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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קֹרַח 코랔흐" 샤밭예배
코라흐는 바이크라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קַר 카르 : 시체, 차갑다 / 아주 근원, 근본, 본질적인 것 = 너무 귀한 것
야카르 임하쉘리라는 히브리 찬양이 있다. 너무나도 귀한 내 엄마. 내 근본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귀하다.
사람의 자존감이 어디서 오냐면, 엄마가 어떠냐에 따라서 자존감이 있다. 엄마의 영역이 구멍이 나면, 자존감 영역에 상당한 타격이 온다. 너무 근본적이고 귀한 것이 카르이다. 코라흐라고 하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시체의 삶이다. 살아있으되 시체의 삶, 좀비의 삶을 가르친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만을 가진다. 내가 무엇을 Receive했는가를 체크하면 시체의 삶이다. 모세에게 가서 네가 나한테 준게 뭐냐고 한다. 내가 뭘 받았는지를 체크하는 순간 사람은 시체가 된다
여러분들도 왜 차가워지는지 아는가? 웃으면서 지내다가, 쟤가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 라고 하는 순간 여러분들은 시체, 코라흐가 된다. 교회도 내중 잘 나오다가 갑자기 싸늘해진다. 인사를 잘 하다가도 제가 뒤에 서 있어도 그냥 싸늘한 시체가 지나가는 수가 있다. 그동안에는 굉장히 뜨거웠는데, 어느날 싸늘해진다.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냐가 들어오는 순간 코라흐가 출현한다. 남편에 대해서도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다가도 싸늘해지는 때가 있다. 저 인간이 나한테 도움이 안된다고 하면 싸늘해진다. Receive, 뭘 받았느냐를 체크하면 코라흐가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반대의 의미로 코라흐는 코라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자들이 된다. 고라의 자손들의 시가 시편에 올라간다. 코라는 또 사무엘이 코라에게서 태어난다. 쉬무엘,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 코라흐는 또한 위대한 이름이다. 코라흐의 자손이 없었다면 다윗도 세워지지 않는다. 소망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라흐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고, 진정한 삶으로 나온다. 가장 귀한 삶, 근본적인 / 본질적인 삶으로 나오는 주간이 코라흐 주간이다. 코라흐 주간에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 나의 필요를 채우려고 하는 것을 제거하고,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려고 하기 바란다.
내 필요와 모든 필요는 다르다. Everything i need, 나의 모든 필요가 뭘까? 콜의 필요이다. 전체 몸의 필요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다. One body, One heart, 단독자가 필요한 것을 필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이라고 한다. 내 욕망에 의해서 받은 것을 체크하면 코라흐가 된다. 그러나 나는 전체 몸의 일부이고, 전체 몸을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순간 코라흐는 사무엘이 되고, 주님을 이 땅에 오시도록 하는 다윗을 세우는 놀라운 삶이 된다.
오늘 특별한 스피커가 오셨다. 코라흐 주간에 오신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IFCJ, 캐나다에서 디렉터로 계신 마크가 오셨는데, 크리스천과 유대인이 하나되게해서,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주게하는, 끊임없이 주는 사역, 주는 삶이 뭘까? 이런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그것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는지 모른다. 그런 삶을 사는 분, 긍정적인 의미의 코라흐이다. 본질적인 생명, 가장 아름답고 귀한 생명.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체크하지 않고, 내가 주기 위해서 고민하는 생명이다. 이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많이 받기 위해서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묵상하는, 이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또한 그런 삶을 사셨다고 믿는다. 이 코라흐 주간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평, 불만,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체크하는 그 악한 생각, Spirit을 다 제거하시고, 우리 또한 주기 위해서 고민할 줄 아는 가장 귀한 생명으로 다시 거듭날 줄 믿는다.
* 170623 IFCJ 마크 클리미 앨리엇
ISRAEL + KOREA = IkSoRrAeEaL
우리는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매일 할 수 있다. 방금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매일 주님을 우리의 마음 속에 둔다는 찬양을 했다. 절대 돌아서지 않는다.
한국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아직 한국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이스라엘을 가져다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나는 캐나다에서 왔다. 영국이랑 캐나다는 미국과 다르게 u를 써서 Neighbour이라고 쓴다. 이 교회는 이웃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듯이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 절대 돌아서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도대체 뭘까? 우리는 어딜 가든, 매일의 매 시간, 매 분, 매 초, 사랑을 나눠야한다. 우리는 해야할 일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잘 하고 있다. 지난 주에 토론토에 있을 때, 토론토에서 여름이 시작되었다. 여름이 시작되며 수많은 관광객들이 토론토로 왔다. 그래서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 연습했으나, 실패했다. 매일, 매분, 매초마다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길에 두 사람이 있었다. 길을 잃었었다. 토론토는 한국과 같아서 매우 번잡하다. 멀리서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냥 너무 바쁘게 지나치는 것이다. 그때 저는 멈췄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완전 처음보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등을 보이지 않는다. 내 일은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길을 잃으셨어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제 말 이해하세요? 어디 가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15초만에 그들은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웃을 수 있었고, 그들도 웃을 수 있었다. 주님은 좋으신 분이다.
우리가 더 잘 해야할 부분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방금 찬양으로 그것을 말했다. No turning back. 등을 돌리지 않는다. 사랑은 미소에서 오고, 가슴에서 온다. 당신이 미소를 짓는다는 것은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현이다. 사랑은 국경이 없는 언어이다. 예수님도 International language였다.
제가 아름다운 서울에 왔는데, 이번 주에 어딜 가나 어깨가 하나 나온다.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토론토에서는 여기서 저기 뒤정도까지 걸어가는데 한국 사람 3명, 일본 사람 4명, 중국 사람은 10명, 자마이카 사람 5명, 러시아인 20명, 인도사람 5명, 파키스탄 사람 10명 정도를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토론토는 아주 국제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토론토에는 항상 길을 잃은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여러분도 많이 길을 잃어버리신다. 너무 바쁜 곳이고, 너무 크다. 서울은 토론토의 4배정도 면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해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더 성장하도록 반드시 애써야한다.
예슈아 비전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주 특별한 목적이 있다. 이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특별한 뜻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 이웃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분의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형제, 자매를 위한 사랑은 강하다.
한국에서 이번 주에 내 친구와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해서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많은 교회들과, 많은 목사님들과, 많은 개인들과도 나누었다. 어딜 가도 삶에 이스라엘이 이렇게 깊이 들어온 공동체를 찾을 수 없다. 왜냐면 여러분은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배울 필요가 없다. 유대인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유대인을 향한 사랑은 점점 이 교회 바깥으로까지 성장하고 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의 이스라엘을 여러분들의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이곳에 오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나누는 것이다.
이 교회를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라도, 딱 정해진 때에, 딱 맞는 순간에, 하나님은 너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나누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뭐라고? 왜? 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주에 이미 많이 경험했다. 뭐? 왜? 한국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별로 신경을 안 쓴다. 당연히 그래야한다. 하지만 여기에 엄연히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아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것도, 이번 주에 만난 다른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로 기쁨을 느낀다. 이스라엘에 사랑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으로 기쁘다. 우리는 행할 일이 있다. 그리고 신나는 일이다. 나의 이스라엘은 작년 9월달에 다비드 목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곳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도 있고, 토론토에도 있고, 플로리다에도 있고, 중국에도, 북한에도 있다. 이스라엘은 모든 곳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오크 나무에 접붙혀진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서로 우리 이웃과 함께 샤밭의 빛을 비춘다. 나는 주님께서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여러분 하나하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
6주 전에 이스라엘에 있는 네베 마이카라는 고아원에 갔었다. 아이들과 점심도 먹었다. 아이들이 예슈아 비전교회에 고맙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도와주고 있는 그 사람들이 축복이다. 하지만 그분들은 여러분들의 의무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주님께 절대 등 돌리지 않을 것이다.
제가 여기에 온 유일한 목적은 여러분이 저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놨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이 방에서 작년 9월에 말이다. 왜냐하면, 그때 제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저는 항상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지만, 그때 여기서 불이 켜졌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꼭 물리적인 이스라엘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함께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있고, 어딜 가던지 있다. 너무 쉽고 간단하게 해주셨다. 우리는 복잡한 대답을 얻을 필요가 없다. 목사님의 3단어가 내 머리를 쳤다. 내 이스라엘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제가 어딜 가는 어디에든 있다. 그래서 웃고, 사랑을 마음에 품고, 증명하라. 나도, 너도 헌신하라.
- 내일 뭘 사러 가시는 분 있는가? 내일 한 가지 실천해보라. 길을 걸어가실 때, 웃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을 보라. 그리고 그냥 웃음을 한번 지어주라. 그들의 하루를 그것으로 인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그 순간으로 인해서 하루 전체가 바뀐다.
예술에 전당 근처에서 두 여인이 앉아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그분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분들은 제가 뭔가 다를 것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랐는데, 저를 보고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제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미소지어줬는데 거기서 사랑을 느꼈다. 너무 쉬운 것이다. 미소 하나로 말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이처럼 쉽다. 길 잃은 사람을 돕는 것은 이처럼 쉽다.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해서 더 기도하는 것이 쉬운 것이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은 절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샤밭의 빛을 저에게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예슈아 비전교회는 영원토록 저와 함께할 것이다. 저는 기도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예슈아 비전교회에 있기를 매일 기도한다. 여러분을 매일 생각한다. 여러분들 중에서 몇몇은 기억도 난다. 우리는 단지 한 시간 만났는데, 이미 가족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다비드 목사님
지난 초막절에 보고 왔던 고아원 아이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고, 이스라엘을 향하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그 아이들을 돕고, 사랑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작은 것일 수 있다. 그 작고 쉬운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이 전파된다고 믿는다. 작년 한 해 동안 작지만 3000만원 정도의 재정을 흘려보낼 수 있었고 우리는 계속해서 No turning back, 이번 초막절에 가서도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것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대로 계속해서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것이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나랑 뭔 상관이 있냐? 그래도 중요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Stranger, 나랑 뭔 상관이 있냐고 생각되는 민족이 이스라엘이다.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 따위를 내가 왜 사랑해야 하느냐?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나랑 전혀 상관이 없다. 그것은 나에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받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도 제일로 가짜 사랑을 하는게 부부들이다. 부부들끼리는 이쁘니까, 내 맘에 드니까 사랑한다. 그 이야기는 내가 다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들이 진정한 부부가 되는 때가, 정말 마귀가 되었을 때이다. 상대가 정말 미워졌을 때이다. 그럴 줄 몰랐다. 이럴 때 부부는 진짜 부부가 된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내가 사랑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내가 돌려받을 길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전혀 돌려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한 남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부부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코라흐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다. 코라흐, 시체의 삶이란 사실 나한테 오는 것을 기대하고, 올 것을 소망하고 고핫 자손으로 성물도 메고, 레위 자손으로 엄청나게 일해서 엄청난 지위까지 올라갔다. 나에게 올 것을 예상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올 기미가 안 보인다. 차라리 약속의 땅보다, 지금 지위를 최고까지 높이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은 것이다. 이게 코라흐이다.
늘 깊은 곳 속에 받기 위한 것이 들어있다. 이번 주간은 주님이 이것을 뿌리뽑는 주간이다. 그것이 싹 뿌리뽑히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Stranger에게 미소를 보일 수 있다. 내 사랑하는 현*이에게만 미소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Stranger에게 스마일 할 수가 있다. 전혀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보이기 시작한다. 그전에는 나에게 받을 수 있는 사람만 눈에 들어온다.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기 시작한다.
하루하루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간다. 이게 우리의 카르, 본질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사랑을 주고, 우리의 생명을 주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이게 우리의 선함이다. 여러분들이 다윗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우리가 다윗에게 뭘 받으려고 하는게 아니지 않는가?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는게 없어도, 내가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고, 그게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미혹해서, 내가 받은 것을 체크하게 하고, 상처받은 것을 체크하게 하고, 뭘 줬냐를 가지고 싸우게하고, 뭘 받을 거냐를 놓고 싸우게한다. 우리는 이 순간, 이 시간,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줄 뿐이다. 그게 우리의 본성이고, 하나님이 다윗이를 통해서 우리를 회복시키고 있는 그런 시간들이다.
화요일 날은 은*이가 계류 유산을 했다. 아이가 성장하지 않아도 유산한 케이스인데, 아직 자궁에 남아있어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했다. 은*이가 이야기하는게, 다윗이는 나도 살린다고 했다. 다윗이는 병원에 있지만, 다윗이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겪었어도 의연할 수 있고, 다윗이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의연하게 유산했음에도 주님 앞에 서는 모습을 보았다.
다윗이는 가장 연약한 생명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우리를 살리고 있다. 우리를 살아나게 하고 있고, 우리에게 삶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있다.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체크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 스올,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의 본성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그냥 우리는 Just Give, 그냥 주는 것이, 다른 존재를 위해 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쉬운 일인 것이다.
다윗이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기적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혈압이 떨어지지 않고, 물을 먹을 수 있게 되고, 물 1cc먹는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것이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물 1cc, 그것을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윗이가 특수 분유를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엄마 젖도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하고, 성장을 해야 수술을 할 수가 있다.
물, 사실 진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한 진리이다. 나를 위한 진리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한 진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다. 더욱 더 다윗이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란다. 우리 몸이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진리를 사용할 때, 나를 체크하기 위해서 진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냐고 진리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진리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진리를 사용한다면, 다윗이의 피는 정상이 될 것이다. 우리 몸이 그런 몸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우리 몸이 그런 물을 마신다면, 다윗이는 거뜬히 그 물을 마실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는 다음 스테이지로 걸어갈 것이다.
* 기도
주님, 나 같이 악하고 이기적인 자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삶의 시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끊임없이 이 몸의 피를 더럽히고, 그래서 심장과 폐의 기능을 저하시킨 나의 이 이기적인 진리를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사용했던 이 죄악을 회개합니다. 돌이킵니다. 이제 이 몸이 진리를 마실 수 있게하여 주십시요. 우리 다윗이가 우리와 한 몸임을 우리가 고백했었습니다. 이제 이 몸에서 다윗이가 살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간, 다윗만이 살아있습니다. 다윗이가 우리를 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고, 이제 다윗이 물을 먹게하여 주시옵소서. 그 아름다운 눈망울에 다윗이에게 기쁨의 눈물이 맺히게 하시고, 그 아름다운 입에 아기다운 울음소리가 나오게하여 주십시요. 주님을 아바 아버지라 다윗이 부르는 그날, 온전히 주님만이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다윗이란 이름은 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자체이기도 하다. 마치 다윗은 이스라엘이 2000년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서 오늘날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오늘날도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어쩌면 다윗은 또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이 다윗이의 세 번째 샤밭이다. 매 샤밭마다 다윗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사랑해주자. 이스라엘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2/3가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조차도 암 바이러스를 주사해서 생체실험을 했고, 다윗이가 가졌던 모든 질병을 이스라엘에게 생체실험을 했다. 그렇게 망가졌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러냐면,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우리가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 시간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는 우리가 잘남으로 구원을 받은 것 같지만,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받았다. 하나님 이제는 이스라엘을 살려주시옵소서. 우리가 더 이상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메시아를 압니다. 그냥 나 구원받으려고 하는 신이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압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셔도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구원하셔도 됩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합니다.
하나님, 이 하나님의 모사를 누가 알겠습니까? 왜 이스라엘에게는 죽음이 역사하고, 그로 말미암아 내게 생명이 역사하는지요. 반드시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야만 왜 많은 열매가 나오는지요? 주님.. 내가 만약에 생명을 얻었다면, 누군가가 죽은 것입니다. 주님,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면, 누군가가 죽은 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면 누군가가 죽은 것입니다.
주님.. 이제 이것을 보게하여 주십시요. 이스라엘이 죽음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이스라엘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내가 죽는다면, 나의 이기심이 죽는다면, 이스라엘도 살 것입니다.
금요일(여섯째 날) 에스더 자매
민16:20-43(To), 살후2:1-4(신약)
슐라흐 레카에서는 악한 혀에 대한 문제였다면, 코라흐에서는 악한 눈에 대한 것을 다뤘다.
오늘 토라포션의 제목은 코라흐이다.
קֹרַח 코라흐
내가 가지지 않은 것을 보는 것, 내가 보기 좋은 것을 나를 위해 취해오는 것이 코라흐의 주제였다.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이름, 대대의 교훈으로 남는 이름, 자신의 소망(ק)을 나의 머리(ר)로 두는 자인데, 그 소망이 나의 소망을 나의 머리로 두었던 자가 바로 코라흐였다. 이미 우리 삶에 나에게 올 것은 정해져있다고 했다. 나에게 올 사람, 직업, 재정,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올 것은 정해져있고, 그것이 티쿤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완성하기 위해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덕지덕지 붙이고 취하는 것이 코라흐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티쿤, 하나님이 원래 정해두신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취하려고 하는 코라흐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올에 빠지게 되었다
스올 : 지옥 = שָׁאַל 샤알 : 질문하다
= 질문만 있고 답이 없는 상태
결국 고라는 땅이 갈라져서 삼킴을 당한다. 땅은 자기 마음인데, 고라는 자기의 마음을 갈라져 삼킴당하게 된다. 그 사람에겐 계속된 질문만 있다
- 저 사람은 왜? 왜 쟤만 저게 허락됐지? 이 상태가 지옥의 상태, 답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금 제사장과 레위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제사장이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가? 제사장은 전적으로 주는 사랑, 주는 의지이다. 레위는 주기 위해 받는 존재이다. 원래 제대로된 레위라면, 제사장을 서포트하기 위한 존재이기에, 주기 위해 받는 의지이다. 우리 안에 제사장과 레위가 있다. 주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어떻게하면 쉐어하고 나눌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는 제사장이 있고, 말씀이던 뭐던 받으려는 의지인 레위가 있다. 레위는 훈련에 대한 계시이기도 하다
레위가 제사장에게 종속되어야 하는데, 받는 의지는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하는데, 그게 뒤바뀌면 고라가 된다. 나도 주겠다. 주는데, 자신 자체가 받는 의지이기에 순수하게 줄 수가 없다. 모양은 주는 모양인데, 이면에는 꿍꿍이가 있다. 그 증상이 나를 체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받은게 뭐냐는 것을 체크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절정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질서와 상관없이 레위가 제사장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시기와 질투라고 했다. 시기와 질투는 잘못 생각하기 쉽다. 감정적인 영역에서 말이다. 제가 질투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분내하고, 감정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유치한 것이 아니라, The Man와 완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는 상관없고, 자기가 보기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고, 자기가 받은 것을 체크한다. 받는 존재인 레위가 제사장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Give to receive, 자기가 머리가 되려고 하는 상태가 고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의 영향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멈추지 않는다. 고라의 영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이, 각 지휘관들에게 지팡이를 가져오게 하라는 것이었다. 고라의 영향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처방전이 바로 지팡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מָטֶה 마테 : 지팡이
가운데 테트가 있는데, 진정한 토브, 선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 좋았더라 하는 토브, 이 토브(ט)에 대한 진리(מ)로 계속 호흡(ה)하는 것이다.
정말 태초부터 주님이 결정하신 선한 것이 뭔지, 내가 보고 생각하기 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신 선, 계획이 뭔지를 보여주시겠다. 그것으로 내가 진리를 호흡하겠다는 것을 가져올 떄, 그것을 내가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에 대한 진리를 호흡하겠다는 것을 가지고, 내 안의 모든 지휘관이 그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각 지휘관이 12개의 지팡이를 가져왔을 때 일어났던 일이 뭔가? 레위에게 할당된 지팡이에게 이름을 아하론이라고 썼는데, 아하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싹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일이 일어났다
אַהֲרֹן 아하론 : 아론, 신성(א)을 호흡(ה)하는 것을 나의 머리(ר)로 규정(ן)하겠다.
고라가 해당되었던 레위 지파 지팡이의 아론의 이름을 적는다. 신성을 호흡하는 것을 나의 가장 으뜸으로 삼는 것을 규정으로 삼는 것이 아론이다.
하나님이 내가 바로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내가 너의 분깃이요 기업이라고 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만이 기업인 자가 아론이다. 우리의 머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레쉬모라고 한다고 배웠다.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이 바로 머리가 되는 것이다. 오직 그분을 위해 사는 믿음, 그분만을 의지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이 중심으로 세워져야하고, 거기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아론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성막에 가까이 가지 못한다. 오직 그분을 위해 사는 믿음이 쉬운 말인 것 같으나, 엄청난 말이다. 그분만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아론의 지팡이, 내가 신성으로 호흡하는 것을 내 머리로 규정하겠다, 그리고 그분만을 위하는 믿음으로 내가 살겠다. 그것이 나의 삶의 목적이다. 100%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고 하는 자들, 그 선의 진리로 내가 호흡하려고 하나님 앞에 지팡이를 들고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님이 보여주시는 것이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게 하신다.
פָּרַח 파라흐 : 움이 돋다, 열매(פַר)맺는 삶(ח)
- 열매를 맺기 위한 울타리가 되는 삶
아론, 신성을 호흡하는 것을 내 머리로 규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때, 열매가 맺히는 삶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내 삶의 이유는 그분을 위한 것이다. 신성을 살기 위한 것을 머리로 두고, 그것이 변치 않는 나의 규정이다. 아론이 리더십인 것을 부인하지 말라고 한다. 네 삶이 어떻다고, 받아들이기 싫다고, 부정하면 안된다. 그 삶을 다 살아내라는 것이 아니라, 네 삶이 너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 그러면 너의 죽은 것 같은 삶에, 마른 막대기에 움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을 내가 보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오라
정말 삶의 목적이 그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른 것이 머리가 아니라, 신성을 살기 위한 것이 나의 머리여야 한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 인생을 괴롭게하는 사건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떻게 그게 처리될 수 있고, 어떻게 나의 환경이 바뀔 수 있고, 좀 더 나은 나를 만들 수 있고, 좀 더 나에게 좋은 것을 끌어올 수 있을까? 이 짜증나고 답답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고, 어떻게 마음졸이지 않는 삶을 구축할 수 있을까? 또 외부에 탓을 돌릴 수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저 사람을 바꿀 수 있지? 고라처럼 모두를 위해서 상황을 낫게 개선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이 나의 머리가 주님이 되어있지 않고, 주님이 나의 목적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내 마음속의 소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결국 주님의 손을 인정하지 않고, 나에게 셋팅된 주님의 뜻과 목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이 하나님의 신성을 호흡하기 위한 셋팅이라고 바라보기 위한 머리가 내게 있는가? 내 삶의 목적이 바로 그분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기 원한다. 그렇게 내 안에서 그 신성을 호흡하는 것을 머리로 하겠다는 것을 규정하는 삶으로 나아갈 때 열매맺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주님이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움이 돋고, 거기에 꽃이 핀다
צִיץ 찌쯔 : 꽃이 피다, 하나님의 손(י)에 의해서 주님의 의(צ)가 바로 나의 의(צ)가 되게 하시는 것
= 찌찌트
하나님의 명령, 계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의가 내 의가 되게 하신다. 방종하는 삶, 내 눈에 당장 보기 좋은 것을 따라가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따라가는 것을 멈추고 의의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찌찌트였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주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정말 그분만을 위하는 믿음, 그로 인해 신성을 호흡하는 것을 머리로 규정하는 삶을 살 때, 어떤 상황에서건 주는 것이 목적인 것을 나의 최고 리더십으로 삼는 것이다. 으뜸 사상을 물어보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으뜸 사상인 사람은 상황과 사람을 볼 때 모든 것을 공산주의의 관점으로 본다. 관점이 나를 지배한다. 나의 으뜸 사상이 아하론이 될 때, 주님이 꽃이 피게 하신다
이제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의가 내 의가 되게 하시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그분만을 위한 믿음의 지팡이에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가득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것이구나 하는, 진정 봐야할 것, 탐스럽게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봐야할 것을 보는 빛이 임하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구 열매가 열린다
שֹׁקֵד 쇼케드 : 살구 열매, Watch, 파수꾼
예레미야가 살구 나무를 보았다. 또 주목하여 보다는 뜻이 있다. 성벽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뜻이 있다
= 형상(שׁ)의 소망(ק)에 종속(ד)되는 것 : 그 형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소망에 종속되는 것이다.
주목해서 보는데, 모든 과정을 보는 것이다. 파수꾼은 일련의 시작과 끝을 아는 자이다. 창세 전부터 완성까지의 청사진, 그 과정을 보는 것이다. 어떤 공장에서 일을 하면, 과정과 완성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태도가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모르는 자는 나사 하나가 떨어져있으면, 작은 부품 하나를 발로 차버리기 일쑤인데, 과정과 완성을 아는 사람은 이 부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필요한지 알기 때문에, 그 작은 나사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한다
진정한 과정과 완성에 대한 청사진이 있을 때, 발로 차버리면 시원할만한 저 지체, 가치도 없어보이는 존재, 내가 이런저런 수많은 판단을 하고, 얘는 발로 차도 돼? 아니어도 돼? 그러나 완성을 아는 자들은 태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 삶에서 갈리는 수많은 작업들이 왜 필요한지, 내 삶에 왜 이러한 것이 왔습니까? 이것을 이렇게만 보면, 이 70년의 인생만 보면, 이게 다라고 보면 이해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되지만, 전체, 완성을 보는 자는 인내하며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을 위한 과정에 필요한 순서이구나. 이런 자가 진정한 연합과 샬롬의 삶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조각의 중요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마른 나무가지에서 움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것을 보여주시면서, 너희가 지금 죽음의 상태에 있지만, 내가 너희를 반드시 부활의 생명으로 옮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이것을 보게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원망이 그치게 된다고 하신다. 이것이 반역한 자에 대한 나의 표징이 되게하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신다. 왜 아론만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고라의 영향력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멈추게 된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봄으로 이것을 멈추게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원망을 그치라. 네 안의 원망들, 고라와 같이 행하지 말고, 내가 정한 질서대로 아론을 머리삼아라. 제사장을 머리삼아라. 특별히 레위는 제사장을 섬기라. 너와 제사장은 함께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볍게 듣는지 모른다. 저는 지체들의 말에는 엄청 영향을 받는다. 지체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하루 종일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다고 하시면, 늘 뻔한 말씀이고, 누구에게나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저 형제는 내 눈 앞에서 오감으로 와닿게 말을 한다. 무엇이 실제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엇을 실제로 여기고 살고, 어디서 살고 있는 것일까? 주님이 오늘 하신 이 말씀이 나에게 빛이 되고, 무엇이 영원히 남는 것인지 볼 수 있게 되길 기도한다.
오늘 민18장에 주님이 다시 어떤 질서를 세우시는 것을 보게된다.
제사장은 성소에 대한 죄와,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담당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레위 지파는 제사장과 함께해서 그를 돕게한다. 아론에게 주신 몫, 아론에게 주님은 거제물을 영원한 몫으로 주시고, 남자들이 먹게 하신다. 아론은 기업이 없지만, 내가 바로 분깃이고 기업이 되리라고 하신다.
첫 번째 아론은 성소에 대한 죄를 담당한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
민18: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조상의 가문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עֲוֹן הַמִּקְדָּשׁ 아본 하미크다쉬 : 성소에 대한 죄
- 거룩에(קְדָּשׁ) 대한 사역(מ)이 있는 것이다. 장소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 실제로 표현되고, 그것이 사역하는 것이다.
קָדֹשׁ 카도쉬 : 거룩, 형상(שׁ)의 소망(ק)에 종속(ד)되는 것
עֲוֹן 아본 : 죄, 나의 관점, 습관(ע)인데, 나의 관점(ע)에 신실한(ן) 것이다.
관점은 일관된 것을 보게하는데, 거기서 습관이 나온다. 항상 내가 보는 관점이 있는데, 내가 보는데서 습관이 나온다. 내가 모든 것에서 형상에 종속되는 것을 소망하는 거룩을 보면 거룩의 습관이 나오고, 판단의 관점이 있으면 판단의 습관이 나온다. 아버지의 죄를 3-4대까지 보응한다는 것은 아본은 공동체의 시스템이 되고, 가정 안에서 시스템이 되는 것을 보게된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관점, 습관에 영향받기 때문이다
제가 뱃속에 아이 발달 과정을 찾아보다가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것을 보았다. 거의 부모 멱살을 잡는 초딩이 나오고, 4-5살인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침 뱉고, 안경을 밟아 부수는 아이들이다. 어떻게 이런 패륜아가 있을까하는데, 생각보다 흔하더라. 그 아이들의 특징이 부모가 인식 못하던, 그것을 그대로 닮는 것이다. 우리 아이가 문제가 있다고 고쳐달라고 하는데, 부모님은 나이스 해보이나, 그것을 몰래카메라로 보이고, 면담하고 상담하면,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이에게 그대로 있는 것이다. 부모는 어른이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기에 안 드러날 뿐이지, 아이가 그것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엄청 무섭더라. 그대로 나타난다. 어릴수록 직빵이고, 클수록 자기 생각을 덧붙이면서 달라진다. 그것이 관점과 습관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관점과 습관의 파워가 한 공동체, 특히 가정안에서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말이다
내가 어떤 습관을 가지는가? 제사장은 거룩에 대한 습관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우리 속에 거룩에 대한 습관, 내가 그 형상을 소망하는 것에 대 소망을 종속시키겠다는 것을 담당하는 자이다. 그것을 습관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담당하는 것이 제사장이다. 계시보다 실제적이고 강력한 것이 습관이다.
עֲוֹן כְּהֻנַּתְכֶם 아본 케후나트켐 :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
from כֹהֶן 코헨 : 제사장, 적용(כ)하는 것을 신실(ן)하게 호흡(ה)하는 것, 교정하는 것이 나의 규정이 된 것이다.
호흡하는 것을 적용하는 것이 나의 규정이 된다. 적용을 신실하게 하려고 하는 자이다.
כָכָה 카카 : 원래 그런 것이다
- 원래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카카를 습관화하는 것이 제사장이다.
어떤 것이 왔을 때 적용을 신실하게 하는 것이다. 내쉬는 호흡을 위한 적용을 신실하게 하고, 카카를 습관화할 수 있는 것이 제사장이다.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제사장이 이 모든 것을 들어올린다
그런데 훈련에 대한 계시를 받는 레위는 제사장과 함께 있어야 한다. 절대 제사장 위로 올라가면 안된다. 모든 것은 주는 사랑을 위해서, 이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 이것들을 서포트하기 위해서 옆에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 주도해서 레위가 돕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훈련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만들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한 훈련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훈련에 대한 욕구가 더 가득찬다. 레위 지파가 급 부상하면서, 훈련하고 말거야 하고 으샤으샤 하는데, 이것이 제사장 아래에서 서포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주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소망하는 것에 종속되는 것이고, 신실하게 주는 호흡의 습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훈련이 아니라, 제사장으로부터 무엇을 훈련해야 할지를 받아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 세워져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이 아론에게 주시는 몫이 뭔가?
תְרוּמָה 테루마 : 거제물
from רָם 람 : 들어올리다, 들어올려서 드리는 예물이다
주님이 완성, 상승을 위해서 넣어두신 것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물을 가지고 나아올 때 내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원래 내 것이 없기에, 주님 것을 주님에게 드린 것이다. 완성하기 위해서 주님이 내게 넣어두셨던 것들이었다. 너는 그것을 다루라. 그것이 바로 네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기 위해 넣어두신 핵심적인 것이 있는데, 제사장은 그것을 몫, 음식으로 삼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완성을 향해 넣어두신 것을 발견하는 것, 제사장은 그것이 음식이다. 다른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위해 넣어두신 것을 발견하며 살게되면, 삶에서 쓸데없는 것에 허비하고 살게되지 않는다. 완성을 위해 이런 것을 넣어두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음식이 된다. 이것을 남자들이 먹으라고 하신다.
כֹל זָכָר 콜 자카르 : 모든 남자, 모든 기억
- 기억이 이것을 먹고 살아난다.
나의 기억이 아무거나 먹으면 안된다. 나의 육신, 오감이 생생한 기억이라고 한다. 영의 세계에서는 이게 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른다. 똥을 내 것이라고 하면, 빨리 물 내리고 흘려내려야 한다
자연치유에서도 보면,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보통 장청소를 시키더라. 청소할 때, 엄청나게 배출을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이렇게 많은 것이 들어있었다니, 정말 오래된 숙변이 얼마나 많은 독소를 내뿜으면서 괴롭혔는지 놀란다. 내 안에 배출되어야 할 똥을 배출하지 않고, 또 먹는 것, 영의 모습이 그와 같았을 것이다. 내 안의 상처와 아픔이 나의 기억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제사장이 살아나면 기억이 살아나게 된다. 주님이 정해둔 것이 있다. 나의 원래 기억이라는 것이 정해져있다. 내가 정하고 경험한 것이 기억이 아니다. 이 개념이 파괴되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할당된 기억이 있다. 에하드의 기억,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기억,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것에 대한 기억이다
나의 콜 자카르, 기억들에 제사장이 회복되면 이런 것들이 작동된다. 하나님이 넣어두신 것들을 발견하고, 나의 콜 자카르는 이것들을 먹기 시작한다.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주님이 주신 가장 큰 분깃과 유업, 기업이다.
חֶלֶק 헬레크 : 분깃 / נָחָל 나할 : 유업, 기업
חֶלֶק 헬레크, 분깃이라는 것은 삶(ח)을 세워나갈 수 있는 자산이 되는 것이다. 어떤 청년이 빚을 물려받고 시작하느냐, 재산을 물려받고 시작하느냐에 따라 삶이 다르다. 내 속의 아론은 주님 자신이 분깃이기에 절대 망할 수 없다. 계속해서 주는데, 거덜날 수 없는게 아론이다. 주님이 그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론에게 분깃이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주님이 נָחָל 나할, 기업이시다. 기업을 잘 물려받는 것이 일본이다. 몇대에 걸쳐서 아버지들의 기업을 물려받는다. 우동집의 기업을 만들면 우동 만드는 사람이 된다. 아버지처럼 된다. 하나님이 너의 기업이 나라는 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 나의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약속되어있다. 너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약속되어있다. 그 믿음 안에서 계속 걸아가게 된다. 주고 또 주는 사랑, 그것이 얼마나 나를 위태하게 만들고, 나를 죽을 것 같이 만드는데, 그것에 대해 주님이 내가 너의 분깃이기 때문에 너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주고 주어도 거덜날 수 없는 것이 삶이고, 너는 나처럼 될 것이라는 소망, 그것이 나에게 믿음을 주고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기업인 아론, 내 삶의 목적인 이것이다. 신성을 머리로 삼는 것이 나의 규정이다. 내 삶의 목적은 주님뿐이라고 하는 아하론, 그것이 내 삶의 머리가 될 때 제사장 직분이 살아나고, 레위는 제사장을 서포트하는 질서로 들어가고, 그러한 아론에게 주시는 분깃, 기업에 대한 약속 안에서 우리가 이 길을 전진해 갈 수 있다.
내가 오늘 오감으로 느끼고, 내게 들리는, 내게 보여지는 그 1%의 세계를 더 실제라고 여기며 아둥바둥하는 삶이 아니라, 정말 살아 역사하시는 99%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이 소망이 우리 삶을 주장하는 하루가 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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