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교회 목회이야기』
이필경 목사
2008년 11월에 지금까지 목회를 하던 곳과는 많이 다른 곳으로 부임게 되었습니다. 한센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곳, 우리는 정착 마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11년 동안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1. 한센인 성도들을 만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던 저자는 남양주시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6년 반 동안 목회를 하다가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한센인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지리산 아랫동네 하동에 한센인들이 정착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입니다.
1) 나는 이렇게 한센인교회 목사가 되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우연히 서점에서 『성자 데미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책 제목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사역을 했던 데미안 신부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또 다른 책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안용준 목사님이 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책을 보았더니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두 책의 공통점은 한센인을 위해서 사랑으로 목회를 한 것입니다. 두 권의 책을 구입해서 집에 와서 읽으면서 내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두 분은 한센인을 위해서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는 한센병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던 시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한센병에 전염될 것을 염려해서 한센인을 멀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한센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한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했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 읽었던 두 권의 책이 훗날 한센인교회에서 사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10여 년 만에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2002년도에 교회를 개척한 필자는 연건평 약 160평을 건축한 후 다른 목사님께 넘겨드리고 2008년 11월에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던 필자 부부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와서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지리산이 있는 하동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도 건축했던 필자가 큰 빚을 지게 되면서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서둘렀던 이유는 건축부지 주변에 아파트 공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천 세대 아파트가 입주하기 전에 교회를 건축해서 먼저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빚을 내서 건축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건축을 하면서 7억 2천 만원이라는 빚을 지면서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동기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필자를 추천해서 후임자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단 신문을 보는데 “한센인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청빙합니다”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광고란에 나온 “한센인교회 청빙”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기 목사님이 소개해준 교회에 연락을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곧 현재 사역하는 교회에 이력서를 등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많이 지났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보았더니 내 이력서가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목회해야 할 곳은 하동동산교회인데, 왜 내 이력서가 등기로 보냈는데 없어졌을까?’, ‘혹시 내 이력서를 받고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동으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남양주시에서 차를 몰고 내려왔습니다. 임시당회장에게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력서를 제출했다고 청빙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동동산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에서 지리산이 있는 하동으로 목회지를 이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2018년에 필자 부부가 쓴 책 『희망레슨』에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추후에 읽어보시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2)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센인
필자가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기 전에는 한센인 하면 소록도와 애양원교회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센인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많을 때는 140여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한센인마을이 아파트지역으로 개발이 되면서 약 70곳 정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마을은 1940년대에 한센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센인 사역은 광주에서 포사이드 선교사가 한센인 한 여인을 데리고 오면서 윌슨 선교사가 애양원을 세우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산, 대구 등으로 한센인 사역을 하면서 선교사들이 예배에 대하여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센인교회들이 일반교회의 성도들보다 예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한센인사역을 했던 초창기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위해서 정착마을을 형성해 주었습니다. 정착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복음을 가르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한센인들 중에 80% 이상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한센인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된 것도 한센인들이 대부분 정착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센인 성도들은 일반인 성도들보다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에 적극적인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정착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교회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착마을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입니다.
우리 마을은 1940년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남 하동군에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한센인 마을들은 전남 소록도, 여수의 애양원, 부산의 상애원 그리고 대구의 애락원 등에서 주변으로 이사하면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을 때는 140여 곳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한센인들이 정착마을을 형성해서 살게 된 이유는 일반 마을에서 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백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 마을은 다른 마을들보다 작은 규모의 숫자가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안식교회와 천주교회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정착마을보다 예전부터 작은 교회였고, 외부의 보조를 많이 받으면서 교회를 유지해 왔습니다.
부임하기 전에 첫 번째 설교하러 수요예배에 왔습니다. 대략 30여 명의 성도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수요예배는 30여 명의 성도들이 참여를 해서 주일날 예배인원이 궁금했습니다. 주일오후와 수요예배의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인도 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는데, 예배를 드리러 온 성도님들이 약40여 명 정도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장로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수요일 날인데 많은 성도님들이 오셨네요?” 장로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오전과 오후예배 그리고 수요예배가 많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3) 목회의 동역자인 4분의 장로님(합력과 협력)
청빙이 되어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작은 교회에 시무 장로님 두 분과 은퇴 장로님 두 분 총 4분이 계셨습니다. 교회에 부임은 했지만, 한센인교회에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한센인성도님들과 신앙생활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나고,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데 신학생 시절 때 읽었던 『성자 데미안』과 『사랑의 원자탄』이 생각이 났습니다. 두 분은 누구보다 한센인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신학생 때를 생각하면서 서재에서 두 권의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두 권의 책이 책꽃이에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생 때는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면서 읽는 두 권의 책은 정답을 찾으려는 학생처럼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분의 장로님이 계셔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무엇보다 든든한 이유는 한센인교회 목회는 처음이기에 장로님들의 도움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은퇴한 장로님 집에 심방을 가면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주셨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들이지만 한참 듣고 있다보면 한센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은퇴 장로님 집에 찾아가서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센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장로님과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신뢰관계가 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계셨던 목사님들이 장로님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때까지 이 장로님은 내 목회에 큰 조력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당회를 하면 시무장로님들께 힘주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 목회를 잘 도우시오! 무조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시오!”
상처가 많은 분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의 문도 신뢰관계가 쌓이면 그 동안 못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4분의 장로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모든 시간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이해하고,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장로님을 통해서 흘러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센인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성도들을 대하기가 편해졌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을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다가가자 성도들도 마음을 열고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2. 목회 이야기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1) 감각이 없는 성도들(장갑에 불이 붙다), 후유증(외모에 나타남. 치료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처음 부임을 해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부분 성도님들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를 올 때가 11월말이었다. 지리산으로 이사를 가면 공기를 좋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은 주로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가면 매연이나, 미세먼지가 없어서 좋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돼지똥 냄새가 굉장히 심하게 났다. 한센인 마을은 예전부터 양계와 양돈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이 직장생활을 하기 어렵기도 하고, 사회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1909년에 선교사님들이 광주에서 한센인 정착마을인 애양원이 시작될 때부터 기술을 가르쳤다. 주로 건축기술을 가르쳤는데, 목공과 미장기술을 가르쳤다. 건축기술을 배우면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축일을 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마을에서 닭을 키워서 계란을 팔아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요즈음은 양계농장을 하는 분들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집 마다 양계농사를 했다고 한다.
양돈농장만 4곳에서 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분뇨냄새가 많이 없어졌다.
또한 시설이 현대화가 되면서 가축의 분뇨에서 나는 냄새가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시설도 낙후되었고, 분뇨냄새가 나더라도 대부분 가정에서 양계나. 양돈사업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가정이 이사를 왔을 때만해도 시설들이 낙후된 곳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냄새가 상당히 많이 났었다. 밤낮으로 창문을 열기가 힘들 정도였다.
장로님들이나, 성도님들이 냄새 때문에 살기 힘들지 않냐고 물을 때 마다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마을에 우리 가정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님들이 양돈사업을 해야 가정에 수입도 생기고, 교회에 헌금도 하기 때문이다. 이사를 와서 초창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처음
2) 지네가 나타났어요!
2008년 11월에 하동으로 이사하면서 첫 겨울을 맞이했다. 그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살았던 저자와 가족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겨울인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었다. 수도에 동파방지를 해야 하는데, 성도님들께 물어봤더니 동파방지를 안 해도 된다고 한다. 그 동안 동파방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1년 동안 살아오면서 눈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눈이 온 횟수가 몇 번 없었다. 물론 하동군에서도 산이 깊은 곳은 눈이 오지만, 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따뜻해서 눈이 오다가도 녹아서 비가 된다.
큰 딸이 초6, 작은 딸이 초4 학년에 이사를 오면서 혹시라도 왕따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이 되었다. 요즘도 학교에서 왕따 문제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많이 계시지만, 그 당시도 사회적으로 왕따 문제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곤 했었다. 걱정과 달리 두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왕따의 문제가 일어나지는 안았다. 더욱 감사한 것은 친구들이 서울말을 쓰는 두 딸을 왕따시키기 보다 신기하다고 하며 서울말을 가르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모의 걱정과 달리 두 딸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왕따의 문제는 기우에 그쳤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동에 내려와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왕따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지네와 각종 벌레들 그리고 뱀의 출현이다. 그중에도 집 안에서 지네가 나타나면 우리 집은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두 딸이 소리치면서 아빠를 부른다. 집 밖에서 보는 것은 도망을 가거나,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는데, 문제는 집 안에서 발견되는 지네가 제일 문제였다.
지네는 굉장히 빨라서 잡기도 힘들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지네에게 독이 있어서 지네를 본 날은 두 딸이 잠을 재대로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네가 나타나면 에프킬러를 뿌리면 곧 죽어요. 그러니까 지네를 잡으려고 하지 말고, 에프킬라를 빨리 뿌리세요라고 집사님이 가르쳐주셔서 그때부터 에프킬라를 텔레비전 옆에다 놓았다. 지네가 나타나서 에프킬라를 뿌렸더니 정말 지네가 힘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살던 두 딸이 시골에 산골짜기가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3) 난방을 하지 않는 성도들(사택을 가장 좋은 집으로, 성도들은 작은 집)
하동으로 내려와서 성도들의 집을 심방하기 시작했다. 주일날 미리 광고를 하고 날짜별로 성도님들의 집을 심방을 했다. 미리 예배상을 준비하고, 간식을 준비해서 우리 부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심방을 하면서 언제 우리 마을에 이사를 왔는지, 언제 한센병이 발병을 했는지, 소록도나 애양원, 상애원 등등에 언제 갔는지 등등을 물어보았다.
전교인 심방이 끝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가끔 성도님들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안 온도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기름을 아끼려고 차갑게 살다가, 목사가 심방을 온다고 실내온도를 따뜻하게 하려고 하루 종일 보일러를 켰던 것이다. 방을 따뜻하게 한 것은 심방 오는 목사를 맞이하려는 성도들의 사랑의 온기였다. 불시에 심방을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지난 해에 정부보조로 집집마다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했다. 감사하게 사택에도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해 주었다. 사택은 슬라브집이라 여름이면 새벽에도 30도가 넘어서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후부터 에어컨을 커는 부담이 적어졌다.
요즈음도 가끔씩 성도님들의 집을 심방한다.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되기 전에는 에어컨이 장식용처럼 달려있었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서 커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세 걱정하지 말고, 에어컨을 열심히 키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런데도 연세가 많이 드신 성도님들은 가난할 때부터 절약이 몸에 베어서 그런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만 에어컨을 사용하신다.
성도님들 집은 방 두칸, 좁은 주방, 옛날 스테트로 지은 집에서 대부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목사의 사택은 30평의 큰 집이었다. 자신들은 좁은 집에서 살더라도 사택 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지었다고 한다.
목회자를 잘 섬기려는 모습들을 통해서 더욱 열심히 목회를 하고,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겨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3 우리 교회도 작은 교회인데요.........
1) 패배주의를 극복하라
우리나라의 시골교회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수많은 개척교회들의 공통된 고민이 우리 교회는 언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일 것이다.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대부분 교회존립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88올림픽이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좋아지면서 새롭게 한센병이 발병하지 않고 있다. 현재 한센인으로 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 88올림픽 이전에 발병한 분들이다. 그러다 보니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고령화가 되고 있다. 고령이 된 한센인 성도들이 돌아가시면서 일반교회보다 빠르게 성도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교회존립에 대해서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10명은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2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보고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으로 보고한 정탐꾼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긍정적인 보고보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듣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거인인 아낙자손의 후손들을 보면서 두려워했다. 그들의 부정적인 마음과 보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갖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거인들의 후손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들 중에 작은 교회 중의 한 곳이다. 예전부터 갖은 교회였기 때문에 도움을 받으면서 교회가 유지가 되고 있었다. 작은 교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 등등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런 마음들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교회를 섬겨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작은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일이 더욱 귀하다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예전에도 많이 해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의 머리에 실패의 DNA가 심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언가 모순이다. 안 된다고 말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면 된다고 외치고, 도전하는 것이다. 해보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받던 습관을 버리라(이전 것을 버리게 하라)
우리나라에 한센인이 많을 때는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교회도 140곳 정도 있었다고 한다. 한센인 마을이 도시화가 되면서 보상을 받고,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해체가 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한센인교회가 70곳 정도 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 중 한 곳이다. 교회가 자립을 하고 싶어도 성도들이 많지 않고, 각 가정들도 경제력이 좋지가 않아서 자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외부교회의 보조를 받지 않고는 교회가 목회자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자가 부임하기 전에는 많은 교회에서 후원을 받아서 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외부로부터 후원을 받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보다 어려운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이고, 30여명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자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부에서 주는 4, 50만원의 생계비로 생활하는 성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회가 자립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교회가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는 교회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62년도에 교회가 세워진 후부터 수십년 동안 외부의 후원에 의지하며 교회를 유지해왔던 교회가 자립을 하고, 우리보다 약한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 부임한 후부터 시작한 일이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기를 강조했다.
받던 습관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어야 한다. 지금까지 받던 습관을 버려야 새로운 습관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을 수 있도록 소망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선포했다.
성경 사도행전20:35절에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저자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가장 많이 가르치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주는 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많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주는 교회가 되자고 선포하고, 함께 기도한 것이다.
2008년에 교회에 부임한 후 외부후원금을 받지 않고 있다. 장년 성도 30여명중 경제활동을 하는 분들이 몇 분 안되지만, 기도하면서 과감히 자립을 선포했다. 감사한 것은 경제활동을 하는 몇 분의 성도님들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재정이 해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2009년부터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선교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교회이지만, 이제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자고 선포하면서 선교헌금을 드리기 시작했다. 몇 곳의 선교지에 헌금을 보내면서 매주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3) 새로운 비전을 꿈꾸게 하라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 약한 교회인가의 기준은 건물이나, 성도의 숫자나, 헌금의 액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큰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어려운 일들이 훨씬 많이 있다.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이사를 하게 되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먼저 찾아간다. 작은 교회에서는 열심히 전도해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 중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작은 교회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5 어린이에게 양보한 주일 오전11시
1) 생각을 바꾸라
우리 교회가 결정한 일들 중에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오전11시를 어린이에게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교회의 주일어린이 예배시간은 오전9시30분이고, 어른 예배가 오전11시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린이 예배와 어른 예배시간을 바꾸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를 꼽아보려고 한다. 첫째는 어린이가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하면서 주일예배의 가장 편한 시간을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당회를 하고, 제직회를 하면서 오전11시를 우리 교회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양보를 하자고 주장을 했다. 감사하게도 성도님들이 흔쾌히 찬성을 하셔서 어린이와 어른 예배시간을 바꾸어드리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요즈음 어린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시달리느라 평소에 늦게 귀가를 한다. 피곤해서 늦잠을 자면서 주일어린이 예배시간에 빠지는 어린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은 오전11시에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결석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부모님이 먼저 예배를 드리러 온다. 어린이들은 11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스스로 교회에 나온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늦었다고 재촉을 하거나, 야단을 치면서 교회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
어른 예배시간과 어린이 예배시간을 바꾸면서 교회학교 학부모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어린이들을 교회에 보내려면 짜증을 내거나,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른 예배시간을 먼저 드리면서 부모님들이 어린이 없이 먼저 주일예배를 편하게 드릴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어린이들도 부모님이 억지로 교회에 보내는 일이 적어져서 교회에 오는 시간이 즐겁다고 한다. 고학년 어린이들이 동생을 챙겨서 11시까지 예배에 참석하면서 동생을 잘 돌보게 되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른 예배시간과 어린이 예배시간을 바꿀 때 도시교회, 특히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분들은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상황이 가능하다면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오전9시30분에 1부 예배로 드리고, 오전11시에는 어른 예배와 어린이 예배를 각각의 장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교회를 사례로 드릴 때 힘들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 되는 일은 없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조차 어렵게 된다.
교회학교 활성화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이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2)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누라
우리 교회는 어린이교육에 많이 투자를 하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행사나 일정을 어린이에게 맞추고 있다.
어른들이 가장 중요한 시간을 내어줌으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면서도 더 못주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 교회는 가장 좋은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마음들이 어린이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1962년도에 창립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대부분 마을과 교회를 떠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상태로 10년 정도 지난다면 교회의 존폐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앞으로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해도 먼 곳에서도 교회를 지킬 수 있도록 주인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바로 어린이들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의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작은 교회들, 특히 시골교회의 대부분은 10년 정도 지나면 상당수의 교회가 존폐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약해지는 시골 교회를 살릴 수 있을까? 시골은 도시보다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앞으로 시골교회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부터 교회학교 어린들이 우리 교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오전11시를 양보하게 한 것이다.
많은 교회가 다음세대가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 말로 그치는 경향이 있다. 다음세대가 먼 훗날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 교회에서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말로만 그치지 말고, 한국 교회의 시스템을 교회학교에 맞추어야 한다. 모든 교회에서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라는 마음이 들게 한다면 장차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자의 교회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회학교에 오전11시를 내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즈음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왜 어른보다 어린이들에게 잘 해주냐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다. 그럴 때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희생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수긍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 주인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각각의 사정과 상황이 다를 것이다. 저자가 주일오전예배를 실례로 든 것은 말 그대로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각 교회에서 어린이과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이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우리 교회는 소망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저자가 섬기는 하동동산교회를 모델교회로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주일예배의 시간을 양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을 양보할 수 없는 교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어른 성도님들이 어린이들과 교회학교를 말로만 소중하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교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도록 반겨주고, 환영하고, 사랑해라. 한국 교회가 그렇게 한다면 마이너스 성장에서 다시금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말도 중요하지만, 행동도 중요하다. 말로만 중요하다고 말하지 말라
다음세대가 주인공(미래를 준비하라)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직접적인 말을 하는 대신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장년부보다 교회학교는 심각한 상황이다. 예전에는 가득차던 교회학교 예배실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
각 교단별로 다음세대가 중요하다고 말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학교 학생들을 다시 교회로 향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많은 목사님들이 “다음세대가 주인공이다!”고 말씀을 하신다.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의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주인공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4년 전부터 교회학교 학생들이 교회의 주인공이라는 구호와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교회학교를 위해서 두 분의 장로님들이 교사로 섬기고 있다. 각종 행사를 교회학교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6 예배를 준비하라
1) 1시간 전에 나오는 성도들
우리 교회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예배시간이 시작되기 30분 전에 성도님들 대부분이 나와서 기도하며 찬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맞이하는 첫 주일 예배는 잊을 수가 없다.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30분 전에 예배당으로 나갔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미 와서 기도하고 있었다. 수도권에서 목회를 할 때 보통 10분 전, 빠르면 20분 전에 예배를 준비하며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30분 전에 기도로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던 것이다.
다음 주일은 성도들보다 먼저 나가서 예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시간 전에 예배당에 나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벌써 많은 성도님들이 나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권에서 일반교회를 목회할 때와 한센인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예배에 대한 사모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배에 대한 열정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배는 열심히 드리면서 패배주의에 빠져서 사는 것이다. 열심히 예배생활을 하면 패배주의도 극복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배와 삶의 불균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예배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교회보다 예배참여율도 좋고, 마을 자체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많은 차이점을 느끼게 되었다.
2)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하라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찬양을 부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오전과 오후예배 그리고 수요일예배를 드리기 30분 전부터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약 30분 정도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며 찬송을 부를 때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교회에 나와있습니다. 요즈음 일반 교회는 30분 전에 나오는 성도님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30분 전에 나와서 기도로 준비하고,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필자는 성도님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빨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요즈음 교회가 그런 모습들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분 전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나와서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첫 찬양이 끝나자 한 성도님이 몇 장을 부르자고 말을 했습니다. 다음 찬양을 하고 나서 다른 성도님이 또 다른 찬양을 하자고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교회는 예배를 준비하며 찬양할 때 성도님들이 희망 찬송을 미리 준비해서 함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한 은퇴장로님은 양손의 손가락이 대부분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찬송을 부르는데 박수를 치쳐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십니다. 언젠가 필자도 장로님을 따라서 박수를 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부딪힐 때에 너무 아팠습니다. 언젠가 장로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박수칠 때 손가락 마디가 부딪히면 아프지 않나요?” 그러자 장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박수를 치면 손가락 마디가 아프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손가락 마디가 조금 아프더라도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해야지요!” 장로님과 대화하면서 지금까지 찬송을 부를 때 어떤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드렸는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3)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
한센인성도님들은 세상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던 분들이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을까?
언젠가 성도님 집을 심방 가서 옛날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성도님은 수십년 된 이야기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듯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7 다문화가정을 전도하라
1) 다문화가정은 전도의 황금어장(친정나들이 보내기)
2008년 11월 교회에 부임을 했을 때 두 분의 다문화가정 성도님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성도님은 6월에 한국에 왔다고 했다. 주일예배 후에 다문화 성도님을 찾아갔다. 우리나라 말을 못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고, 음식과 기후와 환경 등 낯설은 곳에서 사는 너무 아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긴장한 모습으로 우리 부부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 한국생활과 신앙생활을 도우려고 찾아갔는데, 첫 만남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핬다. 그 후에도 몇차례 찾아가면서 서서히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룻기에 나오는 룻의 모습이 떠올랐다. 흉년이 들자 재산을 팔아서 모압으로 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있었다. 모압에서 엘리멜렉이 죽은 후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다. 모압에 거주한지 10년쯤에 두 아들이 죽게 되었다. 설상가상 가지고 갔던 재산도 모두 없어졌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 룻과 함께 돌아왔다.
룻이 이곳까지 온 것은 이스라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룻도 베들레헴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룻은 절대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며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은 이방인이었다. 룻이 강력하게 결심을 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눈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문화와 종교도 다른 곳에서 시어머니를 봉양해야만 했다. 더구나 재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앞이 캄캄한 상태였다. 그런데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들판으로 나갔다. 하나님은 룻을 위해 보아스를 예비해주셨다. 보아스가 룻을 돌봐주도록 하면서 룻은 보아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 다문화가정 두 성도님도 남편을 따라서 낯설고, 물설은 대한민국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있어서 도와주기도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지방자치단체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해서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곳에 열심히 다니면서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조금씩 통하게 되었다.
두 성도님은 주일날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후에 식사하면서 성도님들과 친해졌고, 성도님들도 두 성도님이 한국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떻게 하면 다문화 성도님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문화 성도님들이 많은 돈이 들어서 친정을 다녀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서 다문화가정 친정보내기 행사를 하게 되었다. 요즘은 다문화가정에서 친정가기가 쉬워졌지만, 10년이 넘어도 친정을 다녀오지 못하는 가정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의논한 결과 친정에 다녀올 수 있도록 교회에서 돕기로 했다.
친정에 다녀온 후 두 성도님은 훨씬 얼굴빛도 밝아졌고,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예배시간에 교회에서 준비한 금일봉을 주면서 친정부모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부탁을 했다. 전교인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를 해주었다. 성도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금일봉을 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요즘은 친정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한 분의 선교사님을 파송하기 위해서 1년에 수천만원의 선교헌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다문화가정의 성도님들은 준비된 선교사이다. 다문화가정은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우리 교회는 연세 드신 성도님들이 신앙생활하는 고령화되는 교회였다. 십여년 정도 지나면 교회의 존폐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교회였다. 그런데 다문화 성도 4가정이 신앙생활하면서 교회가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었다. 장년 성도가 30명인데, 교회학교 어린이가 9명이 되었다. 십여년 전에 없어졌던 교회학교예배를 다시 드리게 되었다. 다문화가정이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2) 지인을 통하라(결혼정보회사보다 지인소개)
우리 교회에 다문화 성도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간혹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다문화 아내를 얻을 수 있느냐?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 처음부터 좋은 아내는 없다. 내가 잘 해주면 상대방도 잘 해주고, 내가 잘 못해주면 상대방도 잘 안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11년 목회를 하면서 다문화 가정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노총각이 있는데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곤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소개해주는 분들보다 마을 주변에 외국에서 시집을 온 다문화 여성이 있다면 잘 살펴보라. 특히 시집을 온지 5년 이상 되었는데, 결혼생활과 시댁과의 생활을 잘 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런 분들의 가족이나, 친척을 소개받으면 실패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11년 목회를 하면서 옆에서 다문화 가정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남편과 시부모님을 잘 모시는 분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많은 경우 비슷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고, 특히 가족이나 친척이 잘 살고 있으면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뒤에 오는 여성도 잘 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이 된다.
저자가 이 부분을 쓰는 이유는 요즈음 한국 교회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노총각들 중에 다문화 여성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다문화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교회가 지리산 골짜기에 있지만, 젊은 성도들과 교회학교가 생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다문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때문이다.
주일날 어른 예배와 어린이 예배에 다문화 성도와 어린이들이 오면 최대한 환영해주려고 한다.
3) 부부성경공부(신앙+한국생활정착을 도우라)
다문화가정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도 잘하고, 부부생활, 가정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EBS에서 하는 “다문화고부열전”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될 때 마다 “다문화고부열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다문화가정의 문제점과 해결점을 알게 되었다.
다문화가정이 잘 살아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주일 저녁 시간에 부부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경공부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모임을 하면서 그리고 “다문화고부열전”을 보면서 가정생활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공부와 생활교육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생활교육은 시부모님과의 관계, 부부와의 관계, 친척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네 가정의 다문화부부가 참여하고 있다.
성도들이 행복하게 하라.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신앙생활도 열심을 낸다. 그러려면 믿음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8 선교하는 교회
1)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 중에 작은 교회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헌금보다 기도가 먼저이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물질도 주신다. 기도하다보면 헌금도 할 수 있다.
총회 세계선교부 강사로 선교사훈련에서 강의하면서 많은 선교사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선교하면서 선교헌금후원자를 모집하는 만큼 기도의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는가? 선교헌금은 후원을 하지 못해도 기도라도 해줄 수 있는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느냐?
그런데 정작 기도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도 말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교헌금 후원자는 카드를 받고, 작정을 하게 하지만, 정작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기도후원자 카드를 받지 않고 있다.
선교사님들께서 선교보고를 하면서 기도제목을 보내온다. 그런데 선교보고의 많은 부분은 후원받은 제정으로 어떤 사역들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하려는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줄 것과 지속적인 후원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물론 기도제목도 보내오고 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만 해주는 교회도 필요하다. 작은 교회들이 선교헌금을 보내지 못해도 중보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선교헌금을 보낼 수 있는 재정을 주시기도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역사를 보면 독노회를 결성하면서, 총회를 결성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2) 주는 교회가 되자
지금까지 우리 교회만큼 외부의 후원으로 건물을 많이 지은 교회도 없을 것이다. 예배당, 교육관, 사택 두 채 등 외부의 지원을 받아서 건축을 했다. 물론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였고,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자체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부임하면서 외부의 후원금도 없어지고, 자체적인 자립을 하기 위해서 강력하게 선포를 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주는 교회가 되자!”, “더 이상 받는 교회가 되지 말고 주는 교회가 되자!”
주는 교회로 전환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1962년도에 교회를 창립한 이래 저자가 부임할 때까지 외부의 후원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목회자 생활비를 드렸던 교회였다. 저자가 부임해서 주는 교회가 되자고 하자 당장 장로님들이 반대를 했다. 교회의 살림을 책임져야 할 장로님들은 교회의 상황과 성도들의 경제형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장로님들과 성도들을 설득을 했다. 한 가정에서 월 2천원 정도는 선교헌금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면서 예배시간에 광고를 했다. 다음주부터 자원하는 성도들은 선교헌금을 하면 된다고 하자 성도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감사한 일은 2천원을 하는 성도들은 지금까지 한 분도 없었다. 그때부터 선교헌금을 최소 1만원에서 10만원을 하고 있다. 모든 성도들이 놀라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교헌금을 하면서 매년 교회의 재정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체 헌금보다 외부헌금으로 유지되던 교회였다. 그런데 선교헌금을 하면서 외부헌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우리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채워지고 있었다. 더욱 감사한 일은 해마다 헌금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주는 교회로 전환하면서 매년 선교사님들에게 선교헌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님들 중에 잠시 귀국하는 분들을 교회에 초청하고 있다.
3) 선교하는 교회(정홍기 장로님 음악선교)
우리 교회 장로님 중에 한 분이 10여년 동안 섹소폰을 배워서 주일예배 시간에 특송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양원이나,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음악선교를 하고 있다.
감사한 일은 장로님이 해외선교에도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0여년 동안 매년 음악선교를 위해서 해외를 다녀오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로님의 음악선교를 후원하고, 선교지에 섹소폰도 구입해드리고 있다.
9. 한센인 사역을 한 롤 모델이 된 선교사와 목회자들
저자가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도움을 받은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있다. 애양원, 상애원, 애락원 등에서 사역을 했던 많은 선교사님들과 소록도에서 사역을 했던 일본인 목회자들 그리고 140여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한국의 목회자들이 있다. 많은 분들 중에서 롤모델로 삼은 서양 선교사님 한 분과 일본인 목회자 부부 그리고 우리나라 목사님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1) 윌슨 선교사님
윌슨 선교사님은 광주제중원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센인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한 사건이 윌슨 선교사님의 사역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했다.
오웬 선교사님이 전라도지역에서 쉬지 않고 사역을 하다가 급성폐렴이 걸리게 되었다. 선교부는 목포에서 사역하는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소식을 전해서 빨리 광주로 오도록 했다. 포사이드 선교사님을 부른 이유는 그의 의술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오웬 선교사님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포사이드 선교사님이 광주로 오는 도중에 한센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왔다. 이 여인도 2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윌슨 선교사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었다. 오웬 선교사님과 한센인 여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포사이드 선교사도 목포로 떠났다. 광주에는 윌슨 선교사님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이 한센인 여성을 치료해 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한센인들이 광주제중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이 제중원으로 몰려들자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제중원에서 한센인과 함께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정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광주에서 사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최흥종 청년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부모님께 유산으로 받은 봉선리 땅 1,000평을 한센인치료를 위해서 기부를 했다. 이곳에 한센인을 위한 치료소를 짓고, 치료해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윌슨 선교사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센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광주에 몰려드는 한센인들이 많아지게 되자 윌슨의 마음은 복잡해지게 되었다. 봉선리로 몰려드는 한센인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때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많은 한센인이 살 수 있는 넓은 땅이 필요했다. 그 당시는 한센인들을 치료만 해주었지만, 앞으로 한센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정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1926년에 전남 여수시의 현재 애양원 위치를 본 후 마음에 들어한 윌슨 선교사님은 정착지를 여수로 결정하게 되었다.
광주로부터 여수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광주는 한센인의 치료위주로 사역을 했다면, 여수에서는 치료 뿐아니라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착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한센인 중에 건강 상태가 양호한 분들에게는 목수가 되도록 건축기술을 가르쳤다. 건강이 약한 분들에게는 양계기술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우리나라의 계란의 20% 정도가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나올 정도로 여수애양원을 비롯한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양계사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윌슨 선교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인 치료와 철저한 신앙생활 그리고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서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중국에서 실패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센인 사역을 했던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성공을 하게 되었다.
네비우스 선교사가 주장했던 자립, 자치, 자전의 정신이 가장 먼저 실현된 곳이 바로 한센인 정착마을이었다. 선교사님들로부터 철저한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으로 훈련을 받은 한센인 교회들은 여수, 부산, 대구를 중심으로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오늘날도 많은 한센인교회들과 한센총연합회, IDEA협회 등 한센인들이 세운 단체들이 해외선교에 앞장서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님들을 돕고 있다.
2) 다나까 목사님과 시오자키 사모님
일본 목회자로서 최초의 선교사인 노리마쯔 마사야스는 조선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1896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1896년 12월23일이었다. 노리마쯔는 일본의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다. 일본의 최초 해외선교사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노리마쯔의 선교사역은 일본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중에 한 명이 다나까 목사님이다. 그는 동양선교회 소속의 목회자로서 전남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소록도의 원장이었던 하나이 원장이 다나까 목사님에게 소록도에서 사역을 할 것을 요청을 했다. 다나까 목사님은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하나이 원자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이 있는 한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당장 소록도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한센인 선교는 서양선교사님들의 고유한 사역과도 같았다. 광주의 애양원에서 윌슨 선교사님이, 부산의 상애원에서 매견시 선교사님이, 대구의 애락원에서 플렛처 선교사님이 한센인 사역을 하고 있었다. 서양선교사님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한센인들을 치료해주자 조선인의 민심이 선교사님들께 향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을 한 일본은 조선인의 민심을 붙잡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에서도 소록도를 만들어서 한센인들을 잘 돌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소록도에서는 일본인 관리들에 의해서 한센인이 복지나 치료보다는 탄압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나까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록도로 들어온 것이다.
다나까 목사님이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들에게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도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한센인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목회사역도 필요했지만, 일본어도 가르쳐야 하고, 병자들을 심방도 해야하는데 혼자서 모든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을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조선의 한센인들을 위한 이상촌건설에 대한 비전을 품고 조선으로 온 시오자키 자매가 있었다. 다나까 목사님은 시오자키 자매를 만나서 서로의 사역과 비전을 나누던 중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오자키가 다나까 목사님의 사역을 돕기 시작하면서 소록도는 영적으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다나까 목사님과 시오자키 사모님이 대단한 것은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의 병이 심각한 상태에서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센인 목회를 하면서 그들을 심방하고,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3) 최흥종 목사님
우리나라 사람으로 한센인 사역을 했던 최초의 목회자는 최흥종 목사님이다. 최흥종 목사님은 광주에서 쇠망치라는 이름의 깡패였지만, 김윤수 집사님과 오웬 선교사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최영종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최흥종으로 개명을 했다.
1909년에 오웬 선교사님이 위독할 때 목포에서 사역하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치료하기 위해서 올라올 때 김윤수 집사님과 마중을 나갔다. 포사이드 선교사님이 한센인 여성을 자신의 말에 태우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이 일로 인해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봉선리 땅 1,000평을 광주선교부에 기부를 했다. 이곳에서 한센인치료를 했고, 애양원이 이곳에서 시작이 되었다. 최흥종 청년은 한센인을 치료하는 윌슨 선교사를 도와서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1912년에 북문안교회에서 초대 장로가 된 최흥종은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 광주 북문밖교회, 남문밖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광주중앙교회 등에서 목회를 했다.
최흥종 목사님은 일반목회를 하면서도 청년시절 때 선교사님들이 한센인사역을 하는 것을 본 후 지속적으로 한센인을 돕는 일을 했다.
1933년에는 한센인의 치료와 갱생을 위해서 총독과 단판을 짓기 위해서 한센인 500여명을 데리고 총독부까지 행진을 했다. 최흥종 목사님은 우가끼 총독과 면담을 해서 한센인의 치료와 갱생을 위한 약속을 받아냈다.
최흥종 목사님은 나주에 주변에서 살고 있던 한센인들을 위해서 호혜원이라는 한센인 공동체 마을과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한센인 하면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보타 18살 많은 최흥종 목사님이 먼저 한센인 사역을 하셨다. 최흥종 목사님은 한센인의 신앙과 인권을 위해서 헌신했던 분이었다. 최흥종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광주에 사는 수많은 한센인들이 울면서 슬픔을 나누었다고 한다. 최흥종 목사님은 한센인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한센인교회 목회이야기』
이필경 목사
2008년 11월에 지금까지 목회를 하던 곳과는 많이 다른 곳으로 부임게 되었습니다. 한센인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곳, 우리는 정착 마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11년 동안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1. 한센인 성도들을 만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던 저자는 남양주시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6년 반 동안 목회를 하다가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한센인교회로 목회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지리산 아랫동네 하동에 한센인들이 정착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입니다.
1) 나는 이렇게 한센인교회 목사가 되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우연히 서점에서 『성자 데미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책 제목이 시선을 끌었습니다.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사역을 했던 데미안 신부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또 다른 책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안용준 목사님이 쓴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책을 보았더니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두 책의 공통점은 한센인을 위해서 사랑으로 목회를 한 것입니다. 두 권의 책을 구입해서 집에 와서 읽으면서 내게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두 분은 한센인을 위해서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는 한센병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던 시기였고, 많은 사람들이 한센병에 전염될 것을 염려해서 한센인을 멀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한센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한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역을 했다는 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 읽었던 두 권의 책이 훗날 한센인교회에서 사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10여 년 만에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2002년도에 교회를 개척한 필자는 연건평 약 160평을 건축한 후 다른 목사님께 넘겨드리고 2008년 11월에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던 필자 부부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와서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지리산이 있는 하동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도 건축했던 필자가 큰 빚을 지게 되면서 너무 지쳐있었습니다. 교회 건축을 서둘렀던 이유는 건축부지 주변에 아파트 공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천 세대 아파트가 입주하기 전에 교회를 건축해서 먼저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빚을 내서 건축을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건축을 하면서 7억 2천 만원이라는 빚을 지면서 너무 지쳐 있었습니다.
동기 목사님이 다른 곳으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필자를 추천해서 후임자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단 신문을 보는데 “한센인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을 청빙합니다”라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광고란에 나온 “한센인교회 청빙”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기 목사님이 소개해준 교회에 연락을 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곧 현재 사역하는 교회에 이력서를 등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많이 지났는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해보았더니 내 이력서가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목회해야 할 곳은 하동동산교회인데, 왜 내 이력서가 등기로 보냈는데 없어졌을까?’, ‘혹시 내 이력서를 받고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동으로 가보자는 생각으로 남양주시에서 차를 몰고 내려왔습니다. 임시당회장에게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이력서를 제출했다고 청빙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동동산교회에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에서 지리산이 있는 하동으로 목회지를 이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2018년에 필자 부부가 쓴 책 『희망레슨』에 자세히 기록하였기에 추후에 읽어보시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2)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한센인
필자가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기 전에는 한센인 하면 소록도와 애양원교회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센인교회가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많을 때는 140여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현재는 한센인마을이 아파트지역으로 개발이 되면서 약 70곳 정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마을은 1940년대에 한센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센인 사역은 광주에서 포사이드 선교사가 한센인 한 여인을 데리고 오면서 윌슨 선교사가 애양원을 세우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부산, 대구 등으로 한센인 사역을 하면서 선교사들이 예배에 대하여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센인교회들이 일반교회의 성도들보다 예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한센인사역을 했던 초창기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위해서 정착마을을 형성해 주었습니다. 정착마을에서 생활하면서 복음을 가르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한센인들 중에 80% 이상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한센인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된 것도 한센인들이 대부분 정착마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센인 성도들은 일반인 성도들보다 신앙생활과 예배생활에 적극적인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정착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교회중심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착마을도 대부분 비슷한 상황입니다.
우리 마을은 1940년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경남 하동군에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한센인 마을들은 전남 소록도, 여수의 애양원, 부산의 상애원 그리고 대구의 애락원 등에서 주변으로 이사하면서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을 때는 140여 곳까지 만들어졌습니다. 한센인들이 정착마을을 형성해서 살게 된 이유는 일반 마을에서 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백명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우리 마을은 다른 마을들보다 작은 규모의 숫자가 모여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안식교회와 천주교회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정착마을보다 예전부터 작은 교회였고, 외부의 보조를 많이 받으면서 교회를 유지해 왔습니다.
부임하기 전에 첫 번째 설교하러 수요예배에 왔습니다. 대략 30여 명의 성도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수요예배는 30여 명의 성도들이 참여를 해서 주일날 예배인원이 궁금했습니다. 주일오후와 수요예배의 인원이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예배인도 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는데, 예배를 드리러 온 성도님들이 약40여 명 정도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장로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수요일 날인데 많은 성도님들이 오셨네요?” 장로님이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주일오전과 오후예배 그리고 수요예배가 많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3) 목회의 동역자인 4분의 장로님(합력과 협력)
청빙이 되어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작은 교회에 시무 장로님 두 분과 은퇴 장로님 두 분 총 4분이 계셨습니다. 교회에 부임은 했지만, 한센인교회에서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한센인성도님들과 신앙생활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나고, 대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데 신학생 시절 때 읽었던 『성자 데미안』과 『사랑의 원자탄』이 생각이 났습니다. 두 분은 누구보다 한센인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신학생 때를 생각하면서 서재에서 두 권의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두 권의 책이 책꽃이에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생 때는 막연히 동경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면서 읽는 두 권의 책은 정답을 찾으려는 학생처럼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분의 장로님이 계셔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무엇보다 든든한 이유는 한센인교회 목회는 처음이기에 장로님들의 도움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은퇴한 장로님 집에 심방을 가면 그 동안 살아왔던 이야기 보따리를 술술 풀어주셨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들이지만 한참 듣고 있다보면 한센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은퇴 장로님 집에 찾아가서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센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장로님과 이렇게 대화를 하면서 신뢰관계가 쌓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계셨던 목사님들이 장로님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때까지 이 장로님은 내 목회에 큰 조력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당회를 하면 시무장로님들께 힘주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님 목회를 잘 도우시오! 무조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시오!”
상처가 많은 분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굳게 닫힌 마음의 문도 신뢰관계가 쌓이면 그 동안 못했던 말들이 끊임없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4분의 장로님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모든 시간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더욱 이해하고,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장로님을 통해서 흘러간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센인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성도들을 대하기가 편해졌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관계가 더욱 끈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도들을 마음으로 품고 기도하며 사랑으로 다가가자 성도들도 마음을 열고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2. 목회 이야기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 한다.
1) 감각이 없는 성도들(장갑에 불이 붙다), 후유증(외모에 나타남. 치료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처음 부임을 해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교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부분 성도님들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를 올 때가 11월말이었다. 지리산으로 이사를 가면 공기를 좋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은 주로 서울과 수도권의 아파트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가면 매연이나, 미세먼지가 없어서 좋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을에서 돼지똥 냄새가 굉장히 심하게 났다. 한센인 마을은 예전부터 양계와 양돈을 많이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한센인들이 직장생활을 하기 어렵기도 하고, 사회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1909년에 선교사님들이 광주에서 한센인 정착마을인 애양원이 시작될 때부터 기술을 가르쳤다. 주로 건축기술을 가르쳤는데, 목공과 미장기술을 가르쳤다. 건축기술을 배우면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축일을 할 수 없는 분들을 위해서 마을에서 닭을 키워서 계란을 팔아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요즈음은 양계농장을 하는 분들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집 마다 양계농사를 했다고 한다.
양돈농장만 4곳에서 하기 때문에 예전보다 분뇨냄새가 많이 없어졌다.
또한 시설이 현대화가 되면서 가축의 분뇨에서 나는 냄새가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예전에는 시설도 낙후되었고, 분뇨냄새가 나더라도 대부분 가정에서 양계나. 양돈사업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가정이 이사를 왔을 때만해도 시설들이 낙후된 곳이 제법 있었기 때문에 냄새가 상당히 많이 났었다. 밤낮으로 창문을 열기가 힘들 정도였다.
장로님들이나, 성도님들이 냄새 때문에 살기 힘들지 않냐고 물을 때 마다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렇게 말씀을 드린 이유는 마을에 우리 가정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님들이 양돈사업을 해야 가정에 수입도 생기고, 교회에 헌금도 하기 때문이다. 이사를 와서 초창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처음
2) 지네가 나타났어요!
2008년 11월에 하동으로 이사하면서 첫 겨울을 맞이했다. 그 동안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살았던 저자와 가족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겨울인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었다. 수도에 동파방지를 해야 하는데, 성도님들께 물어봤더니 동파방지를 안 해도 된다고 한다. 그 동안 동파방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1년 동안 살아오면서 눈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눈이 온 횟수가 몇 번 없었다. 물론 하동군에서도 산이 깊은 곳은 눈이 오지만, 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따뜻해서 눈이 오다가도 녹아서 비가 된다.
큰 딸이 초6, 작은 딸이 초4 학년에 이사를 오면서 혹시라도 왕따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이 되었다. 요즘도 학교에서 왕따 문제로 인해서 힘들어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많이 계시지만, 그 당시도 사회적으로 왕따 문제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곤 했었다. 걱정과 달리 두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 왕따의 문제가 일어나지는 안았다. 더욱 감사한 것은 친구들이 서울말을 쓰는 두 딸을 왕따시키기 보다 신기하다고 하며 서울말을 가르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모의 걱정과 달리 두 딸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했다.
왕따의 문제는 기우에 그쳤지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문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하동에 내려와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는 왕따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지네와 각종 벌레들 그리고 뱀의 출현이다. 그중에도 집 안에서 지네가 나타나면 우리 집은 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두 딸이 소리치면서 아빠를 부른다. 집 밖에서 보는 것은 도망을 가거나,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니까 그런 대로 넘어갈 수 있는데, 문제는 집 안에서 발견되는 지네가 제일 문제였다.
지네는 굉장히 빨라서 잡기도 힘들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지네에게 독이 있어서 지네를 본 날은 두 딸이 잠을 재대로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네가 나타나면 에프킬러를 뿌리면 곧 죽어요. 그러니까 지네를 잡으려고 하지 말고, 에프킬라를 빨리 뿌리세요라고 집사님이 가르쳐주셔서 그때부터 에프킬라를 텔레비전 옆에다 놓았다. 지네가 나타나서 에프킬라를 뿌렸더니 정말 지네가 힘 없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살던 두 딸이 시골에 산골짜기가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다.
3) 난방을 하지 않는 성도들(사택을 가장 좋은 집으로, 성도들은 작은 집)
하동으로 내려와서 성도들의 집을 심방하기 시작했다. 주일날 미리 광고를 하고 날짜별로 성도님들의 집을 심방을 했다. 미리 예배상을 준비하고, 간식을 준비해서 우리 부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심방을 하면서 언제 우리 마을에 이사를 왔는지, 언제 한센병이 발병을 했는지, 소록도나 애양원, 상애원 등등에 언제 갔는지 등등을 물어보았다.
전교인 심방이 끝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가끔 성도님들의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안 온도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기름을 아끼려고 차갑게 살다가, 목사가 심방을 온다고 실내온도를 따뜻하게 하려고 하루 종일 보일러를 켰던 것이다. 방을 따뜻하게 한 것은 심방 오는 목사를 맞이하려는 성도들의 사랑의 온기였다. 불시에 심방을 가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지난 해에 정부보조로 집집마다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했다. 감사하게 사택에도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해 주었다. 사택은 슬라브집이라 여름이면 새벽에도 30도가 넘어서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후부터 에어컨을 커는 부담이 적어졌다.
요즈음도 가끔씩 성도님들의 집을 심방한다. 태양광발전소가 설치되기 전에는 에어컨이 장식용처럼 달려있었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서 커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세 걱정하지 말고, 에어컨을 열심히 키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런데도 연세가 많이 드신 성도님들은 가난할 때부터 절약이 몸에 베어서 그런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만 에어컨을 사용하신다.
성도님들 집은 방 두칸, 좁은 주방, 옛날 스테트로 지은 집에서 대부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목사의 사택은 30평의 큰 집이었다. 자신들은 좁은 집에서 살더라도 사택 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지었다고 한다.
목회자를 잘 섬기려는 모습들을 통해서 더욱 열심히 목회를 하고,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겨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3 우리 교회도 작은 교회인데요.........
1) 패배주의를 극복하라
우리나라의 시골교회들 그리고 도시에 있는 수많은 개척교회들의 공통된 고민이 우리 교회는 언젠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일 것이다. 한센인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대부분 교회존립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게 된다. 특히 88올림픽이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좋아지면서 새롭게 한센병이 발병하지 않고 있다. 현재 한센인으로 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 88올림픽 이전에 발병한 분들이다. 그러다 보니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 고령화가 되고 있다. 고령이 된 한센인 성도들이 돌아가시면서 일반교회보다 빠르게 성도들의 자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교회존립에 대해서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10명은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 2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보고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으로 보고한 정탐꾼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긍정적인 보고보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들의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하게 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듣는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른 반응을 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거인인 아낙자손의 후손들을 보면서 두려워했다. 그들의 부정적인 마음과 보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을 갖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거인들의 후손이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들 중에 작은 교회 중의 한 곳이다. 예전부터 갖은 교회였기 때문에 도움을 받으면서 교회가 유지가 되고 있었다. 작은 교회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 등등의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런 마음들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작은 교회를 섬겨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작은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일이 더욱 귀하다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말들을 많이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예전에도 많이 해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이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의 머리에 실패의 DNA가 심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언가 모순이다. 안 된다고 말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우리는 패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하면 된다고 외치고, 도전하는 것이다. 해보자고 서로 격려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받던 습관을 버리라(이전 것을 버리게 하라)
우리나라에 한센인이 많을 때는 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교회도 140곳 정도 있었다고 한다. 한센인 마을이 도시화가 되면서 보상을 받고,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해체가 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한센인교회가 70곳 정도 있다.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 중 한 곳이다. 교회가 자립을 하고 싶어도 성도들이 많지 않고, 각 가정들도 경제력이 좋지가 않아서 자립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외부교회의 보조를 받지 않고는 교회가 목회자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저자가 부임하기 전에는 많은 교회에서 후원을 받아서 교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외부로부터 후원을 받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보다 어려운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이고, 30여명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자립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정부에서 주는 4, 50만원의 생계비로 생활하는 성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회가 자립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교회가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는 교회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62년도에 교회가 세워진 후부터 수십년 동안 외부의 후원에 의지하며 교회를 유지해왔던 교회가 자립을 하고, 우리보다 약한 교회를 돕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 부임한 후부터 시작한 일이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기를 강조했다.
받던 습관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어야 한다. 지금까지 받던 습관을 버려야 새로운 습관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을 수 있도록 소망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선포했다.
성경 사도행전20:35절에 “.....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저자가 우리 교회에 와서 가장 많이 가르치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주는 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많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주는 교회가 되자고 선포하고, 함께 기도한 것이다.
2008년에 교회에 부임한 후 외부후원금을 받지 않고 있다. 장년 성도 30여명중 경제활동을 하는 분들이 몇 분 안되지만, 기도하면서 과감히 자립을 선포했다. 감사한 것은 경제활동을 하는 몇 분의 성도님들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교회의 재정이 해마다 늘어나게 되었다.
2009년부터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선교헌금을 하기 시작했다. 작은 교회이지만, 이제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자고 선포하면서 선교헌금을 드리기 시작했다. 몇 곳의 선교지에 헌금을 보내면서 매주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3) 새로운 비전을 꿈꾸게 하라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가? 약한 교회인가의 기준은 건물이나, 성도의 숫자나, 헌금의 액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큰 교회를 섬기는 것보다 어려운 일들이 훨씬 많이 있다.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이사를 하게 되면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를 먼저 찾아간다. 작은 교회에서는 열심히 전도해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 중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작은 교회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5 어린이에게 양보한 주일 오전11시
1) 생각을 바꾸라
우리 교회가 결정한 일들 중에 가장 잘 한 일을 꼽으라고 한다면 오전11시를 어린이에게 양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 교회의 주일어린이 예배시간은 오전9시30분이고, 어른 예배가 오전11시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어린이 예배와 어른 예배시간을 바꾸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몇 가지를 꼽아보려고 한다. 첫째는 어린이가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하면서 주일예배의 가장 편한 시간을 어른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저자는 당회를 하고, 제직회를 하면서 오전11시를 우리 교회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에게 양보를 하자고 주장을 했다. 감사하게도 성도님들이 흔쾌히 찬성을 하셔서 어린이와 어른 예배시간을 바꾸어드리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요즈음 어린이들이 학교와 학원에 시달리느라 평소에 늦게 귀가를 한다. 피곤해서 늦잠을 자면서 주일어린이 예배시간에 빠지는 어린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은 오전11시에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결석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부모님이 먼저 예배를 드리러 온다. 어린이들은 11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스스로 교회에 나온다.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늦었다고 재촉을 하거나, 야단을 치면서 교회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
어른 예배시간과 어린이 예배시간을 바꾸면서 교회학교 학부모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어린이들을 교회에 보내려면 짜증을 내거나,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른 예배시간을 먼저 드리면서 부모님들이 어린이 없이 먼저 주일예배를 편하게 드릴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어린이들도 부모님이 억지로 교회에 보내는 일이 적어져서 교회에 오는 시간이 즐겁다고 한다. 고학년 어린이들이 동생을 챙겨서 11시까지 예배에 참석하면서 동생을 잘 돌보게 되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른 예배시간과 어린이 예배시간을 바꿀 때 도시교회, 특히 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분들은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교회는 상황이 가능하다면 교회학교 선생님들이 오전9시30분에 1부 예배로 드리고, 오전11시에는 어른 예배와 어린이 예배를 각각의 장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교회를 사례로 드릴 때 힘들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 되는 일은 없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면 가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조차 어렵게 된다.
교회학교 활성화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이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2) 가장 중요한 것을 나누라
우리 교회는 어린이교육에 많이 투자를 하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행사나 일정을 어린이에게 맞추고 있다.
어른들이 가장 중요한 시간을 내어줌으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인정을 받고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주면서도 더 못주어서 미안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대부분 부모들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 교회는 가장 좋은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마음들이 어린이들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교회는 1962년도에 창립이 되었지만,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대부분 마을과 교회를 떠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상태로 10년 정도 지난다면 교회의 존폐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앞으로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해도 먼 곳에서도 교회를 지킬 수 있도록 주인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바로 어린이들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의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작은 교회들, 특히 시골교회의 대부분은 10년 정도 지나면 상당수의 교회가 존폐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약해지는 시골 교회를 살릴 수 있을까? 시골은 도시보다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앞으로 시골교회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부터 교회학교 어린들이 우리 교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오전11시를 양보하게 한 것이다.
많은 교회가 다음세대가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 말로 그치는 경향이 있다. 다음세대가 먼 훗날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우리 교회에서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말로만 그치지 말고, 한국 교회의 시스템을 교회학교에 맞추어야 한다. 모든 교회에서 어린이들이 주인공이라는 마음이 들게 한다면 장차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자의 교회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교회학교에 오전11시를 내어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요즈음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왜 어른보다 어린이들에게 잘 해주냐고 말하는 성도들도 있다. 그럴 때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어른들이 희생을 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리면 대부분 수긍을 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는 사람이 주인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각각의 사정과 상황이 다를 것이다. 저자가 주일오전예배를 실례로 든 것은 말 그대로 한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각 교회에서 어린이과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이 가장 중요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우리 교회는 소망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저자가 섬기는 하동동산교회를 모델교회로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주일예배의 시간을 양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을 양보할 수 없는 교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어른 성도님들이 어린이들과 교회학교를 말로만 소중하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교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도록 반겨주고, 환영하고, 사랑해라. 한국 교회가 그렇게 한다면 마이너스 성장에서 다시금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행동이 있어야 한다
말도 중요하지만, 행동도 중요하다. 말로만 중요하다고 말하지 말라
다음세대가 주인공(미래를 준비하라)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줄어든다고 직접적인 말을 하는 대신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장년부보다 교회학교는 심각한 상황이다. 예전에는 가득차던 교회학교 예배실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
각 교단별로 다음세대가 중요하다고 말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학교 학생들을 다시 교회로 향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많은 목사님들이 “다음세대가 주인공이다!”고 말씀을 하신다. 주인공이라면 주인공의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주인공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4년 전부터 교회학교 학생들이 교회의 주인공이라는 구호와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교회학교를 위해서 두 분의 장로님들이 교사로 섬기고 있다. 각종 행사를 교회학교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다.
6 예배를 준비하라
1) 1시간 전에 나오는 성도들
우리 교회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예배시간이 시작되기 30분 전에 성도님들 대부분이 나와서 기도하며 찬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맞이하는 첫 주일 예배는 잊을 수가 없다.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30분 전에 예배당으로 나갔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미 와서 기도하고 있었다. 수도권에서 목회를 할 때 보통 10분 전, 빠르면 20분 전에 예배를 준비하며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30분 전에 기도로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나갔던 것이다.
다음 주일은 성도들보다 먼저 나가서 예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1시간 전에 예배당에 나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벌써 많은 성도님들이 나와서 기도로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권에서 일반교회를 목회할 때와 한센인교회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예배에 대한 사모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배에 대한 열정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배는 열심히 드리면서 패배주의에 빠져서 사는 것이다. 열심히 예배생활을 하면 패배주의도 극복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배와 삶의 불균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인 것은 예배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교회보다 예배참여율도 좋고, 마을 자체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많은 차이점을 느끼게 되었다.
2)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하라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찬양을 부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오전과 오후예배 그리고 수요일예배를 드리기 30분 전부터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약 30분 정도 찬송을 부르면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며 찬송을 부를 때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교회에 나와있습니다. 요즈음 일반 교회는 30분 전에 나오는 성도님들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30분 전에 나와서 기도로 준비하고, 찬양으로 예배를 준비합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필자는 성도님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빨리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상식이겠지만, 요즈음 교회가 그런 모습들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30분 전에 대부분의 성도들이 나와서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두 번째로 놀랐던 것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처음 부임해서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서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첫 찬양이 끝나자 한 성도님이 몇 장을 부르자고 말을 했습니다. 다음 찬양을 하고 나서 다른 성도님이 또 다른 찬양을 하자고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교회는 예배를 준비하며 찬양할 때 성도님들이 희망 찬송을 미리 준비해서 함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한 은퇴장로님은 양손의 손가락이 대부분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 장로님은 찬송을 부르는데 박수를 치쳐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손가락이 구부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십니다. 언젠가 필자도 장로님을 따라서 박수를 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손가락 마디가 부딪힐 때에 너무 아팠습니다. 언젠가 장로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박수칠 때 손가락 마디가 부딪히면 아프지 않나요?” 그러자 장로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박수를 치면 손가락 마디가 아프지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손가락 마디가 조금 아프더라도 박수를 치면서 찬송을 해야지요!” 장로님과 대화하면서 지금까지 찬송을 부를 때 어떤 마음으로 박수를 치면서 찬양을 드렸는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3)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
한센인성도님들은 세상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었던 분들이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받을 수 있을까?
언젠가 성도님 집을 심방 가서 옛날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성도님은 수십년 된 이야기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듯 얼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7 다문화가정을 전도하라
1) 다문화가정은 전도의 황금어장(친정나들이 보내기)
2008년 11월 교회에 부임을 했을 때 두 분의 다문화가정 성도님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성도님은 6월에 한국에 왔다고 했다. 주일예배 후에 다문화 성도님을 찾아갔다. 우리나라 말을 못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고, 음식과 기후와 환경 등 낯설은 곳에서 사는 너무 아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긴장한 모습으로 우리 부부를 경계하는 듯 보였다. 한국생활과 신앙생활을 도우려고 찾아갔는데, 첫 만남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핬다. 그 후에도 몇차례 찾아가면서 서서히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룻기에 나오는 룻의 모습이 떠올랐다. 흉년이 들자 재산을 팔아서 모압으로 갔던 엘리멜렉의 가정이 있었다. 모압에서 엘리멜렉이 죽은 후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했다. 모압에 거주한지 10년쯤에 두 아들이 죽게 되었다. 설상가상 가지고 갔던 재산도 모두 없어졌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며느리 룻과 함께 돌아왔다.
룻이 이곳까지 온 것은 이스라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들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룻도 베들레헴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룻은 절대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며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룻은 이방인이었다. 룻이 강력하게 결심을 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눈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언어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문화와 종교도 다른 곳에서 시어머니를 봉양해야만 했다. 더구나 재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다. 한마디로 앞이 캄캄한 상태였다. 그런데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들판으로 나갔다. 하나님은 룻을 위해 보아스를 예비해주셨다. 보아스가 룻을 돌봐주도록 하면서 룻은 보아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 다문화가정 두 성도님도 남편을 따라서 낯설고, 물설은 대한민국으로 시집을 온 것이다. 그 당시는 모든 사람을 경계하고 있어서 도와주기도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지방자치단체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해서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곳에 열심히 다니면서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말이 조금씩 통하게 되었다.
두 성도님은 주일날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후에 식사하면서 성도님들과 친해졌고, 성도님들도 두 성도님이 한국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떻게 하면 다문화 성도님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문화 성도님들이 많은 돈이 들어서 친정을 다녀오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서 다문화가정 친정보내기 행사를 하게 되었다. 요즘은 다문화가정에서 친정가기가 쉬워졌지만, 10년이 넘어도 친정을 다녀오지 못하는 가정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장로님들과 의논한 결과 친정에 다녀올 수 있도록 교회에서 돕기로 했다.
친정에 다녀온 후 두 성도님은 훨씬 얼굴빛도 밝아졌고, 가정생활과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예배시간에 교회에서 준비한 금일봉을 주면서 친정부모님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부탁을 했다. 전교인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를 해주었다. 성도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금일봉을 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요즘은 친정의 부모님과 형제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한 분의 선교사님을 파송하기 위해서 1년에 수천만원의 선교헌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다문화가정의 성도님들은 준비된 선교사이다. 다문화가정은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우리 교회는 연세 드신 성도님들이 신앙생활하는 고령화되는 교회였다. 십여년 정도 지나면 교회의 존폐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교회였다. 그런데 다문화 성도 4가정이 신앙생활하면서 교회가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었다. 장년 성도가 30명인데, 교회학교 어린이가 9명이 되었다. 십여년 전에 없어졌던 교회학교예배를 다시 드리게 되었다. 다문화가정이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2) 지인을 통하라(결혼정보회사보다 지인소개)
우리 교회에 다문화 성도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간혹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다문화 아내를 얻을 수 있느냐? 그러면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 처음부터 좋은 아내는 없다. 내가 잘 해주면 상대방도 잘 해주고, 내가 잘 못해주면 상대방도 잘 안 할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11년 목회를 하면서 다문화 가정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노총각이 있는데 좋은 여자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곤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소개해주는 분들보다 마을 주변에 외국에서 시집을 온 다문화 여성이 있다면 잘 살펴보라. 특히 시집을 온지 5년 이상 되었는데, 결혼생활과 시댁과의 생활을 잘 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런 분들의 가족이나, 친척을 소개받으면 실패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100% 맞는 것은 아니지만, 11년 목회를 하면서 옆에서 다문화 가정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남편과 시부모님을 잘 모시는 분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많은 경우 비슷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고, 특히 가족이나 친척이 잘 살고 있으면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뒤에 오는 여성도 잘 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이 된다.
저자가 이 부분을 쓰는 이유는 요즈음 한국 교회에 결혼을 하지 못하는 노총각들 중에 다문화 여성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저자는 다문화 가정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교회가 지리산 골짜기에 있지만, 젊은 성도들과 교회학교가 생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다문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때문이다.
주일날 어른 예배와 어린이 예배에 다문화 성도와 어린이들이 오면 최대한 환영해주려고 한다.
3) 부부성경공부(신앙+한국생활정착을 도우라)
다문화가정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도 잘하고, 부부생활, 가정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EBS에서 하는 “다문화고부열전”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될 때 마다 “다문화고부열전”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다문화가정의 문제점과 해결점을 알게 되었다.
다문화가정이 잘 살아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주일 저녁 시간에 부부성경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성경공부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모임을 하면서 그리고 “다문화고부열전”을 보면서 가정생활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공부와 생활교육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생활교육은 시부모님과의 관계, 부부와의 관계, 친척들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요즈음은 네 가정의 다문화부부가 참여하고 있다.
성도들이 행복하게 하라.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신앙생활도 열심을 낸다. 그러려면 믿음이 바로 들어가야 한다.
8 선교하는 교회
1)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 중에 작은 교회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헌금보다 기도가 먼저이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물질도 주신다. 기도하다보면 헌금도 할 수 있다.
총회 세계선교부 강사로 선교사훈련에서 강의하면서 많은 선교사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선교하면서 선교헌금후원자를 모집하는 만큼 기도의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는가? 선교헌금은 후원을 하지 못해도 기도라도 해줄 수 있는 후원자를 모집하고 있느냐?
그런데 정작 기도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서도 말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교헌금 후원자는 카드를 받고, 작정을 하게 하지만, 정작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기도후원자 카드를 받지 않고 있다.
선교사님들께서 선교보고를 하면서 기도제목을 보내온다. 그런데 선교보고의 많은 부분은 후원받은 제정으로 어떤 사역들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하려는 사역을 위해서 기도해줄 것과 지속적인 후원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물론 기도제목도 보내오고 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만 해주는 교회도 필요하다. 작은 교회들이 선교헌금을 보내지 못해도 중보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셔서 선교헌금을 보낼 수 있는 재정을 주시기도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역사를 보면 독노회를 결성하면서, 총회를 결성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2) 주는 교회가 되자
지금까지 우리 교회만큼 외부의 후원으로 건물을 많이 지은 교회도 없을 것이다. 예배당, 교육관, 사택 두 채 등 외부의 지원을 받아서 건축을 했다. 물론 우리 교회는 한센인교회였고,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자체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부임하면서 외부의 후원금도 없어지고, 자체적인 자립을 하기 위해서 강력하게 선포를 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주는 교회가 되자!”, “더 이상 받는 교회가 되지 말고 주는 교회가 되자!”
주는 교회로 전환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1962년도에 교회를 창립한 이래 저자가 부임할 때까지 외부의 후원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목회자 생활비를 드렸던 교회였다. 저자가 부임해서 주는 교회가 되자고 하자 당장 장로님들이 반대를 했다. 교회의 살림을 책임져야 할 장로님들은 교회의 상황과 성도들의 경제형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장로님들과 성도들을 설득을 했다. 한 가정에서 월 2천원 정도는 선교헌금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면서 예배시간에 광고를 했다. 다음주부터 자원하는 성도들은 선교헌금을 하면 된다고 하자 성도들이 동참하기 시작했다. 감사한 일은 2천원을 하는 성도들은 지금까지 한 분도 없었다. 그때부터 선교헌금을 최소 1만원에서 10만원을 하고 있다. 모든 성도들이 놀라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선교헌금을 하면서 매년 교회의 재정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자체 헌금보다 외부헌금으로 유지되던 교회였다. 그런데 선교헌금을 하면서 외부헌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우리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채워지고 있었다. 더욱 감사한 일은 해마다 헌금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주는 교회로 전환하면서 매년 선교사님들에게 선교헌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선교사님들 중에 잠시 귀국하는 분들을 교회에 초청하고 있다.
3) 선교하는 교회(정홍기 장로님 음악선교)
우리 교회 장로님 중에 한 분이 10여년 동안 섹소폰을 배워서 주일예배 시간에 특송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양원이나, 작은 교회를 다니면서 음악선교를 하고 있다.
감사한 일은 장로님이 해외선교에도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0여년 동안 매년 음악선교를 위해서 해외를 다녀오고 있다. 우리 교회에서도 장로님의 음악선교를 후원하고, 선교지에 섹소폰도 구입해드리고 있다.
9. 한센인 사역을 한 롤 모델이 된 선교사와 목회자들
저자가 한센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도움을 받은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있다. 애양원, 상애원, 애락원 등에서 사역을 했던 많은 선교사님들과 소록도에서 사역을 했던 일본인 목회자들 그리고 140여 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한국의 목회자들이 있다. 많은 분들 중에서 롤모델로 삼은 서양 선교사님 한 분과 일본인 목회자 부부 그리고 우리나라 목사님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1) 윌슨 선교사님
윌슨 선교사님은 광주제중원에서 의료선교사역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센인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한 사건이 윌슨 선교사님의 사역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게 했다.
오웬 선교사님이 전라도지역에서 쉬지 않고 사역을 하다가 급성폐렴이 걸리게 되었다. 선교부는 목포에서 사역하는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소식을 전해서 빨리 광주로 오도록 했다. 포사이드 선교사님을 부른 이유는 그의 의술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포사이드가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오웬 선교사님은 돌아가셨다. 그러나 포사이드 선교사님이 광주로 오는 도중에 한센인 여성 한 분을 데리고 왔다. 이 여인도 2주 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윌슨 선교사님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었다. 오웬 선교사님과 한센인 여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포사이드 선교사도 목포로 떠났다. 광주에는 윌슨 선교사님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이 한센인 여성을 치료해 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한센인들이 광주제중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이 제중원으로 몰려들자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제중원에서 한센인과 함께 치료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정과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센인들을 내쫓을 수도 없고, 광주에서 사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때 하나님께서 최흥종 청년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부모님께 유산으로 받은 봉선리 땅 1,000평을 한센인치료를 위해서 기부를 했다. 이곳에 한센인을 위한 치료소를 짓고, 치료해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다.
윌슨 선교사님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한센인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광주에 몰려드는 한센인들이 많아지게 되자 윌슨의 마음은 복잡해지게 되었다. 봉선리로 몰려드는 한센인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광주에 사는 사람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때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많은 한센인이 살 수 있는 넓은 땅이 필요했다. 그 당시는 한센인들을 치료만 해주었지만, 앞으로 한센인들이 모여서 살면서 정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다. 1926년에 전남 여수시의 현재 애양원 위치를 본 후 마음에 들어한 윌슨 선교사님은 정착지를 여수로 결정하게 되었다.
광주로부터 여수로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광주는 한센인의 치료위주로 사역을 했다면, 여수에서는 치료 뿐아니라 생활을 할 수 있는 정착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한센인 중에 건강 상태가 양호한 분들에게는 목수가 되도록 건축기술을 가르쳤다. 건강이 약한 분들에게는 양계기술을 가르쳐주었다. 한때 우리나라의 계란의 20% 정도가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나올 정도로 여수애양원을 비롯한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양계사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윌슨 선교사님은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인 치료와 철저한 신앙생활 그리고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서 신앙적으로, 경제적으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중국에서 실패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센인 사역을 했던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성공을 하게 되었다.
네비우스 선교사가 주장했던 자립, 자치, 자전의 정신이 가장 먼저 실현된 곳이 바로 한센인 정착마을이었다. 선교사님들로부터 철저한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으로 훈련을 받은 한센인 교회들은 여수, 부산, 대구를 중심으로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오늘날도 많은 한센인교회들과 한센총연합회, IDEA협회 등 한센인들이 세운 단체들이 해외선교에 앞장서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님들을 돕고 있다.
2) 다나까 목사님과 시오자키 사모님
일본 목회자로서 최초의 선교사인 노리마쯔 마사야스는 조선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1896년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조선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1896년 12월23일이었다. 노리마쯔는 일본의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였다. 일본의 최초 해외선교사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노리마쯔의 선교사역은 일본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중에 한 명이 다나까 목사님이다. 그는 동양선교회 소속의 목회자로서 전남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소록도의 원장이었던 하나이 원장이 다나까 목사님에게 소록도에서 사역을 할 것을 요청을 했다. 다나까 목사님은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하나이 원자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이 있는 한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당장 소록도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한센인 선교는 서양선교사님들의 고유한 사역과도 같았다. 광주의 애양원에서 윌슨 선교사님이, 부산의 상애원에서 매견시 선교사님이, 대구의 애락원에서 플렛처 선교사님이 한센인 사역을 하고 있었다. 서양선교사님들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한센인들을 치료해주자 조선인의 민심이 선교사님들께 향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을 한 일본은 조선인의 민심을 붙잡기 위해서 조선총독부에서도 소록도를 만들어서 한센인들을 잘 돌본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나 소록도에서는 일본인 관리들에 의해서 한센인이 복지나 치료보다는 탄압과 억압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나까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록도로 들어온 것이다.
다나까 목사님이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들에게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도 많은 일들을 해야 했다. 한센인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목회사역도 필요했지만, 일본어도 가르쳐야 하고, 병자들을 심방도 해야하는데 혼자서 모든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을 너무 벅찬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조선의 한센인들을 위한 이상촌건설에 대한 비전을 품고 조선으로 온 시오자키 자매가 있었다. 다나까 목사님은 시오자키 자매를 만나서 서로의 사역과 비전을 나누던 중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오자키가 다나까 목사님의 사역을 돕기 시작하면서 소록도는 영적으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다나까 목사님과 시오자키 사모님이 대단한 것은 소록도에서는 한센인들의 병이 심각한 상태에서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센인 목회를 하면서 그들을 심방하고, 기도해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3) 최흥종 목사님
우리나라 사람으로 한센인 사역을 했던 최초의 목회자는 최흥종 목사님이다. 최흥종 목사님은 광주에서 쇠망치라는 이름의 깡패였지만, 김윤수 집사님과 오웬 선교사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세례를 받은 후 최영종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최흥종으로 개명을 했다.
1909년에 오웬 선교사님이 위독할 때 목포에서 사역하던 포사이드 선교사가 치료하기 위해서 올라올 때 김윤수 집사님과 마중을 나갔다. 포사이드 선교사님이 한센인 여성을 자신의 말에 태우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이 일로 인해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봉선리 땅 1,000평을 광주선교부에 기부를 했다. 이곳에서 한센인치료를 했고, 애양원이 이곳에서 시작이 되었다. 최흥종 청년은 한센인을 치료하는 윌슨 선교사를 도와서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1912년에 북문안교회에서 초대 장로가 된 최흥종은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 광주 북문밖교회, 남문밖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광주중앙교회 등에서 목회를 했다.
최흥종 목사님은 일반목회를 하면서도 청년시절 때 선교사님들이 한센인사역을 하는 것을 본 후 지속적으로 한센인을 돕는 일을 했다.
1933년에는 한센인의 치료와 갱생을 위해서 총독과 단판을 짓기 위해서 한센인 500여명을 데리고 총독부까지 행진을 했다. 최흥종 목사님은 우가끼 총독과 면담을 해서 한센인의 치료와 갱생을 위한 약속을 받아냈다.
최흥종 목사님은 나주에 주변에서 살고 있던 한센인들을 위해서 호혜원이라는 한센인 공동체 마을과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한센인 하면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보타 18살 많은 최흥종 목사님이 먼저 한센인 사역을 하셨다. 최흥종 목사님은 한센인의 신앙과 인권을 위해서 헌신했던 분이었다. 최흥종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광주에 사는 수많은 한센인들이 울면서 슬픔을 나누었다고 한다. 최흥종 목사님은 한센인의 아버지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