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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여보?”
뒤돌아서서 나를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는 아내, 뭐가 그리도 좋을까, 매일 보는 사이면서.
아내가 입은 옷은 언뜻 보면 평이한 홈웨어 드레스였지만 칠부소매에 치마의 마지막부분이 나팔처럼 퍼지는 디자인이었고 가슴이 1/3쯤 드러나고 뒤에는 날개쭉찌뼈의 절반이 드러나는 노출이 심한 옷이었다.
그리고 언제 일어났는지 풀메이크업을 한 상태였고 입술에는 진한 핑크빛 립스틱을 겹겹이 발르고 반짝이까지 입혀 놓았다.
20대나 가능한 풀메 스타일이었지만 45세가 된 아내 예린에겐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그리고 연주회 전날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예린의 목에 걸어준 크리스탈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것이 눈의 뜨인다.
“굿모닝 허니!”
아내는 이렇게 화답하며 내게 다가왔고 내 가슴에 얼굴을 살짝 묻는다.
그리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가벼운 뽀뽀를 했다.
오늘의 아침상은 예상대로 시레기 된장국과 쇠고기 표고버섯 볶음, 미역두부 간장 샐러드였는데 밥 두그릇은 뚝딱 먹어치울 의욕을 북돋는 아침상이었다.
아내 예린은 내가 첫술을 뜰때까지 기다렸고, 식사를 하는 내내 내 젓가락이 어디어딜 향하고 있는지 면밀히 관찰하고 있다.
식사가 끝나자 아침부터 퍼질 것 같았고 포만감이 몰려와 배를 두드렸다.
“와아, 이거 이러다 배만 나오겠어”
“당신 정도 나이의 남자가 적당히 배가 나올수도 있는거죠, 슬림하면 못써요, 그리고 여자가 욕먹어요”
“그래? 우리 예린이 욕먹이면 안돼지, 자! 대신에 소화시킬겸 좀 걷자,”
마당으로 나와 휘파람을 불어 진돗개 와룡이가 달려오도록 한뒤 함께 산책길에 나선다.
아내 예린은 자연스레 내 왼팔꿈치 안에 자기 오른팔을 끼웠고 살짝 옆몸을 밀착시킨채 천천히 걷는다.
걸을 때마다 예린의 무릎 바로 아래에서 나팔처럼 퍼지는 드레스의 레이스부분이 팔랑거렸고 샌들을 신은 발가락에는 검은 진주를 연상케하는 검은 광택의 페디큐어가 발라져 있는데 잘 어울린다.
와룡이에겐 넓은 담장 따위는 상관도 없이 수없이 뛰어넘어 다니면서 이 산 전체를 자신의 구역으로 삼고 있는 놈이라, 집 주변에 멧돼지나 고라니 따위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인적없는 산속의 단독주택에 살면서 아무리 경비용역을 맺고 cctv를 달아 놓아도 저런 독구를 키우는게 안심이 된다.
토요일 오후에 아내의 문하생들이 렛슨받으러 올 때를 빼면 목줄을 늘 풀어 놓기에,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인지라 산책하면서도 목줄은 걸지 않았고 녀석은 주인내외와 함께 산책한다는게 그리 흥분되었는지 우리 산책길 앞쪽에서 홀로 점프를 하고 난리를 친다.
"네? 그때 엄마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구요?"
"그때 큰 처남도 있었고 몇발짝 떨어졌지만 당신 새언니도 분명 같이 들었어"
"당신더러 때로는 절 꾸중하고 야단치라는 이야기......솔직히 당신은 저한테 너무 안 그러셔서 불만이에요. 어쩜 20년동안 제게 목소리톤 올린게 딱 한번이면 말다했죠? 남들은 당신 천사라고 하던데, 저 진짜 괜챦아요. 당신에게라면요, 진심이에요.,.......하지만, 하지만, 그 말씀이 엄마 입에서 나왔다고요?"
아내 예린은 잠시 감회에 빠진듯 눈을 가늘게 뜨고 저멀리 도회지를 응시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서서 다시 내 팔짱을 낀다.
"우리 언니 시집갔을때 언니와 형부 앉혀놓고 했던 말씀 고대로에요, 저도 실감 안나지만 대강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나를 진정한 사위로 너무 늦었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일게다.
실은 그전부터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체면상 지금까지 꾹꾹 눌러참아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보, 참, 이번주 추석이지? 어제 장모님이 말씀하시길 이번에 오면 하룻밤 자고 가라시네? 큰 처남도 나더러 밤새도록 술마시자고 하고?”
“네?? 엄마가 언제 또그런 말씀을 했죠?”
“어제 당신이 옛 합주단원들한테 붙들려서 정신없을 때 내 차에 오셔서 그리 말씀하셨어, 근데 평균 15명이 모이는데 아무리 큰 집이라도 잘때나 있을려나? 처남들하고 고스톱치다가 마루에서 자야지 뭐”
아내 예린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내쪽으로 휘감아 돌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금시초문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내게 캐듯이 묻는다.
그녀도 어젯밤 나와 장모와의 짧은 만남을 전해들으며 충격의 연속인듯 했다.
그리고 내 설명을 듣고나서 코끝을 징긋거리기 시작했고, 눈가에 이슬이 살짝 맺힌다.
가을 아침의 햇살과 아내 예린의 깊고 맑은 눈동자에 맺힌 이슬은 그녀의 눈두덩 위에 트리플톤으로 멋을 낸 아이섀도우 빛과 합쳐져 무지개 빛을 내고 있다.
자연스럽게 팔짱이 풀렸지만 그녀의 목을 감싸쥐었다.
나는 서울 출신이지만 대학을 이 도시로 와서 다녔다.
복학하여 4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있던 자취촌에 국악과 학생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때 자기 선배들을 찾아 놀러오던 신입생이 바로 아내 정예린이었다.
그때도 꽤 귀엽고 예쁘고 애교도 많았는데 나와 나이차가 7살이라 아저씨라고 부르며 잘 따랐었고 나는 그녀를 여자로 간주하기보단 귀여운 여동생처럼 챙겨주었다.
그녀와의 가벼웠던 만남은 1년에 불과했고, 나는 졸업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취업재수를 하는 동안 예린은 내게 꾸준히 손편지를 보내왔다.
당시 ‘어린아이가 제법이네?’하는 생각으로 나도 손편지 답장을 가끔 보내곤 했다.
운이 좋았는지, IMF 이후의 새로운 인재채용이라는 기치하에 모 대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대대적으로 공고했고 나는 거기에 합격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중 지금의 아내 예린이 서울의 중요한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올라왔다.
어느덧 대학 4학년이된 예린은 앳된 모습을 벗고 아름답고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또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산뜻한 원피스 차림에 곱고 정성이 들어간 메이크업을 하고 데이트 장소에 나타났다.
예린은 나더러 다짜고짜 자기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카페에서 일어나 나가는데 천연덕스럽게 팔짱을 꼈다.
그러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의 입술을 교환하면서 진짜 남녀관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곧 위기이자 기회가 닥쳐왔는데, 지방 사립대 출신인 내가 운좋게 대기업에 취업할수 있었던 것은 대외적인 기업이미지 광고 차원에서의 이벤트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입사 3년차 되던 해에 대리를 달아주고서는 지사 역량강화라는 기치 하에 지방근무자 자원을 대거 받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엔 나도 지방 파견 대상자로 묶여 있다고 HR쪽에서 귀뜸을 해주었다.
그때 반사적으로 생각난 것은 내가 떠나온 예린이 있는 도시였기에, 이곳 지사로 지원했고 6개월만에 다시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예린은 사실상 좌천으로 내가 내려왔지만 날 매일 볼수 있다는 생각에 애처럼 기뻐했고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본가에서는 예비며느리 예린의 미모와 매너에 푹 빠졌지만, 지역유지이며 갑부였던 처가에서는 하이스펙을 지닌 두 아들과 두 딸과 비교되서인지 날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딸 예린이 날 너무 좋아한다는걸 알기에, 심지어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대들며 그 비싼 가야금을 부숴버리겠다던 협박에 처가 어른들이 손을 내저으며 허락을 해주었다.
처가에서는 내게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예린이의 실질적 매니져가 되어야 하며, 캐리어에 방해가 될수 있으니 출산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마도 서로의 콩깍지가 벗겨질 때쯤 이혼시키기 용이한 장치를 심어두기 위해서 그런 어려운 요구를 했다는것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들이 리모델링 해준 집을 상속해줄터이니 시내 아파트로 나올 생각말고 무조건 거기서 살라는 요구를 했다.
원래 500평 대지를 끼고 세워져 처갓집의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는데 최근에 딸 예린을 위해 완전한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다는 그 집은 도시에서 한참 떨어져 산속 깊은 곳에 외로이 있었다.
건축면적 66평 2층의 대리석으로 도배되고 우드프레임이 혼합된 호화로운 내 집은 넓은 연습실을 포함하여 그녀를 위한 연구실, 넓은 침실 속의 메이컵룹과 목욕탕과 어지간한 방보다 넓은 드레싱룸, 나를 위해 배당했다는 작은 홈오피스용 방 전부 네개에 실내주차 세 대와 야외주차 다섯대가 가능했던 그 집은 거의가 제자 강습과 개인 연습이 필요한 예린만을 위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팔뚝길이만한 값비싼 대리석에 내 이름 석자를 새겨넣어 대문의 문패로 박아둔 것이 나를 위한 그들 나름의 유일한 배려이자 생색이었으며 내게 부여한 책임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다거나 금슬이 좋다라는 차원을 넘어 애절함과 오히려 슬픔이 느껴질 정도로 서로를 사랑했다.
예린은 내가 원한다면 생명같은 가야금을 버릴 것이며, 내가 가고자 한다면 서울이던 부산이던 외국이던 따라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약속대로 아내 예린은 모든 신경과 노력을 나에게로 집중시켰다.
아침 저녁 갈아입을 의상과 양말, 출근 복장까지 손수 준비했고, 과도한 렛슨생은 받지 않고 주부의 역할을 절대 방기하지 않았다.
음식 솜씨도 좋았고 매일 같은 반찬을 올리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신혼기를 넘겨서도 일주일의 정사횟수가 세번 아래로 떨어진적이 거의 없었지만, 신기한 것은 그녀는 아무리 바깥 일에 지쳐도 나에 대해서만은 피곤함과 관성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특히 연주회를 앞둔 날 밤에 부부관계를 가진 날과 안 가진 날과 그녀의 퍼포먼스가 달랐다.
전날밤 꼭 그녀와 격렬한 관계를 해야만 그녀는 합주회 무대에서 긴장을 풀고 여유롭게 연주를 할수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잘한게 정예린과 결혼한 일이라 할 정도로 행복한 결혼생활에 감사했다.
어려서부터 누군가에게 대접받거나 배려받는 일이 별로 없었던 내겐 집에서 그녀와의 생활은 정말 내가 무슨 황제라도 된듯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행복한 결혼생활이 자극이 되어 나는 지사에서 4년만에 퇴사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작은 업체를 열었고 온라인 부문이 매출이 터져 지금은 종업원도 이십명 정도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아내 예린이 벌어들이는 렛슨비나 예술단에서 나오는 월급은 그녀의 용돈 내지는 자신을 위한 투자로 돌리도록 했다.
그때부터 예린은 자기 수입으로 스승과 제자들에게 돈을 많이 푼듯 하고, 그 다음으로 스킨케어나 화장품 구입 등에도 과감하게 돈을 썼다.
아내 예린은 가끔 내 종업원들을 위해 간식까지 손수 만들어서 회사로 날라다 주기도 했다.
그리고 9년전부터는 아내의 제안대로 성탄절 직후 회사에서 종업식을 마치고 전 직원들이 우리 집에서 모여 커플동반으로 회식을 하는데 거의 30인분의 음식을 모두 장만하고 접대하는 등 사모의 역할에도, '하갑수의 부인'이라는 호스테스의 품위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본가에 가서도 내 어머니와 가족들에게도 헌신했다.
이토록 이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딸을 데려간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금슬이 꺼지지 않았음에도 나를 바라보는 처가는 여전히 무관심하거나 아웃사이더 취급을 했다.
결혼한지 4년째 되던 구정이 보름 지나고 무슨 일인지 예린만 홀로 처가에 갔다가 그녀답지 않게 밤늦게 돌아왔다.
어두운 국도길에서 무슨 변을 당한게 아닐까 초조했고 예린의 전화기도 꺼져 있었다.
아무리 행사가 늦어지거나 해도 홀로 밤 9시 이후에 집에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던 예린이 11시쯤 되어서 집으로 들어왔는데 차에서 내리는 예린은 얼굴이 초췌하고 눈이 퉁퉁 붓고 목이 착 감겨 있었다.
내 생각엔 장인어른이 4남매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시집간 언니에게도 상당한 몫을 챙겨주었는데 유독 막내딸인 예린에게는 결혼 당시 리모델링해서 준 지금의 주택으로 이미 다 끝난 것으로 알라는 것 때문에 싸운 것일까 하고 오해했다.
하지만 예린은 그깟 상속재산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평소 처가가 나를 무시한 것에 대해 몹시 기분이 상해 있던 터였다.
분명 나와 우리의 결혼생활 때문에 친정 식구들과 대판 싸우고 왔음을 직감한 내가 해줄수 있는 것은 예린을 꼬옥 안아주고 한참을 그대로 있는 것 밖에는 없었다.
(여보, 이제 저 친정 안가요, 당신도 제 친정에서 불편하게 있을 필요 없어요. 저, 엄마 아버지 오빠랑 연 끊기로 했어요.......................당신이 절 위로하고 싶어하는 심정알고 어떻게 말할까라는 고민도 전 읽을수 있어요, 우리는 사랑하니깐요. 그래요, 당신, 이렇게 꼭 안아주기만 해도 예린이는 행복해요. 왜 유부녀가 밤늦게 다니냐고 큰 소리로 야단쳐주셔도 전 그게 더 행복해요.)
본가에 오면 나도 예린도 대우받지만, 처가에 가면 나는 찬밥이었다.
게다가 장모님이 그녀의 올케들에게 무슨 가스라이팅을 당했던지 예린 역시 남편인 나를 따라 비주류급 서열로 위치되었으며 그녀의 내 동갑내기 큰처남은 그녀에게도 냉랭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을 극력 반대하던 처갓집에는 결혼을 어쩔수 없이 허락하면서 모종의 음모와 안배를 행했다.
나에겐 예린의 커리어를 위해 출산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고, 어느날 장모님과 그녀의 올케가 기사딸린 차를 타고와 예린을 납치하다시피 산부인과로 데려가 루프삽입시술을 시켜버린 엽기적인 일까지 발생했다.
3년이면 콩깍지가 벗겨질 것이고 그때 이혼을 종용하여 예린을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는 얼토당토 않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여자가 미모가 출중해도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진 남자 측에서 호적상으로도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처녀가 아닌 여성을 원할런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자식들까지 이용물로 바라보는 처갓집이라면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겐 예린의 캐리어가 제일 중요하다고 가스라이팅했지만, 실은 처갓집에선 예린이 교수가 되는 것도 독주자로서 성공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적당히 예술단원 생활하고 렛슨이나 하다가 좋은 집안으로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린의 직업적 승승장구에도 우리의 서로가 서로만 바라보는 깊고 단란한 사랑, 이 세가지는 그 집안을 극도로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아내 예린의 담담한 고백에 의하면 이미 예린의 나이 32살인 결혼 7년차인 13년전부터 처가측의 입장은 달라지기 시작해서 오히려 정서적으로 을이 되어 버렸다.
산속 깊은 곳의 미술관을 닮은 우리 외동 주택에서 수백미터를 떠나와 저 멀리 예린이 공연했던 대형 시민회관이 손톱만하게 보이고 그녀가 재직중인 대학이 지평선에 걸쳐진 것이 보이는 언덕의 끝에서 우리는 동시에 멈춰섰다.
“근데 엄마집에 방이 왜 없어요? 엄마방에서 자게 될거에요”
“그게 무슨? 어른을 침소에서 밀어내고 자식 부부가 잔다고?”
“원래 첫 결혼한 커플이 첫 명절을 맞이할때 부모님의 방에서 재웠어요, 부모님은 도우미 아줌마가 기거하던 작은 방으로 가시고, 큰 오빠네, 둘째 오빠네, 언니랑 형부 모두 결혼 직후 맞는 명절의 첫날밤을 엄마아빠 침실에서 지냈거든요.”
이게 무슨 뭐같은 전통인가 싶겠지만 너무 늦게 와서야 장모님은 나를 진정한 사위로 인정해준다는 사인이었고 막내딸 예린에게도 더 이상 차별대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우리 침실보다 엄마 침실이 조금 좁을거에요, 그래도 좋다면야”
“그럼 당신이 장모님한테 확인해봐, 그래야 나도 서울 본가에 올라가는 일정을 조정하게 될테니깐”
아내 예린도 장모님과 돌아가신 장인어른에게 결혼 문제와 그 이후의 나에 대한 대우 때문에 여러차례 도발했던 과거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알아보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며칠 안으로 엄마가 제게 전화를 할지 모르지만, 세대주인 당신에게 통보했으면 이미 다 결정된거에요. 전 따르기만 하면 되니깐요.”
나는 야무지면서도 사려깊은 아내 예린의 말에 감격하여 그녀의 허리를 나무 밑에서 감싸안았고 예린은 조용히 내 품에 고양이처럼 파고 들었다.
저 멀리 도회지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서 아내 예린은 시가지를 등진채 두 팔을 내 겨드랑이에 끼웠고, 나는 한손으로는 그녀의 등에 대고, 한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고 서로의 입술을 포갠채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나긴 입맞춤을 시작한다.
어차피 집밖이라 해도 아스팔트 길로 10분 걸어서 삼거리 나오기전까지는 철조망과 철문으로 둘러쌓인 사유지다.
집밖에서 키스 정도가 아니라 섹스를 해도 누구 눈에 뜨일 일이 없고, 실제로 몇번 숲속에서 알몸차림의 퍼포먼스도 몇번 해 보았다.
하지만 벌레와 흙과 낙엽과 차가운 공기의 습격은 상상보다 낭만적이지 않아 요즘은 별로 안한다.
서서히 예린의 숨결이 거칠어져 그녀의 뜨거운 날숨이 내 인중을 주기적으로 강타하기 시작했고 예린의 달콤한 타액이 그녀가 바른 립스틱과 뒤섞여 내 입술에 녹아들고 있다.
가을 아침의 산 중턱에서 내려오는 바람결에 린스향 머금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춤추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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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절절한 부부애가 잘 표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