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핵심적인 내용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으뜸은 물론 사성제일 것이며 실천에 있어서 으뜸인 사성제의 네 번째 요소인 팔정도가 뒤따를 것이다. 그 다음 교학(이해를 위한 배움)에 관해서라면 '온처계근제연' 이라 하여 5온, 12처, 18계, 22근, 4성제, 12연기라 하고, 수행에 관해서는 37도품 또는 37보리분법이라 하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37가지 방법을 말한다 - 4념처, 4정근,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8정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어렵고 복잡해보일 것이다.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알고 나면 별 것(?) 아니다. 굳이 알고 싶지 않다면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일단 이 중에서 교학의 4성제는 이미 알고 있고 12연기는 대략이라도 알아야 한다(설명은 나중에). 수행 내용 중에는 8정도는 대충이라도 알고 있고, 4념처는 중요하니까 역시 알아야 한다. 필자도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은 잘 모른다. 이 글은 전문가를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필자보다 더 모르는 분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기 위해 쓰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시길.
앞에서 구도의 길을 찾는 만인들의 공통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해서 언급했던 적이 있다. 그 화두에 대해 이제 본격적으로 풀어볼 시간이다. 잠시 붓다의 말씀 한 구절을 들어보자.
여래가 완벽하고 완전한 지혜로 깨달은 세상의 궁극적 실재는 무엇인가?
비구(수행승)들이여,
1) 물질(rūpa, 루빠),
2) 느낌(vedanā, 웨다나),
3) 지각(saññā, 산냐),
4) 정신적 형성(saṅkhārā, 상카라),
5) 식(viññāṇa, 윈냐나)
은 여래가 완벽하고 완전한 지혜로 깨달은 세상의 궁극적 실재다.
그런 후 여래는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고 선언하고 확립하고 드러내고 명료하게 한다.
궁극적 실재가 이렇게 여래에 의해 설명되고 가르쳐지고 드러나고 분석되고 명료하게 되었을 때,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안목 없고 눈 먼 그 어리석은 범부와 함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꽃경(뿝파숫따) 중에서
불법의 핵심 중 하나는 해체해서 보는 것이다. 전체를 볼 때 우리는 관념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요즘말로 해서 여신급이라 하자). 그녀를 보는 한 남성의 마음은 어떠할까?(일반적으로) 필시 아름다움에 매혹되고야 말 것이다. 그녀의 매혹적인 자태를 보고, 목소리를 듣고, (만지기까지 한다면) 몸으로 느낀다. 향기와 맛을... (!?) 거기에 더하여 온갖 상상의 나래를... (이게 아닌데!? 본론으로 돌아가자) 감각적인 접촉은 느낌으로 이어진다. 느낌은 지속하고 싶다는 갈애를 낳고 집착으로 이어진다. 집착은 존재를 유발하며(존재란 윤회하는 모든 세계를 통틀어 말한다 - 천상계, 인간계, 지옥 등), 존재는 (다시) 태어남을, 태어남은 늙고 죽음, 그리고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으로 이어진다. 연기법으로 인해 (앞의 내용에는 괴로움의 윤회를 반복시키는 12연기 중 절반 이상의 요소들이 들어있다)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고 뭉뚱그려 보고, 관념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그러하다.
*** 연기 : 보통 12연기라 하여 연기의 12가지 요소를 든다. 나중에 다시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연기를 간단히 설명할 때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도 소멸된다' 라는 문구가 대표적으로 사용된다. 세상 사물의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가 어느 하나도 독립적이지 않고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다. 더욱 간단하게 두드러지는 12연기의 일면을 설명하자면 태어남이 있기에 그 외 모든 생의 괴로움들이 뒤따라 생겨나기에 태어나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다,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움도 없다는 사성제의 진리와도 깊게 이어져있다. 하지만 이 정도 설명 혹은 이 상의 복잡한 설명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12연기를 완전히 이해했다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평생 붓다의 시자로 지내며 머리 또한 총명하여 부처님 모든 말씀을 다 듣고 지녀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난존자가 연기법에 대해 이해했다고 하자 부처님은 '그런 소리 말아라' 하시며 만류하실 정도였다.
반대로 제아무리 여신급 미녀라 해도 신체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 뜯어서 보자. 신체로부터 분리된 머리카락을 본다. 아름다울까? 뜯겨진 머리카락만으로? 분리된 눈알, 코(제 아무리 오똑선 콧날이라 해도!), 귀, 피부, 해골, 혀, 그 안의 뇌, 타액, 콧물, 핏물... 신체의 모든 부분들... 상상에 맡기겠다. 리얼할수록 좋다. 감미로울까? 아름다울까? 아닐 것이다. 진짜 리얼하게 할 수 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일으킬지 모른다. 이것은 '부정관'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붓다께서 제시한 수행의 여러 방편 중 한가지이다. 효과는 물질에 대한 탐욕, 갈애, 집착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
붓다는 존재를 다섯가지로 해체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를 둘로 나누면 물질과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을 다시 넷으로 나눈다. 물질 한가지와 정신의 구성요소 네가지를 합치면 다섯가지가 되는데 이 다섯요소를 다섯 무더기, 오온이라 부르며, 다섯가지 취착(집착)의 무더기라 하여 오취온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 '집착의 무더기' 이다. 우리가 무엇보다 집착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자신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든 가족이든 다른 누군가에 대한 집착은 그 다음이다. 등잔 밑이 어두워 자신에 대한 집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우선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요소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 물질, 느낌, 인식, 형성(의도라고도 한다), 의식이다. 색수상행식 이 용어는 반드시 기억해두자. 여담이지만 새로운 분야를 이해하는데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는 해당 분야의 용어에 먼저 익숙해지는 일이다. 용어부터 생소하고 잘 가려쓰지 못하면 자기 것으로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다.
붓다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 아니므로 경장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불경에 속하는 것 중에 밀린다왕문경(빨리어 밀린다팡하, 한역 나선비구경) 이라는 것이 있다. 기원전 2세기 후반경 나가세나(나선) 라는 비구가 당시 그리스의 왕인 밀린다왕(메난드로스왕)을 만나 문답을 나누는 내용으로, 높은 지식의 소유자로 합리적인 그리스식 사고를 가진 밀린다왕은 결국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불교에서 존재를 구성하는 이 색수상행식 오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하면, 밀린다왕문경에서 나가세나 비구가 붓다에 대해 찬탄하는 내용 중에 세상의 모든 벽지불(스승 없이 홀로 깨닫고 설법도 남기지 않고 해탈하여 사라짐)들이 몸과 마음(색과 식)은 알아도 수상행은 알지 못한다며 마음을 수상행식으로 나누어 구분해주신 붓다의 가르침을 극찬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우선 위의 꽃경 인용문을 통해 부처님 당시의 빨리어 단어들이 함께 언급된 것을 눈여겨 보자.
(한자 - 한글 - 빨리어)
색色 - 물질 - 루빠
수受 - 느낌 - 웨다나
상想 - 지각 - 산냐
행行 - 형성 - 상카라
식識 - 의식 - 윈냐나
위 꽃경의 번역자는 색수상행식 각각에 대하여 물질, 느낌, 지각, 정신적 형성, 식 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붓다께서 설법을 하실 때 오온에 대하여 색수상행식으로 말씀하시지는 않았음이 틀림없다.
붓다 재세 당시 인도의 언어는 서민들의 언어인 빨리어와 윗계급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 이 두 가지였다고 전해진다. 붓다께서는 왕족출신이지만 출가하는 제자를 받는데 있어서 계급구분을 하지 않으셨고 주로 빨리어로 설법을 하셨다. 다음에 불교적 역사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따로 있겠지만, 산스크리트어를 포함해 문자가 있는 대부분의 언어와는 달리 빨리어에는 문자가 없다. 또 붓다 재세 당시에는 기록의 문화도 아니었기에 붓다의 가르침은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된다. 붓다 입멸 후 불교가 인도에서 쇠퇴하고 아쇼카왕에 의해 스리랑카로 전해지면서 전승되던 초기경의 내용들은 스리랑카의 언어인 싱할라 문자로 패엽(팜리브잎을 말린 것)에 기록되어 보존되었다. 문자가 없는 빨리어 경전이 소리나는대로 전승되다가 음사하여 싱할라 문자로 기록된 것이 패엽경이다. 그리고 패엽경은 근대에 서구 역사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이래로 영어로 음사되어 세계로 전해지게 되었다.
언어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문제 없이 번역되기는 하지만 일부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이 존재하는 듯하다. 우리가 초기경을, 지금은 그 중에서도 특히 오온을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빨리어를 상당히 깊이 알고 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새로운 고대어를 익히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 단어만 해도 생소하게 느껴진다. 일단은 여기서 물질인 색色과 느낌을 뜻하는 수受까지는 번역 후에도 쉽게 통용되는 의미들이다. 물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물질이고, 느낌도 거의 일상적인 단어와 통한다고 보고 넘어갈 수 있다. 느낌에 대해서는 그저 느낌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을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좋은 느낌, 괴로운 느낌,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다.
국내 초기경전 번역하신 분들은 크게 전재성 박사와 각묵스님, 이 두 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재성 박사는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해 각각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각묵 스님은 물질,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 라고 각각 번역하였다.
빨리어 표현 : 루빠 - 웨다나 - 산냐 - 상카라 - 윈냐나
한자 표현 :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전재성 박사 : 물질 - 느낌 - 지각 - 형성 - 의식
각묵 스님 : 물질 - 느낌 - 인식 - 심리현상들 - 알음알이
결국 양대 두 번역자들의 오온에 대한 번역도 물질과 느낌까지는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산냐, 상카라, 윈냐나 (상행식)에 대해서는 지각VS인식, 형성VS심리현상들, 의식VS알음알이 로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복잡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각개격파! 나눠서 이해해보면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우선 원어로 산냐 라 불리는 상에 대해 알아보자. 각각 전재성 박사는 지각이라 번역하고 각묵스님은 인식이라 번역하였다. 보통은 인식이라고 많이들 번역하고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지각 (知覺)
1.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런 능력.
2.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
3. <심리> 감각 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함. 또는 그런 작용. 그 작용의 결과로 지각체가 형성된다.
인식 (認識)
1.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2. <심리> [같은 말] 인지(認知)(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일련의 정신 과정).
앞에서 새로운 분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용어' 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언급을 했었다. 또 한 가지, 어떤 개념이나 용어에 익숙해지려면 사전과 친해져야 한다. 사과를 처음 보는 어떤 사람이 사과를 이해(?) 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사과를 눈으로 보고 만져보고 먹어보는 일일 것이다. 즉 사과를 제대로 경험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지각이나 인식과 같은 단어는 경험이 불가능한 추상적인 개념인 단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평소 알고 있던 생각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전을 통해 핵심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지각과 인식의 사전적 정의에서 중요한 키워드들이 보이는데, 그것은 '앎' 이고 '분별' 이다. 결국 무엇인가에 대해서 '안다', '분별하다', '판단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영어공부를 할 때도 그렇지만 단어를 1대1로 매칭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문맥에 따라서 유사하지만 의미가 통하는 다른 단어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아무튼 색수상행식 중 상에 해당하는 산냐의 의미는 안다, 분별하다, 판단하다... 라는 의미임이 틀림 없다. 이것을 지각이나 인식이나 뭐라 대표해서 번역하든지 말이다.
그리고 잠깐, 색수상행식 중 행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식에 해당하는 윈냐나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윈냐나를 전재성 박사는 의식으로 번역하였고 각묵스님은 알음알이 라고 번역하였다. 의식이란 우리가 평소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 친숙하지만 역시 두루뭉술하게 쓰는 말이다. 알음알이는 순우리말 같기도 하고 대충 의미는 알겠지만 다소 생소하다. 아쉽게도 알음알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는 '약삭빠른' 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다. 그렇다면 의식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의식 (意識)
1.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2. 사회적ㆍ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ㆍ집단적 감정이나 견해나 사상.
3. <불교> 의근(意根)에 기대어 대상을 인식ㆍ추리ㆍ추상(追想)하는 마음의 작용.
불교용어로 의근이란 '생각하고 사유하는 기능' 정도로 풀이하면 된다. 핵심 단어들을 추려보면 인식, 추리, 추상...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인식? 이란 앞에서 산냐를 풀이할 때 등장했던 단어다. 단어들의 의미 그 자체도 지각이나 인식이나 의식이나 대체 뭐가 다른지 애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산냐(想)와 윈냐나(識)의 차이는? 우선은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이쯤되면 오온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고 글을 정독하던 독자의 경우라면 멘붕마저도 오지 않을까? 하지만 역사상 최고의 각자이신 붓다께서 괜히 나눠쓰셨을 리가 없다!).
이쯤에서 잠시 초기경전인 니까야의 주석서인 붓다고사 스님의 청정도론 이라는 책을 펼쳐보자(붓다고사 스님은 인도인이었고 430년 경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청정도론이라는 가장 유명한 초기경전의 주석서-해설서를 남겼다). 청정도론에 의하면 산냐와 윈냐나를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비유가 있다. 산냐와 윈냐나는 둘 다 어떤 대상을 알다, 식별하고 구분한다는 의미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산냐는 아주 어린 아이의 식별 능력에 가깝다. 이건 뭐지? 동전! 이것은? 코끼리! 냉장고! ... 아주 기초적인 앎과 구분에 해당된다. 그런데 윈냐나는 산냐에 비해 좀 더 수준 높은 앎이다. 동전(돈)이 많으면 부자다. 이건 얼마짜리 동전이고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그런 앎에 속한다. 그래서 사전에서 의식은 인식ㆍ추리ㆍ추상(追想) 이라는 복잡한 작용들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오온 각각의 요소들 중 행을 제외한 색수상(행)식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끝났다. 마지막 요소인 행行에 대해 살펴볼 차례다.
행온行蘊 에 대한 일반적인 큰 오해 중 하나가 행이라는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 행하다, 행동하다, 실천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자 사전을 찾아보면 行이라는 글자에 대해 20가지 뜻을 나열하고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요소 행行에 어울릴만한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붓다의 본래 가르침과는 다소 달라진 내용의 대승불교가 중국 국경을 넘어 뜻글자인 한자로 번역되면서 왜곡된 부분도 클 것이다.
행行으로 번역된 원래 빨리어인 상카라는 문맥에 따라 조금씩 달리 쓰이는 단어다. 크게 봤을 때 12연기의 첫번째 요소인 무명無明(어리석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행行(상카라)에서는 이후의 모든 연기의 요소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다소 적극적인 '의도' - 흔히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과 일치하는 의미다. 오온의 맥락에서는 특히 자신인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각묵스님은 아비담마에 기초하여 상카라를 50가지 심리현상들을 뜻하는 심리현상들로 번역하였다.
*** 아비담마 : 아비담마란 법(담마)에 대하여(아비) 라는 의미로 부파불교(초기불교 중 일부)의 논장(해설서)의 가르침을 뜻한다.
정리하자면 상카라는 의도, 형성, 각종의 심리현상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상카라가 의미하는 이들 각각의 단어들만을 놓고 피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서로가 별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저서인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전반을 통해 피력하였듯이, 높은 상위 차원에서는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던 에너지는 낮은 차원으로 구체화되고 물현됨에 따라 '형상'을 가지고 드러나게 된다. 즉 '형성' 되는 것이다. 이중의 일부 과정에서는 '의도에 의해 형성'된다. 흔히 창조라고 표현되는 과정이 그렇다. 어떤 형체를 가진 개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형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는 것이 먼저다. 또한 모든 심리현상들의 바탕에는 반드시 어떤 의도가 깔려있다. 이런 의도를 통해 심리현상으로 형상화되는 형성의 과정은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정신적)이든 반드시 구체적인 결과로써 구현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할 때의 행行의 의미도 '형성' 으로 직역할 수 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항상 그대로이지 않다. 이 우주, 우주의 어떤 개체, 어떤 존재, 심지어는 가장 높은 천상인 무색계, 그중에서도 제일 꼭대기인 비상비비상처천의 신들, 그 신들 중의 왕인 사함빠띠조차도 형성된 존재이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어느 종교에서 절대자로 숭배 받고, 절대자로 자칭하는 신, 신적인 존재도 항상 그대로 (無常) 이지는 않다. 물론 고작 100년을 살까 말까 하는 인간에 비하면 반영구적인 존재임에는 틀림 없겠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렇다. 모든 형성된 것들이 무상하다는 것은, 애초에 형성되지 않은 것은 항상 그대로 불변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역시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에서 이 애초에 형성되지 않은,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은, 하지만 모든 현상들의 뒷 배경에 깔려있는 이것에 대해 '근원'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근원이라는 언어적 표현조차 어불성설이라는 사족을 달면서. 사실 이 부분이 현시대의 불교에서 가장 애매한 부분이다. 일반적으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여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고 한다. 빨리어로 '나' 라는 것은 atta라 표현된다. 빨리어와 동시대 같은 사회에서 쓰인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는 아트만atman과 동의어이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따라 감겨 따라 돌 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고귀한 님을 보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느낌을 자아로 여기거나,
......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지각을 자아로 여기거나,
......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형성을 자아로 여기거나,
......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의식을 자아로 여기거나,
......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물질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느낌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지각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형성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고,
의식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 상윳따니까야 (S22.99-100)
위의 상윳따니까야에서, 이 외의 많은 구절들을 통해 붓다는 반복해서 강조하며 색수상행식 오온 중 그 어느것도 atta(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설파하신다. 빨리어에서 아니다(非) 혹은 없다(無)는 접두사인 an- 이 atta에 붙어서 anatta(안아따 아나따 라 발음) 가 되어 후대에 무아(無我)라는 의미로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현재에는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불교 교리에서 무아라고 한다. atta(참나) 라고 할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또 불교 한편에서는 '참나' 혹은 진아(眞我) 라는 표현을 한다. 위에서 빨리어 atta와 산스크리트어 atman은 원래 같은 의미로 참나(위 상윳따니까야 초기불경에서는 '나의 자아' 라 번역)라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빨리어 atta는 주로 anatta와 함께 불교식 표현인 무아로 쓰이고, 산스크리트어 atman은 힌두식 표현의 '참나'의 의미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현재 불교의 경계 내에서는 무아와 참나가 함께 공존하고 있지만 실상 참나라는 표현은 힌두식 표현의 atman과 유사하다. 현재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많은 불보살(관세음보살 약사여래 등의 존재들은 힌두교의 수많은 신들과 대비된다)들이 그러하듯이.
무아 무아 하며 무아에 너무 붙들려서도 실패한다.
정말로 이 세상 모든 것에는 atta라 할만한 것이 없을까?
참나 참나 하며 참나에 너무 붙들려서도 실패한다.
정말로 이 세상에는 참나라 할만한 것이 있을까?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오온)으로부터의
여읨(버림)이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참나)이 있으므로,
세상에서 태어나고, 생겨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오온)으로부터의
여읨(버림)이 알려진다.
- 우다나경 중(열반경)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는 것.
형성되지 않는 것 - 형성되기 이전의 것.
이것이 붓다께서 설하신 '불사(不死)' 의 자리, 궁극의 자리이다.
형성된 오온은 atta인 참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형성되지 않은 것'은 atta라 할 수 있는가?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 도를 도라 부르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노자의 첫구절은 이런 맥락에서 몹시도 탁월하다. 참나인 atta를 atta라 부르면 그것은 이미 참나가 아니다. 즉 atta가 없다고 할 수 없다. atta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atta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atta가 아니고,
atta가 없다고 하면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할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 오온은 atta가 아니다! 라는 것.
힌두교의 atman - '영원불변하는 자아가 있다' 는 사상이 진리인 것처럼 여겨지는 곳에서 태어난 붓다의 진리이기에 더더욱 그렇게 설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하고 감히 추측해본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애초에 형성되지 않은 것은 형성된 모든 것에 대비하여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존재'와 '비존재'를 논할 수도 없는 영역인 것이다.
세상은 이미 무아(설)이 진리인듯 지배하고 있다 - 불교의 세계.
불법이 500년씩 다섯 번, 2,500년 동안 쇠퇴한 시기라 지금이라 그럴까? 아니면 그것(無我)은 정말로 붓다의 진리일까?
설은 설일뿐이고 가본 자는 알리라.
어쨌든, 무아이든 아니든 최소한 오온에 대해서는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온은 atta가 아니다"
P.S.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형성되기 이전의 것을 일시적으로 참나라 하든 근원이라 부르든 그것은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체험의 영역을 훨씬 더 초월해있습니다. 그러니 일부 '참나 체험' 이라는 표현을 쓰는 단체들에 대해 주의하고 경계하시길 바랍니다. 혹여 특이한 체험이 있더라도 그것은 절대 참나가 아닙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어려워요.
구체적으로 어려운 점 질문 주시면 최대한 쉽게 답변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