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이라는 미국의 최고 명문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마친 이승만은 나라가 망한 경술년인 1910년 9월 3일 뉴욕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대영제국의 리버풀을 거처 런던 파리 베를린을 경유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당시 모스크바는 로마노프 왕조의 니콜라이 2세가 다스리고 있던 때로 1328년 세워진 나라는 그 마지막을 고하고 있었다. 로마노프라는 성은 로마 유레프에서 따온 말로 1598년 니카타의 손자 로마노프를 차르 즉 황제로 선출하여 시작된 왕조였다. 1762년 엘리자베타가 보위에 오름으로 남자 계보가 끊어졌으나 로마노프라는 이름은 표트로 3세 즉 우리말로 베드로 3세를 배출한 홀슈타인 고토르가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때는 1910년 이었으니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망하기 7년전이었다. 볼세비키는 레닌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공산주의자들로 이는 다수라는 뜻의 말이다. 이 말의 반대는 소수파라는 멘세비키였다. 저들은 1917년 10월 혁명 후 로마노프 왕조를 접수 사회혁명당인 좌파외에 모두 숙청하여 러시아를 공산화 시켰던 것이다. 이승만은 아마도 이 당시 석양의 로마노프 왕조를 보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만주를 거처 귀국했던 것이다. 이승만의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은 지난 2012년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었다. 일명 이승만 기념강의실(The Synfzaan Rhee lecture Hall)이었다. 이 강의실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동판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로 12년에 걸쳐야 마치는 과정을 5년만에 마친 이승만은 뛰어난 수재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되어 특히 서양사에다 정치학 국제법은 물론이고 외교론 등 최고의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최고의 석학이 된 것이다. 미국인 보다 미국 역사와 정치를 더 잘아는 이승만에게 저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이런 이승만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귀국과 함께 YMCA의 학감에 취임한다. YMCA는 1844년 6월 6일 영국런던에서 청년 12명이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의 지도하에서 탄생한 단체로 당시 뉴욕에 그 본부를 두고 있었다 당시 YMCA 국제위원회는 이승만에게 황성 기독교 청년회의 청년학관 학감으로 임명한다. 당시 이승만은 월 75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만국 공법과 세계사와 성경을 가르친다. 당시 이승만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이원순 허정 정구영 안재홍 이한호 임병직 등이었다. 임병직은 후일 그의 비서 역할을 한 인물이었고 저들 제자들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구국의 동량들로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인물들이다. 나라는 일제에 의하여 519년의 사직이 사망을 고한 나라 패망한지 6일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되어 감시의 대상이 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식민지를 악하게 지배한 것으로 평가되는 왜놈들의 조선 총독부는 12월 일제시대 민족지사를 탄압한 3대 사건 중 하나인 105인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여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살해하기 위해 음모했다는 것으로 민족 지사 105인을 검속한 사건이라 역사는 105인 사건으로 부른다. 역사는 해서 교육 총회사건 경북 의성 동우회 사건까지 합처 일제의 민족지사를 탄압한 3대사건 으로 부른다. 어찌 저들 간악한 일제가 세 번뿐이겠는가 저들은 무단정치로 수도없는 민족지사들을 협박 투옥시켰고 회유하여 변절자들이 되게 하는 등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자들이었다. 저들 일제는 무너뜨린 조선의 영구 지배라는 목표하에서 민족의 희망의 싹을 자르기 위하여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이 목사 장로 집사들이었으니 이사건은 교회 핍박과 그 궤적을 같이 한다. 사실 105인 사건에서 저들이 표적으로 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YMCA의 국제위원장인 존 모트가 강력히 항의하여 체포를 면한다. 존모트가 누구인가. 저는 미국 역사를 바꾼 학생자원운동(SVM)의 주역으로 이는 미국 메사츠세츠 주 노스필드의 힐몬 마운틴에서 한달간 개최한 대학생 수련회로 은혜를 체험한 대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된 영적운동으로 미국의 세계 선교운동의 효시로 이어진다. 세계적인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와 피어선 박사가 설립한 이 단체는 세계에 오천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로 존 모트는 저들 후에 이 운동을 지도한 인물로 후일 노벨상 수상자가 된다. 당시 이승만은 존 모트의 보호 아래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세계 감리교대회의 한국 평신도 대표란 명목으로 뽑혀 화를 면한 채 1912년 3월 26일 조국을 떠난다. 조국을 등지고 떠난 그의 길은 이제 해방후에 환국하는 기약없는 처절한 망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