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전의 사람을 기억한다는 일은 그 자체가 참 놀랍고 감격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 기억이 제대로 된 것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동시대의 사람을 보는 눈들도 저마다 다르고 서로 헛갈려서 논란이 일기 쉬운 법인데 많은 부분은 지워진 저 천년 전의 생애와 생각에 대해서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겠는가.
신라말기 그리고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최치원(857-?)은 이 나라 이 겨레의 정신 속에 많은 영향을 미쳐 하나의 무의식으로 들어앉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람의 이름은 친숙하지만 별로 그 삶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위인전을 허술히 읽은 탓일까. 지금 와서 살펴보면 이 위대한 천년 전의 천재는 후대의 정치적 목적이나 고양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엄청나게 찬양받거나 또 형편없이 매도당하는 경우가 잦았기에 그 평가에 있어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할 만큼 곡절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최치원은 그런 논란의 와중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순 없기에 아이들의 위인전에도 자주 빠지는 푸대접을 받고 있지 않나 싶다.
최치원의 호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어린 시절의 이름인 자(字)가 고운(孤雲)으로 되어있다. 호가 알려지지 않은데다 자가 마치 호처럼 상징적이고 아름다워서 후대사람들은 그를 그냥 고운 최치원이라고 불러오기도 했다. 외로운 구름. 이런 이름은 어쩌면 그의 삶을 압축하는 메타포인지도 모른다. 열두살에 당나라에 국비유학생으로 떠나 그 현지서 열여덟살에 진사갑과라는 공무원시험에 수석합격하여 천재적 실력을 널리 인정받은 그였다. 그리고 스무살엔 선주라는 곳에서 율수현위라는 관직을 받아 벼슬살이를 하는 등 외국인으로서는 아주 두드러진 출세를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이방의 생활 동안에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탔던 모양이다. 그의 많은 시들은 당나라 체류시절의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가을밤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秋夜唯苦吟) 세상길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世路少知音) 창밖에 깊은 밤 비는 내리는데(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은 먼곳에 가있구나(燈前萬里心)
이 쉽고 간결한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많은 이들의 향수(鄕愁)와 외로움을 자극하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지음(知音)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알아줄 수 있는 소통가능한 벗을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런데 최치원의 심정에는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땅에서의 언어적 고독을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의 골목을 나가보면 낯선 이방의 말투 뿐이니, 속시원히 속엣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모국어대화가 무척 그리웠을 것이다. 게다가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방안에 켜진 등불은 깜박이며 그리운 얼굴들로 향한 생각을 자꾸만 더 간절히 키워올리니 환장할 노릇 아닌가. 천년 전의 감성이 때 한점 묻지 않고 먼지 한올 앉지 않고 이렇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오는 시의 힘을 보면서 우린 또다른 감동을 느끼기도 하였다.
당나라에서의 승승장구. 그러나 그런 최치원의 시들은 슬픔과 고독으로 늘 출렁거린다. 외로운 구름이란 그의 이름은 이방인의 정처없는 분위기를 그림같이 붙들어내고 있지 않은가. 서양에선 헤세라는 시인이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말했지만, 이 나라에선 이 사람보다 더 구름같은 삶을 산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말할 만 하다. 다시 시를 읽어보자.
강가에 말을 세우고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네. 파도를 두른 물안개 띠가 영원한 슬픔같네. 산이 평지되고 물이 말라버리는 날 인간의 이별이란 비로소 멈출 수 있을까. <우강역 정자에서>
나그네집에 내리는 마지막 가을비 추운 창에 밤 등불은 고요한데 슬픔 속에 앉아 스스로 가엾어하네 내 진실로 명상에 든 승려와 같구나 <우정(郵亭)에 내리는 비>
서로 만나 잠시 초산의 봄을 즐겼더니 다시 헤어지려니 눈물이 수건 가득 젖네 바람끝 쓸쓸히 바라보는 걸 이상하다 생각마소서 이향(異鄕)에서 고향사람 만나는 일이란 어려운 일인 것을 <산양(山陽)에서 고향벗을 보내며>
최치원은 중국서도 유명한 시인이요 문장가였고 식견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신라조정에 잘 알려진 사람이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당서(唐書)의 예문지에까지 최치원의 글이 올라있는데도 중국 문예열전에 고운전(孤雲傳)을 빼버린 것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천재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억울해하고 있을 정도다. 그가 중국 체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스물 아홉살 되던 때였다. 잘 나가는 그가 왜 갑자기 귀국을 서둘렀을까.
잠깐 그의 중국시절을 짚어보면 그는 스무살때 율수현위라는 관직을 맡았다. 현위란 벼슬은 종9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하나의 현에 3명씩 있었는데, 지금의 경찰, 사법, 형집행에 해당하는 일을 맡은 말단공무원이다.외국인으로서 약관의 나이에 이례적인 대우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는 1년뒤 겨울에 그 자리를 내놓고 산으로 들어가 다른 관리시험 준비를 하는 것을 봐도 그리 영광스런 직책은 아니었던듯 싶다. 생활도 곤궁하였던 모양이다. 그가 쓴 <월계수숲에 붓으로 밭을 갈다(桂苑筆耕集)>이란 책에는 이 당시의 심경을 고백하는 글이 있다. "산에 은거하려는 결심으로 잠깐 은퇴하여 학문은 바다처럼 이르기를 기약하고 다시 스스로 탁마하였더니 다만 녹봉에 남은 것이 없어 글 읽을 양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런 가운데 최치원은 스물네살 때 고변(821-887)이라는 제후에게 탄원하여 드디어 그의 종사관이 된다. 고변은 원래 무인 집안이지만 문학을 좋아해서 최치원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라는 고위 관직을 맡았을 때 최치원은 그의 부름을 받아 도통순관이라는 벼슬을 받는다.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 시절에 당시 중국을 시끄럽게 했던 황소의 난을 맞아 당사자인 황소를 떨게 만들었다는 <토황소격문>을 써서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데는 나름대로 정세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최치원은 자신을 키워주고 벼슬살이를 시켜준 고변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최치원은 고변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점차 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나가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약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가장 핵심은 오만과 태만이다. 그는 신선사상에 사로잡혀 세상의 세세한 가치와 덕목들을 우습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여용지와 제갈은 같은 도사들을 브레인으로 두었다. 중앙조정에서 그에게 여러번 출병(出兵)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병을 핑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고변에 대한 조정의 신뢰를 점차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가적인 구선(求仙)에만 열중해 격동하는 세상의 변화들을 제대로 감잡지 못하고 있으니 최치원은 답답했다. 그는 몇번 고변에게 충고어린 말을 건넸으리라. 그러나 고변이 이런 말을 들었을리 없다. 최치원은 이제 그가 할 역할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봇짐을 싼 것이다. 최치원이 떠난지 3년 뒤 회남에서 난이 일어나 고변은 권력에서 쫓겨나고 그뒤 피살당하고 만다. 역사서들은 이런 뒷사건들을 들어 최치원의 혜안을 높이 사기도 한다. 그러나 이방에서 그를 거둬준 은인이었던 고변에 대해 좀더 충성스러운 태도를 지니지 못했던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쩌면 최치원의 이런 태도는 차후에 나타나는 몇가지 약점들을 상기시키는 복선인 것 같기도 하다.
고변에 대한 실망만이 최치원의 마음을 흔든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방인으로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최치원에 대한 주변의 질투들이 그를 괴롭혔을 지도 모른다. 그가 그토록 쓸쓸한 노래를 자주 뱉어낸 이유는 외국인천재를 왕따시키는 숨막히는 당나라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게다가 그가 중국을 뜨기 직전엔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또 그를 미워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무인도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나라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고 있는가? 회의가 들었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이 깊이 신뢰했던 고변마저 맛이 간 상황이니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국인 신라에 가면 나를 알아주는 군주가 있고 또 나를 지지해주는 많은 동포들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새로운 기대감을 안고 그는 발길을 재촉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이 더 똑똑할 거라는 세상의 굳은 믿음에 대해 불만이 많다. 우리나라보다 교육적 시스템이 앞서있고 학문적 토양이 풍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유학 자체가 그 사람을 반드시 업그레이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학을 자랑하고 그 자랑이 통하는 나라는 자기 나라와 자기의 뿌리에 대해 깊은 경멸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사대(事大)주의라고 말하는 것에는 지적 식민지 근성도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물 건너가서 공부했다는 게 큰 뻐김이 되고, 심지어 물 건너가서 노숙자 생활에서 약간 진보한 배낭여행을 한 사실 만으로도 큰 벼슬처럼 생각하는 요즘의 풍조는, 사실 새삼스런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지금 말하려는 신라시대에도 대단했었던 모양이다.
추사 김정희는 아버지를 따라 잠깐 연경에 다녀오고도 청나라 지식인들과 빵빵하게 교유하는 실력을 보여 조선시대 식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의 북학파들은 외교사절을 따라 잠깐씩 다녀온 체험을 바탕으로 학문의 혁명을 부르짖은 사람들이었다. 유학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짧고 정규적인 교육커리큘럼도 없는 그런 외유에 불과했는데도 그들에 대한 조선 내의 관심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고 그 유학생들은 그 관심에 걸맞은 새로운 식견을 조선 내에 보급함으로써 하나의 학문적 각성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또한 오늘날 못지않은 유학열풍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추사를 비롯한 중국유학생들이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수입하면서 중국에 대한 필요이상의 사모(思慕)증세, 혹은 그쪽의 것은 모두 잘났고 우리 것은 모두 촌스럽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관점까지를 수입해왔다는 혐의로, 후대의 비판을 받아온 점은 주목할 만하다.
최치원은 말하자면 이 나라에서 원조(元祖)급 유학생이다. 그는 당나라에서 상당히 오래 살았고 게다가 거기서 명망과 벼슬까지 얻은 사람이니, 제대로 된 에이급 유학생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신라에서 나랏돈을 들여 유학생들을 집단적으로 키운 것은 10년 내지 20년을 내다보고한 장기적 교육투자였다. 이 엘리트들이 귀국하여 왕의 측근이 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합리적인 지식인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프로그램에 바탕한 유학이었다.
천재유학생 최치원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당대의 왕과 국민들에게도 컸으리라. 그는 884년에 신라사신으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집 소식을 전해왔던 육촌동생 서원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바다의 풍랑이 심한 탓에 도중에 유산이란 곳에 이르러 당분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마침 겨울이 닥쳐와 그는 곡포에 정박해 짐을 푼뒤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에야 신라에 발을 디뎠다. 그 시절엔 중국서 신라로 오는 길도 이렇듯 험난하고 먼길이었다. 최치원에게는 이 기간이 더욱 멀고 지루하게 느껴졌으리라.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며 최치원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자신을 닮은 구름들 사이로 끼룩대며 날아오르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그의 눈앞엔 어떤 사념들이 명멸했을까? 그의 중국 생활을 뒤돌아보았을까? 열두살때 당나라로 그를 보내며 10년 안에 급제를 하라고 간곡히 당부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최치원의 재당(在唐) 시기는 희종의 집권(873-888)기간이었다. 희종은 열네살에 환관들에 의해 옹립된 황제로 주관이 없고 여색과 놀이만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특히 10년에 걸친 황소의 난(875-884)으로 인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어 서촉으로 몽진을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던 황제다. 안으로는 환관의 발호가 극심했고 밖으로는 번진의 난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때였으니 최치원은 중국생활이 평온하고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으리라. 청운의 꿈을 품고 달려왔던 이방이 신천지가 아니라 피폐해가는 늙은 나라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는 고국은 그래도 밝게 보였다.
중국에 왔던 동생 최서원은, 국내 정세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으리라. 당시는 헌강왕이 집권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경문왕은 그 윗대 헌안왕의 사위였는데 태자가 없던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그가 가진 막강한 사병의 힘도 작용하였던 모양이다. 이런 아버지의 사례를 알고있는 헌강왕은 사병의 혁파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다. 최치원의 귀국은 헌강왕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그는 당나라에서 고변의 종사관으로 근무했을 뿐 아니라 황소의 난을 치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고변이 당 황실에서도 무시못할 군벌로 성장하는데 최치원의 지략도 한몫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런 최치원에게 헌강왕은 군제개혁에 관한 방안을 자문받고 싶었을 것이다.
헌강왕은 돌아온 최치원에게 시독겸한림학사와 수병부시랑을 맡긴다. 후자의 수병부시랑이 바로 군사개혁을 연구하는 직책이었다. 물론 그가 진골이 아닌 육두품이라 정직(正職)을 주지는 못하고 수직(守職)을 내렸다. 한림학사는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외교교섭 사절 임무를 맡는 직책이다. 신라정부는 당나라 국비유학생들을 주로 이와같은 문한(文翰)기구에 임명을 시켰다. 허약해진 왕권을 추스리려는 경문왕 헌강왕 양대의 노력의 일환이었다.
최치원은 귀국한 이듬해(886) 정월에 자신이 중국서 저작한 시와 산문집 28권을 왕에게 올린다. 헌강왕은 문학과 유학(儒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명한 군주로 그려지기도 하나, 혹자는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왕이었다고도 하며 신라 하대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즈음을 그의 집권 시기쯤부터 잡는 경우도 많다. 어쨌거나 최치원에게는 고마운 군주였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경륜을 알아주는 군왕에게 그는 기꺼이 자신의 시집을 바쳤을 것이다. 그런데 헌강왕은 최치원이 귀국한 다음해 7월에 죽고만다. 최치원으로서는 믿었던 기둥 하나가 빠져버린 셈이다. 왕의 측근에 기용되었던 그는, 헌강왕이 승하하자마자 태산군 태수라는 외직으로 밀려난다.
왜 그는 갑자기 밀려났을까? 삼국사기나 가승(家乘)에 보면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용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외직을 자청했다"고 되어있다. 이것도 한 이유는 되었을 것이다. 내가 유학생에 대해 고까운 시선을 가지고 있듯, 당시에도 최치원의 출세에 대해 질투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선가 굴러온 돌을 왕이 잔뜩 총애하니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상황이 급변하자 누군가가 그를 밀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인 시각에서 최치원의 조정퇴출을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왕권강화기구인 문한기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귀족들이 헌강왕 사후에 바로 공중분해시키는 작업에 나섰고 최치원은 그 피해자라는 것이다. 그런 설명도 일리는 있다.
그가 태산태수로 간 것은 서른 살 때였다. 이듬해 부성군으로 옮겨 7년간 태수를 지냈다. 진성왕 7년인 893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그 다음해에 다시 천령태수로 부임한다. 천령태수로 부임하고 나서 최치원(38세)은 유명한 시무(時務)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여왕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를 6두품 최고의 관등인 아찬직에 올린다. 시무란 해야할 알맞은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 10여조는 당시의 문란해져가는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안들은 실천되지 않았고 그래서 최치원은 더욱 좌절하였을 것이다. 천령태수를 끝으로 그는 은퇴를 결심한다.
그가 시무책을 올리던 때는 참담한 시대였다. 진성여왕이 워낙 정치에 무능하고 향락만 일삼는 폭군이었는데다가 호족들의 발호로 나라는 찢기고 귀족들은 여자 왕에 대한 깊은 반감을 바탕으로 노골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골품제의 병폐는 깊어져 아무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시피한 상황이었다. 최치원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파견될 당시, 그가 지나쳐야할 통로가 견훤등 반군들에게 점거당하여 외교가 차질을 빚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신라는 경주 부근만이 겨우 통치권이 미치는 옹색한 나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이 중국에 다녀온뒤 바로 올린 시무책은 이같은 국망(國亡)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가조직의 대혁신안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시무책은 비록 당대에는 반영되지 못했지만 뒷날 고려 건국과정에서 이념적 방향을 제시하는 귀중한 주춧돌이 되었다.
최치원은 우리 역사 천년의 최대 스캔들 메이커다. 기울어져가는 신라말기를 괴롭게 호흡하며 살아간 그는 좌절한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당나라에서 문명(文名)은 떨치고 벼슬도 붙잡았지만 그것이 그의 깊은 허기를 채워주진 못했다. 돌아와서도 그는 고독한 천재일 뿐이었다. 기껏 야심작으로 올렸던 시무10여조는 그저 부패한 군주와 탐욕스런 신하들 사이에서 휴지처럼 구겨져버린 문서가 되었고 지방으로 좌천되어 고을을 전전하다가는 결국 사표를 내고 은둔하고 마는 쓸쓸한 이력서의 주인공이다.
그가 재발견되는 건 고려 현종때(1020) 아주 얄궂은 공로를 인정받으면서였다. 최치원이 고려로부터 추앙을 받게된 이유를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적고있다. "처음에 우리 태조가 나라를 일으킬 때 최치원이 비범한 인물로서 반드시 천명을 받들어 나라를 열 것을 알았기에 태조에게 글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계림은 황엽(黃葉)이고 곡령은 청송(靑松)이라는 글이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고려 초기에 이르러 많이 와서 고려에 벼슬하여 높은 자리에 이른 자도 적지 않았다. 현종이 재위시에 치원이 밀찬조업하였으니 그의 공을 잊을 수 없으므로 명령하여 내사령을 추증하고 현종4년 계해 2월에 이르러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즉 최치원이 고려로부터 우상화된 것은 그러니까 신라를 배신하고 태조의 건국을 몰래 도왔기 때문이란 얘기다. 고려 당시로서는 이런 행위가 큰 공로로 여겨졌을지 모르나 후세 사람들이 보자면 이런 칭찬이야 말로 최치원의 인격을 의심케하는 치명적인 욕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반란자 왕건에게 글을 보내 신라는 마른잎이요 고려는 푸른솔이라니...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받아 몽천하는 수난을 겪은 왕이다. 나라의 위신을 살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적당한 조상을 물색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띈 최치원은 그런 우상화 작업에 똑 떨어지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는 최치원을 설총과 함께 추증하고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배향하기까지 한다. 위대한 유학자로 모신 것이다.
최치원이 은밀히 고려 창업을 도왔다는 밀찬조업설은 곳곳에서 보인다. 삼국사기보다 조금 뒤에 나온 최자의 보한집에서는 한술 더 뜬다. "최치원은 태조에게 천운이 있음을 알고 <계림황엽 곡령청송>이란 글을 올렸다. 신라왕이 이를 듣고 미워하니 그는 곧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가 은거한 것은 시무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정치생활을 포기하고 들어간 것인데, 마치 황엽청송 사건이 그 원인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조선시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최치원이 의리와 절조를 지키지 못했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조선시대 정극후(1577-1658)는 서악지에서 "최치원이 청송황엽의 글로써 고려의 창업을 은밀히 도왔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하였다는 것은 필시 사전(史傳)의 비루(鄙陋)함 때문일 것이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병주는 이런 의심에 살을 붙이고 있다. "고려초에 최치원의 문인으로 벼슬한 사람이 자못 많았던 모양이어니와, 위의 참언(讖言)이야기는 그 계통의 사람들이 벼슬을 도모하기 위해 최치원의 이름을 빌려 지어낸 일화가 아닐까?" 한석수란 분은 고려가 이데올로기 확립 과정에서 최치원의 명성을 끌여들였다고 말하며 "고려 건국을 전후하여 민간에 전파되었던 참요(讖謠)를 의도적으로 최치원과 결부시킴으로써 고려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풀이하고 있다.
최치원이 왕건에게 그런 참언을 써줬다는 이야기는 시기상으로도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최치원이 은퇴한 것은 마흔두살때 898년이었다. 이때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지 3년째 되는 때로써 왕건의 나이는 스물두살이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즉위한 것은 이로부터 20년뒤인 918년이다. 최치원이 은퇴할 당시엔 왕건의 존재는 미미하여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때였으므로 최치원이 그를 알아보고 참서를 주었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최치원이 은퇴하기 전해인 897년에 그는 왕명에 의하여 신라정부를 대신하는 문서를 네 편이나 올렸다. 이런 그가 바로 그 이듬해에 황엽청송을 왕건에게 주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최경숙씨는 밀찬조업설이 나오게 된 배경을, 당시 최치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해인사 화엄승인 희랑에 대한 세간의 추측을 꼽고 있다. 희랑은 이후 왕건과 친해지는데 이런 세 사람의 관계를 후대 사람들이 윤색하여 참서이야기로 꾸며냈다는 설명이다. 이재운씨는 청송황엽이란 문구가 최치원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며, 아마도 이 귀절은 최치원이 임금께 상소하여 신라와 태봉의 형세를 비교하여 강조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귀절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신라는 지는 잎의 형국이며 궁예의 태봉은 강성하기가 푸른 소나무처럼 쩡쩡하다는 비유를 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문구는 신라의 멸망을 축수하는 대목이 아니라, 나말의 현실의 냉철하게 통찰한 우국심이었다고 강조한다. 또 그가 은퇴한 뒤 42세, 44세, 48세, 52세때 계속해서 신라왕실이 사찰의 기(記)를 지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반신라적인 인물이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최치원은 후학들의 각별한 노력에 힘입어 신라를 배신하고 새 왕조의 탄생을 도운 역적이자 배신자라는 혐의는 상당히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황엽청송의 비밀은 완전히 풀린 게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심증적으로 추측할 뿐이다. 최치원이 진실로 시무10여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패한 왕실에 대한 지독한 절망으로 새 왕국의 탄생을 꿈꾸었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왕조적 관점에서의 충성이데올로기로 보자면 용서할 수 없는 흠이겠으나, 일치일란(一治一亂)의 맹자적 역사관을 갖고 있던 그가 망해가는 왕조를 보며 새로운 시대로의 혁명을 꿈꾸었다면 그것을 굳이 한 인간의 부도덕이나 패륜으로만 몰겠는가? 왕실에 충성했던 그가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거라는 정황적 증거들과,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정략적 목적에 따라 최치원 띄우기를 했다는 설명들은 고개를 끄덕이게는 하지만 한 천재의 열정과 절망, 그리고 인간의 다면성, 시대적 고민 등의 변수를 도외시한 점이 있고 또 중국 제후 고변을 과감히 떠나오던 최치원의 모습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윤리적 추론들이, 다른 추론들을 압도해버릴 경우, 그것은 윤리교과서일 뿐이지 역사는 아닌 것이다.
최치원이 사후에 만나게되는 가장 버거운 논란은 조선시대의 문묘 논쟁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라 이른다. 그 가르침을 베푸른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있는데 실로 세가지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을 함께 포용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에 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말씀 그대로이며, 무위(無爲)의 꾸밈없음과 말없는 가르침은 노자의 뜻 그대로이며,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이 글의 내용처럼 최치원은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유교 불교 도교 3교가 혼융해야 한다는 종교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불교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의 유학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그중에서 가장 야무진 독설을 퍼부었던 사람은 퇴계 이황이었다. "최치원의 무리들은 문장만 숭상하고 부처에게 몹시 아첨하였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불소(佛疎)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서 아주 끊어버리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를 받게 하니 어찌 옛 성인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은가." 퇴계의 이런 비평은 최치원을 부처에 아첨하는 놈으로 낙인찍어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배향하는 일이 부당함을 주장하는 무게있는 근거로 쓰였다. 율곡 이이도 거들었다. "고려시대에 문묘에 종사한 사람으로는 정몽주 한 사람 밖에 없으며 설총 최치원 안유 등은 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조대왕도 최치원을 문묘 배향하는 일은 좀 심하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최치원이 혼났던 것은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의 상징적인 모델케이스에 그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문묘배향은 계속되었는데, 그 명분은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된 것은 유학자로서가 아니라 대문장가로서이다"라는 방식으로 논점을 비켜나갔기 때문이다. 이런 반면에 불교에서는 최치원을 최상급 형용사를 동원하여 기리고 있다. 서산대사 휴정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유교과 불교를 밝게 알고 안팎으로 널리 통달한 사람들은 공명을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남의 근심을 자기 것처럼 걱정하며 남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니 어느 겨를에 유교가 그르다 불교가 그르다하여 서로 원수처럼 지내며 비난만 하겠는가. 우리나라의 최고운과 진감선사가 그러한 분이다. 고운은 유학자요 진감은 불승이다. 진감이 절을 세워 처음으로 인간과 하늘의 안목을 열었고, 고운이 비를 세워 널리 유.불의 골수를 내었으니 아아, 두사람은 일종의 줄이 없는 거문고로다." 서산의 이런 찬사가 나온 뒤 불가에서는 최치원의 글들을 불경 바로 아랫자리에 놓는 귀한 특별참고서로 모신다.
도교 쪽에서는 더 난리다. 아예 최치원을 신선으로 모시기도 한다. 말년에 최치원은 가야산에 은거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문밖을 나가더니 모자와 신발만 숲 사이에 남겨놓았을 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해인사의 스님이 그날로 명복을 빌며 초상을 걸어두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만, 모자와 신발 밖의 나머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암시 아닌가? 그런데 그가 자취를 감춘 것을 자살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절망한 나머지 택한 방법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신선이 되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 북애라는 사람이 자신의 도교적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최치원을 빌린 것이라고 하니, 이래저래 그는 후세사람에게 인기도 좋았던 것 같다. 또 고려의 밀찬조업설과 관련있는 황엽청송도 바로 도가적 예언 아닌가? 그쪽 방면에서는 그의 이런 예지능력을 믿고 또 믿는다. 또 택리지에는 "고운은 김가기 최승우 두 사람과 더불어 종남산 절에서 선사를 만나 내단비결이란 책을 얻고 뒷날 동국에 돌아와서는 함께 수련하여 선인의 술법을 깨쳤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정조실록에는 "최고운이 가야산에 들어가 공부할 때 항상 사슴 한 마리가 책상 밑에 엎드려 있었는데 마치 도를 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최고운이 말하기를 '네가 비록 다른 종류의 짐승이지만 능히 도를 흠모할 줄 아니 나이를 연장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마침내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말도 통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전국 곳곳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금돼지굴이 산재해있다. 금돼지는 기복신앙상의 존귀함을 상징하는 대상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최치원이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구름처럼 왕래했다는 이야기와 최치원이 글 읽는 소리가 중국 천자에게 들렸다는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 문학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최치원 문장은 별로 볼 것이 없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친불교적인 태도에 심기가 뒤틀린 시각에서 바라본 연장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대체로는 한국 문학사의 위대한 스승으로 꼽는다. 조선전기에 심의(1475-?)라는 사람은 우리나라 역대 문사들을 한 자리에 놓고 문장의 고하에 따라 관직의 차등을 둔 가상의 문인국가를 그린 한문소설 <대관재몽유록>에서 최치원을 최고의 지위인 천자로 모시고 있다. 이 나라 역사에는 최치원을 사모하고 그의 문장을 담고자 하는 최치원스쿨이라할 만한 통시적인 지식인 그룹을 만날 수 있다. 외로운 구름이라는 고운(孤雲)을 이은 흰구름(白雲)거사 이규보, 물빛구름(水雲)이란 호를 가진 최제우는 아예 구름클럽이라 할 만큼 최치원을 좋아한 열광팬들이다. 매월당 김시습, 청허당 휴정, 연담 유일, 또 초정 박제가를 비롯한 일군의 북학파들도 그 학통을 이루는 고운라인이다.
최치원이 마지막으로 두들겨맞는 것은 근대에 들어오면서이다. 단재 신채호는 "최치원은 사상이 한나라나 당나라에만 있는 줄 알고 신라에 있는 줄 모르며 학식은 중국책이나 불교책을 꿰뚫었으나 본국의 옛글 한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상은 조선을 가져다가 중국버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른바 사대모화사상을 비판하는 근대적 자의식이 이 유학생의 자기나라 깔보기를 곱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추사 김정희에게도 적용되어 그를 중국병 환자처럼 여기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신라의 왕에 관한 기록인 <제왕연대록>에서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등의 호칭을 버리고 중국식으로 왕이라고 불렀다. 자국의 호칭은 오랑캐말이라고 비하한 것이다. 이 대목은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 경우, 중국에 중독된 한 지식인의 초상만을 성급하게 떠올릴 게 아니라 당시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인 역사개념을 적용하려던 실험정신이라고 보아주자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주로 그의 사대 모화적 표현이 보이는 곳은 외교문서인 경우가 많은데 외교적 표현이란 게 흔히 그렇듯이 그걸 필자의 진심이라고 해석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변호에도 불구하고 흔히 유학생들이 가지기 쉬운 사대적인 발상과 주체성 상실의 태도는 최치원도 완전히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너무 지루한 글길을 오게 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일별하는 일이 그리 간결하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루함 만은 면하도록 여러가지 서비스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건 능력의 문제이니 하는 수 없다. 다만 내가 최치원을 좋아하게된 인상적인 시 세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읽는 수고의 끝을 다소 유익하게 하고 싶다.
하나는 시무책을 올렸다가 성골 진골 대퇴골 뱀사골 등등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하는 통에 사표를 써서 임금 책상에 올려놓고 가야산에 짱 박힌 뒤 물소리를 들으며 써내려간 시다. 모름지기 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글이라면 이쯤은 돼야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겹겹의 돌 사이로 미쳐날뛰며 첩첩의 골짜기를 울려 사람의 말소리를 코앞에서도 알아들을 수 없네 늘 시비를 따지는 소리가 귀에 닿을까 두려워하여 그래서 흐르는 물로 온산을 감싸라고 가르치는가
저 잘났다고 떠드는 것들아. 이 가야산으로 들어와보렴. 아무리 지껄여도 물소리가 다 삼켜버리곤 입 오물대는 모양만 남을 테니. 인심의 쓸쓸함을 담되, 자연의 깊고 웅숭한 맛을 전혀 놓치지 않은 아름다운 시다. 정말 어느 여름에 폭포 앞에서 나는 최치원이 말한 그 물소리에 서로 대화도 나누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 참 신기하다 싶었다. 물소리도 저렇듯 모이니 인간의 잡담을 이기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경지를 저렇듯 시원스럽게 최치원이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는 그가 외국물을 먹어서 생긴 사회적 통찰력인지 몰라도 관점이 매우 근대적이라는 점을 엿보게 하는 시다. 제목은 강남의 여인인데, 중국의 강남이겠으나 지금 우리 압구정동을 생각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남에는 해댕기는 꼬라지가 요상하다네 갓 스물 여자들 이쁘고 야들야들하지 간뎅이는 부어서 바느질 따윈 쪽팔려하지 립스틱 짙게 바르고 최신 레게음악에 열중이네 원래 배워먹은 게 클래식은 아니잖아 자주 야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음악이지 자칭 꽃보다 이쁜 여자라니 마냥 보들보들한 밝은 날만 있을 것 같지 이웃 구로의 한 공순이를 보고 웃지 마라 아침까지 내내 미싱 돌리는 일을 조롱하네 미싱에 붙어앉은 몸 고달프겠지만 비단옷을 네 몸에 걸칠 일은 없을 거야
마지막 귀절은 하도 날렵해서 브레히트의 어느 싯귀를 보는 것 같다. 천년전이나 지금이나 세상 사는 방식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실감하는 대목이다. 최치원은 오늘의 강남 어디에 섰더라도 비슷한 시를 짓지 않았을까? 표현방식만 조금 바뀔 뿐. 그 천재의 안테나에 걸린 통시대적인 통찰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읽고 싶은 시는 <해문사의 버드나무>라는 시인데 너무 애절하고 아릿해서 이게 과연 최치원이 쓴 건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 나라 역사를 통틀어 대문호라는 칭호를 받는 시인의 감관을 통해 나온 야릿하고 애절하고 또 묘한 울림이 있는 이 시는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광릉성 기슭에서 헤어진 고운 이마 바다끝에서 서로 만날 줄 어찌 헤아렸으랴 다만 관음보살이 슬퍼할까 두려워 가는 길 감히 여린 가지 꺾지 못하네
여긴 비유니 은유니 끼어들 게 없다. 그저 한 여인과의 이별, 그리고 재회, 다시 헤어져야하는 순간이 긴박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낀 관음보살은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랑의 신같이 느껴진다. 최치원이 중국을 떠날 때 고운 여인과 힘겨운 이별이 있었나 보다. 해문사의 버들처럼 가녀리고 매끈한 여인이었나 보다. 광릉성에서 기껏 뿌리치고 떠나왔는데, 여인은 바닷가 해문까지 좇아왔다. 어쩌자고 그대는 내게 왔는가? 슬프고 아프고 미안하고 가엾은 마음에 최치원은 버들여인을 꼬옥 안아줬으리라. 닿은 가슴자리에 펑펑펑 흐르는 눈물의 체온을 느끼면서. 마음 같아선 하룻밤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어찌 그녀를 더욱 깊이 흔들어놓을 수 있겠는가. 관세음보살에 의지하여 그녀를 되돌려보내는 하나의 그림같은 스크린이 내 마음에 펼쳐진다. 이 주인공이 최치원이란 말인가? 한 인간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만나게 하는 길이 또 있겠는가? 이 아름다운 시의 행간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