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2004.2.1(일)
07:00반선출발-07:25석실-07:40금포교-08:10병소-08:40제승교-09:40이끼폭포-10:20출발-11:30좌측능선으로 붙기시작함-13:30묘향암-14:20출발-15:30반야봉 헬기장-15:45달궁-심원 갈림길-18:50심원-19:30반선
친구 남원O적, L 선생과 오랜만의 지리산행이다. 이렇게 셋이서 오붓하게 지리산행을 하게 된 것은 2년 만의 일이다. 그때는 중산리 민박집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을 함께 올랐었다. 밤늦게까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곡차를 많이 마신 탓에 L 선생은 아주 힘겹게 천왕봉에 올랐던 거로 기억된다. 정읍에서 전주로 이사한 L 선생을 만나 일요일 오전 6시 남원O적과 남원시청에서 만나 뱀사골 들머리인 반선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오늘의 코스는 남원O적과 1년 전에 올랐던 이끼폭포와 묘향암 반야봉으로 잡았다.
아직 캄캄한 반선 마을에 주차한다. 순간 관광버스 한 대가 등산객을 가득 싣고 성삼재를 향하여 질주해 올라간다. 성삼재까지 차량 통행이 원활히 잘 되는 모양이다. 3명의 산꾼은 내린 눈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초입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지름길을 택해 뱀사골을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석실과 와운마을 초입을 지나 계곡 왼쪽 길을 따라서 산행이 이어진다. 뱀사골 산행은 꼭 1년 만이다. 저 멀리 토끼봉이 아스라이 보이고 금포교를 건너자 아늑한 안부 화개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꽁꽁 얼어붙은 뱀사골. 여름이면 아마도 지리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피서지가 뱀사골이 아닌가 싶다. 지리산행 들머리로 자주 뱀사골을 찾아 아마도 나에겐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지리산 골짜기의 하나가 바로 뱀사골이다. 지금은 나의 반쪽이 되어버린 아내와 뱀사골의 야영 추억도 있다. 아련한 20년 전의 일이다. 하도 많은 사람이 붐벼 이제는 계곡 자체가 휴식년제에 들어간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옛날 이곳에 백암사(배암사)라는 절이 있어서 지금은 뱀사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실제로 뱀사골에는 약효가 좋은 뱀들이 많아 마을 주민들이 소득을 올렸다고 하는데 뱀이 많고 뱀에 관한 전설이 많아 지명이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다. 묘한 지명이 그 어느 골짜기보다도 많아서 재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뱀사골에는 칠선계곡과 한신계곡처럼 폭포는 없지만 넓은 암반과 계류가 단풍과 어우러져 아름다워 가을에는 피아골과 견줄 만 하다.
병소를 지나 계곡 좌측에 멋지게 설치된 목조다리를 따라 우리의 산행은 계속 진행이 된다. 곧 제승교를 지나 뱀사골 산장 가는 길을 버리고 반야봉의 북쪽 사면인 우측으로 진로를 바꾼다. 이름하여 이끼폭포 가는길. 이곳에 들어서자 북쪽 사면에 자리 잡은 좁은 계곡은 많은 눈이 녹지 않고 한겨울을 그대로 보내고 있다. 최근 눈이 내린 후 산님들의 출입이 없었든지 계곡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얼어붙은 바위를 걷다가 왼쪽 발이 살얼음에 빠져 등산화를 적시고 만다. 초반부터 조짐이 좋지 못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등산화를 벗어 젖은 양말을 짠다.
눈이 내린 후 아무도 찾지 않은 이곳에서 묘향암을 찾아 나서는게 쉽지 않아 다소 마음이 부담된다. 계곡 우측의 너덜지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우리의 1차 목적지인 이끼폭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40분 무렵이었다. 이끼폭포는 오늘도 두꺼운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었고, 이곳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고자 물을 끓인다. 지금까지의 산행은 아주 순조로왔지만 이끼폭포를 지나면서 고행은 차츰 시작되었다. 계곡을 두어 차례 건너며 표지기를 따라 좌측 능선으로 붙은 후 심마니 능선을 뒤로 한 채 고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좌측으로는 명선봉과 중북부 능선이 우뚝 솟아있다. 현재 고도에서 아마도 한참을 치고 올라야 묘향암에 이를 것이다. 경사는 점차 가팔라지고 적설량이 많아 스틱을 찍어가며 손이 발이 되어 기기도한다. 두 걸음 오르다가 세 걸음 미끄러진다. 길은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으나 표지기들이 가끔 고맙게 나타났고 감각적으로 묘향암을 향하여 산행은 원만히 진행된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 L 선생은 힘겨운 모습이다. 그나마 어제 만나서 한잔 술도 하지 않은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하늘은 많은 눈을 뿌릴 듯 온통 어두운 잿빛이다.
아아! 지리산 서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반야봉이여. 나는 항상 반야봉에 오를 때마다 힘겨웠고 늘 반야봉이 두려웠다. 후의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오늘도 나는 반야봉 그 언저리에서 12시간이나 헤매게 된다. 고도를 높여 나가며 묘향암으로 가기 위해 차츰 좌측으로 붙었고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삼정산과 영원령이 대충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명선봉과 토끼봉의 능선이 멋지고 화개재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직도 고도를 더 높여야 한다. 과거 묘향대 암자 툇마루에서 바라본 시야가 명선봉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GPS나 고도계가 있다면 정확한 묘향대길 포인트를 잡을 수 있지만, 장비가 없는 나는 경험의 눈대중으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이젠 표지기는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산행은 그만큼 지연된다. 오르다 아닌가 싶으면 되돌아와 허덕이는 체력을 달래며 묘향대 찾기 산행은 이어진다. 혹시 이러다가 반야봉으로 직접 바로 오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과를 한 개 베어 먹으며 동료들을 기다린다. 남원O적도 체력이 소진되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을 따라 올라오겠지.
얼마나 올랐을까. 묘향암을 안내하는 조그만 이정표가 눈 속에 파묻혀 빵긋 모습을 드러낸다. 아아. 제대로 찾아왔구나. 반가움에 큰소리로 외친다. 어이! 다 왔네. 바로 여기야. 조금 더 오르니 묘향암 텃밭에 그동안 못 보던 돌탑이 세워져 있다. 3명의 산꾼은 인적없는 묘향암에 불청객으로 그렇게 들이닥친다. 앞마당은 햇빛을 아늑하게 받고 있었으나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하얗게 덮고 있어 지리산의 겨울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나는 이미 등산화가 모두 젖어 다시 등산화를 벗고, 양말을 짜내 다시 신고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점심을 준비한다. 식사래야 준비해온 김밥과 떡, 라면, 그리고 김치. 하지만 나에겐 사랑하는 친구가 있는 진수성찬이다. 작년 이맘때는 산행이 일찍 이루어져 이곳에 11시가 되기 전에 도착하였고, 따뜻한 햇볕에 몸을 맡기며 지붕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팩 소주를 꺼내 3개의 잔으로 성공적인 묘향암 산행을 위해 건배한다.
식사를 마치고 땀이 식자 추위가 곧 엄습해 온다. 남은 흰떡 1봉지는 묘향암 마루에 시주를 한다. 벌써 오후 2시 반. 겨울 지리산의 하산으로 늦은 시간이다. 아직 반야봉에 오르는데 1시간 정도 예상되니 서둘러야 한다. 우리가 올랐던 이끼폭포 가는 길을 버리고 다시 반야봉을 치고 오른다. 역시 이곳도 러셀이 전혀 되어있지 않아 다시 고행길은 시작된다. 오를수록 낮아지는 중북부 능선과 토끼봉. 그리고 지리 주능선을 바라보며 계속 고도를 치고 나간다. 다행히 숨바꼭질하듯 나타나는 표지기를 찾아 반야봉 정상을 향하다 심마니 능선을 만나 힘을 얻었고, 반야봉 헬기장에 도착한다.
반야봉 헬기장에서도 조망은 가능한데 날씨가 흐리고 가스가 퍼져 아쉽다. 천왕봉이 동쪽 끝에 아스라이 보이고, 촛대봉에서 뻗어내린 남부능선의 광활함을 더듬고, 뒤를 돌아 만복대의 서북능선을 조망한다. 지금의 시각이 벌써 오후 3시 40분.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가깝게 하산할 수 있는 심원 마을로 안전하게 하산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3년 전 필O님과 하산했을 때에는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 거로 기억되어 지금 눈이 많다고는 하나 오후 6시 정도면 심원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이었다.
달궁과 심원 갈림길에서 광주에서 온 젊은 남녀 산님들을 만났고, 심원길을 발자국을 따라 하산했는데 그전에 내려섰던 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전의 심원길은 내려서다 바라본 노루목과 임걸령에서 노고단과 종석대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주능선이 아름다웠고, 성삼재가 지척이며 고리봉과 묘봉치, 만복대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의 멋진 풍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달궁과 심원 갈림길을 지나 깊게 박혀있는 발자국을 따라 내려서는데 이곳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돌아서거나 다른 길을 찾아서 진행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이 발자국을 따라 내려서면 우리는 안전하게 하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만복대와 정령치의 고도가 점차 낮아진다고 느끼면서 능선 길을 내려섰는데, 한 시간을 걸었는데도 우리는 반야봉 북릉 사이의 작은 계곡을 따라 빙폭을 만나 엉덩이 미끄럼을 타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다. 나의 생각은 우리가 하산하는 이 길이 심원으로 내려선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어쩌면 얼음골 로 빠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5시가 넘어 점차 어두워져 마음은 초조해졌다. 그렇다고 친구들을 닦달하여 빨리 걸으라고 말할 처지도 아니었다. 혹 서두르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정말 더 큰 일이기 때문이다.
여의봉으로 구름을 부른 손오공이 날아다녀 보았자 부처님 손바닥인 것처럼, 지리산에 익숙한 우리도 10시간 이상을 이 반야봉 언저리에서 힘겹게 헤매고 있다. 정말 광활한 지리산이다. 계곡을 한참이나 내려와서야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내려온 계곡은 심원계곡을 지나 대소골과 갈라져 반야봉 쪽으로 뻗은 이름 없는 작은 지계곡이었다. 대소골과 합류를 하자 낯익은 포에버 님의 빨간 표지기와 백계남 님의 노란 표지기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대소골 본류를 좌측에 끼고 산비탈 길을 따라 걷는다.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캄캄해졌다.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30분이 지났지만, 심원마을의 불빛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이윽고 계곡을 건너 왼쪽으로 붙은 후 걸어 나가자 심원-노고단 3.8km의 이정표를 랜턴 빛에 만난다. 이제 심원마을까지 0.2km가 남았다. 모퉁이를 돌자 나뭇가지 사이로 훤한 불빛이 들어오며 심원마을을 만난다. 반갑다. 12시간의 산행이 마감되며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이다. 다행히 반선 마을까지 심원마을의 차량을 지원받는다. 사륜구동의 테라칸은 얼어붙은 빙판 길을 커다란 엔진소리를 내고 힘을 쓰며 저단으로 내려간다. 우리는 이제야 지리산 자락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아직도 남은 겨울을 오랫동안 떠나보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첫댓글 고생고생 힘들게힘들게 산행하였지만 그것은 행복의순간순간이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