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어전에서 신하가 방귀 뀐 사실도 기록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다가 포복절도할 기사를 보았습니다.
<선조실록> 1601년(선조 34) 3월 25일자인데요. 임금(선조)이 편전에서 왕세자(광해군)가 입시한 가운데 침을 맞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744년 8월 20일자. 영조가 41세 때와 51세 때 그린 초상화를 두고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는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했다. 41세와 51세의 영조 초상화를 비교한 신하들은 “10년 전에 비해 엄청 늙으셨다”는 등 ‘팩폭’을 가한다. 영조는 “아니 경들은 과인에게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무슨 소리야”면서 41세 초상화를 가리키며 “저기도 수염이 있는데 뭘 그러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오른쪽 그림은 연잉군 초상화)
그 자리에는 약방제조 김명원(1534 ~1602), 유근(1549~1627), 윤돈(1551 ~1612) 등이 있었고요. 우리가 잘 아는 허준(1539~1615)과 이공기·김영국(생몰년 미상), 허임(1570~1647) 등 어의와 침의 등도 총출동했죠.
어전에서 감히 방귀를?
그런데 실록 중에 ‘유근’이라는 분의 이름 뒤에 작은 글씨로 쓰인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유근이) 임금의 지척에서 감히 방귀를 뀌었으니(敢發穢聲) 이는 위인이 경솔한 소치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유근이 감히 임금이, 그것도 아파서 침을 맞고 계신 자리에서 방귀(穢聲)를 뀌었다는 겁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갑분싸’였겠으며, 방귀를 뀐 유근 본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 일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자리를 지킨 사관의 붓끝이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조판서와 좌찬성 등을 역임한 유근은 ‘임금 앞에서 감히 방귀를 뀐 인물’로 역사서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유근의 방귀’ 이야기는 실록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TMI’라 할 수도 있습니다.
실록은 어디까지나 편집본이기 때문입니다. 사관이 조정의 모든 행사 및 회의에 참석해 임금과 신하들의 언동과 정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그 잘잘못 등을 기록한 초고가 있죠. 그것이 사초(史草)입니다. 여기에 관청의 공식문서까지 모아 차기 국왕대(조선의 경우)에 편집 정리해 실록을 편찬했습니다.
지금 언론으로 치면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데스크를 거쳐 보도하는 스트레이트, 해설, 논평, 사설 등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방송으로 치면 뉴스 및 다큐멘터리 편집본이겠죠. ‘유근의 방귀’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편집 과정에서 상당 부분 걸러내기 때문에 ‘팩트’에 충실한, 다소 무미건조한 내용을 전하게 마련이죠. 다만 ‘사관의 촌철살인 평가’가 실록의 가치를 한껏 높이는 요소가 됩니다.
<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기자의 취재일지 혹은 영상 촬영본을 일기형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일기이니만큼 매일매일의 날씨까지 빠짐없이 기록해놓았죠.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 어전의 모습을 생중계한 동영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
취재일지와 편집기사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한번 비교해볼까요. <영조실록> 1738년 1월 21일의 기사를 보겠습니다.
“임금이 창덕궁 양정합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 등을 만났는데, 동궁(사도세자)도 있었다. 임금이 동궁에게 ‘글자를 써서 스승들(이광좌 등)에게 주라’고 하자 동궁은 큰 글씨를 써서 주었다.”
무미건조하게 팩트만 전달한 신문의 스트레이트 기사 같죠. 같은 날짜(1월 21일) <승정원일기>는 어떻게 다뤘을까요.
영조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네(사도세자·당시 네 살)가 한번 글씨를 써보라”고 말합니다.
“글씨는 어려워하지 않는데 글 읽는 건 몹시 싫증을 낸단 말이야. 글씨 쓴 종이를 네 스승(이광좌)에게 가져다주어라.”(영조)
이광좌 등은 “동궁이 온화한 모습과 슬기로운 지혜를 갖췄다”고 덕담을 하는데요. 이 자리에서 판중추부사 서명균(1680~1745)이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집니다.
“전하(영조)의 솔선수범만이 동궁을 인도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한데 전하께서는 평소 감정조절을 잘 못 하는 점이 많으니….
우선 성상께서 더욱 힘써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서명균은 겉으로는 자애롭기 그지없는 아버지(영조)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혹 24년 뒤(1762) 일어난 비극(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예감한 것일까요.
조선왕조 기록계의 쌍두마차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실록은 태조(1392)부터 철종(1863)까지 47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했다. 총 888책 4770만자다.
<승정원일기>는 국왕 비서실이 작성한 임금 일기다.
1623년(인조 1)~1910년(융희 4)까지 288년 3245책 2억2650만자가 남아 있다.
“전하 많이 늙으셨습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비교사례를 더 들어볼까요.
<영조실록> 1744년(영조 20) 8월 20일자를 보죠.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1690~1752) 등을 접견하고 어진(임금 초상화) 2폭을 보여주며 ‘이것이 나의 마흔한 살 때를 모사한 것인데, 이 어진의 봉안처를 찾아야겠다’고 말씀하셨다….”
팩트만 전달한 기사죠. 그런데 같은 날짜 <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쉰한 살이 된 영조가 마흔한 살 때 그린 당신의 초상화를 가져와 신하들과 품평회를 열었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백낙천(772~846)의 시에 ‘나이 많은 형이 어린 아우를 마주 대하듯 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이 맞습니다.”(조현명)
“10년 사이에 이렇게 달라졌으니….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구나. 이때만 해도 젊었구나!”(영조)
영조는 대신들에게 “가까이 와서 과인의 어진을 상세히 보라”고 했습니다. 영조는 특히 시력이 좋지 않은 화가 장득만(1684~1764)에게 “안경을 쓰고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두 어진을 살펴보던 장득만이 ‘돌직구’를 날립니다.
“지금의 용안이 옛날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진짜 다르냐”고 되묻자 우의정 조현명이 나서 ‘확인사살’을 합니다.
“크게 다릅니다. 수염과 머리카락은 물론 성상의 안색도 옛날 어진의 모습과 다릅니다.”
임금이 웃으면서 “경들은 늘 나보고 하나도 늙지 않았다고 하더니 지금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그러자 ‘눈치 0점’인 장득만이 임금의 말을 일축해버립니다.
“지금 용안은 수염이 세어 하얗게 변했고, 안색도 많이 좋지 않습니다. 전에는 홍조를 띠고 윤기가 있었는데….”
임금의 마지막 항변이 재미있습니다.
“저기(마흔한 살 때의 어진)에도 흰수염이 있구먼 뭘.(彼猶有鬚白處矣)”
신료들도 참 어지간하지 않습니까. 지존인 임금에게 “전혀 늙지 않으셨다”고 덕담을 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임금의 면전에서 “어찌 그렇게 늙으셨냐”고 했으니 말입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은 “영조가 우의정 조현명 등을 접견하고 어진(임금 초상화) 2폭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내 40세 초상화인데 봉안처를 찾아야겠다’”는 등의 간략한 내용만 담고 있다.
기자의 촌철살인 논평
인용한 사례를 보면 <실록>이 <승정원일기>보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느끼죠. 그러나 <실록>에는 <승정원일기>가 담아내지 못한 특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자(사관)가 촌철살인으로 달아놓는 평론인데요.
<선조실록> 1598년 11월 27일자를 봅시다. 좌의정 이덕형(1561~1613)이 8일 전(19일) 벌어진 이순신 장군(1545~1598)의 노량해전 전공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실록의 사관이 사론을 달아 장군의 최후를 생생한 필치로 전합니다.
“기습작전 중 몸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니…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했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
사관의 평론 덕분에 이순신의 장렬한 최후를 공식자료를 통해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율곡 이이(1536~1584)의 혜안도 그렇습니다. 이이가 죽자 <선조실록>의 사관은
“나라에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알고는 늘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면서 “
임진란이 일어나니 이이의 염려가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상기시킨 거죠.
기록에 한 맺힌 사람들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차이를 좀 느끼셨죠.
<실록>은 888책 4770만자가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사고 4~5곳에 분산 보관했고,
임진왜란 중 포의의 선비인 안의(1529~1596)·손홍록(1537~1600) 등이 목숨을 걸고 지킨 덕분이죠.
반면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1592~1598)과 이괄의 난(1624), 화재(1744·1888)를 거치며 상당 부분 소실됐습니다.
288년(1623년 인조 1~1910년 융희 4년)의 기록만 남아 있는데요.
그럼에도 옛책 기준으로 3245책 2억2650만자나 됩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은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에 견주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입니다.
<실록>은 예문관 소속 봉교(7품) 2명·대교(8품) 2명·검열(9급) 4명 등 8명이,
<승정원일기>는 주서(7품) 2명이 불철주야 써내려간 기록물을 정리·편찬한 것입니다.
하급관리들의 분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죠. 지금의 국무회의 기록물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등록>(1617 ~1892·273책)과
정조(1776~1800)가 세손시절(1760·영조 36)부터 기록한 <일성록>(2379책)까지….
꼭 기록에 한 맺힌 사람들 같죠.
사도세자가 어릴 때 쓴 글씨들. 나름 필획이 바르고 크며 위엄이 느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의 <실록> <승정원일기> 번역은 어떤가
1993년 번역 작업을 끝낸 <실록>의 경우 데이터베이스(DB) 구축도 마쳐 누구나 온라인에서 검색할 수 있는데요.
<승정원일기>는 어떨까요.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실장은 “전체 2395책(요즘 기준의 책분량) 가운데 32%(774여책) 정도 번역했다”고 밝혔습니다.
요즘처럼 80여명을 투입해 매해 60책 정도 번역한다면 대략 2048년이면 끝낼 수 있다네요.
지난해(2021년) 4월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한문자동번역서비스를 시작했는데요.
단어와 구문을 쪼개 번역했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문장을 통째로 파악해 번역하는 최신 기술을 도입했답니다.
지금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 가운데 <승정원일기>의 원문 중 필요한 부분을 따서 입력하면 자동으로 번역됩니다.
지난 2017년 당시 한국고전번역원 등 관계기관이 발표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문번역과 인공지능 번역의 차이점을 기사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엔 ‘육십(60)하고도 여섯 살 더 먹은 나이(今六十有六矣)’라는 표현을, 인공지능 번역기는 ‘앞의 60(六十)만 읽고, 뒤의 육(有六)’은 그냥 넘겨 예순 살로 잘못 읽었습니다. 또 ‘거의’로 읽어야 할 단어(恰)를 ‘겨우’라 한 표현도 있고요.
이밖에 ‘거의 쉬는 달도 없이(殆無虛月)’를 인공지능은 ‘거의 없는 달이 없어’로 잘못 표현했었는데요.
또 ‘죽을 지경에 놓인 목숨을 연명하게 해주소서(?延濱死之喘)’라는 청유형 문장을 ‘거의 죽게 된 목숨을 연장하게 해야 합니다’는 당위형 표현으로 잘못 번역했고요.
제가 지난해 4월 개통된 한국고전번역원의 자동번역기에 5년 전에 비교 검토했던 ‘승정원일기’ 기사를 입력해봤는데요.
상당 부분 개선됐더라고요. ‘60세’로 잘못 읽었던 것을 ‘66세’로, ‘목숨을 연명하게 해야 합니다’를 ‘목숨을 연명하게 하옵소서’로, ‘포도청 죄인 호린’을 ‘포도청 박호랑’이라고 정확히 고쳐 읽었더라고요. 물론 여전히 어색한 표현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 자동번역기를 돌려보면 일반인이 보기에는 나름 그럴듯합니다. 인공지능도 ‘미천한 신의 나이’를 뜻하는 ‘견마지치(犬馬之齒)’와 승정원을 가리키는 ‘후설(喉舌)’ 등과 같은 관용어는 파악하게 됐고요.
그러나 고전번역은 디테일이 생명이죠. 원전번역이 틀리면 역사가 왜곡되는 것이라 한치의 오류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정영미 실장은 “복잡한 맥락과 배경 사건 등은 인공지능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불과 몇년 전, 인간이 인공지능 ‘알파고’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한 바둑의 사례가 있죠. 경우의 수가 우주의 원자수보다 많고 인간이 5000년 이상 터득해온 바둑의 진리를 ‘알파고’가 이길 수 없다고 큰소리쳤죠.
그러나 결과는 어찌 됐습니까. 망신만 당했죠. 그렇다면 인공지능 번역은 어떨까요. 저는 인공지능 번역기가 제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옛사람의 붓 흔적과 체취를 찾아내고 맡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 냄새 나는 번역, 그것은 인공지능이 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초책과 붓을 들고 임금과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주알고주알 기록한 젊은 사관들의 분투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