을 많이 주었다는 고향 마을 앞에 흐르는 하천도 둘러보았다. 이 하천을 동네 주민들은 ‘백천’(白川)이라고 부른다는데 시인은 ‘흰내’라고 표현했다.
방올음산은 북벽으로 서있다./그 등덜미 시퍼렇게 얼어 터졌을 것이다 그러나/겨우내 묵묵히 버티고 선/산/아버지, 엄동의 산협에 들어갔다./쩌렁쩌렁 참나무 장작 찍어낸 아버지,/흰내 그 긴 물머리 몰고 온 것일까/첫 새벽 홰치는 소리 들었다./집 뒤 동구 둑길 위에 아버지 우뚝 서 있고/여명 속에서 그렇게 방올음산 꼭대기 솟아올라/아, 붉새 아래로 천천히 어둠 가라앉을 때/그러니까, 이제 막 커다랗게 날개 접어 내리며/수탉, 마당으로 내려서고/봄, 연두들녘 물안개 벗으며 눕다. (「홰치는 산」전문)
네 번째 시집『홰치는 산』첫머리에 실린 시다. 이 시집은 문인수 시인에게 가장 왕성하게 작품을 생산해낸 시기에 쓴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 무렵에 만난 시인은 매일 온종일 엎드려 시만 쓴다는 말을 자주 했다.
흰내 둑을 따라 걷다 보면 북쪽 방향 정면에 마주 보이는 삼각형으로 뾰족이 솟은 산이 ‘홰치는 산’이다. 그 산 이름은 방울소리가 울리는 산이라 하여 ‘방올음산’(方兀音山)이라 부른다. “이 고장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두식 표기를 좇아 방올음산, 바우람산, 바아람산 등으로 편하게 부르고” 있다고 한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의 북쪽 머리맡을 오래 지키고 앉아있”는 “해발 칠백팔십이미터인 이 산은 마치 삼각의 푸른 종 하나가 하늘 깊이 걸려 있는 그런 형상을 하고” 있어 “현령산(懸鈴山) 또는 영산(鈴山)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실제로 그 옛날엔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저녁 시간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져 널리 사람의 정신을 맑히고 지친 몸 한없이 추스르게 했”다. “그 아래 자고 일어난 사람들, 살다 죽은 사람들, 아버지의 농경에도 힘줄에도 아 그 파란만장에도 산의 푸른 종소리 흐르고 있”다. (「방울음산 이야기」 참조)
그의 고향 관련 시가 무려 100편이 넘는다. 시집『홰치는 산』자서에 보면 “인간에게도 나무나 풀의 그것과도 같은 섬세하고도 집요한, 흰 뿌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향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일 것이다. 현실의 깜깜한 바닥을 뚫고 내려가 보면 거기, 그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는 데가 있다. 바로 고향이라는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에게 고향은 ‘육친’ 같은 것이다.
소년 시인 문인수
그는 말썽장이 아이였다. 위로 두 형이 그랬고 시인도 골목대장 노릇을 단단히 했다. 학교에 가서도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는데 선생님들의 골치를 썩였다. 칭찬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전기가 왔다. 1954년 쯤 초등학교 4학년 때 숙제로 동시 한 편을 써냈는데 선생의 뇌성벼벽력 같은, 융단폭격과 같은, 소나기 같은 칭찬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목이「흰 구름」 인 데 내용은 이렇다.
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의 옷자락인가
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그날 그렇게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글쓰기에만 매달렸는데 교내 백일장이다 뭐다 해서 상 탈 일이 더러 생겨 으쓱해져 티를 내고 다녔다.
성주농업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2, 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장원으로 뽑아준 지역의 유명한 시인 권오택 선생을 스승으로 만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선생은 문학전문잡지 『현대문학』이며 학생문예지 『학원』, 대구『매일신문』 학생문예란, 경주 신라문화제 백일장 그리고 이런저런 책 이야기와 여러 유명 시인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한없는 기대와 벅찬 설렘을 갖게 됐다.
가을 맑은 하늘은
일요일 하오.
석점을 치면 학교 마당에선
코스모스가 핀다.
곱게 열을 앓던 어린 날의
어머님 치마폭이
뺨에 차가운데
손뼉을 치며 치며
아득한 그리움
춤을 춥니다.
1962년 학생문예지『학원』에 발표한 「코스모스」라는 시다. 이때부터 주변에 문학소년으로 알려지게 됐다. 소년 시인은 대처로 나가 활동하고 싶은 욕심에 아버지를 졸라 1962년 가을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문예반에 들어 이준석, 손성호, 김종섭, 이채형, 노명석, 정덕환, 윤용섭 등 학생 글쟁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학원』이나 『매일신문』에 몇 차례 얼굴을 내밀면서 자연히 다른 학교의 이재행, 박해수 등과 안면을 트고 멀리 광주의 김만옥, 대전의 윤채한 등과 아는 사이가 됐다.
하찮은 기인 밤을 메꾸는 동안에
허공진 내 속에는 누구도 없었다.
부우엉 부우엉 부우엉
사위어지는 내 소리에 귀를 모으면
아슴한 메아리에 행여나? 싶어
이 산에도 저 산을 옮아 울었다.
부우엉 부우엉 부우엉
가슴서 울려 가슴벽을 치고
가슴 안을 맴돌아 가슴 속에서
오뚜기처럼 멈춰 선 것은
내일 밤을 울기 위한 고독이었다.
「부엉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1963년 가을,『매일신문』 학생시원에 발표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의 문인수 시인의 작품을 찾아보면 그가 생래적으로 시인 기질을 타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62년. 성주농업고등학교에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버지를 졸라 대구의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해버렸다.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질투가 ‘쟁취’한 길. 그것이 나의 최초 ‘출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일이 내 ‘잘못 든 길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하고 시인은 회고하고 있다.
시인은 소년기를 보내고 서울의 동국 대학교 국문과로 진학해 강희근, 박제천, 정의홍, 선원빈 같은 선배와 홍희표, 송유하, 이계홍, 김갑기, 김철진 등을 만났다. 1966년 육군 자원입대와 더불어 문학청년 시절은 막을 내린다. 모든 문학인구와 문학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버린 것이다. 그는 문학에 대해 깊이 좌절했던 것 같다. 어디 한 번 도전해 보지도 않고 시인에의 꿈을 완전히 접어 버렸다.(이상의 성장기 이야기는 2004년 발간된 ‘문학청년 시절의 추억여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부서진 조각처럼 반짝였다』에 수록된 문인수 시인의 산문 「저 흰 구름, 잘못 든 길」을 참고하였다.)
타관 객지를 떠돌다 늦깎이 등단
그는 1970년 대한관광공사 부설 호텔학교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서울 라이온스호텔, 제주 한라호텔 등에서 웨이터 생활도 했다. 간이상수도공사에도 다녔으며, 자전거 수리점, 소매점 등을 운영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런저런 분탕질과 퇴폐가 밥이었던 그 시절을 시인은 스스로 ‘문학적 공백기’라고 말한 바 있다.
1975년 3월 23일 전성수(田性洙)와 이갑조(李甲祚)의 외동딸 전정숙(田貞淑)과 결혼해 12월 장남 동섭을 낳았다. 1978년 11월 딸 효원을 얻었다. 두 아이를 위해 쓸 돈을 벌지 못했던 변변찮은 아버지였다. 대구 북성로에 폴리에틸렌 대리점을 열었으나 1년 만에 걷어치우고 타관 객지를 떠돌면서 간헐적인 글쓰기를 이어갔다.
1983년 2월 어느 날 아내 전정숙 여사가 한마디 던졌다. “아무나 시인이 되나. 당신이 시인만 되면 모시적삼을 입혀 아랫목에 앉혀놓고 먹여 살릴게.” 아내의 핀잔에 등을 떠밀려 시인이 되기 위한 등단 출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침내 20여 년간의 허송세월을 지나 마흔이 넘어 소위 등단이란 걸 했다. 1985년 《심상》 신인상에「능수버들」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시인은 이듬해 첫 시집『늪이 늪에 젖듯이』를 심상에서 펴내고, 4년 뒤 두 번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를 문학아카데미에서 펴낸다. 1992년 민음사에서 세 번째 시집『뿔』을 펴내고, 그해 대구 영남일보에 입사해 일생에 처음으로 신문사 기자라는 번듯한 직업도 갖게 됐다.
마흔에 띄운 시의 화살은 참 신바람 나게도 너풀너풀, 쭉쭉 닿는 곳마다 신명으로 명중하였다. 문단에서도 새삼 그 명사수를 바라보기에 이른다.
영남일보에 입사하기 전 그는 서울 장충동에 살면서『월간 비디오』잡지사 주간으로 일 년 남짓 근무한 적이 있다. 나 역시 변변한 밥벌이도 못 하고 빈둥대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배랍시고 찾아갔더니 당장 출근하라고 해서 나도 덩달아 뽀대나는 기자 신분이 되어 서울 생활을 하게 됐다. 잡지사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삼류 에로 비디오 영화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경영하던 곳이었다. 박봉이었지만 선배 덕분에 팍팍한 서울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문인수 시인은 서너 평 정도 될까, 다리 펴고 눕기도 비좁은 천장 낮은 다락방에 살았다. 종종 놀러 가서 밤늦도록 쪼그리고 앉아 시담(詩談)을 나누다 왔다. 1989년 무렵 이야기다. 서울지하철 노조 파업으로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던 게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이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서울이라는 낯선 땅에 올라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문인수 시인과 수시로 시담을 주고받으면서 깊은 공감대를 나눌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낯선 객지 생활에 마음이 쓸쓸해지는 저녁이 오면 그의 다락방으로 찾아갔다. 시인은 종이에 휘갈겨 쓰던 시를 보여주며 조언해 달라고 채근하기 일쑤였다.
‘아, 결국 기댈 데란 허공뿐’인 ‘거처’에 기거하며, 거의 끼니마다 국수만 먹는 모습을 자주 봤다. “국수를 너무 좋아해서 국수만 먹는다”라고 말했지만, 생활비를 아끼려고 그리 산 줄 내 다 안다. 나는 서울의 그 잡지사에 근무한 지 일 년도 채 안 돼 노사분규에 휩쓸려 갈등을 겪다가 사표를 던지고 대구로 낙향하였다. 그는 얼마간 뒷수습을 한 뒤에 낙향해 대구로 내려왔다.
그의 세 번째 시집『뿔』은 아마도 알량한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올라와 객지 생활할 때 쓴 시편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고향과 유년으로의 회귀성, 집으로의 귀로 의식을 현실의 시간과 공간에 막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슬픔이 비극적으로 심화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 어디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던 타관객지에서 ‘그의 유배지인 몸’은 ‘나무 속의 새’였다. 유배지에는 “바람 소리 거칠게 찢어진다./하늘도 거칠게 찢어진다./달빛도 거칠게 찢어진다.”(「나무 속의 새」) “나무의 팽팽한/긴 외로움의 끝에 와서 덜컥,/덜컥, 걸린” “저 나무 비바람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타오른” “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슬픔은 물로 된 불인 것 같다」)라고 노래한다. 시인의 슬픔은 물의 속성과 불의 속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이윽고 슬픔으로 상징된 “나무는 폭발한다.” 시인은「달팽이」라는 시에서 “검은 수렁 한복판을 느릿느릿 간다 저런 절 한 채를 뒤집어쓰고 살 수 있다면……”이라고 소망한다. 시인 자신이기도 한 달팽이가 느리게 가고 있는 ‘검은 수렁’은 ‘동해안 아름다운 길’에서 ‘길게 풀린다.’ 그 길은 ‘정선 가는 길’이다. 정선 가는 길은 다시 육친과도 같은 고향으로 귀착된다.
흐린 봄날 정선 간다.
처음 길이어서 길이 어둡다.
노룻재 새재 싸릿재 넘으며
굽이굽이 막힐 듯 막힐 것 같은
길
끝에
길이 나와서 또 길을 땡긴다.
내 마음 속으로 가는가
뒤 돌아보면 검게 닫히는 산, 첩, 첩,
비가 올라나 눈이 오겠다.
-「정선 가는 길」전문
싱싱한 서정의 문맥, 황혼의 전성기
서울에서 짧은 직장생활을 접고 대구로 낙향해 다시 실업자가 된 시인은 그 무렵 시인과 화가들의 모임인 ‘시화오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하석, 문무학, 김선굉, 박기섭, 박진형, 송재학, 엄원태, 장옥관 시인 등과 이규목, 이영철, 홍창용, 이수동, 이정웅, 김성호, 김영대 등의 화가들이 어울려 시화전과 시화집을 내기도 했다. 이 무렵에 쓴「가오리연」과「간통」 이라는 시가 대구문단이 떠들썩할 정도로 주목받기도 했다.
이때부터 문인수 시인은 하나의 서사를 서정의 문맥 위로 건져 올리는 날렵한 솜씨를 보여준다. 시적 수사(修辭)는 금방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싱싱하고 젖은 비늘을 번쩍이며 퍼덕거렸다. 김선굉 시인은 “이러한 작업이 미당의 『질마재 神話』와 다른 점은 추억의 깊이다. 미당은 설화적 공간 속으로 내려갔지만 문인수는 유년의 추억 속에서 다시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말하자면 양자는 서로 시간의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미당이 설화의 원형을 재구성하여 우리 앞에 내놓았다면, 문인수는 아직 숨줄이 한참이나 붙어 퍼덕이는 물고기를 한 마리씩 건져 올려 우리의 발아래 내동댕이치고 있다. 그것에 「간통」과 같은 것일 경우 그 현란한 리비도적 정서의 원색이 주는 탄력으로 인해 그 살아 있음의 감각이 더욱더 강하게 전해지는 것이다.”(『대구민족문학회보』1997년 가을)고 상찬한 바 있다.
늦깎이 시인은 후생 각이 우뚝했다. 이 시기에 「채와 북 사이, 동백진다」, 「바다책, 다시 채석강」, 「달북」, 「쉬」, 「식당의자」 등 주옥같은 명작들이 잇따라 나오면서 2000년 제11회 김달진문학상을 시작으로 2003년 제3회 노작문학상 수상, 2007년 제17회 편운문학상과 제10회 한국 가톨릭문학상, 제7회 미당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여 큰 주목을 받게 됐다.
정진규 시인의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선친에 대한 회고담을 듣고 쓴 시「쉬」에 대해 정끝별 시인은 “해방둥이 문인수 시인은 마흔이 넘어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하지만 시적 성취는 어느 시인보다 높아 환갑 지나 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뛰어난 작품들이 셀 수없이 많지만, 이 시야말로 그의 출세작으로 손꼽고 싶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이후 미당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황혼의 전성기”에 이른 듯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젊은 시인들의 존경 어린 감탄에 걸맞게 “한편 한편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빼어난 시편들을 선보인다.(웹진 시인광장, 2006)
2016년에는 무려 8천만 원이라는 최고의 상금이 걸린 제9회 목월문학상까지 받고 한국시단에서 전무후무한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파킨슨 증후군 초기 증세가 시작되어 일상적 삶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털썩 낳아 김이 나는 한 무더기 말씀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 돼지국밥이다. 뜨신 돼지국밥 한 그릇 먹고 나면 강추위도 잊을 만큼 속이 든든해진다. 돼지국밥은 좋은 사람을 만나서 함께 먹으면 더 맛있다. 나는 문인수 시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주로 돼지국밥을 먹었다.
그는 돼지국밥과 아주 잘 어울리는 시인이다. 삶의 내용과 철저하게 육화된 그의 시는 돼지국밥의 누리끼리한 냄새와도 닮았다. 이규리 시인이 쓴 ‘문인수 시인의 스케치’라는 산문에 보면 “그의 몸과 태도가 돼지국밥집과 절묘하게 어울린다”라면서 “돼지국밥에 둥둥 뜬, 꺼먼 돼지 털이 숭숭 박힌 비계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그의 어금니 사이에서, 그리고 벌건 노을 같은 국물 훌훌 마시고 나서 먼지 낀 창 넘어 먼 마을을 보는 그의 눈빛 사이에서 그의 빛나는 시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라는 회고한 바 있다.
어느 해 겨울 어느 날에도 선배이고 스승인 문인수 시인을 만나 뜨신 돼지국밥 한 그릇과 ‘털썩 낳아 김이 나는 한 무더기 말씀’을 뜨시게 잘 얻어먹고 나왔는데 바깥에 나오니 갑자기 날씨가 너무 추웠다. 먼저 들어가시라고 해도 기어이 나를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그의 발길은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또 전화를 해왔다. “잘 갔냐. 춥지 않았냐. 모자 쓰고 잘 다녀라”라고 말하는 그의 따뜻함은 방금 토렴해 나온 돼지국밥에서 솟아오르는 김처럼 훈훈하게 몸을 데워주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어진 사람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남의 상처를 깊이 들여다보고 뜨겁게 끌어 안아주는 인품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밥값을 지불하는 일도 절대로 양보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이하석 시인과 함께 돼지국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서루밥값을 내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문인수 시인이 탁자를 밟고 뛰어넘어가 먼저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마지막 모습
지난해 가을에 문인수 시인을 만나고 왔다. 추석 문안 인사차 들린 것이다.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폭염의 잔류부대가 마당에 집결하고 있”(「9월」)는 그의 단독주택 거실에 들어서니 시인은 야윈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가가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시인이 앓고 있는 병마가 “잘 씹지도 않고 삼킨 길” 같이, ‘막힌 길’처럼 “깜깜 오래 질기”(「귀성길」)게 시인을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인의 일상은 미당문학상을 받은 그의 출세작 「식당의자」 같은 모습이었다. “수성못 유원지 도롯가에, 삼초식당 천막 안에, 흰 플라스틱 의자”처럼 “몇 날 며칠 그대로 앉아”(「식당의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천천히 걷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걸음걸이가 예사롭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도 힘겹게 보였다.
시인은 “운동 도우미의 도움을 받거나 아내와 함께 거의 매일 동네 공원까지 걸어가서 간단한 근력운동을 꾸준히 하며 지낸다”고 했다. “가끔 한 동네 사는 심강우 시인의 산책길과 동선이 겹쳐 마주치면 심 시인과 나란히 걷기도 하고 나무벤치에 앉아 두런두런 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작년 추석 연휴 지나고 나서 심강우 시인과 함께 또 한 번 찾아뵈었는데 문인수 시인의 “명절이 편안해 보였다.” 걱정과 근심이 없어 편안해 보이기보다는 내려놓은 데서 오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독서도 시작(詩作)도 다 내려놓았다고 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무진장 부려놓던 절창들, 그 빛나는 시(詩)의 자궁이 거세된 시인의 무기력증에 대한 고백은 오히려 새장을 벗어나 푸른 창공을 나는 자유를 찾은 새 같았다.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 그러할 것이다. 문단 말석의 시인인 내가 보기에는 잠잠 앉은 자세와 표정만 봐도 시의 경지가 느껴졌다.
이문열의 소설 「시인」을 읽어 보면 시인의 경지가 어떤 모습인지 나온다. 김삿갓이 스승으로 섬기는 취옹은 필설로 시를 써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으나 스스로 소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물이 되고, 구름이 되어 흐르는 지존의 경지를 보여준다. 세상을 떠돌며 김삿갓이 추구한 시의 길이 스승 취옹과 같은 지존의 경지에 이르렀고, 결국 스승과 같은 지존이 된다는 이야기다.
들릴 듯 말듯 더듬더듬 한 무더기 말씀을 풀어놓는 시인의 어눌한 말투에 마음의 꽃이 활짝 만발한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해오는 아내더러 느닷없이 굿모닝! 그랬다. 아내가 웬 무식?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후 매일 저녁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이제 아침이고 대낮이고 저녁이고 밤중이고 뭐고 수년째 굿모닝, 그런다. 한술 더 떠 아내의 생일에도 결혼기념일에도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도 예외 없이 굿모닝, 그런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수고했다 보고 싶었다 축하한다 해야 할 때도 고저장단을 맞춰 굿모닝, 그런다. 꽃바구니라도 안겨주는 것처럼 굿모닝, 그런다. 그런데 이거 너무 가벼운가, 아내가 눈 흘리거나 말거나 굿모닝, 그런다. 그 무슨 화두가 요런 잔재미보다 더 기쁘냐, 깊으냐. 마음은 통신용 비둘기처럼 잘 날아간다. 나의 애완 개그, ‘굿모닝’도 훈련되고 진화하는 것 같다. 말이 너무 많아서 복잡하고 민망하고 시끄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엑기스, 혹은 통폐합이라는 게 참 편리하고 영양가도 높구나 싶다. 종합비타민 같다. 일체형 가전제품처럼 다기능으로 다 통한다. 아내도 요즘 내게 굿모닝,그런다. 나도 웃으며 웬 무식? 그런다. 지난 시절은 전부 호미자루처럼, 노루꼬리처럼 짤막짤막했다.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ㅡ「굿모닝」 전문
문인수 시인과 헤어지면서 나도 ‘굿모닝’ 그랬다. 그러고 싶었다. 틈날 때마다 자주 찾아뵙고 ‘굿모닝’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없는 사람’이다. 지난 8여 년간 파킨슨병을 앓다가 올해 6월에 유명을 달리하여 경북 군위 카톨릭공원묘원에 긴 잠 들었다. 향년 76세. 100세 시대라는 요즘 다소 아쉬운 나이다.
6월 9일. 군위군 군위읍 가톨릭 공원묘역에서 마지막 고인을 보내는 장례 절차가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그의 관 위에 손을 얹었다.” 생전에 참 선한 인상이던 그의 미소가 한 마리 흰나비 같다. 잡힐 듯 사뿐 날아올라서 창공 멀리 사뿐사뿐 스며드는 것 본다.
“그리하여 죽음 또한 한 표정을 갖는구나. 사방 구만리가 고요한 하늘의 덧니, 저 맑은 낮달” (「덧니-이성선 시인을 추모함」) “나무 한 그루를 얹어 심는 것으로 무덤을 완성”하고 채와 북 사이 동백지는 소리 보듬어 넣고 “그 일생이 보이지 않도록 쓸어모아 흙으로 덮어 평평하게 밟아”(이상「수장」) 기도로 마무리 지었다. (실제로 그날 입관할 때 김선굉 시인은 붓글씨로 써온 문인수의 대표시「채와 북 사이, 동백진다」를 그 자리에서 낭송하고 북채와 함께 말아서 관에 넣어 심었다.)
“다시는 아픈 꽃으로 피어나지 말고 주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기도하는 동안 “굿모닝! 여보! 여보! 굿모닝!” 사모님의 곡소리가 애잔하게, 애닯게 홰치듯 산을 울렸다. 그때 느티나무든 측백나무든 애통하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명아주 바랭이 참비름 강아지풀 같은 초록의 정강이”(「벽의 풀」)를 붙들던 말도 들렸다. 먼 하늘에 “슬픔이 새파랗게 만져”(「벽의 풀」)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별노래 한 무더기 봉분에 부려놓았다.
밤 깊은 시간엔 창을 열고 하염없더라
오늘도 저 혼자 기운 달아
기러기 앞서가는 만리 꿈길에
너를 만나 기뻐 웃고
너를 잃고 슬피 울던
등 굽은 그 적막에 봄날은 간다.
ㅡ「봄날은 간다 4절」 전문
아들 동섭 씨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를 칠성꽃시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천유원실버타운’에 보내면서 그곳이 또 다른 ‘배꼽’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전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요양원에 가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면회를 했을 때 그 어느 날보다도 또렷한 표정과 눈으로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책임을 다하듯’ 안부와 당부를 이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제 됐다.’ 싶었다”고 한다. “그날 면회가 끝나고 돌아서는 어머니와 아들을 돌려세우며 사진 한 장 찍자고 하였고, 그 사진은 또렷한 문인수 시인과 함께한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인수 시인 연보
1945년 6월 2일(음력 4월 21일)경북 성주군 초전면에서 아버지 문종협(文鍾協)과 어머니 조묵단(曺默丹)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초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주중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 성주중학교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했다.
1961년 성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주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62년 9월 대구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이때부터 교내 문학동아리 계단문학동인회에 가입해 학원 지와 매일신문 학생시원 난에 시를 발표하며 학생문사로 이름을 날렸다.
1964년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전신)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6월 학업을 중단했다.
1965년 9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1학년에 편입했다.
1966년 4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중퇴했다.
1966년 4년 21일 육군에 자원입대했다.
1969년 4월 5일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5년 3월 23일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전성수(田性洙-6·25전쟁에서 전사), 이갑조(李甲祚) 씨의 외동딸인 전정숙(田貞淑)과 결혼했다. 12월 아들 동섭(東燮)이 출생했다.
1978년 11월 딸 효원(孝媛)이 출생했다.
1985년 1월 《심상》신인상에 「능수버들」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등단을 계기로 아내를 따라 대구 신천동 복자성당에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1986년 8월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를 심상사에서 펴냈다.
1987년 이진흥, 이구락, 구석본, 이진호, 이재훈, 김동희 시인과 함께 ‘형상(刑象)’ 동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5월 두 번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를 문학아카데미에서 펴냈다.
1991년 9월 영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이하석 시인의 주선으로 주간국 교열부 기자로 입사했다.
1992년 세 번째 시집『뿔』을 민음사에서 펴냈다.
1996년 12일 제14회 대구문학상을 수상했다.
1997년 김선굉, 박기섭, 박진형과 함께 4인 공동시집 『머리를 구름에 밀어 넣자』를 대구 만인사에서 펴내고 화가 이규목, 이영철, 홍창룡, 권기철 등과 ‘8인의 시와 그림전’을 대구 동원화랑에서 가졌다.
1998년 5월 영남일보에서 퇴직했다.
1999년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을 대구 만인사에서 펴냈다.
2000년 6월 제11회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2000년 10월 다섯 번째 시집 『동강의 높은 새』를 세계사에서 펴냈다.
2001년 11월 두 번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를 문학아카데미에서 재출간했다.
2003년 12월 제3회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 6월 네 번째 시집 『홰치는 산』을 천년의시작에서 재출간했다.
2005년 제8대 대구시인협회장에 취임해 2년간 재임했다.
2006년 1월 여섯 번째 시집 『쉬!』를 문학동네에서 펴냈다.
2006년 8월 두 번째 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를 문학의전당에서 재출간했다.
2007년 제17회 편운문학상, 제10회 한국 가톨릭문학상, 제7회 미당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했다.
2008년 4월 일곱 번째 시집 『배꼽』을 창비에서 펴냈다.
2009년 시집 『배꼽』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문학나눔추진단 문학나눔사무국이 뽑은 ‘올해의 시’로 선정됐다.
2010년 2월 동시집 『염소똥은 똥그랗다』를 문학동네에서 펴냈다.
2012년 1월 여덟 번째 시집 『적막소리』를 창비에서 펴냈다.
2012년 7월 아홉 번째 시집 『그립다는 말의 긴 팔』을 서정시학에서 펴냈다.
2013년 5월 시선집 『밤 깊어 더 낯선 객지』를 시와반시에서 펴냈다.
2014년 4월 열 번째 시집『달북』을 문학의전당에서 ‘시인동네 시리즈 10’으로 펴냈다.
2015년 3월 열한 번째 시집『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를 창비에서 펴냈다.
2016년 제9회 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부터 파킨슨 증후군으로 일상적 삶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2019년 ‘모교를 빛낸 동문 문학예술인’에 선정되어 대구고등학교 역사관에 문학적 성과가 영구 보존돼 있다.
2021년 6월 7일 오전 12시35분 지병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향년 76세. 사흘 뒤 대구시인협회장으로 경북 군위군 군위읍 가톨릭 공원묘역에 모셨다.
(정리 : 박상봉)
첫댓글 문인수 시인님에 관한 정말 귀한 자료를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자료를 정리해 주신
시공간의 박상봉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