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함
[에베소서 1장 11절~12절]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다, 하나님의 몫이다, 하나님의 산업이다’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북한에서 제일 활발한 곳은 다른 곳은 조용한데 장마당이 제일 활발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심히 장사하면 그 몫은 자기에게 돌아간다. 사람은 자기의 기업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한다. 남의 땅 천 평 있는 것보다 내 땅 열 평이 더 소중하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업을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하나님의 기업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업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품을 넣어서 그 생명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표현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신’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신으로 계시기를 원치 않고, 사람 속에서 씨가 되셔서 사람을 통해서 인격화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인격을 통해서 만물을 통치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형상통치’라고 한다. 형상으로 통치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문제이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찬미하게 한다.’는 말하고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한다.’는 말은 다른 말이다. 이 말은 사람으로 인해서 만물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물은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은 어려운 말로 가치중립적이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고, 찬양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만물이 달라진다. 사람이 하나님을 먼저 찬송하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노래로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인하여 만물의 가치가 원래 지어진 그 가치대로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 먼저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전 우주적인 찬양이라고 한다. 사람이 합당한 머리가 될 때에 만물은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몸의 지체들이 스스로는 좋은 일을 할 수도 없고 나쁜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머리가 잘 돼야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쓰일 수가 있다. 병 가운데 뇌전증이 있다. 뇌전증은 평소에는 멀쩡한데,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서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고 구르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몸이 문제가 아니고 머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몸에 상처가 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고 뇌의 문제이다.
몸은 건강하지만 머리 때문에 놀음판에 가서 손이 계속 화투짝을 만지는 사람도 있다. 손이 죄가 아니다. 머리의 문제 때문에 손은 밤새면서 온 몸이 담배연기 속에서 그런 일을 한다. 만물은 머리 때문에 허무한 곳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잘못되면 만물은 머리가 온전한 머리가 되기를 탄식한다.
만유 위에는 만유를 통제하고 인도할 머리가 필요하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섯째 날 오후까지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이 우주는 동물의 세계에 불과하다. 사슴 떼가 돌아다니고 누가 돌아다니는 그런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왜 창조하셨는지 동물의 세계를 보면 알 수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만유의 머리가 되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이 만유위에 만유를 통제하지 못하면 만유는 헛된 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이 헛된 길에서 방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온 만물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 세상 재료는 너무 좋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뭐가 있는가? 옛날에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가? 지금은 옷이 워낙 발달해서 밖에 나가도 주위를 느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추위를 기다린다. 추위가 와야 건강을 발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류가 굉장히 발달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세상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며칠 전에 인터넷을 보니까 아인슈타인 박사의 편지 한 편이 200몇 억에 팔렸다. 그 편지를 사려고 경매에 붙여서 아인슈타인 편지 중에 최고로 팔렸는데, 그 편지의 내용은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사려고 줄을 섰다.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대신에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기업이 돼서 만유가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유의 머리로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밖에 모른다. 어떤 형제가 가만히 있으면 모든 생각이 들어온다는 말을 한다. 생각이 자기를 지배한다고 한다고 한다.
우리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깨끗한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오만가지 잡생각이 들어온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사람은 쓰레기를 넣는 쓰레기 하치장이 아니구나. 사람은 만유의 머리로 세우시려고 하나님이 지으셨구나. 이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이것이다. 만유의 머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이보다 더 고상한 것이 없다. 이보다 영광스런 예정이 없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만유의 머리가 되어야 만유가 그 안에서 통일되고,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합당하게 찬송을 드릴수가 있다.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낙원은 사람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낙원의 모든 것을 분배하는 곳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잘못되어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낙원이 철창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낙원이 폐쇄된 것은 사람 때문이다. 우리가 회복되면 낙원이 열린다.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게 된다.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합당하게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떻게 하면 사람 속에 하나님 자신을 넣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성품을 넣을 것인가?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갈망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신 하나님, 그래서 산 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만물의 머리가 되게 하려면 사람 속에 하나님의 어떠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의 일은 전 역사를 통하여 온 역사를 통하여 사람 속에 하나님 자신을 넣는 것이다.
왜 바로를 징계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가? 왜 홍해를 갈랐는가? 왜 광야에서 40년간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가? 청년부 형제들과 출애굽기를 하면서 광야를 이야기했다. 광야는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 물과 음식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 광야이다.
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셨는가? 광야는 무엇이 끊어지면 모두 끊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바로 끊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기 위하여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 광야가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에서 다른 것을 찾으면 헛수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살면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하늘에서 만나가 나오고,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불어넣기 위하여 필요가 채워지기 위하여 애굽에서 광야로 옮겨주셨다. 왜 교회로 옮기셨는가?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넣기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교회에서 세상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이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런 목적 때문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들어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수많은 일들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넣기 위한 방법이다.
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필요한가?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 하신 일을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에 오기까지 앞으로도 하나님이 개인에게도 너무 많은 일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냥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누구이며, 어느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나는 공부를 어떻게 해서 어느 대학을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역사의 나열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뼈다귀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모든 것에 생기가 들어간다. 그때 하나님이 내게 무슨 일을 하셨구나! 나는 왜 이렇게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하는가? 절망적인 자리에서 헤매다가 교회로 오게 되는가? 남편을 만난 것이 오히려 화가 안 되고 복으로 변한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렇게 해석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을 알 수 없다.
목사님은 하늘에 있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자기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재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어릴 때 방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마룻바닥에서 태어나 폐가 안 좋아서 십대 때 폐결핵을 앓았다. 생각하면 재수 없는 일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그것이 복이 돼서 우리를 먹여 살리신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그때는 저주라고 생각한 것이 지금은 복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일을 모르면 자기의 행적밖에 모른다. 자기의 역사, 업적, 행적을 아들한테 아비는 스무 살 때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이렇게 하면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잘난 아버지일수록 아들을 더 죽인다. 업적이 좋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상처를 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하셨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너무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왜 더 좋은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머리가 되지 못할까? 그렇게 생각했다. 대학 때 예쁜 여학생이 리포트를 부탁했다. 그때 리포트를 했더라면 바꿔질 수 있었을 텐데 어려운 영어책을 읽어달라고 해도 모르겠다. 고생을 하다가 서울대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했다. 그 친구는 금방 했다. 머리 좋은 사람과 머리 안 좋은 사람은 차이가 많이 난다. 그때에 나는 왜 내가 머리가 안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머리가 안 좋은 것이 우리 교회를 만난 것으로 복이 된다. 자기의 연구실에 와서 영어책을 펴서 해석을 해보라고 하는데 못했다. 그때는 깜깜했다. 그래서 군대에 먼저 가서 3년 동안 공부를 해서 복학해서 신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하나님께 공부할 수 있는 미군 부대에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그때 카츄샤가 아니고 대구에 있는 50사단에 떨어졌다.
끝까지 공부했더라면 목사님을 못 만났다. 머리가 안 좋았기 때문에 나는 군대에 빨리 갈 수밖에 없었고, 군대에서 방황하다가 우리 교회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은 다 해석된다. 여러분이 IQ를 물어봐도 부끄럽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왔는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겠는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밤낮으로 인도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생활을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은 불기둥 없이 광야를 헤매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된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알면 사람은 안정이 되고, 하나님께 신뢰가 생긴다.
왜 야곱의 인생을 기록했는가? 창세기에 야곱의 일생이 제일 길다. 야곱의 일생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간섭하신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 말은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너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야곱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바로 나의 하나님이다. 틀림없이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간섭하셨다. 이것을 깨닫는 날에 우리는 저절로 하나님에 대하여 신뢰가 생긴다. 또 앞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를 알게 된다.
나는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옛날에는 소용없는 걱정을 많이 하신다. 신뢰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님이 나를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신뢰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계획을 가지신 이가 신성한 목적을 가지신 이가 내 위에 계시는구나. 나는 그것을 몰랐구나.
이제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알고 난 다음에 내 인생에 불안이 없어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뢰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 신뢰 되는 사람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 불신 되는 사람은 안 들어온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깊이 신뢰 되면 그 사람이 먼저 신뢰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신뢰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계속 집어넣는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버렸고 자기가 맹세했고 자기가 주님을 향하여서 자기 힘으로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십자가 앞에 계신 예수님 앞에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베드로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주님 그렇게도 나를 모르십니까?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내가 뭘 더 보여드려야 믿겠습니까? 이런 맘이 들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닭이 두 번 우니까 베드로가 저주하며 주님을 부인했다. 그때 베드로는 그 말씀이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그 주님을 3년 동안 따라 왔는데 그 주님을 몰랐다는 것이다.
왜 우리가 주님을 모르겠는가? 내 믿음, 내 힘,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는 주님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완전히 무너지고 난 다음에 베드로는 자기를 돌아볼 자기가 없어졌다.
옛날에는 돌아 볼 자기가 너무 많았다. 그런데 돌아 볼 자기가 완전히 없어졌다. 나중에 예수님이 네가 나를 아느냐? 주님, 저는 저를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가 저를 모릅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그날이 진실한 나이다. 나는 나를 안다고 생각한 것이 내가 아니고 거짓이었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속아 있기 때문에 빛이 오지 않으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느 날 주님이 완전히 나를 드러내셔야 내가 나를 알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알고 난 다음에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왜 우리가 자기 스스로 하는가? 자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를 믿기 때문에 자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자신이 없었다. 그것이 없어지고 주님 자신을 따라 갈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살수밖에 없었다.
교회 안에서 사고를 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다. 왜 사고를 치는가? 자신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고를 치는 것이다. 어느 날 뻥 터진 것을 보았다. 자기를 잘 알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는다. 다 해놓고 터지고 난 다음에야 드러난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은 주님이 나를 아신다고 알게 된 사람은 물어 본다. 자기 머리에게 물어 보면 되는 것을 사건이 다 터지고 난 다음에 물어보면 어떻게 하겠는가?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계획하기 전에 자기를 내어놓고 따르면 된다. 그때는 너무 쉽다. 투자를 하여 망한 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이유는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나를 아시는 분은 주님이다. 물어보면 될 일을 우리는 너무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완전히 주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이 되시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이 되셨는가? 영이신 하나님이 생명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셨는가? 이것은 수없는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되신 것이다.
모세 이전에는 정말 하나님 알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모세가 산에 가있었을 때에 사람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모세는 그 흑암과 번개와 벼락과 모든 무서운 관경이 있는 속으로 들어가서 40일 40주야를 보냈다. 이것은 모세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통이다. 하나님이 말씀이 되기 위한 진통이다. 엄마가 아기를 생산할 때, 진통할 때, 얼마나 소리를 지르는가? 아기를 낳기 위한 진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한 진통이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말씀이 되시니까 무서운 말씀을 찾아갈 필요가 없이 기록된 말, 그 말씀을 들으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다시 육신이 되기 위해서는 또 수많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모세가 예수가 되는 과정이 하루아침에 되겠는가? 수많은 과정, 구약의 전 과정은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과정이다. 육신이 되려면 내 안에 들어있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 속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해보면 잘 안 된다.
처음에 나는 너무 너무 열정을 가지고 갔는데, 그 사람과 좋은 말을 하러 갔다가 싸움을 하고 왔다. 가족한테도 이야기를 하러 갔다가 싸움을 했다. 이상하게 내 속에 있는 마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논쟁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 오히려 말하기 전보다 더 어색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말하고 난 다음에 뒤통수에서 왜 그 말을 못했을까, 간증하고 난 다음에 그 말을 빠뜨리고 다른 말만 하고 나왔다는 마음이 든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말씀이 정말 육신이 되어서 나오는 것은 너무 어려운 과정이다 더 순수해 져야하고 더 단수해 져야하고 더 온전해 지는 과정을 격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이것을 제자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무엇을 보고 알았을까? 물위를 걸어가는 그분을 보고 알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없고 열매만 남은 그 자리, 행위도 끝나고 역사도 끝나고 업적이 다 끝난 그 자리에 무엇만 남았는가? 운명만 남은 자리이다.
인격만 남은 사람, 그 사람이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 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은혜와 실재가 된다는 말은 그 사람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은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수많은 과정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 속에 자신을 넣는 과정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시는 과정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들어갈 때에 죽음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들어 갈수가 없다. 십자가 없이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율법이 된다. 가르치게 된다. 자기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그 사람에게 들어 갈 수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다. 좋은 것을 주려고 앉혀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이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진다. 부모는 좋은 것을 주는데 자식은 죽어간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가 하는 말을 너무 듣기 싫어한다. 또 잔소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십자가 없이 가르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속에서 완전히 적셔지고 충만해지는 것은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하지 않으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채워 줄 수 없다. 그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은 큰 것을 먹어라 한다고 해서 먹어 지겠는가? 잘게 부서지고 잘게 부서져서 들어가는 줄도 모르게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향기라고 한다. 향기는 태워짐의 결과이다. 태워져야 향기가 나온다. 태워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면 태워지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성경을 그대로 주어버리면 그대로 죽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채워지면 사람이 하나님의 유업이 된다.
규화목이란 나무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규화목은 돌이 된 나무이다. 큰 나무가 강물에 넘어져서 강물이 계속 흐르다보면 어느 날 나무의 성질은 다 없어지고 이산화규소라고 하는 성분이 나무 안에 들어가서 분명히 보여지는 것은 나무인데 돌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규화목이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 형제들을 보면 그 사람은 옛날 사람인데 속이 달라졌다. 속은 무엇으로 채워졌는가? 하나님 이외는 어떤 다른 것이 없어지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업이 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규화목이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하여 만물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물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말이 무엇인가? 만물이 제 주인을 찾았다는 말이다. 제 주인을 찾아서 제자리에서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속에 충만이 되고, 사람은 만물 안에서 충만이 되는 것이 우주적인 통일이다.
우리의 제자리는 하나님의 표현이 되는 그 자리가 우리의 제자리다. 만물은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의 자리를 찾아서 사람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이 쓰여질 때 그 때에 만물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만물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물을 통치하고 있다.
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돈, 이 돈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아주 다르게 쓰일 수 있다. 사람이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으면 그 돈도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다. 사람이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으면 그 돈도 사람 때문에 가장 가치 있는 돈이 되는 것이다. 나는 부자를 정의할 때에 부자는 돈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다. 쓸 때 쓰는 사람이 부자이다.
문경에 있는 어떤 부부 형제자매를 보면 그 형제가 공무원 퇴직해서 연금으로 사는데 얼마나 풍부하게 사는지 모른다. 인생이 자기를 위하여 쓸 데가 없으니까 형제들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쓰는 것이다. 그 동네에서 사람들이 하도 그 집에 손님이 많이 오니까 소문이 났다. 저 집은 언젠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무엇을 가지고 먹이는가했는데 그렇지 않다. 여전히 그 집에서 풍성히 나오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 아들들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만물의 가치는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만물은 스스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은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기술자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 기계는 좋은 기술자를 만나야 다 쓸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머리로서의 자격을 자격있게 만들어서 만물이 찬양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럼 머리의 자격이 있으려면 하나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창조자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만물은 지으신 자의 마음을 가져야 귀하게 할 수가 있다.
모든 만물은 지으신 자의 마음을 가져야 움직일 수 있다. 기계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은 그 기계를 만든 사람이다. 만든 사람이 그 기계를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을 제일 잘 아시는 분의 마음을 가져야 우리 인생을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창조자의 목적은 거룩한 목적이다. 거룩한 목적이 있어야 만물로 하여금 거룩한 목적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만유를 제자리에 있게 하려면 내가 제자리에 있어야한다. 누구 탓할 것 없이 내가 제자리에 있으면 저절로 만유가 모두 제자리에 있게 된다.
내가 왕이라면 내가 성군이 되면 간신은 없어지고 충신이 줄을 서게 된다. 내가 폭군이 되면 간신이 줄을 서게 된다. 간신과 충신이 다른 것이 아니라 왕에 의해서 간신이 충신이 되기도 하고 충신이 간신이 되기도 한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다가 마지막에 천사가 수종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탄과 천사는 같은 종류이다.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리가 제자리에 있게 되면 우리의 환경도 우리를 위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시고 교회는 만유의 머리가 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 만유가 통일되는 그림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머리가 되고 사람이 만유의 머리가 되는 것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없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머리가 없고 머리 없는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있다. 만물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돈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 알지 못한다. 목사님은 ‘나는 정말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고 하신다.
주님의 지갑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돈은 정말 쓸 사람이 써야 돈의 가치가 올라간다. 그 돈을 가지고 사람을 사게 된다.
사실 우리 양문회 형제들은 먹여주지 않으면 교회에 오지 않는다. 일단은 먹여주어야 한다. 교회가 먹여줄 형편이 안 되면 양문회 형제들을 부를 수 없게 된다. 지금 양문회 형제들과 중고등부 아이들을 교회가 뒷받침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대단히 중요하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결국 무덤에 가져갈 수도 없는데 지금 현재 필요한곳이 어디인지 아는 게 너무 중요하다. 세상에는 열심히 벌어서 대학에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300억을 대학에 기부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그렇게 돈을 대학에 기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필요한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만유의 찬송이 되도록 예정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형제자매들을 향해서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살전2:20).”고 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목사님은 우리교회를 향하여 나는 교회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서울교회가 너무 자랑스럽다.
어제 있었던 일을 잠깐 말씀드리겠다. 어제 청년부가 교회가 아닌 모처에 모였는데 토요일 청년부가 모이던 중에 제일 많이 모였다. 어제 저녁 9시 반까지 교제를 했고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 청년부 형제들이 모두 전사가 되어 불꽃 튀는 전쟁을 했다.
그리고 주님이 승리하셨다. 완전히 사탄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는 한 형제를 청년부 형제들이 살리기 위해 어제 오후시간을 다 허비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살아났다. 어제 나는 집에 돌아와 너무 흥분되어 잠이 안 왔다. 제가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형제자매들과 같이 사는지 주님이 우리를 너무 영광스럽게 하셨다
작년 서울에 오니 청년부 총섬김이가 총섬김이 직을 언제 그만두나 하는 타령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전사가 되었다. 교회를 살리고 형제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형제들을 보았다. 이것을 주님이 보실 때 자랑스럽다고 하실 것이다. 저도 서울교회 형제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작년에 느낀 느낌과 지금의 느낌이 너무 다르다.
보내신 이와 보냄을 받은 자는 언제든지 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알겠는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듯 마찬가지로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보내심을 받은 자면 우리를 통해서 또 보내심을 받는 자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 생명으로 연결 된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때 나도 영광스러운 사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인생은 얼마나 귀한 위치에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면 우리인생은 너무 너무 소중하고 귀중하다.
창세기 5장에 장수족들이 나오는데 처음에 아주 좋은 말로 시작한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이것이 5장의 시작이다.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사람은 낳고 죽었더라 하며 창세기 5장을 읽어보면 그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잘못하면 낳고 죽는 것 밖에 없게 된다. 공부하고 장가가서 아들딸 낳고 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창세기 5장이다.
창세기 5장이 계속되니 너무 지루해서 이렇게는 안 되겠다 해서 나타난 것이 내피림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너무 잠잠하게 쓰일 곳 없이 낳고 죽었더라만 반복하면 엉뚱하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통치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나 자신이 내 것이 아니다.
우리 일생이 하나님의 이 영원한 계획과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사람을 놓고 무엇을 자랑하겠는가? 우리는 빌딩이 있다, 차가 있다, 도시가 있다, 컴퓨터가 있다, 지하철이 있다고 자랑하면 만물이 웃을 것이다. 만물은 그런 것 하나도 필요 없으니 인간들은 제발 지구를 떠나라, 인간들 때문에 몸살이 나서 못살겠다할 것이다.
성경에 만물은 참되나 사람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때 인생에 의미가 있게 되고 만물 위에 있게 된다. 때가 차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표현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소망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성숙하고 충만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표현되게 될 것이다.
앞서간 선진들이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고 있다. 예수님의 소망은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산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꾼 분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생을 바꾸어야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내 인생을 바꾸어야 한다. 사도들도 핍박을 받으면서 이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하나님이 표현될 때 영광이 된다. 만유는 이 표현된 하나님을 보고 찬양한다. 우주적인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만유가 우리를 찬양하는 이 엄청난 찬양이다.
12월에는 노래를 많이 부르는데 예전에 메시아를 부를 때 너무 장엄했다. 수 천 명이 모여서 메시아를 부르면 감동스럽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찬양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만유의 머리가 되어 하나님의 표현이 되어 그 표현된 사람이 찬양하는 것이 바로 우주적인 찬양이다.
이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성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때 만유는 그 성을 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영광은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목적은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다. 성막을 건축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현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격으로 하나님의 표현을 완성시키고 있다. 만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너무 고대하고 있다. 만물의 가치는 그 주인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가 이런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다.
올해 12월 남은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제 드는 생각이, 내가 서울교회에 오지 않았다면 따뜻한 방에서 이불 덮고 편히 지냈을 텐데 나를 서울로 보내서 이 역동적이고 꿈틀거리는 교회로 부름 받은 게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이 제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의 여러분과 함께 살게 하신 게 너무 감사하다. 여러분이 영광스러워지니 나도 영광스러워지고 있다. 영광스러운 사람과 함께 살면 자동적으로 영광스럽게 된다. 우리를 하나님의 찬송이 되도록 부르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의 유일한 몫이고 기업으로 부르신 주님을 영원히 찬송한다.
[ 기 도 ]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당신의 기업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산업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몫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산업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알 때 우리는 세상에 기웃거리고 방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업이 당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이고 몫이고 산업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을 완성하기위해 이렇게 한 몸으로 모이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몸이 되고 만유의 머리가 될 때 이 만유는 하나님께 완전한 영광의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주적인 찬송을 위해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