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5대승기신론(32)
대승기신론(32)
또 이것들은 그 작용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첫째, 업식이다. 진여의 진실한 존재방식은 본래 평등하여 한 맛이며 차별이 없지만, 그것을 그대로 깨달을 수 없는 무명 때문에 미혹한 망상심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전식이다. 깨닫지 못한 망상심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음 가운데에 따라서 생기는, 대상을 비추어주는 의지적 작용이다.
셋째, 현식이다. 대상에 작용하는 의지적 활동이 있는 곳에는 그와 더불어서 ---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에 현전하는 모든 사물이 비치듯이 --- 우리의 마음의 경계가 모두 비추어진다. 따라서 대상에 작용하는 의지적 활동이 감각기관의 대상인 빛깔이나 형태, 소리, 냄새, 맛, 접촉의 다섯 가지 외계와 대응하게 되면 모든 대상은 그 자리에서 비추어져서,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 할 수 없다. 대상의 비침은 언제 어디서나, 주관적인 노력이 없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대상에 작용하는 의지적 활동이 있는 곳에는 그와 더불어 언제나 대상이 비치고 있다.
넷째, 지식이다. 비춰진 대상에 대하여, 더럽게 물든 것과 맑고 깨끗한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다섯째, 상속식이다. 한번 야기된 망념은 다음에서 다음으로 새로운 망념을 야기하여 단절하는 일이 없다. 무한한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악의 행위를 잘 보존해서 꼭 붙들고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선⋅악의 행위의 영향력을 소멸시키는 일이 없다. 과거의 선악의 행위에 의해 미래에 어김없는 과보가 주어진다. 곱고 착한 행위에는 열락(悅樂)의 과보를, 짓궂고 못된 행위에는 고뇌의 과보를 성숙시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틀림없이 들어맞게 한다. 또 이런 작용은 지금 발생하는 것과 지나가버린 과거에 있었던 것들을 홀연히 망상할 뿐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것들까지 끌어들여 헛되이 망상하고 분별한다.
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 謂無明力. 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依於動心. 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 所謂能現一切境界. 猶如明鏡現於色像. 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 卽現無有前後. 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四者名爲智識. 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 以念相應不斷故. 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 令不失故.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 無差違故. 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 未來之事不覺妄慮.
문 장 해 설
이 의(意)를 자세하게 서술하면,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의(意)에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意)는 서로 다른 측면에서 다섯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는 의미이다. 의(意)가 5식(五識)으로 분화한다는 하는 의미는 아니다. 말하자면 『대승기신론』은, 의(意) 곧 5식(五識)의 작용은 합하여 하나라고 보고 있는 것이며, 이 점은 법상종이 알라야식(阿賴耶識) 등의 8식의 체(體)가 별도라고 보는 것과 입장이 다르다. 그러면 의(意)의 다섯 가지 이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업식(業識)⋅전식(轉識)⋅현식(現識)⋅지식(智識)⋅상속식(相續識)이다.
첫째, 의(意)를 부르기를 업식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의 마음이 움직여서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일심은 불생불멸이며, ‘법dharma’이다. ‘업karma’이 아니다. 업(業)은 인과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무명에 의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의 시작이다. 이것을 가리켜서 업식(業識)이라고 부른다. 업식은, 불각인 상태로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의(意)를 부르기를 전식이라고 한다. 앞의 동심(動心)에는 능견(能見)의 상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분별작용을 한다는 것이며, 주관의 작용이 그곳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작용을 여기서는 전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무명에 움직여서 전식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전식은 알라야식 가운데에 있다. 두 번째는 대상(능현상)에 움직여서 전식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전식은 마음의 표면에 있는 인식주관 말하자면 지식(智識)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식은 첫 번째 경우의 전식이다.
셋째, 의(意)를 부르기를 현식이라고 한다. ‘현(現)’이란 나타낸다고 하는 의미이다. 앞의 전식에 대응하여 알라야식 가운데에 객관으로서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객관이지만 이것도 식(識)의 작용이다. 식(識)이 아닌 것은, 식(識)에 의하여 알아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론에서는 현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식이란, 모든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이 색상(色像)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식이 외계의 5진(五塵)(五境)에 대응하면, 사물이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시간적 전후가 없이, 바로 외계가 현식에 비추어지며, 마치 눈앞에 있는 것과 같다. 5진(五塵)이란, 색⋅성⋅향⋅미⋅촉의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실제로 외계에 있는 것은 색(色)rūpa이 아니라, 빛의 파동이며, 소리가 아니라 공기의 파동이지만, 그러나 『대승기신론』시대에는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색⋅성⋅향⋅미⋅촉이 외계에 실재하고 있으며, 그들이 거울에 사물이 비치는 것처럼, 마음에 비추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추어진 부분이 현식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5진(5경)에서의 첫 번째인 색(色)rūpa에는, 빛깔과 형태가 포함된다. 눈으로 보는 것은 빛깔과 형태이며, 결코 책상이나 집과 같은 개체적 사물이 아니다. 다섯 번째의 촉(觸)이란, ‘접촉되어진 것’의 의미이며, 촉각(身根)의 대상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견고함⋅무거움⋅매끄러움⋅따뜻함⋅차가움⋅움직임 등과 같은 것이다.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은 5근(五根)에 의하여 각각 개별적으로 지각된다. 따라서 색깔이나 형태, 냄새, 맛, 무게, 딱딱함 등을 합성하여 성립하는 책상이나 과실, 사람 등은 감관에 의하여 직접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감관에 의하여 얻은 인식의 결과를 의식이 총합하여 구상한 것이다. 어쨌든 의식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 등의 5식(五識)이 인식하는 것은 외부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외계(5진)를 현식이 내재화시킨 마음속의 5경(境)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6식은, 언제나 일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안식이 휴지(休止)할 때는, 보는 작용은 없다. 그러나 현식은 중단하는 일이 없이, 언제나 외계를 비추어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6식(識)은, 현식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외계 그 자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대승기신론』에서는, 안⋅이⋅비⋅설⋅신⋅의의 6식(六識)이나 그 배후에 있는 제7manas(마나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대승기신론』은 이들 식(識)이 별체(別體)라고 보지 않고, 일체(一體)로 보고 하나의 식의 다른 작용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업식 등의 다섯을 의(意)라고 하는 하나의 것을 다섯 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의(意)를 부르기를 지식이라고 한다. 이상의 업식(業識)⋅전식(轉識)⋅현식(現識)의 3식(三識)은 알라야식 가운데의 작용이지만, 이 현식이 나타내고 있는 것을, 마음 밖의 실재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개물에 대하여 허망한 분별하는 것이 지식(智識)이다. 이것은 3세⋅6추로 말하면 지상(智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상(智相)은 “애(愛)와 불애(不愛)를 분별한다”고 논설하고 있는데, 지식은 “염정(染淨)의 법을 분별한다”고 논설하고 있다. 요지는 외계에 ‘대상존재’가 실재한다고 판단하고, 그것에 대하여, 호(好)⋅오(惡)를 감지하며, 혹은 선(善)⋅악(惡)의 판단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사식(事識) 가운데의 세분별(細分別)”이라고 말하며, 개물(個物)을 인식하는 가운데의 미세한 분별이다.
다섯째, 의(意)를 부르기를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한다. 이것은 3세⋅6추로 말하면 상속상이라고 부르며, 지식에 바탕을 두고서 고(苦)⋅락(樂)의 지각을 생겨나게 하여, 염(念)을 일으켜서 상응함으로서 단절하지 않는다고 논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상속’의 의미가 더욱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먼저 “염(念)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속식(相續識)이라고 부른다. 염(念)이라 망념이며, 끊임없이 허망한 분별을 일으켜서 식(識)이 지속되어 가는 것을 가리킨다. 식(識)이 지속되는 것에 의하여, 무한한 과거로부터의 선⋅악의 까르마(karma, 業)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까르마(karma, 업)란, 행위가 뒤에 남긴 보이지 않는 힘을 말한다. 이것이 심리적 형태로 남아서 상속식에 보존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면, 그것이 마음의 상처가 되고, 마음의 심층의식의 영역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도 까르마(karma, 업)를 성숙시켜서, 고(苦)⋅락(樂)의 과보를 얻게 하는 것도 상속식이라고 한다. 고(苦)⋅락(樂)이나 행복⋅불행과 같은 것은 심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악의 까르마(karma, 업)의 과보는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에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그것을 생각해내는 것도 상속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더욱 미래에 이러저러한 일을 하려고, 돌연 마음에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 것도 이 상속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 선⋅악의 까르마(karma, 업)를 보존하는 것과, 까르마(karma, 업)의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은 알라야식에 속하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작의(作意)하는 것의 두 가지는 사식(事識)의 세분별이라고 한다. 사식(事識)은 분별사식이라고도 부르며, 말하자면 외계의 사물을 분별하는 식(識)이다. 상속식은 일상의 경험과 그 결과를 마음에 보존하는 작용을 하는 것인데,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아집도 상속식의 작용이지만, 이 경우에는, 상속식을 특별히 의식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집을 제외한 법집을 저지르는 것이 지식(智識)과 상속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