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펠릭시스 13

펠릭스 펠릭시스   Written by.티어   13. 크리스마스이브 "멍멍아....너, 머리!"   "어때? 멋있냐?"   그게 호그스미드 외출이 있었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나눈 대화이다. 어깨까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다니던 시리우스는 머리를 짧게 잘라 버렸다. 한쪽 귀엔 검은색의 알이 큰 귀걸이를 걸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씩 웃으며 어깨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었다. 반짝, 구름사이로 배꼼이 고개를 내민 태양빛에 하얀 눈이 반짝이며 허공에서 녹아 버렸다. 시리우스가 망토를 벗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올려놓았다.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붕대로 허리를 감고 있어야만 했던 제임스는 퇴원시켜주지 않아 침대에서 굉장히 무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뒹굴 거리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주체할 수 없는 명랑, 쾌할, 장난기의 소유자인 그는 끼를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제임스에게 단짝이 찾아 왔으니, 그는 어떤 일도 잊은 채 만면에 미소를 피웠었던 것이다. 시리우스도 그 미소에 답했다.   "분위기가 완전 변한 거 같아. 우리 멍멍이 조금 멋있어 졌는데?"   시리우스가 제임스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   시리우스에게선 답이 없다. 그러자 제임스도 얼굴에 가득 메우던 미소를 거두고 괜히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재깍거리는 초침의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침묵은...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뭔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밀려와서 제임스는 섣불리 또 입을 열었다.   "어쩌자고 이미지를 그렇게 파격적으로 변신시킨 거냐. 우리 멍멍이 인기 더 많아지면, 곤란한데..."   침묵을 깨보려는 제임스의 무모한 시도였다. 시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조금 모자라는 사슴아저씨. 난 이미지 변신을 하려는 게 아니네요. 단지 기분 전환으로." "그게 그거지. 바보 강아지야...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모두 널 흠모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제임스가 괜스레 씩 웃으며 약간 앞뒤가 뒤죽박죽 되어버린 말을 중얼거렸다.   "쿡,"   시리우스가 웃으며, 제임스의 침대 위로 눕는다. 시리우스의 머리가 제임스의 배 위에 닿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야, 이 망할 똥강아지야. 나 아직 환자라고."   제임스가 시리우스를 밀쳐냈다. 시리우스가 힘없이 떨어져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제임스가 웃는다. 간신히 일어나 이제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시리우스도 웃었다.   " 여전하네, 프롱스"   시리우스가 고개를 돌려 제임스에게 씩 웃으며 말한다.   "그거 칭찬이냐? 패드풋."   제임스도 씩 웃었다.   "글쎄.."   시리우스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중얼거린다.   "뭐야." "칭찬이라고 치고."   시리우스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으나 작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아무 일도." "리무스하고 이야기 한 적은 있었어?" "혼자 있고 싶다고 하고. 아직 아무하고도 안 만났어." "아..."   또 침묵이 흐르고... 제임스는 시선을 자신의 손에 고정시켰다.   "사슴."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시리우스가 중얼거린다.   "응?"   제임스가 단풍잎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 "멍멍아...미안하다." "뭐가?" "그냥..." "사슴아..나도 미안하다." "뭐가?" "나도 그냥.."   시리우스가 씩 웃었다. 제임스는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왜 이렇게 되었냐?" "글쎄." "여전히 포기는 안 되는 거지?" "미안하다. 프롱스." "하아~"   제임스는 또 다시 손에 쥐고 있는 단풍잎을 핑그르르 돌린다.   "우리 그럼.. 그거나 한 번 해보자."   시리우스가 생긋 웃으며 제임스를 응시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 정정당당한 승부를 보지 않겠냐고. 도전장이야. 제임스 포터."   제임스가 눈을 깜박거렸다. 삐뚤어진 안경을 옳게 고친 뒤,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소문에, 크리스마스에 파티가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 파트너가 있어야 하잖아." "으흥~ 누구하고 가는지 보자 이 말인가?"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어때?" "조금 짜증나긴 하지만, 시리우스 너니까 받아준다. 아니, 나야말로 도전이야. 시리우스 블랙."   제임스가 손을 내밀었다. 시리우스가 그 손을 잡았다. 창 밖에 내리던 눈이 그쳐가고 있었다. 잔디밭을 하얗게 덮은 눈 위로 마알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되받아치는 버드나무가 몸을 흔들자 쌓여있던 눈덩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아, 그리고 우리 4층 화장실 청소해야 해. 징계래. 마법은 사용하지 않고."     * * *       호그와트가 하루 종일 시끄럽다. 오늘 아침에 막 올 크리스마스엔 파티가 있을 거라는 게시 글이 각 기숙사마다 붙여졌기 때문이다. 호그스미드 외출이 끝나자마자 시험을 통보한 뒤의 그 차분하고 엄숙하고 우울한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이따금씩 공부를 하다가 눈물을 터뜨리는 아이들이 있어서 병동은 진정제를 맞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아직 O.W.L 이나 N.E.W.T가 다가온 것도 아닌데, 벌써 비축해 둔 진정제를 반이나 썼어." 폼프리 부인이 투덜거렸다.) 시험의 압박이 왠지 크게 느껴지는 까닭인지 덤블도어 교수는 조금 분위기를 띄우고 싶어 크리스마스 파티 통보를 조금 이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 학생들이 공부를 할 생각을 안 하잖아요."   맥고나걸 교수님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학교는 즐거운 곳이어야 합니다."   덤블도어 교수님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파티라고 해서 들뜨고 그러는 타입이 아니어서 시끄러운 휴게실을 피해 「변신술의 필요조건」이라는 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용 털이 달린 검은색 교복 망토에 은색 단추를 채우고 그리핀도르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쌌지만 추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도서관에 가서 공부할까 하다가 기왕 나온 김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즐기고 싶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벤치에서 눈을 쓸어내렸다.   두꺼운 책을 펼쳐들고 가방에서 초록색 깃펜을 꺼냈다. 머리가 자꾸 흘러내려 계속 귀 뒤로 쓸어 넘겼지만 너무 길어서 쓸모가 없었다. 머릴 좀 자를까? ......머리하니까 생각나는데, 시리우스의 머리가 확 짧아졌다. 짧게 자른 그의 머리는 그를 좀 더 귀풍스럽고, 고독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아까 기숙사에서 얼핏 보았는데 하마터면 못 알아 볼 뻔 했었다. 그가 잠시 내 주위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깊고 달빛 같은 회색 눈동자를 보고서야 그가 시리우스임을 알았다.   "호오-"   뿌연 입김이 나온다. 조금 춥네-   "자-"   갑자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면서 향긋한 초콜릿 내음이 난다. 하얀 머그잔에 담긴 코코아였다.   "엇, 로즈!" "쳇, 릴리. 왜 만날 날 두고 가. 얼른 받아. 팔 아파."   로즈가 입술을 삐죽거린다.   "아....그게..." "변명은 그다지 듣고 싶지 않다구. 이거 안 받아?" "아...? 응. 고마워."   나는 로즈가 건네는 코코아잔을 받아 손에 감싸 쥐었다. 그녀의 또 다른 손에는 프린세스가 웅크리고 있었고, 또 다른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나는 코코아의 달콤한 냄새를 느끼며 컵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변신술의 필요조건」은 이미 낡은 표지로 덮인 채 나의 오른쪽에 놓여있었다.   "로즈." "릴리."   로즈가 아쿠아빛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내 말을 잘랐다.   "제임스랑 시리우스. 아직도 서먹서먹할까?"   나는 그녀에게 첫눈 오던 날, 호그스미드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 소문이 좌-악 퍼져서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다.   "설마아- 그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데."   나는 피식 웃으며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온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로즈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래, 그럴 것 같아. 그건 그렇고 공부는 많이 했니?"   어떻게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냥 그래. 알잖아. 공부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에에? 공부를 재미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너."   로즈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코코아를 마신다. 프린세스가 추위에 바들바들 떨자, 로즈는 프린세스를 망토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프린세스는 냐아- 거리며 앞발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그녀는 그녀의 주인만큼이나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아아- 나.. 엥? 나? 아냐. 내가 공부를 재미로 한다고? '나'란 인간 지독하게 할 일이 없나 봐."   쿡쿡, 로즈가 그제야 키득거린다. 나는 다 마신 코코아잔을 옆에 내려놓은 뒤, 다시 변신술 책을 집어 들었다. 다시 하늘에 구름이 낀걸 보니 곧 또 눈이 내릴 것 같기도 하다.   "릴리, 너 있잖아." "응?"   나는 로즈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변신술을 잘하기 위해선 정신집중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구절을 읽으며 도대체 어떤 마법이 정신집중이 중요하지 않은지 그게 최대의 미스터리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너는 이 이야기 피하고 싶은 거 같은데.." "응."   여전히 난 깃펜 끝으로 책을 촤르르 훑어 내려가면서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찾아보고 있었다.   "시리우스야? 제임스야?" "응..." "시.리.우.스.야? 제.임.스.야?"   로즈가 깃펜을 잡고 있는 내 손을 탁 잡고는 내 눈을 응시했다. 요새 계속 느끼는 거지만, 로즈 매우 강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네가 시리우스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애도 그런 것 같고. 그런 거  아니야?" "로즈.." "하아- 왜 어째서 제임스를.. 그렇게 증오하던 제임스를.." "나...미안, 로즈. 너에게 상처 준 거 같다." "아니,"   로즈가 고개를 젓는다.   "내가 말했지? 내가 포기했으니까 시리우스 아프게 하지 말라고. 근데 왜."   로즈가 한숨을 내쉰다.   "너... 자꾸 병동에 왔다 갔다 하는 거 알아. 제임스가 병동에 있잖아." "로즈.." "왜 자꾸 시리우스 힘들 게 해? 왜?" "로즈.. 제임스는 나 때문에 다쳤어. 그래서 걱정이 되서 가봤던 거야. 로즈. 난 제임스와 시리우스. 둘 다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그들에게 고정관념 같은 걸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알고 보니, 둘 다 썩 괜찮더라."   나는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랄까, 첫눈 오던 날. 이후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정리 되는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자꾸 미루어만 두었던 문제들이.   "로즈. 그리고 난 네가 포기 하지 않았으면 해. 아직 좋아한다고 말해보지도 않았잖아."   이 말을 하면서, 내가 시리우스에게 로즈가 널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제길. 나 설마 로즈에게 고백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거야? 그러면서 시리우스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니까."   로즈의 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가 고백이란 걸 해봐. 응?" "릴리, 넌 시리우스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   나, 나...응. 좋아했어. 좋아해. 그렇지만..   "말해봐. 너 시리우스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구."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한데?"   저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즈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다가 우리 쪽을 향해 빙긋 웃고 있는 시리우스를 발견하고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나 역시 갑자기 마주 친 시리우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여전히 짧게 자른 시리우스의 머리는 낯설다.   로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즈의 무릎 위에서 웅크리고 잠든 프린세스를 품에 안고는 성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연한 금발 곱슬머리가 쌓인 눈에 반사된 햇빛에 부딪혀 반짝였다.   "로즈."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털썩, 차가운 체온이 손목에서 느껴진다.   "어? 로즈..."   로즈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다가 손목으로 시선을 재빠르게 돌렸다.   "릴리. 가지 마."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다시 머릿속이 꼬일 것 같았다. 왠지 시리우스가 그렇게 차갑게 대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그에게 차갑게 대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있어."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그의 목소리에 아픔과 괴로움이 녹아 있었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흔들리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겠지..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을 조금 더 응시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도로 앉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는 아까 로즈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손가락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혹시. 나랑 로즈가 하는 이야기 들었어?"   내가 시리우스에게 먼저 묻는다.   "마지막 그 질문.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그거. 그것만."   다시 내 얼굴은 발개졌다. 뭐야. 그런 말을 목소리 톤 하나 변하지 않고.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해.   "그래, 너 나 진짜 좋아해?"   역시 목소리 톤 하나 변하지 않는다.   "호그스미드에서 말했잖아."   나는 괜히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꼭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시리우스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아래로 향한 눈과 날카로운 턱선이 정말 조각해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녀석, 역시 멋있다. 이런 아이가 나에게 고백을 하고, 날 좋아한다는 게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다시 듣고 싶은데.."   시리우스가 시선을 돌린다. 나의 눈과 마주쳤다. 또 다시.   "...." "릴리, 제임스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난 내 감정에 다시 솔직해 지겠다고 했어. 그 날은 나와 제임스 둘 다 이성을 잃었던 거 같아. 우리 시시껄렁하게 그런 일로 우정이 깨지거나 그러진 않아." "...." "다시 말해줘, 응?" "...."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짧아진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더니 나한테 묻는다.   "머리 어색해?" "...." "이상하지? 괜히 잘랐나.." "아니, 잘 어울려.."   드디어 얼굴근육이 움직였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시리우스의 모습이 "엄마, 나 잘하지? 칭찬해줘." 라고 말하는 꼬맹이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이 순간만큼은... 조금 행복해도 되는 걸까?...   "시리우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툭, 투둑 떨어진다. 주름진 교복치마를 움켜쥐었다.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꼭 감았다.   "힘들어..."   머릿속이 터질 것 같단 말이야. 이렇게 잘난 녀석이 날 좋아한다는데,  그렇게 차갑게 대했어도 얼마나 이 녀석도 마음속으로 끙끙 앓았었을까 생각하니 고맙고, 미안하고.   제임스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게 되니. 내가 그 동안 제임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지. 미안하고. 너무 미안하고.   내 친구 로즈. 아직 너무 여리지만,  나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 가엾은 로즈. 너무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후읍- 나.."   이제 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 거 같은데, 이 감정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고 행복한 건지 조금은 알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내 친구들은 이 감정 때문에 이렇게 아파해야 해. 내가...내가.. 제일 나빠..   "너무 힘들어..." "...."   시리우스가 조금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안아주었다.   "울어. 조금 더." "후읍- 흑."   그의 손이 부드럽게 내 등을 토닥거린다. 따뜻하다. 눈물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으나,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다. 난 그의 교복망토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를 밀어냈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이 기분은 내가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왜 이렇게 자주 울어. 울보야." "....딸꾹."   울고 나니, 딸꾹질이 나온다. 나는 손으로 얼굴에 눈물 자국을 닦아낸 뒤, 시리우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시리우스는 내 딸꾹질 소리를 듣고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마...딸꾹." "쿡, 귀여워서 그래. 바보야."   시리우스가 활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 놓는다. "들어가자. 이러다 감기 들어 너 쓰러지면, 그 땐 난 널 다시 병동으로 데리고 갈 수 없어."   "...딸꾹."   나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접때, 진짜 무거웠어."   나는 또 다시 얼굴이 빨개진다. 시리우스가 내 이마를 콩, 한 대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한 쪽도 제대로 읽지 못한 「변신술의 필요조건」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어? 눈이다."   시리우스가 말했다. 나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구름이 가득 메우고 있더니, 결국 눈이 내린다. 시리우스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머그잔을 주우려고 다시 시선을 벤치 쪽으로 돌리느라 그걸 잡지 않았다.   "앗."   하얀 눈 사이에서 붉은 빛이 어른거린다. 책 사이에 끼어 놓았던 단풍잎이 언제 떨어졌나 보다.   "아, 맞다. 릴리. 내가 할 말은.."   시리우스는 손을 여전히 나에게 내민 채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 쭈그리고 앉아 눈에 파묻히기 전에, 이 단풍잎을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시리우스를 쳐다 볼 겨를이 없었다. 단풍잎이 반짝인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리우스가 단풍잎을 들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말끝을 흐렸다.   "응?" "아냐.. 가자." "응."   나는 입술을 한 번 삐죽거리고는 단풍잎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시리우스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딸꾹질은 멈췄네?" "어? 그러네...딸꾹." "푸핫하하하하하하하하."   시리우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야아- 웃지 마..딸꾹. 아씨." "괜찮아? 쿡.." "...전혀 걱정해주지 않는 눈빛이야 너...딸꾹." "아, 미안."   그의 눈이 웃고 있고, 그는 입술을 자꾸 깨물고 있었다.   "쿡."   그 모습이 우스워 나도 결국 웃고 만다. 그나저나, 시리우스가 하려던 말이 뭐였을까. 딸꾹... 아, 안 멈추네..     * * *       "어? 제임스 퇴원이야?"   리무스 목소리다. 나는 재빨리 의자를 뒤로 빼서 확인해 보았다. 리무스 말대로 기숙사 구멍을 빠져나오는 아인, 제임스였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긴 했지만, 한결 나아보았다. 보던 책을 덮고 제임스에게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임스, 퇴원 축하해."   빨리 손을 풀고 제임스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니, 제임스 얼굴 빨개졌다. 눈이 동그랗게 커진 걸 보니 되게 놀랜 것 같다.   "에반스, 너 갑자기 왜 그래."   리무스가 날 쳐다본다.   "어? 어....아...그게." "릴리가 드디어 날 좋아하게 됐나 봐."   이때다 하고는 제임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른다.    "그런 거 아니거든. 팔 치워." "원한다면."   제임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 부탁이 하나 있어."   제임스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허리를 굽혀 나와 시선을 맞춘다.   "크리스마스 무도회 때,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싫어."   이건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난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공부하던 책상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여자기숙사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니까 누군가 갑자기 내 팔을 잡았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제임스가 날 올려다본다.   "싫어? 릴리, 솔직히 말해봐. 너 나 싫어?"   제임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두 번째다. 그의 밤색 눈에 장난기가 사라져있다. 그의 눈이 슬퍼 보인다. 제임스의 눈도 이렇게까지 슬퍼 보일 수가 있구나. 제임스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아니. 안 싫어해." "그럼 누구야?" "응?" "누구랑 같이 가? 시리우스야?"   두근.   "아니."   시리우스. 크리스마스 무도회.  누군가랑 같이 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 시리우스. 시리우스는 누구랑 가지? ........제임스가 계속 날 올려다보았다. 제임스는 눈빛은 여전히 슬퍼보였다. 그는 곧 내 팔을 잡고 있는 손을 풀었다.   "그럼 누구랑 가?" "같이 가는 사람 없어." "하아- 알겠어."   제임스가 피식 웃더니 뒷걸음 치고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씩 웃는다.   "잘 자-"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계단을 조금 올라가다가 기둥 옆에서 멈췄다. 그 때 마침 누군가가 또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어- 시리우스."   또 다시 리무스가 인사한다. 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기둥 뒤로 가서 앉았다.   "시리우스, 너 릴리랑 크리스마스 가는 거 아니야?"   제임스가 시리우스에게 다짜고짜 묻는다.   "안 가-"   시리우스는 태연한 듯이 답했다.   "왜?" "같이 가자고 말 안했어. 왜? 내가 같이 가길 바라?"   시리우스가 쿡, 하고 웃는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 이야기 먼저 꺼낸 건 너잖아." "뭐, 그렇게 됐어."   갑자기 시리우스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잠깐 언급 하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말을 하려다 말았어. 왜지?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제대로 못 들었어.  순간, 내 머릿속에 하얀 눈 속에 파묻힌 단풍잎이 떠올랐다. 설마, 단풍잎 아는 거야?........또 다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내 생각은 어딘가에서 멈췄다. 곧바로 일어나서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그리곤 난간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리무스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핀."   리무스가 소리 나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제임스와 시리우스도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가자. 크리스마스 무도회."   리무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눈을 깜박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난 그런 리무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와 시리우스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그 둘은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속도로 나와 리무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내 리무스는 싱긋 웃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동시에 리무스를 노려보았다. 리무스는 씩 웃으며 "이 바보들." 이라고 하더니, 책을 덮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윽고 계단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리무스는 대단해. 여전히 제임스와 시리우스는 멍하니 둘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그리고 곧. 크리스마스가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DIV class=autosourcing-stub></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