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29 규슈 조선중고급학교 럭비부
(글 박수화)
- 규슈 조선중고급학교 럭비팀. 정식 럭비부가 되기 전년도인 1957년 -
한 교원으로부터 시작된 자이니치 럭비
조선고교 럭비부의 활약은 일본전국 재일동포들의 마음에 감동과 희망을 주고 있다. 이러한 자이니치 럭비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58년,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은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운동장에서다. 후에 ‘자이니치 코리안 럭비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전원치(全源治)씨와 학생들이 개척한 럭비부 초창기를 돌아본다.
- 규슈 중고에 부임했을 당시의 전원치씨 -
축구 열풍 속에서
규슈조선중고급학교가 창립된 것은 1956년.
젊은 교원들이 모여 어렵사리 학교운영을 시작했다. 고급부 교실은 1개밖에 없었고, 학생 중에는 성인들도 많았다. 또 59년에는 니가타에서 조국으로 가는 귀국선 운항이 시작되어 이 학교의 학생들도 차츰 귀국하기 시작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무렵, 재일동포 사회에서 스포츠라 하면 축구였고, 럭비는 인지조차 하지 못한 때였다.
이듬해인 57년, 이 학교 교원으로 고 전원치(1934-2014)씨가 부임한다.
전원치씨는 후쿠오카현 리츠메이젠(立明善) 고교에서 럭비를 시작해 도쿄교육대학시절에는 럭비부 캡틴을 맡았던 럭비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학교에서 럭비를 가르치는 일을 희망했으나, 조선적이라 취직자리가 없어 고민하던 중 규슈조고 교원에게 체육교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아왔던 전원치씨에게 조선학교와의 만남은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된다. 동시에 이 사건은 ‘자이니치 럭비’라는 새로운 역사의 막을 열게 되었다.
전원치씨의 일생을 엮은 저서 <태클을 걸어라!(タックルせぇ!2011년, 글 이형일>에는 학생들과 처음 럭비를 했던 날이 적혀있다.
‘야, 너희들 럭비라는 스포츠를 알고 있냐?’ ‘배짱 두둑한 녀석들만 할 수 있는 거다!’
럭비 볼을 처음 본 학생들이었지만 ‘싸움이라면 져 본 적이 없으니까!’ 라며 모두들 흥미진진.
‘하고 싶은 녀석들은 먼저 나부터 잡아 봐라’
볼을 들고 달리는 전씨에게 학생들이 일제히 달려갔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져 줄 생각도 없었지만, 그 일로 나는 그 녀석들한테는 신 같은 존재가 된 거죠. 분명히 힘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녀석들에게 럭비를 가르치고 싶다 생각했죠. 럭비를 하려면 역시 마음가짐이 젤 중요하니까’
58년 일본전국의 조선학교 가운데 처음으로 규슈조고에 럭비부가 만들어진다. 그렇지만 ‘환상의 일본 최고’로 불렸던 재일조선축구단의 활약 등으로 재일동포 누구나 축구에 열광했던 시절. 이 럭비부가 학교에서 스포츠클럽으로 인정을 받기까지는 한동안 시간이 필요했다.
- 1963년 규슈조고 럭비부. 뒷줄 오른쪽 2번째가 전원치씨 -
無에서 시작한 연습
당시 럭비부원으로 규슈조고 5기생이었던 동포는 그 시절 모습을 이렇게 말한다.
‘럭비부 형태는 갖췄는데 가장 중요한 운동장이 비좁은데다 돌투성이였죠, 신발은 학교 운동화였고. 축구부에서 스파이크를 2개 정도 빌려와서 발 사이즈가 맞는 녀석이 신었어요. 맨발로 연습하는 녀석도 있었죠. 볼은 연습시합을 했던 상대팀한테 받든지 해서 하나씩 늘어났죠. 모두 워낙 오래 사용해서 달걀 모양으로 변형된 것들뿐이었어요.’
일본학교와 연습시합에서는 전원치씨가 얼마나 발이 넓은지를 통감했다고 한다.
‘경기장에 도착하면 상대팀의 감독들이 하나같이 전선생님에게 일제히 인사를 했죠. 강한 팀이 대전 상대를 지명하기 때문에 보통은 조고 같은 약한 팀은 지명 받을 수 없는데, 전선생님의 팀이라는 이유로 가장 쎈 팀하고도 시합을 할 수 있었죠. 인원이 모자라니까 축구부원도 2~3명 데려오고 전선생님이 직접 운동장에서 뛰기도 했죠.’
규슈조고 10기생 안광호(安光虎 67)씨도 럭비에 몰두했던 한 사람이다.
‘합숙했던 일은 잊을 수가 없어요. 쿠루메(久留米)에 있는 의대에서 연습을 하고, 근처 절에서 잠을 잤죠. 연습은 뭐 죽을 정도로 힘들었는데도, 아직 다들 젊었으니까 4~5일째 되는 날에는 점점 기운을 차려갔죠.’
부원들은 이른바 ‘문제아’ 집단이었다며 웃는다.
‘1학년 때 일본학교와 연습시합을 하는데 유니폼이 부족하니까 상대 럭비부실에 있는 유니폼을 가져와 염료를 써서 조고 유니폼과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여 입은 적도 있었죠.’(안광호씨)
한편 전원치씨의 지도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달려! 공격해! 도망치지 마! 태클 걸어!
‘기술’을 알려주는 일은 일체 없었고, 그 대신 전씨 자신의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는 럭비’를 철저히 가르쳤다.
‘조직플레이 같은 건 전혀 모른 채 매일같이 달리고 태클 걸고. 그래도 점점 럭비의 즐거움을 알게 됐죠. 2학년,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팀도 강해져 갔어요. (안광호씨)’
그 무렵 규슈조고에서는 럭비부가 축구부에 뒤지지 않는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고, 운동장 대부분을 럭비부가 사용했다고 한다.
- 조선대학교 운동장에서 시합중인 전원치씨(사진 중앙) -
전국으로 퍼져나간 자이니치 럭비
68년 전원치씨는 조선대학교로 부임한다. 조대에는 이미 럭비 동호회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 해부터 정식으로 럭비부가 되었다. 규슈조고 럭비부 출신자뿐 아니라 각지에서 조고를 졸업한 럭비 미경험자들도 부에 들어와 공식전에는 나갈 수 없었음에도 일본대학과 연습시합에 전력을 다했다.
전씨가 조대로 부임한 해 이 대학에 입학해 4년 동안 전원치씨의 지도 아래 럭비를 배운 럭비부 2기에 해당하는 멤버들은 졸업을 목전에 두고 서로 약속했다.
’재일본 조선학생 중앙체육대회‘에 럭비 종목을 만들어 각지의 조고 럭비부끼리 시합을 하자.’
안광호씨도 그 중 한 사람으로 졸업 후에는 모교인 규슈조고에서 럭비를 지도하고 있다.
동기들은 오사카, 도쿄, 아이치, 고베, 도호쿠, 야마구치의 조고 교원으로 흩어졌고, 규슈조고 이외에도 일제히 럭비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75년에는 제1회 <중앙대회>가 실현되어 꿈은 현실이 되었다. 중앙대회 결승전은 전원치씨가 경기 시작 호루라기를 불었다.
이후 조선학교의 학생 수 감소로 많은 럭비부가 없어졌고, 규슈조고도 2011년 이후 활동을 쉬고 있다. 현재는 오사카, 도쿄, 아이치, 고베의 조고에 럭비부가 있다.
한편 럭비는 재일동포들 사이에 널리 친숙해지게 되었다. 오사카조고, 도쿄조고의 ’하나조노(花園)'대회 출전과 그곳에서의 활약은 전국의 동포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있다. 또 재일동포들의 투구(럭비)단과 모임이 각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매년 열리는 럭비 페스티벌에는 전국에서 자이니치 럭비맨들이 집결한다. 일본팀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자이니치 스포츠계는 럭비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월간 <이어> 2017년 8월호에서
첫댓글 화이팅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