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계고적보와 정유보의 변록과 남종통기등을 종합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정유보(1957년) 족보 오류편찬의 문제점* (변록)
O.66년 전 근대사 남씨 최초의 영양, 안동, 의령, 고성 3파의 대동보를 발행하였다.
정유보(1957년) 편찬에 주관은 남씨대종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의령관 남상철이다.
이분이 당시 자신의 권력으로 우리의 족보를 왜곡 편찬하였다. 영양, 안동에서 제출한 자료는 모조리 무시를 당하였고,
의령관의 최초 족보 남익훈이가 발행한 (1693년 계유보)를 근거로, 정유보(1957 년)가 편찬되었다.
의문점
1 남익훈 족보는 남진용의 아들 삼형제(홍보, 군보, 광보)로 시작하며, 시조 민의 7세라 했다.
7세로 한다면 불과(200~230년)인데 시조 남민께서는 755년도에 오셨다.
그러면 중시조로 기준을 한다면 400년이라 보아야 하므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2 남진용은 고려의 대장군이다. 한다.
높은 관직인데 불구하고 타성은 대장군이라 하면, 역사지, 유집, 인물 기록에 나오는데, 남진용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남상철은 3관의 아버지인 남진용의 묘가 없다면 설단이라도 당시에 영의공 산소 밑에 설치를 마땅히 하여야 하나
차마 그것은 못 한 것 같다.
3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기록에 남익훈의 아우 남치훈이가 경주분윤에 임명되자,
해운으로 경주로 옮겼고, 부윤직에서 해임되자, 다시 의령소재 남진용(현재 군보의 묘소로 추측)의 산소 아레로 옮긴 것을 진주목사로 부임한 막내동생 남지훈이 영구 보관을 위해 장판실을 지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남척(南倜)으로, 계대가 미상이나
남진용을 기준하여 7세손 홍보, 군보, 광보로 표기하여 상계가 미비점이 많다고 기록한다.
남사고의 울평보(울진,평해) 족보가 영향을 미친점
1 남사고(1,509-1,571)의 울평보는 영양남씨의 최초의 족보이나 애석하게 지금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남사고(1,509년생)께서는 영주시 소수서원에 1,555년에 입학을 하 였고,
당시 남몽구(1524년생) 남몽오(1528년생)는 나이는 남사고 보다 어리지만,
소수서원 입학은 (1,547년).(1,551)에 입학을 하여 남사고보다 앞서 입학을 하였지만 같이 수학을 하신 것으로 본다.
그 후 남치형, 남치리가 격암 선생의 소수서원의 후배가 된다.
치형, 치리는 남공약의 종가인 부사공파로서 남사고의 울평보를 접하였고,
이 울평보가 남두원(1655-?부사공파)이가 남종통기(南宗通 記) 5권을 편찬하였으나,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남제명(1668-1751 송정공파) 풍기 남두원을 찾아가서 족보 남종통기 2권을 필사하고,
보충 취동성변문 풍기 남두원과 신구보 세계변의문 풍기 남두원 문서도 필사하여
지금은 남제명의 자료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중이다.
2 그런데 남종통기의 자료 일부가 남명섭(1698-? 수의공파)이를 통하여 다시 한번 필사가 된 자료를
남두채(1715-? 부사공파 의성 봉 양면 안평리)를 찾아가 보니,
남명섭이가 남두채가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보고 놀라와 한 것이,
바로 남민 이후 실전되었다는 자료가 400년의 상계도가 나온 것이다.
1세 민 敏 영의공 (英毅公) (712-782) 755년 신라에 오심.
2세 척 倜 상서공(尙書公) (733-794) 당벼슬 평장사 신라벼슬 우복야 (생몰년 상이)
3세 세준世俊 사마공(司馬公) (759-804) 세영,세호,세걸
4세 윤철允哲 망덕공(望德公) (780-820) 중철
5세 제운霽雲 상서공(尙書公) (803-854) 흥운,회운,보운
6세 소 紹 충선공(忠宣公) (821-890) 찬,역
7세 지도之道 창의공(彰義公) (842-886) (생몰년 상이)
8세 영수永壽 중랑장공(中郞將公) (875-936) 대수(兄)
9세 필오弼午 낙절공(樂節公) (907-947) 매제 (김장.이적)
10세 익 翼 영양군(英陽君) (928-1004) 입,습, 매제 (김승옥)
11세 전금殿琴 부사공(副使公) (958-1020) 순금,태금.
12세 양규陽葵 충모공(忠慕公) (980-1046) 양란
13세 회석懷碩 사공공(司空公) (1004-1074) 매제 (석도철).
14세 대기大器 중서령(中書令公) (1025-1094) 대숙,대우,대명,대윤
15세 원량元良 대광공(大匡公) (1046-1105) 원성, 매제 (박도걸)
16세 홍보洪輔 중대광공(重大匡公) (1084-?) 군보?, 광보? (생년 상이)
17세 겸謙
3 청선고(淸選考)1906년 편찬하여 1909년에 완성한 16권책에,
시호를 받은 분들 중 1세 민, 4세 윤철, 6세 소, 7세 지도, 9세 필오, 모두 영의공 빼고, 고려 초기 분들이다.
청선고는 국가에서 편찬한 문집으로,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결론:
의령관의 남익훈(1640-1693)의 막내 동생 남지훈(1647-?)이가 편찬한 족보는 미비한 점이 많다.
66년 전은 지금처럼 자료가 미약하고, 설상 당시에 자료가 있다 했어도,
의령관인 남상철의 주도로 안동, 영양, 울진, 청송, 영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한 것으로 본다.
우리 영양관은 울평보의 영향을 받아서 편찬한 남두원의 족보 남종통기,
그리고 그 것을 필사한 남두채의 1-15세 상계도와 송정공파 남제명, 두원에게 찾아가 필사해온 남종통기의 기록을
우리는 진실로 믿어야 한다. 이상.
*양정공파 카페지기(청돈)의 변*
[문제점]
1. 시조 영의공 이하의 생몰년이, +120년을 더하여야 세대간 년차의 적용에 무리가 없다.
2. 단) 시조공과 2세간의 년차가 11년이라? 의문이 든다는 점???. (아들이 10세에 태어남)
3. 시조부터 20세 유손공까지 +120년을 더하여야 한다는 점.
4. 한때 논란이 되었던 시조공이 당대에, 신라국 표착설의 진실을 두고, 공방전이 재연될 수 있다.
5. 20세 유손공에 +120년을 더하여야, 21세 휘주공과의 년차에 무리가 없다는 점.
6. 고적보에는 직계만 기록하였고, 방계는 각각의 세대에 아들들만 기록한 점.
7. 당시의 방계의 자손들은 모두 직계에 흡수되었다는 말인가? 의문???.
8. 고적보에 의하면 1460~년대(을유년) 이후에 기록된것으로 보이며, 많은 문제점들이 보인다.
9. 관조이하 세대에 누락 세대(년차)가 보인다는 점.
10. 관조중에 영양 홍보공과 고성 광보공의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 (삼관의 분관에 관한 기록).
각각의 관조분들의 기록을 종합하면, 관조분들의 세대(世代)가 16世(고적보)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
(고로 의령관 계유보(1693년) 이후에 작성한 고적보로 추정된다는 점).
11. 삼관이 논의를 하여 합리적인, 수긍(首肯)할 수 있는 답을 구할 수 있을 지, 염려와 기대가 됩니다.
12. 7世(之道)의 子에 1子 대수(大壽)가 있으나, 추가 언급이 없다.
13. 2세와 7세와 16세의 생몰년이 원본과 상이합니다.
첫댓글 상계문제는 정말 진위를 가리기 힘들다. 연구위를 구성하여 토론에 토론을 거쳐 나온 결론을 대중에게 알리고 황정지어주어야 하는데, 현실은 토론자체를 거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