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Ⅲ부 정통선의 향훈
마음의 성품 (2)
- 유식삼성(唯識三性)
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정유리무(情有理無)
二. 의타기성(依他起性) : 여환가유(如幻假有)
三. 원성실성(圓成實性) : 정무리유(情無理有)ㆍ진여(眞如)ㆍ
진공묘유(眞空妙有)
[- 이 삼성(三性)으로써 비공비유(非空非有)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함]
일체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유심(唯心)이나 유식(唯識)은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조금 차이 나게 풀이가 됩니다만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의 성품에
여러 가지 구분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만,
우선 간추리면 삼성(三性)이라,
세 가지 성품으로 줄여서 말씀합니다.
이런 법문은 불교 전반적으로도 되어 있으나
불교심리학인 유식론(唯識論)에서 말씀하는 법문입니다.
맨 처음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우리 중생은 절대로 바로 못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바로 못 보는 견해를 옳다고 생각해서
고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중생의 습기(習氣)가 되어 버렸습니다.
‘내 견해가 절대로 옳지가 않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무지(無知)를 아는 것이 참다운 지혜’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보는 견해가
상대유한(相對有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보는 것은 절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지혜에 들어갑니다.
변계소집성이란,
두루 계교(計較)하고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생의 성품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바로 못 보기 때문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일체 만물을
좋다 궂다, 옳다 그르다고
자꾸만 헤아리고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마음,
이것이 변계소집성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중생의 망정(妄情)인 망령된 정(情)에는 있다 하더라도
참다운 진리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에는 없습니다.
‘저 사람이 밉다’하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린 마음에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나의 망정,
나의 망상(妄想)에만 있지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보통 이와 같이 정유리무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 합니다.
인류 위기상황도 이러한 정유리무의 법,
중생의 상대유한의 망정에만 존재하고
참다운 진리에는 없는 것 가지고서
억지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변계소집성이라,
두루두루 헤아려서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뿌리쳐 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가정이나 마을에
평화가 안 올 수가 없습니다.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다른 것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이 사람 역시 인연 따라서 생겨났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는 말을
흔히들 쉽게 합니다만,
이 말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사람 하나가 존재한다 해도
천지우주가 거기에 다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하더라도
역시 꽃씨나 태양이나 기후나 수분 같은 것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모두가 거기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직ㆍ간접으로
먼 원인, 가까운 원인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다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나 태양광선이나 어떠한 것이나,
우주의 저 변두리 그야말로 극지(極地)에 있는
어떤 공기나 어떠한 미세(微細)한 존재라도
거기에 다 관계가 있습니다.
단, 직ㆍ간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중생은 먼 것은 안 보이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일체 만유의 것은
결국 타(他)에 의지해서 일어났다[起]는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하나의 존재는
일체 만유를, 일체 만물을 다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나올 때는
일체 만물을 다 인연으로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는
그 어머니와 아버지만 인연이 아니라
무수한 인연이 모인 것입니다.
가사, 오행(五行)을 보는 사람들이 하늘의 별도 보고,
여러 가지 사주풀이를 할 때
그 사람이 태어난 시(時), 날[日], 달[月]
이런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저 북극성이나 하늘의 별들과
다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항시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을 다,
모든 천지만유를 의지해서 나오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허깨비같이 가짜로 임시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나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일체 현상,
이것은 마치 바다에 뜬 거품 모양으로 사실이 아니요,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일어난
허깨비 같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허깨비 같은 존재를
중생들은 망정(妄情)으로,
망상(妄想)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도 궂은 것도 아니고,
이쁜 것도 미운 것도 아닌데,
중생이 괜히 자기 뜻으로 헤아려서
좋다 궂다 고집하고 싸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성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원만히 성취된 참다운,
실다운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실존(實存)이고 실상(實相)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우리 중생의 망정에는 없지만
참다운 이치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실상이 보입니까?
우리는 불성도 못 보고 진여도 못 봅니다.
부처나 여래도 못 봅니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否認)합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망정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원리, 참다운 근원적인 이치(理致)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제시하는 것은 실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가 인생고해(人生苦海) 아닙니까?
그러나 천박한 사람들은
인생고해마저 잘 못 느낍니다.
‘인생은 향락이나 하고 멋대로 즐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고해라고 생각하면 웬만한 것은 잘 참습니다만,
인생은 원래 행복스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고생이 오면
그냥 나에게만 왔다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실상은 결국 고생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낳는 것도 고생, 사는 것도 고생,
또 아파서도 고생, 죽어서 고생,
늙어서 고생, 헤어져서 고생,
모두가 고생인 것입니다.
안락(安樂)은 잠깐, 순간순간,
고생의 막간에 존재하는 허망한 것에 불과하고
사실은 고생뿐입니다.
신라 때 사복(蛇福)이란 사람이,
어머니는 절의 종이었는데,
열두 살 먹도록 벙어리같이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바보천치같이 보았겠지요.
그러나 그의 마음은 깊은 선정에 잠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위대한 성인인 원효(元曉)대사한테 가서,
어머니 장사를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성인(聖人)끼리는 서로를 알아봐서,
사복이가 말은 못했지만
위대한 성인인 원효대사는 안단 말입니다.
원효대사가 그러자고 하고서 같이 장사를 지내는데,
그 시체에 대해서 원효대사가,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라고 법문하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지면 임종법문(臨終法門)이라,
죽을 때 영혼한테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바와 같이
생자필멸(生者必滅) 아닙니까.
한번 낳아지면 결국은 죽어지는 것이고,
또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 아닙니까.
역시 무상한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법문(無常法門)을
원효대사가 시체한테 했다는 말입니다.
“낳지 말라, 죽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낳아 놓으면 결국은 죽는 것이 정칙(定則)이니까
“죽지 말라, 낳는 것이 고생이니라.”
한번 죽어 놓으면 해탈을 못하고 윤회할 바에는
이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고생이요,
또 어린애 배서 고생, 날 때 고생, 크려면 고생입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사복이가 듣고 있다가
“스님, 말씀이 너무 깁니다.
낳는 것이나 죽는 것이 다 고생이니라.”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모두가 다 고생입니다.
그러나 인생고를 떠나는 데는
단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불교말로 해서는 ‘백도(白道)’라 합니다.
어두운 길에서 광명으로 가는
하나의 외줄기 밝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
이것이 원성실성,
곧 영원하고 참다운 성품을 우리가 찾는 길입니다.
원성실성을 다른 말로 하면
불성, 부처, 열반, 도, 극락, 실상이라 합니다.
다 똑같은 뜻입니다.
시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우주에 가득 차고, 영원하고,
일체 공덕이나 모든 재주를 다 갖춘 것이 원성실성이고
다른 말로 하면 진리, 도, 부처, 하느님이라 하는데
다 같은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말이 많으니까
그냥 말 때문에 혼란을 느껴 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경을 보더라도
이런 원리를 아는 분들은 그냥 척척 알게 되는 것인데,
조금 어려우니까 말 때문에 그냥 혼동을 해서
혼미를 느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구하는 불성이나,
성불, 열반, 극락, 도, 진리, 주인공, 본래면목 같은 것이
모두가 다 똑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있다는 고집으로 느끼는 망정(妄情),
범부의 망상(妄想)에만 존재하고
실제는 없는 것이 현상세계입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비유하는가 하면,
불가에서는 사승마(蛇繩麻)라 합니다.
뱀 사(蛇)자, 새끼줄이나 노끈 승(繩)자, 삼 마(麻)자입니다.
사승마란 무엇인고 하면,
우리 중생이 망상으로 고집하는 견해,
이것은 마치 어슴푸레한 때 새끼줄 토막이 있으면
그것을 뱀으로 잘못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새끼줄 토막인데
어슴푸레하여 광명이 없으니까
잘못 봐서 뱀으로 보는 정도의 것이 변계소집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역시 하나의 새끼줄 토막이지요.
그래서 새끼줄 토막은 의타기성에 해당합니다.
뱀으로 본 것은 다만 우리 망상이지만,
현상적으로는 분명 새끼줄 토막이 있습니다.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은 의타기성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여환가유라,
다만 임시간 새끼줄로 만들어져서
새끼줄 토막이 되었던 것이지
역시 짚이나 삼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새끼줄 토막의 본질은 삼이나 짚입니다.
따라서 새끼줄 토막을 이룩한 본질은
원성실성에 해당합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이러한 것을 못 보고
다만 어두컴컴할 때 새끼줄 토막을 뱀으로 보는
그런 견해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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