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5. 2023. 4. 29(토) - 4.30(일) |
4월29일 (토)
이번 순례는 광주대교구의 성지다. 광주대교구의 성지는 4곳인데 가톨릭 목포성지,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 곡성 옥터, 영광 순교자 기념성당이다. 이번에는 영광 순교자 기념성당을 뺀 3곳을 가는 것이다.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직접 승용차로 가기에 매우 힘이 든다. 참여자도 지금까지 함께 한 인원 중 가장 적은 수이다. 아침 8시 성모상 앞에서 성모님께 안전 순례를 전구하면서 출발 전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올랐다.
오늘 종착지는 목포이지만 먼저 가야할 곳은 곡성과 나주이다. 따라서 첫 행선지 곡성 성당으로 ‘핸드폰 길찾기’를 하니 경부고속도로와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경로로 나온다. 시간은 3시간 정도지만 2곳의 휴게소에서 쉬어가면서 천천히 가다보니 12시가 다 되어 곡성 성당에 도착했다.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오늘 날씨 예보로는 비가 온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차량 운행에 지장이 될 정도로 비는 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작 도착하고 보니 우산을 받쳐야 할 정도로 비가 뿌린다.
곡성 옥터 - 정해박해의 진원지 |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읍내11길 20에 위치한 곡성 성당은 1827년 정해박해 시 순교의 현장인 곡성관아의 옥터에 지어진 성당이다. 따라서 성지 이름으로는 ‘곡성 옥터’라고 한다.
전라도 지역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대규모의 박해는 없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지역적으로 행해지던 박해는 끊이지 않았다. 곡성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는 1815년경 을해박해를 피해 온 경상도와 강원도 신자들이 이곳 덕실 마을(현 오곡면 승법리)과 미를골(현 오곡면 미산리) 일대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주로 생계수단으로 옹기를 구워 팔며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당시 덕실 마을의 천주교 신자 한덕운 토마스(韓德運, 1752-1802, 2016년 8월, 복자로 시복되었음)의 아들인 한백겸은 성질이 아주 광포하고 주사(酒邪)가 심해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1827년 2월 어느 날 옹기가마를 여는 축하연이 벌어졌을 때, 술에 취한 한백겸은 신입 교우인 주막집 여주인에게 욕설과 손지껌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이에 여주인의 남편 전씨가 홧김에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곡성 현감을 찾아가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관내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닥치는 대로 교우들을 잡아들였다.
이렇게 되자 곡성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고, 이에 따라 탄압의 손길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가 급기야는 인근 지역인 순창 · 용담 · 임실 · 장성 · 전주 등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됐다. 전라도의 모든 옥은 이때 잡힌 교우들로 초만원을 이루게 되는데 전주 감영에만도 240여 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1827년(순조 27) 정해년에 전라남도 곡성을 시발로 하여 경상북도 상주, 충청도와 서울의 일부에까지 파급되었던 정해박해였다.
정해박해는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했다. 두 달간 맹렬하게 계속된 박해는 조정의 태도가 완화됨에 따라 누그러졌지만 얼마나 혹독하고 광범위했던지 전라도 지역에서는 교우들이 집단생활을 전폐하고 각기 심산유곡으로 피신해 생명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정해박해 당시 전라 감사 김광문(金光文)은 추위와 더위, 굶주림에 약한 인간의 나약성을 매우 교묘하게 이용해 붙잡힌 교우들 중 많은 사람을 배교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때 약 5백여 명의 신자들이 잡혔는데 그들 대부분이 배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어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장계 고을 이 바오로의 누이이며 이명의의 어머니인 이 막달레나는 박해 초기에 곡성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초에도 굴하지 않고 황해도 백천으로 귀양 가 4년여의 유배 생활 끝에 1830년 53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리고 고산(高山)에서 포졸에게 온 가족 13명과 함께 잡힌 이성지(세례자 요한)은 무려 9년 동안 옥에 갇혀 괴로움을 당하고 8개월을 병마에 신음하다가 1835년 세상을 떠났다. 또 그의 셋째 아우인 이성삼(요한) 역시 그 해 3월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반년이 채 못 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박해를 받아 순교한 이들도 있으니 이들 중에는 지금도 기록으로 전해 내려와, 후손들에게 박해를 무릅쓰고 믿음을 지킨 용맹한 신앙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다.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막내 동생인 복자 이경언 바오로(李景彦, 1792-1827년)는 천주교 책과 상본을 전파하다가 붙잡혀 수없는 배교의 유혹과 매질 속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순교하였다.
이밖에도 복자 김대권(베드로), 이태권(베드로), 이일언(욥), 신태보(베드로), 정태봉(바오로), 이유정, 이유진, 김도명, 김지성, 김성집, 김사흥, 유흥순, 김순옥, 신아지, 이도원 등이 이 시기에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곡성은 정해박해의 진원지로 그 발단은 일부 행실이 좋지 않은 신자의 사소한 행위에서 시작됐지만 그 박해의 끝은 순교의 피로 물들었다.
한덕운 토마스(1752~1802)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돌보고, 또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 1801년 12월 27일)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1957년 광주교구는 교구 내에서 박해시대 유일한 순교의 현장인 곡성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자수가 10명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해 당시 옥터로 사용되었던 객사 자리에 대지를 구입하여 1958년 8월 15일 본당을 설립하고 그해 10월 6일 곡성 성당을 준공하였다.
2006년에는 낡고 오래 된 성전 건물에 대한 개축공사를 실시하여 성당 내부를 정해박해를 상징하는 옹기 가마터 모형의 돔형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갈비뼈를 형상화했고, 쇠사슬에 묶인 예수님 성상을 제대 옆에 설치하여 박해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을 기념하고 있다. 또 정해박해와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옥터 전시실도 개관했다.
그 이후의 성당 구내 환경 정비 및 성화(聖化) 사업으로는 2007년 5월 9일 정해박해 180주년을 재조명하는 학술발표회를 개최하고, 12월 20일 승법리 가마터에 기념비와 안내판을 설치에 이어, 2008년 10월 12일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옥사(獄舍)를 복원하고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옥터 공원화사업의 일환으로 옥사 앞에 공원을 조성하고 2010년 야외 제대도 설치하였다. 2011년 10월 16일에는 주차장을 설치하고 아가페 관( 종합관)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2016년 3월 26일 성당 지붕의 낡은 슬레이트를 철거하고 동판으로 교체하는 등 정해박해 기념성지 조성을 완료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전주 옥에서 순교한 이경언 바오로와 1839년 기해박해 때까지 12년 동안 전주 옥에 수감되었다가 순교한 김대권 베드로 등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성당 앞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정문에 이르자 단정히 자리 잡은 성전 건물 정면에는 예수성심상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환영하고 있고 정문 바로 안에는 성지 표지석이 돌 축대 정원 위에 앉아 있다.
곡성 성당은 두 영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성전 영역(안내도의 연두색 지역)이고 하나는 옥사(獄舍) 영역(안내도의 주황색 지역)이다. 성전 영역은 성전을 중심으로 전시실옆 마당의 성모상, 사무실, 교육관 등을 포함하고, 옥사 영역은 넓은 잔디밭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 옥사, 십자가의 길, 야외 제대, 사제관 등을 포함한다.
성전 안은 그야말로 토기 가마 굴 같이 돔형으로 되어있는데 둥근 아치가 마치 예수님의 갈비뼈 같은 형상이다. 특이한 것은 제대 후벽 높이 걸린 십자고상에는 예수님 대신 어린 양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순교자가 하느님께 봉헌된 제물이기에 어린양을 대신 한 것 같다. 어린양 십자가 아래는 성체 안치대가 있고 그 좌우에 성모상과 쇠사슬에 묶인 예수님상이 있다.
벽에는 성인상 스테인 글라스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스테인 글라스는 성인들의 특징을 살렸는데 우리나라 성인 성녀도 들어 있다.
옥터 영역으로 들어가니 널찍한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도 있고 바위산 형상의 둔덕에 성모상도 모셔져 있다. 그리고 야외제대도 있고 그 옆에 김대건(안드레아) 사제 상이 서 있다. 정원의 중심이 되는 옥사는 십자가의 길 반대쪽에 있다.
옥사는 문간채와 본채가 있다. 본채 밖 나무 창살 벽에는 옥사 안내문 겸 정해박해 원인과 과정, 결말이 소개 되어 붙어있고 그 위 가운데에는 정해박해의 진원지인 당고개가 그림으로 그려지고 그 안에 설명과 순교자 명단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창살 안에는 형틀과 갇혀 있는 순교자가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오는 길에 대문 앞에 옹기를 쌓아둔 사제관과 새로 지은 아가페관을 바라보며 어느 단체의 방문 기념식수를 지났는데 송순(松荀)이 순교자의 기백처럼 살아나고 있었다.
전시관은 성전 옆에 붙어 있었는데 보러 갔으나 아쉽게도 새로운 전시관 개관 시까지는 폐쇄되었다. 지금 성전 옆 마당에는 새 전시관 건립을 위해 전시관 터 발굴 중이었다.
성당 건립 당시 소중한 사진 자료 등 몇 개를 소개하면서 마치려 한다.
박해의 발단이 된 장소 당고개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네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고 물을 데도 없다. 시간도 1시가 다 돼 가고 있어 이 역시 따온 사진자료 하나와 순례시 한 편으로 대신한다.
곡성성당 감옥터에서 -김영수 -
피 걸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진하고 아득한 향기 있을까요
한 점 순간을 태워
영원의 불꽃 밝히며
눈물 깊은 사랑으로 달리던 이들
여기 감옥터 빈 곳으로 돌아와
꽃들로 흐드러져 있습니다
햇살들 부서지며 장엄히 일어서고
바람들 소망의 가슴 찧어
선연히 피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씻으며
갇혀서 얻는 자유
갇혀서 여는 하늘 바라봅니다
내 이제는 하늘 닿는 꿈에 갇혀
사랑의 초원 아득히 달려볼까요
영원의 언덕 황홀히 날아볼까요
곡성 옥터 순례로 오전 일과는 마쳤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한다. 나주까지 가기는 너무 늦어서 곡성에서 먹기로 했다. 곡성에는 섬진강 참게가 유명하다기에 휴대폰 검색을 통해 섬진강변에 있는 별천지 가든이라는 식당에 가서 참게탕과 은어튀김으로 식사를 했다.
사실 참게니 꽃게니 하는 것은 대게에 비해서 살은 별로 없다. 우려낸 국물 맛을 취할 뿐이다. 참게탕은 무청 시래기가 그런대로 맛이 있었고, 담백한 은어튀김은 제맛이었다. 무엇보다 식당 앞에 펼쳐진 섬진강 풍경이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니 2시가 훌쩍 넘었다. 나주로 출발. 섬진강변에 조성된 철쭉꽃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주 좋다. 기차 폐선로를 이용한 관광상품 기차마을도 나타난다. 4시가 거의 다 되가는 시간에 나주 순교자 기념성당에 도착했다.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 - 박해시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 |
나주는 오랜 옛 도시요 전남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발전한 고장이었다. 북에는 전주(全州) 남에는 나주(羅州), 그래서 전라도(全羅道)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서는 신앙 선조들의 피와 신앙 혼이 서려 있고, 일제 강점기 땐 사학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간단치 않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나주 성당은 광주대교구 소속이며 전남 나주시 산정동 18에 소재한다. 목포 성당과 동명이 같다. 나주 성당은 1935년에 설립되었지만 아무래도 그 연원은 기해박해와 병인박해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베드로)와 1872년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안드레아) 등 네 사람의 순교가 나주 성지의 설립 연원이며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들의 순교는 바로 지역 내의 전교로 이어지지 못했다.
약 50여년이 지난 뒤 나주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유학자였던 손정우(孫禎佑, 베드로)였다. 어느 날 친척집에서 한문으로 된 가톨릭 성서를 보게 그는 3-4년 동안 홀로 성서를 연구하다가 계량 본당(현 나주시 노안 본당)의 카닥스(Cadars, 姜達淳) 신부와 박재수(朴在秀, 요한)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1927년 영세하였다.
이후 나주 지역의 본격적인 전교는 1933년 5월 나주에 설립된 십팔은행(十八銀行)의 지점장 임태길(任太吉, 마태오)의 부인 이 루시아와 계량 본당의 복사 이응범(李應範, 아우구스티노)에 의해서였다. 이 루시아의 공소 설립 제안에 이응범이 계량 본당의 박재수 신부와 의논하여, 1933년 9월 임태길의 사택에 나주 공소를 개설하였다. 그 후 열심한 전교활동으로 공소 시작 당시 17명이었던 신자수가 2년 후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35년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에서 나주읍 박정리(현 성당 자리)에 3,00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50평 규모의 성당과 사제관, 35평의 교육관을 신축하였다. 이로써 나주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성당이자 전남 지역에서 목포 산정동 성당과, 나주 노안 성당에 이은 세 번째 성당이었다. 첫 본당의 신부는 하롤드 헨리(Harold Henry 玄) 대주교(제5대 광주대교구장)였다.
1956년 까리따스 수녀회 분원을 개설하고, 1958년 2월 12일 산포면 덕례리에 공소 건물과 사제관을 마련하였으며, 이듬해 7월 13일 나주시 청동 81번지에 3,120평의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61년 3월 성당을 증축하였고, 1970년 5월 하롤드 현(玄) 대주교의 후원으로 ‘현해 도서관’을 개관하였으며, 1971년 5월 강당을 신축하고 성당 조경공사를 하였다. 1974년 5월 사제관을 보수하고 성당 앞 보도블록 공사를 하였으며, 1982년 12월 사제관을 신축하고, 1984년 12월 성당 이층의 칸막이 공사를 하였다. 이천수(李淺水) 신부 재임 중 무학당 성지 개발을 추진하였고, 1994년 말부터 계획된 교육관(현 무학관)을 건립하였다.
2005년 나주 본당은 설립 70주년을 맞아 성역화를 본격화해 2001년 나주 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무학당 순교 터에서 무학관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 중 10개를 성당 구내로 옮겨와 무학당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이어 2004년 본당 내에 ‘빈무덤’ 형태의 순교자 기념경당을 건립하고,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인 사제관을 수리해 하롤드 현(玄) 대주교 기념관으로 개관했으며,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으로 쓰였던 한옥 기와집도 복원했다.
2011년 5월 17일에는 나주 순교자(이춘화 베드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를 현양하기 위해 무학당 터의 흙을 취토하여 현 대주교 기념관 맞은편 쉼터 부지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이상 ‘가톨릭 굿 뉴스’에서 발췌 인용)
정문을 통과하여 주차를 하고 경내에 들어서는데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물은 사무실과 교육관을 겸한 무학관이었다. 무학관 왼편에는 드넓은 마당이 있고 건너편에는 성모상이 있다. 늘 그렇듯 처음 찾는 곳은 성전이다. 매번 그렇듯 맨 먼저 성전에서 인사를 드린 후에 순례가 이루어진다. 성전에 갈려면 야트막한 오르막으로 올라가야 한다.
성전 - 단순 소박미의 표본
성전 건물은 이게 성당인가 할 정도로 가장 흔한 벽돌로 그냥 쌓아올린 일자형 건물이다. 지붕에 십자가와 전면과 측면에 현관 지붕이 없다면 무슨 창고와 같다. 정면 문은 잠겼고 출입 시는 옆문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꾸밈없고 소박하기는 성전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은 마루이고 천장에는 골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벽면에는 작은 창문이 나있고 창문 윗부분에 액자식 십사처가 걸렸는데 문구가 한결 예스럽다.
제대 후벽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그 위로 원형 스테인 글라스만 있을 뿐이고 성체 감실조차 없이 성체는 성체조배실을 따로 마련하여 모시고 있다.
성전을 나와서 언덕으로 오르는 입구에 종탑이 우뚝 서있다. 성당 전체의 지역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순교자 기념경당으로 가고, 계속 오르막으로 오르면 현 대주교 기념관과 순교자 묘역이 있다.
먼저 순교자 기념경당으로 향했다. 축대 위 길 저만큼엔 예수성심상이 있고 십가의 길 5처와 6처가 지나가고 있다. 길가에는 때 늦은 철쭉이 마지막 정열을 토하고 있다. 널찍한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시각적 여유를 준다.
순교자 기념 경당
경당이라 하여 지상 건축물인가 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빈 무덤 형태를 하고 있다.입구를 보면 마치 옛날 돌방무덤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문은 거대한 돌 세 덩어리로 되었는데 둘은 문기둥이고 하나는 기둥 위에 올렸다. 문 양 옆으로 자연석을 쌓아 방을 만들고 봉분 위는 잔디를 입혔다. 꼭대기 부분은 유리를 덮어 하늘과 통하도록 했다. 그리고 문 앞에는 큼직한 돌 제단이 있다.
안내문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베드로, 33세)와 1872년 나주 무학당(武學堂)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51세), 유치성(안드레아 48세), 유문보(안드레아, 60세) 등 네 사람의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하고 입구의 돌은 무게가 60톤으로 순교자들이 석침형(石針形)과 백지사형(白紙死刑)를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백지사형(白紙死刑)이야 백지를 얼굴에 붙여 질식사시키는 형벌이지만 석침형(石針刑)이란 어떤 형벌인지 설명이 없다. 아마도 돌을 사용하여 죄수를 죽이는 형벌로만 짐작할 뿐이다. 또 입구의 60톤 돌도 문기둥인지 그 앞 돌 제단인지 불분명하다.
설명에 의하면 모든 시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예컨데 예수님의 무덤을 닮은 빈 무덤 형태가 사면이 막혀 있고 위쪽만 뚫린 것은 당시 사면초가의 절박한 상황에서도 천주님께로 향하는 일편단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하였다. 내부의 텅 빈 공간과 어둠은 순교자들의 비움과 죽음을, 외부의 아름다운 자연과 밝음은 순교자들의 충만한 사랑과 부활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문 안에 들어서면 먼저 참배실이다. 참배 순서와 내용을 안내하고 있는데 묵상과 성서 봉독과 순교자를 위한 기도, 봉헌 등으로 엮어져 있다.
성구(聖句)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마태오 16장의 말씀이었다.
무덤 내부는 사면이 거무스레한 돌 벽인데 마치 차량의 투명 루프처럼 위의 천장으로만 하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안쪽 벽 높은 곳에 작은 십자고상이 걸렸고 벽의 중간 높이에는 불을 밝히는 호롱이 배치된 감실 몇 개가 있다. 바닥에는 십자고상 벽 아래에 관 모양 제대가 나지막하게 놓여있다. 화초가 빙 둘러가며 심어진 화단 안에 역시 십자가형으로 화초가 심어져 있다. 언젠가는 순교자의 영광을 드러내듯 꽃이 피리라.
병인박해 시에 나주에서 순교한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세 분 순교자들과 함께 옥살이 하다가 석방되었던 사람들의 중언에 의하면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훌륭했다고 한다.
그들은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혹형 속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천주 신앙의 당위성을 용감히 증언했으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온 몸으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연일 계속된 혹독한 고문으로 땀과 피가 범벅이 된 지친 몸의 상태에서도 형제애를 발휘하여 세상의 유혹을 극복하자고 서로서로 격려해 주었으며 조석으로 묵주신공을 통성(痛聲)으로 바친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모두가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박해를 잘 견디어 내며 옥살이 중에 모범을 보이고 심지어 사형집행일을 남기고 남에게 진 빚을 걱정했던 분들이라고 증언했다.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통 가운데서도 오로지 천주님과 천상의 삶만을 너무나 그리워했기에 천사와 성인들이 순교자들을 모시러 오는 꿈을 죽음 직전에 세 분이 함께 꾸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모두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정말 오늘날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귀감이 된다고 하겠다.
이제 순교자 묘소로 간다. 다시 종탑 있는 위치로 돌아와서 오르막길을 올랐다. 오른편 저만큼 사제관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는 백색의 피에타가 있다.
오르막길을 올라 오른쪽으로 꺾으면 순교자 묘원이, 반대로 왼쪽으로 꺾으면 현 대주교기념관이 있다. 십자가의 길은 계속 마지막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순교자 묘원 입구에 김대건(안드레아) 사제 석상이 서 있다.
나주 성당 순교자 묘원 - 초라할수록 더 드러나는 순교자의 영광
순교자 묘원은 2011년 5월 17일, 나주 지역 순교자(이춘화 베드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를 현양하기 위해 조성했다. 실제 순교자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어 순교지 무학당 터의 흙을 취토하여 와서 현 대주교 기념관 맞은편 쉼터 부지인 이곳에 조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유해가 없는 가묘이다.
순교자 묘원 앞의 누운 비석에는 네 분 순교자의 뜨거운 신앙 고백과 “소중한 신앙의 유산은 오늘, 나를 통하여 증거 돼야 한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순교자 순교사적을 개인별로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 이춘화 베드로 ( ? ∼1839)
나주의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기해박해(1839년) 때 나주 읍내 옥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춘화에 대한 기록은 달레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짤막하게 기록된 기사가 전부로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이춘화는 공주 태생으로 나주에 와서 산지 얼마 안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체포되어 천주 신앙을 지키다가 고문으로 읍내 옥에서 3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기해박해 때 청주 고산에서 순교한 박 바르바라는 이춘화의 처제로 알려진 것으로 미루어 집안이 모두 신심이 두터운 것으로 이해된다.
◆ 강영원 바오로 ( ? ∼1872)
전북 용담인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투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꿋꿋이 참고 견디었다.
그러나 끝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 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유치성 안드레아 ( ? ∼1872)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전북 무장 암틔에서 살다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혔다. 그는 신문을 받으며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을 불로 지지도록 했다. 그는 돌에 받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가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유문보 안드레아 ( ? ∼1871)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가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 중병까지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최성화(안드레아)와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비록 유해 없는 묘라고는 하나 너무나도 초라하다. 하기야 생전의 자취가 보잘 것 없을수록 순교자의 영광은 더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나오는 길에 청동기 시대 고인돌 같이 자연석을 덮개돌로 한 1기의 묘를 더 볼 수 있다. 전주교구 초대 교구장 김양홍(金洋洪, 1874-1945)신부의 묘다. 그는 전라도에서 두 번째 사제이며 4대 나주본당 주임으로 재직하다가 해방되던 해 5월3일에 선종했다고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순교자 묘원을 나오면 맞은편 언덕 위에 고풍스런 단층 적색 벽돌 건물 한 채가 있다. 바로 현 대주교 전시관이다.
하롤드 현(玄) 대주교기념관 - 호남 교회사의 증인
이 건물은 1934년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원래 사제관이었으나 2005년 대대적으로 부수해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으로 탈바꿈했다.
하롤드 현 (Harold Henry 玄) 대주교는 1909년 7월 11일 미국 미네소타주의 노드필드에서 태어나 1932년 12원 21일 성 골룸반 출신의 사제로 서품되어 1976년 3월 1일 제주교구장으로 서거하기 까지 40여 연간 한국에서 여러 본당 신부와 교구장으로 사목하면서 순교 영성을 몸소 실천한 사제이다. 현 대주교는 여러 본당을 설립하고 남녀 수도회를 초청하여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교육, 의료, 복지와 관련된 많은 사업을 시작하여 사회를 구제하고 천주교의 발전 토양을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가 극에 달하던 시기 1935년, 초대 나주본당 주임으로 7년간 사목하면서 선교는 물론 성당 안에 해성학교를 설립,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우리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이 건물은 바로 그분을 추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분이 사셨던 집을 복원하여 세운 기념관이다.
하롤드 대주교 기념관에는 대주교가 본당 초대주임 시절에 쓰던 타자기를 비롯해 기도서, 십자가, 성합, 제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쏟았던 하롤드 대주교의 땀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와서 보니 미리 예약되어야만 관람할 수가 있다고 하여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특히 전시관이 있는 성지는 사전에 알아봐야 함을 깨달았다.
이제 구 까리따스수녀회 본원으로 가기 위해 다시 순교자 기념 경당으로 내려왔다. 순교자 기념경당의 또 다른 입구,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잔디밭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의 순교자의 기도상이 있다. 현무암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울퉁불퉁하고 거친 돌로 같은 석질의 대좌 위에 만들어진 상이다. 마치 화형으로 이목구비도 다 일그러진 채 타 죽은 모습과 같다. 그러나 혹독한 뜨거운 불길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니,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바친 순교자의 고통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낸 조각상이 있을까? 그 어떤 우아한 상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득 김동리의 작품 《등신불》이 연상된다. 부처님께 소신공양(燒身供養)한 주인공의 몸에 금을 입힌 불상 - 향로를 머리에 이고 오뇌와 비원이 서린 모습,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가져오게 하는 불상이 바로 등신불이다.
순교자의 기도상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려가는 길을 택해 걸음을 옮기면 갈림길이다.
여기서 오르막길로 십자가의 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까리따스 수녀원 본원은 아래로 내려간다. 대나무밭과 토담길을 따라 내려오면 수녀원이 나타난다.
구 까리따스 수녀회 본원(현 까리따스수녀회 역사전시관) - 한국 수녀회 사목의 요람
까리따스 수녀회는 살레지오회 수도 사제 안토니오 카볼리(Antonio Caboli) 신부가 일본 미야자키[宮崎]에 설립한 수녀회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예수성심(聖心)의 사랑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1926년 2월 8일 살레시오회 선교사로서 일본에 파견된 카볼리 신부는 미야자키시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우선 신앙심이 깊은 젊은 여성들을 모아 애덕 자매회(愛德姉妹會)를 만들었다.
한국에는 당시 광주 교구장이었던 하롤드 현 대주교의 초청으로 1956년 10월 19일에 선교 수녀를 파견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민간 소유였던 것을 1956년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본원이 설립되자 이 건물을 구입하여 개조한 것으로 안채(1934년 건립)는 수도자들이, 행랑채(1933년 건립)는 지원자들이 사용하였다. 1959년 수녀원은 광주 학동으로 옮겨졌으며, 2004년 5월에 한국 수도회의 표양이 된 수도자들의 삶을 되새기기 위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까리따스 수녀회 역사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수녀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1958년 초창기 수녀를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었던 현(玄) 하롤드 몬시뇰의 숙소를 잠시 빌어 지원자들의 집으로 사용하였다. 이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이 대나무 숲을 지나야 했는데 이 숲은 새벽에 일어나 호롱불을 들고 아래쪽 수녀원으로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비가 오면 황토에 발이 빠지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원장이던 김묵석(피데스) 수녀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대나무를 잡고 울기도 했던 곳이라고 한다.
까리따스 역사 전시관
무학당 상징 구조물
나주 무학당(武學堂)은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성지로 옛날에는 지방 군영의 훈련장이었다. 병인박해 때에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세 순교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처형당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아무런 흔적도 없고 당시 주춧돌 12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이곳이 나주 초등학교 교정이다.
광주대교구에서는 무학당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나주 성당을 중심으로 현양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나주 초등학교 정문 옆 화단에 이곳이 무학당 순교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2021년 기둥 12개 중 10개를 나주본당으로 가져와서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바로 이곳이다.
오후 5시 반 정도 되어서 나주에서의 순례 일정은 끝났다. 이제 목포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를 구해 투숙하면 된다. 나주-목포 간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일단 내일 순례지인 가톨릭 목포성지(산정동) 인근 지역의 식당을 미리 알아 두었기에 네비게이션으로 쉽게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상호는 독천식당(061-242-6528)인데 낙지 전문이다. 남도 음식축제 대상을 받았으며, 지상파 3방송사가 다 맛집으로 추천했다는 문구가 간판에 들어 있다. 입구는 좁은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엄청 넓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손님 또한 많다. 번호표를 받아야 할 정도다. 먼저 부드러운 연포탕(육수에 낙지, 야채를 넣어 끓인 음식)을 시켜 나누어 먹고 주 메뉴로는 낙지 비빔밥을 택했다. 특히 낙지 비빔밤이 다들 맛이 있다는 반응이다. 이름난 식당에 걸맞는 음식맛, 이를 명불허전이라고 하는 걸까?
숙소도 또한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바로 인근에 목포가족호텔이라는 곳이 가까이 있어 들어갔는데 깨끗하고 편이시설을 갖추었으며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2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