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재 지; | 대전 유성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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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1668~1734)이 호조판서로 재직하던 1729년경에 고향 마을이었던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을 화공에게 그리게 한 것이다. 원래는 팔폭의 병풍이었으나 현재는 칠폭 만이 남아 있고, 팔폭의 글씨는 권이진(權以鎭)의 4대손 권감(權堪)(1760~1823)이 무수동도(無愁洞圖)를 보고 지은 시를 옮겨놓은 것이다. 무수동은 무쇠골 수철리(水鐵里)라 부르던 곳이었는데, 권이진(權以鎭)의 백부인 무수옹(無愁翁) 권기(權愭)가 정착하면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세거지가 되었고, 따라서 마을 이름도 기의 호를 따라 무수리라 한 곳이다. 이 마을은 보문산 남쪽 계곡 사이에서 발원한 세 줄기의 계류(溪流)가 만나 너른 들을 이루고, 그 둘레를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 감싸고 있어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다. 그래서 권이진(權以鎭)은 오랜 벼슬살이로 아름다운 고향마을을 떠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늘 그리워하여 고향의 정경을 팔폭의 그림으로 곁에 두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남아 있는 칠폭의 풍광은 지금의 무수동 전경과 크게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이 병풍의 그림은 18세기 전반의 회화사 자료이면서 당시 무수동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주는 역사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병풍의 주인 권이진(權以鎭)의 본관은 안동, 자는 자정(子定), 호는 유회당으로 예학자이었던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손자이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외손이며, 명제(明齋) 윤증(尹拯)의 처조카이었다. 그는 1693년(숙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40년간의 벼슬살이 동안에 내외직을 두루 거치었다. 말년에 호조판서로 국가의 재정운용에 공헌을 한 인물이다. 첫째 폭은 유회당(有懷堂)과 여경암(餘慶菴)의 전경을 그려 놓은 것이다. 그림은 중앙 유회당(有懷堂)을 중심으로 좌측이 재실인 기궁재(寄窮齋), 유회당(有懷堂) 뒤편 우측이 시묘소인 삼근정사(三近精舍), 유회당(有懷堂) 뒤편의 건물은 장판각이다. 장판각 옆의 조그마한 문이 이진의 부친 여용(旅翁) 권유(權惟)의 묘소로 들어가는 문이다. 권이진(有懷堂)은 부친의 묘를 쓰고서 그 아래에다 부모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유회당(有懷堂)이란 강당을 세웠다. 유화당(有懷堂)이란 당호는 중국 명나라 말기 전목재(錢牧齋)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會二人)'라는 시의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품고자 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는 당호을 자신의 호로 사용하여 효심을 키우고자 하였다. 삼근정사(三近精舍)는 권이진(有懷堂)이 숙종 41년(1715)에 선친 권유(權惟)의 묘를 지키기 위하여 세운 시묘소이다. 삼근(三近)은 곧 선친 권유(權惟)의 묘, 담장 옆 골짜기에 흐르는 물과 수석(泉石), 이곳 남쪽 언덕에 계절마다 바뀌는 아름다운 꽃동산 등 세 곳이 가까이에 있다는 뜻으로 삼근정사(三近精舍)라 하였다. 첫째 폭 위쪽 우측 상단에 보이는 조그마한 두채의 집은 여경암(餘慶菴)과 거업재(居業齋)이다. 이곳은 권이진(有懷堂)이 48세(숙종41; 1715) 때에 후손들과 후학의 교육장소로 건립한 것이다. 여경암(餘慶菴)은 사마온공이 자제와 제자를 가르키기위해 지은 여경사(餘慶寺)에서 유래된 것이고, 거업재(居業齋)는 춘추정신을 깨닫고 삼강을 바르게 하는 올바른 군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둘째 폭은 보문산의 남쪽 면과 보문사(普門寺)이다. 보문사(普門寺)는 유회당(有懷堂)에서 약 1km지점인 보문산 남록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현재는 폐사지와 '보문사석조(普文寺石槽)'만이 남아 있다. 그림의 장면은 보문산 중턱의 보문사(普門寺)와 그 주변마을을 포함한 보문산 남록과 산 아래쪽으로 너른 들과 민가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18세기 당시 보문사(普門寺)의 건물배치와 규모 및 그 주변 10여호가 되는 민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셋째 폭은 유회당(有懷堂) 종가와 마을의 전경이다. 앞쪽의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 사랑채이고, 안채는 'ᄆ'형을 하고 있으며, 사랑채 뒤 건물이 가묘(家廟)이다. 현재 유회당 종가 안채는 퇴락으로 헐리어 없으나 사랑채와 가묘는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종가의 앞에는 마을에 살던 백성들의 소박한 살립집이 사대부가 저택과 대비되면서도 정겹게 그려져 있다. 넷째 폭은 장수공가(長水公家)와 중뜸 마을이다. 장수공(長水公)은 권이진(有懷堂)의 둘째 아들인 권정징(權瀞徵)으로 장수현감을 지냈으며, 분가하여 유회당(有懷堂) 동남쪽에 있는 중뜸 마을에 살았다. 그림 중앙의 'ᄆ'형의 저택이 장수공가(長水公家)이며, 이 집을 중심으로 앞뒤로 중뜸 마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현재 장수공가(長水公家)는 전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폭은 유등천과 옥녀봉 일원이다. 이곳은 무수동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로 현재도 무수동으로 통하는 길이다. 계류(溪流) 사이에 바위가 깍아 세운 듯 단애를 이루었고, 그 앞쪽의 유등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돌출한 바위가 옥녀봉이다. 그리고 냇가를 따라 내려가면 하단에 조그만 민가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데, 이곳이 점촌(店村) 마을이다. 여섯 번째 폭은 버드내의 모습이다. 이곳은 옥녀봉쪽의 하류로 버드나무가 많아 유천(柳川) 혹은 버드내로 불리는 곳이다. 이 폭의 장면도 버드내에 수양버들이 늘어진 모습과 마을 풍경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일곱 번째 폭은 갑천에서 한 선비가 선유하는 장면이다. 갑천은 무수동의 유등천에서 들을 지나 남쪽에 있는 천으로 하류에서 유등천과 만난다. 이 장면은 한 선비가 심의(深衣)에 복건(?巾)를 하고, 배안의 상에 술 한병을 올려놓고 주변의 풍광을 즐기는 모습이다. 그리고 배 뒷편 사공의 바지춤이 흘러내러 배가 드러난 모습이 흥미롭다. 여덟 번째 폭은 분실되어 어느 곳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림의 배치 순서를 보면 가장 동쪽으로 유회당을 시점으로 유등천을 따라 내려가면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아마도 서쪽의 어느 지역 풍광이 아니었을까 한다. 현재 팔폭에 쓰여 있는 시는 권이진의 4대손이었던 용와(容窩) 권감(權堪)(1760~1823)이 무수동도(無愁洞圖)를 보고 지은 시이다. 이 시에 '선조께서 탁지부를 맡아 노심초사하시다가(先祖憂勤按度支)/고향 그리시던 날 이 그림을 그리라 하셨지(戀鄕當日命圖斯)'라 되어있어, 그림이 권이진(有懷堂)이 호조판서로 있을 적에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년 동안 돌아가지 못하여 이토록 간절한 생각지녀(未返三年思正若 )'라 되어 있어, 권이진(有懷堂)이 호조판서로 재직 삼년이 되던 1729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권감(權堪)의 시 전문은 아래와 같다.
제무수동도(題無愁洞圖)
先祖憂勤按度支 선조께서 탁지부를 맡아 노심초사하실세
戀鄕當日命圖斯 고향 그리시던 날 이 그림을 그리라 명 하셨네
一花一木模本意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모사한 본 뜻은
某水某邱指點時 이 강물 저 언덕을 모두 가까이 두고자 함일세
未返三年思正若 삼년 동안 돌아가지 못하여 이토록 간절한 생각지녀
細粧八幅盡新移 세밀히 여덟 폭에 그려 모두 새롭게 옮겨놨네
溪從曲曲完田邃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은 완전으로 깊이 이어지고
山自茫茫德有奇 아득히 보이는 산은 덕유산 기이한 봉우리라
彩筆經營曾入妙 채색 붓으로 그린 솜씨 묘함에 들어
幽居物色盡輸玆 유거하던 고향의 물색이 모두 이곳에 옮겨졌네
茂林修竹排鋪際 무성한 수풀 긴 대나무 늘어선 사이에
?石層巖莽蒼涯 기이한 돌 겹겹의 바위 물가에 솟아있고
中有高堂棲息久 그 가운데 高堂 있어 오래도록 쉴만하고
上瞻先墓孝思追 위로 선묘를 바라보며 효심 키우네
七分修飾遺?在 흡사하게 꾸민 그림 남겨 놓았으니
百世傳來敬玩宜 백세토록 전래하여 공경히 완상함이 마땅하리
麻詰舊圖良有以 왕유의 옛 그림 진실로 까닭이 있고
淵明歸意又兼之 도연명의 귀거래사 뜻 또한 겸하였네
先人重畵承先志 선인께서 그림 중히 여김은 선조의 뜻을 받듬이라
永慕吾心?此詩 길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시를 읊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