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탐구하는 대상없이 탐구 할 수 없으니 , 탐구하는 마음 잃지 않으며 산다는 것은
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읽은 책 갈무리 합니다.
4장 : 자연속의 나, 내 안의 자연
*
우리 몸은 대략 10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렇게나 많은 세포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를 아는 과정은 어렵고 복잡하다. 또 인간의 지식으론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험을 들기도 하고 백신을 마기도 하며 불안해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몸에 관련된 질문을 품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끝없이 궁금해하며 질문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해 조금씩 알게되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라는 곳에서 혼자 살 순 없고, 생명들 무생명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음식을 먹고 소화하며 필요한 양분으로 삼는다. 이 양분들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키우는 가축들 몸을 이루는 미세한 성분들에게서 와, 그걸 먹은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서 몸을 이루게 된다. 이처럼 사람도 사는동안 몸을 이루는 것들을 흡수하다 죽어 그 성분들과 하나가 된다. 물도 같다. 물은 46억년동안 곳곳을 떠돌다 증발해 비와 눈으로 내린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마신다. 그렇게보면 우리 옆 사람들의 몸을 거쳐 나온 수증기를 호흡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옆사람의 피와 땀을 이루던 수분이 어느덧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세포에 스미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를 알아감으로써 자신의 참 모습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사람이 먹는 음식이 사람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우리는 서로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나누며, 공기와 물과 무기물을 서로 나눠 받는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속에서 다른 생명체와 무생물들이 교류하는 것을 바로 볼때에만 인간의 참 모습을 깨닫는다.
인간과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것들은 진화한다. 자연선택이라는 말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다른 생물체들처럼 인간도 자연의 선택을 받아야만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있다. 무서웠던 신종플루 바이러스도 진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왜냐면 인간 진화를 위해선 돌연변이도 필요한데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돌연변이가 살아남으면 그건 진화이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자' 우리 지구의 균형은 놀랍도록 치밀하게 이루어진다.
만일 대기중에 수증기나 이산화탄소가 없다면 발산된 적외선이 우주 공간으로 방출되게씨마 이들이 있어서 이를 다시 흡수하고 그러므로 지표면은 온실 안에 있는 것첢 열기를 보존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현상이 온실효과이다. 문제는 대기 중에 있느 이산화탄소의 양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다. 지구 역사와 시작된 뒤로 산업혁명 시기까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줄곧 270피피엠 미만이었지만 2009년엔 383피피엠까지 올라갔다. 이게 지구 온난화이다. 인간은 온난화를 막기위해 발생한 이산화탄소를 붙잡아 모으는 기술을 개발하거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지 않게 연료를 개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론 극복할 수 없다.
왜냐면 "자연의 법칙은 인간이 발명하는것이 아니다. 자연에의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이 중심이 아닌 자연, 지구 세계를 중심으로 볼 수 이게 해준다. 따라서 지구 체계 속에서 나의 권리나 의무가 무엇인지 계속 묻고 답해야 겠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장ㄴ을 조금이라도 이해할때까지 말이다. <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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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과 우주의 공통점을 시작으로,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여러 대목들이 나온다.
간단하게 요약해 정리하려한다. 우주에는 약 10조개의 천체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 몸 세포들의 총 개수는 약 100조개 정도 된다고한다. 그만큼 우주와 우리몸은 닮아있고, 우주를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우리몸도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병을 조심하고 걱정하며 지내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곁에 병에 걸린 이를 보고 조금씩 깨달아간다. 곧 질문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우리 곧 인간은 지구라는 곳에서 혼자 살 수 없다는 건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곁의 생물들과 항상 관계를 맺고 지낸다. 우리가 잘 살려면 주변과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알아야된다. 그래서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내며 필요한 것은 모두 곁의 무생물, 생물들의 도움으로 순환해서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계와 한몸인 셈이다. 모든 자연이 그렇다.
인간이 특별해 보일 수 있어도 순환하는 이 세계에 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탐구하고 교류할 때에만 인간의 참모습을 깨닫는다고 한다.
인간이 진화한다는 건 우리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화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다. 다양한 바이러스로 인해 몸은 병에 걸리고 그 일로 우리몸은 알아가고 진화한다. 이런 사건들은 인간과 주변 자연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 없고, 자연과 맺는 관계, 곧 진화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왜 탐구를 하는가?'를 질문한다.
자연을 안다면 우리가 이산화탄소 농도를 200년간 113ppm 올렸다는 걸 알 것이며, 곧 지구온난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지구에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그것이 진호하는 것이고, 지금껏 밝힌 과학탐구에 맞는 길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나눈 이야기들이 '자연속의 나. 내 안의 자연' 대목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리하며 기억에 남는 것은 인간은 혼자가 아니고 특별한 생물이 아니라는 거였다.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데, 나는 계속 혼자하고 싶어하고 독립하고 싶어하고 그런다. 곁의 이들과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자연의 흐름이라는 걸 기억하고 싶고 기억에 남는다. 읽으며 조금 내용이 반복돼 순환 되는 느낌어었는데, 그만큼 머리속에 잘 들어왔다. 이렇게 탐구를 왜 하는지 열심히 설명한 뒤에 어떤 얘기가 나올지 다른 얘기도 궁금해졌다. 내가 정리한 대목은 탐구를 하는 이유를 중점으로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내가 생각한 부분이 있기에 다들 한번씩 읽어보길 바라고 우리가 관찰하고 탐구하는 근본 질문을 알게되어 기쁜 마음으로 정리를 마친다.
<현민>
5장 : 사라져 버린 호기심, 잃어버린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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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탐구하기를 통해 소중한 것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탐구하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나요? 질문이 있어야 탐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호기심이 사라져 질문하는 법을 잊었는가? 우리는 학교, 학원 등에서 많은 지식을 익힌다. 앞서 지식은 탐구의 지도와 같다 했다. 지식이 없다면 호기심이 많더라도 상상력이 풍부하다해도 '탐구하기'라는 이해에서 길을 쉽게 잃는다. 지식이 풍부할수록 더 멀리, 빨리 새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지식을 익히면 그 지식은 우리마음 안에서 질문을 불러오지 않는다. 지식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고, 상상을 더 많이 하지 않는다. 다른 지식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죽은 지식은 더 나아가 살아있는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권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돈을 정말 중요시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보니 탐구하는데에도 돈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사람들이 돈이되는 연구만 지원하여 탐구할 기회를 주면 큰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탐구로 얻은 지식이 어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유가 되기 쉽고, 인간과 주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립하기위해 탐구하는것이 아닌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탐구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질문하는 법을 되찾기위해서는 관찰과 탐구의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관찰과 탐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관찰, 탐구를 거듭하던 중에 애정이 생기고 깊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있는 자연에 대해 질문을 하는것도 마찬가지다. 그 자연과 자주 만나고 친해져 많이 접해 애정을 가질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게된다.
많은 지식이 있어도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알던 지식이 내 삶이나 일상생활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 봐야된다. 이렇게 계속 생각해보며 그 과정속에서 잃어버렸던 질문을 되찾으 수 있다. 일상은 사실 질문의 보물단지와도 같다. 일상에서 어느것하나 탐구하기와 관련없는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럴까 질문을 던지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일상의 무수한 질문을 통해 알게된 지식과 서로 만날때 우리는 더 진지하고 깊이 주위 사물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이번에 요약을 하며 나에게 가장 와닿는 대목은 돈이되는 질문, 안되는 질문의 대목이 나에게 와닿은거 같다.
정말 사람들은 돈이되는 탐구에만 투자해 사람들이 돈이되는 탐구만을 하게 되는 것이 정말 아쉽지만 어쩔수 없는것 같다. 이런 사실들이 아쉽다. 그래서 나라도 만약 투자를 하더래도, 연구를 하더라도 돈이되는것이 아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할 것이다. <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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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탐구하기는 질문하기라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차츰 호기심을 잃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어릴적 품었던 많은 질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을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분주하다. 어떤 법칙과 섭리에 따라 늘 변화하고 늘 서로 서로 관계 맺는다. 그런데 우리는 놀랍게도 이런 세상에 참 무관심하다. 그 까닭이 뭘까?
우리는 학교나 인터넷에서 참 많은 지식을 익히고 받아들인다. 앞서 지식은 탐구의 지도아 같다고 했다. 지식이 없다면 '탐구하기'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지식이 풍부할 수록 더 멀리 더 빨리 새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따기위해 자식을 익힌다면 지식을 익히는 목적이 잘못되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는다 해도 죽은 지식이 되기 쉽다. 지식은 탐구를 위한 지도와 같아서 어떤 지식을 익힐 때에는 그 지식을 통해 다른 지식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점수를 따고 성과를 올리기위해 얻은 죽은 지식은 우리 마음 안에서 질문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저 고가의 사치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식은 끊임없이 질문을 일으키는 길잡이로서 쓰일 때 살아 있을 수 있다.
살아 있다는 건 변화한다는 뜻이다. 탐구를 할 때에만 이런 지식의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점이 바로 잡히고 더 정확하고 바르게 변호할 수 있다. 질문을 하는 것은 지식이 살아있기 위해 호흡하는 것과 같다. 질문은 지식의 이런 내용을 의심하고 부정하도록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그 전에 그림 이야기를 해보겠다. 네덜란드 화가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사물들의 고유한 물성을 잘 묘사되어 있다. (물성이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한다) 그의 그림을 보다 보면 모든 사물에는 고유한 물성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그림에 담은 사물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끈기있게 관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물을 끈기있게 관찰하는 자만이 그 사물의 물성을 바로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끈기있고 깊게 관찰하기 위해서는 다름아닌 관찰과 탐구의 대상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관찰. 감구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참을성 있는 관찰과 탐구를 거듭하던 중에 그 대상에 대하여 애정이 생기고 깊어진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과 주변에 있는 자연에 질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페르메이르의 눈이 대상에게 관심 갖고 마음 나누며 애정을 갖고 관찰 했듯이, 참을성 있는 관찰과 보살핌을 통해 우리 역시 자연과 마음 나누고 관계 맺을 수 있따. 그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많은 사물에 애정을 가질 수 있다. 또 그렇게 애정이 생겨나면 우리에겐 더 많은 질문이 생길 것이다.
많은 지식을 지니고도 아무런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지식의 껍질을 벗겨 속살을 보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내 삶이나 일상생활과 얼마나 관련 깊은지 껍질을 벗겨 살펴 보라는 뜻이다. 물의 순환이나 물질의 순환이야기 등도 이미 배우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들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우리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려 깊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분명 그 지식은 두꺼운 껍질에 싸여 죽은 듯 잠자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껍질을 벗기고 이 지식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세상과 그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훨씬 투명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질문들을 되찾을 수 있다. 그 모든 지식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사실 질문의 보물단지와도 같다. 일상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탐구하기와 관련이 없는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럴까 질문을 던지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 모든 일상과 그 현상의 배후에는 앞서 말했듯 물질이나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법칙과 원리가 깔려 있다. 따라서 조금 더 애착을 가지고 우리의 일상을 지켜본다면 그 안에 숨어 있는 많은 질문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무수한 질문을 통해 껍질 벗긴 지식과 서로 만날때 우리는 좀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주위 사물들의 모습을 그리고 각자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늘 변화한다는 뜻이다'
짧은 문장이여서 요약할 때 알아차린 문장이다. 나는 늘 변하고 있는가, 내 하루는 늘 변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매일 새날에 변화하고 새로워진 나를 만나는 거구나 깨닫게 된다. 매일의 하늘이 다르듯이 자연은 너무도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깨닫는다. '너 변했다'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만 어저면 살아있음을 알렺는 말이겠다 싶었다. 변화의 때가 혼란과 적응의 시기가 아닌 마치 비바람이 몰아쳐도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오히려 나무에게 양분이 되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야겠다 싶었다. 3학년<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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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장의 제목이 '사라져버린 호기심, 잃어버린 질문'이다.
처음 시작도 '왜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을까?'다
'담벼락을 기어가는 개미, 먼 하늘의 구름들, 밥상 위에 있는 음식들, 도로를 가득 채운 자동차들.... '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분주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질문을 안하는 걸까?
먼저 중세를 이야기한다.
프롤레마이오스 이후 1400년간 이어져 오던 천동설은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용되었다. 또한 '인간을 위해 신이 창조한 지구'라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굳건히 하는데도 사용됐다. 지식이 권력이 된 순간이다. 이 권력에 질문을 하기 위해선 참으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브루노처럼 유명한 사람들도 몇몇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교황청에 의해 죽기도 했다. '지식은 끊임없이 질문을 일으키는 길잡이로서 쓰일 때'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늘 변한단거다. 질문을 하는 것은 지식이 살아있기 위해 호흡하는 것과 같다. 질문은 지식의 이전 내용을 의심하고 부정하도록 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문이 끊기면 지식은 변화하지 않고 곧 생명을 잃는다.
중세는 이처럼 변화하지 않는 지식, 곧 죽어 있는 지식을 마치 절대적 진리인양 여겼던 시대다. 중세때 지식이 생명을 잃게 된 까닭은 종교의 권위와 신념을 지키는데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하면 과연 중세 뿐일까?
지금 세상은 돈이 지배한다.
그래서 좋은 성적으로 좋은 학교 나오고, 연봉 높은 직장에 가고, 지금 학교들은 여러 지식을 가르치지만, '경쟁'과 '점수'만 바라보며 공부하면 결국엔 죽은 지식이 된다. 또 돈이 되는 질문, 돈이 안되는 질문을 나눠 차별을 한다. 그러면서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사건'이 나왔는데 안타깝기만 했다. 이렇게 돈이 되는 연구만을 지원하여 탐구할 기회를 준다면, 탐구로 얻는 지식이 집단이나 개인의 소유가 되기 쉽다는 점과, 주변세계를 올바르게 탐구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거라고 이 책은 말한다.
'세상에는 응용과학이란 없습니다. 과학이 있을 뿐이고 그것의 응용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세자르 밀슈타인, 루이 파스퇴르처럼 깨어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분야일지라도.
책을 읽다보면 그림 몇 잘이 나온다. 진짜 같은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데에는 무수한 관찰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들도 세상을 잘 관찰하자. 우리의 일상은 질문의 보물단지와 같다. 이 일상은 질문하다보면 좀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주위 사물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나는 질문을 하나 생각해 본다.
내 안에 지식이 질문을 불러일으키는지 생각해본다.
사실 돈, 점수 같은 것들이 내 삶과 밀접하진 않다. 하지만 앞으로 가까워지는 날이 온다.
그럴 때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은 내용이었다.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관찰력과 과학자 세자르 밀슈타인의 호기심, 대단하다. 문장이 아니라 그림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우유의 어둡고, 투명한 곳을 잘 표현했다. <하준>
6장 : 탐구의 비밀, 발견하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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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것과 발견하는 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예를들어 아는건 거울에 레이져를 비췄을때 반사각이 법선을 기준으로 입사각과 대칭이 된다는 걸 책이나 말을 통해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며, 발견하는건 레이져로 거울을 비추며 반사된 걸 보다가 어떤 규칙이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거울을 비추며 반사된 걸 보다가 어떤 규칙이 있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발견이란 난 무언가를 발견하겠어! 하여 하는 경우도 많지만, 우연히 알게된 경우도 있다.
식혜로 예를 들자면 식혜는 먼저 겉보리를 찬 물에 담가 원래 크기의 1~1.5배쯤이 되게 싹을 틔우고 겨울볕에서 말린다. 이게 엿기름인데 엿기름을 물에 우려낸 뒤, 잘 익은밥을 섞어서 6시간동안 아랫목에서 이불에 덥어 삭힌다. 엿기름에는 알파-아밀라아제와 베타-아밀라아제가 들어있는데 이것은 녹말같은 거대분자를 다당류 혹은 단당류로 잘라준다. 막 싹이 돋아났을때는 알파-아밀라아제가 매우 많은데 특힌 1~1.5배 일때가 가장 많다. 그래서 이때 꺼내서 말릴때 더 자라지 않게 겨울볕에 말려야한다. 또 이것은 물에 잘 스며들기에 물에 섞으면 물속으로 이런 성분이 들어간다. 또한 밥이 설익으면 효소가 침투할 수 없어서 잘 익은 밥으로 만든다. 아밀라아제는 섭씨 60도일때 가장 잘 적용되는데 아랫목 이불속이 딱 그정도이다. 이런 사실을 조상들이 알고 식혜를 만든것이 아니라 오랜기간 지나면서 좋은 음료를 만든 것이다. 만들어가며 어떨때 더 맛있고 소화가 잘 되는지 '탐구'해가며 알아낸 것이다.
겨울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안경에 김이 서린다. 차에 탈때면 창문이 그렇게 된다.
우리는 그냥 살면서 그런 현상을 많이 봤기에 알고 있다는 걸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탐구란 규칙적인 현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우린 지금까지 탐구를 하며 많은 걸 배워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탐구하려면 무언가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어느 동무가 점심때 먹는걸 ㅗ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어! 제가 저 반찬을 또 뜨네. 지난주에도 그랬는데' 이런식으로 생각하며 관찰해보면 그 동무가 그 반찬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것이 탐구다.
나는 옛날에 책에 나오는 것만 진짜라고 생각했다.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 무조건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경험해볼때 책에선 이렇다고 하니 맞겠지하며 뭔가 달라도 내 생각과 느낌을 바꿨다. 지금 그런걸 바꾸고 있지만 이 글 덕분에 더 잘 바꿀 수 있겠다. <봄>
*
이 장을 시작하며 작가는 아는것과 발견하는 것에 차이를 말한다.
또, 잃어버린 질문을 찾으려면 탐구하기가 주는 즐거움을 되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실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 두 문장으로 이번 장에 담긴 내용을 설명할 수 있다. 작가가 그 만큼 즐겁게 탐구하기, 아는 것과 발견한다는 것에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원리와 법칙이 담긴 지식을 배운다.
열심히 공부해 그 지식을 이해하고 외우면 그 안에 담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반면 발견하는 것은 그 원리와 법칙이 주위 사물들이나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 깨닫는 것을 말한다. 내 지식을 나의 세계 속에서 직접 느끼며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책으로 보는 별똥별과 어느날 직접 본 별똥별이 다른 것 같이 말이다.
발견이란 말을 들으면 대부분 먼저 떠올리는 내용이 몇개 있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목욕탕에서 부력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가 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런 발견들이 어느날 우연히 이뤄진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는 그 '발견'이 있기 전까지 과학자들은 아주 오랫동안 많은 관찰과 실험을 하며 늘 생각을 한다. 두번째는 이처럼 위대하고 거대한 것만이 발견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도 매우 과학적인 발견들은 많다. 예를 들면 우리의 전통음식 식혜는 만드는 과정이 아주 잘 짜여진 과학실험의 결과 같다. 식혜에 쓰이는 엿기름은 겉보리로 만드는데, 그 과정을 보면 겉보리에 가장 많은 효소가 들어있을때 겉보리를 거두어 효소들이 죽지 않게 저온, 즉 겨울볕에서 말리는 등 말이다. 또한 바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어부들은 늘 바다의 변화를 자세히 살피며 바닷가의 자연현상들을 익힌다.
이것들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꾸준한 관찰과 체험을 통해 직접 무엇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이 일종의 탐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 분석하다보면 그 안에 숨은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과학자들이 하는 실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번 장에선 말하고 있다. '탐구하기'를 어려운 과학이 아닌, 놀이같이 주변
생명체들과 즐겁게 만나가는 것,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고 언제나 발견하기 우해 준비하는 것. 이 두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 놀이는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크고 작은 세상 사물들과 생명체들과 함께 벌이는 것입니다'
탐구하기는 나혼자 직면해서 관찰하는게 아닌 굳이 나와 타 생명체가 함께 하는 일이라고 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호나 관찰하고 기록하면 되는거 아닌가.. 했는데, 탐구하기를 하나의 '놀이'에 빗대서 말하니 이해가 갔다. 이 장에서 말하듯이 탐구는 내가 다른 사람과 하지 않는다. 생각해도 함께 할 수 밖에 없고, 또 놀이는 같이 해야 재밌듯이 탐구도 다른 생명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탐구한다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 흥미를 주려는 것 같아서 나도 읽으며 재밌으려고 노려하게 되는 글이었다. <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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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즐거움은 어떤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말을 아이작아시모프가 한 적이 있다. 이 말로 '아는것'과 '발견하는것'의 차이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먼저 '아는것'은 원리와 법칙이 담긴 지식을 배울때 그 지식을 이해하고 외우면 그 지식에 담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 발견하는 것은 그 원리와 법칙이 주위 사물들이나 경험하는 사건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깨닫는 걸 말한다.
뭐든 즐길때 가장 잘 할 수 있다. 천재는 노력하는자를 이기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아무리 탐구가 어렵고 힘들어 보여도 즐길 수 있다는 그 누구보다도 탐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진정한 즐거움은 어떤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다.
아까도 이야기 했던 문장이다. 지식을 배워서 얻는 앎 보다는 직접 경험해보고 몸으로 한 발견이 더 오래 기억되고 간직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또 나도 그런 발견을하며 점차 세상을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다는것, 깨닫는다는 것, 발견한다는것, 배운다는 것 모두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배움이 없는 삶은 지넝한 삶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탐구다. 알기 위해서, 배우기 위해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것 같다. 또 탐구는 즐기면서 할때 더 효과적이라는 것도 말이다. <준>
7장 : 탐구하기, 열정과 우정이 함께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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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사람은 연구를 하다가 갑자기 눈이 하얘졌다.
그 상태로 차에 탄걸 후회했지만 갈수록 모습을 드러낸다. 탐구도 그것과 같다. 처음에는 안 보이지만 나중에 점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람의 그룹은 6년동안 노벨상을 13번 받았다는데 짧은 시간동안 많이 받은게 신기했다. 이 질문에 글 쓴 사람은 그곳에서 탐구하는 기쁨을 누려서 자신도 모르게 탐구하는 대상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눈이 갑자기 하얘졌다가 점점 되돌아가는 일이 내 일상에서 있을지 궁금했다. 일상은 아니지만 보드게임할때 복잡해지면 눈이 하얘지지만 수를 한수 한수 찾아서 게임이 거의 끝날때는 눈에 윤곽이 잡히면서 모습을 드러내고 끝났을때는 원래대로 돌아온다. <새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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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남창훈 선생님은 자신 앞에 갔던 선배들을 따라간다.
처음부터 자신의 분발력만 믿어선 안된다고 한다. 그랬다간 큰코 다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에 먼저 간 선배들의 길의 흔적을 따라 가다보면 수수께끼 같은 희미한 길도 보인다는 거다.
여기서는 어떤 목적이어도 다 이어져있기 때문에 상관없다. 세상에는 여러 공동체가 있다. 탐구자들도 어쩌면 공동체와 비슷하다. 언제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공동체 말이다. 남창훈 선생님은 과학연구가 노벨상 같은 기준으로 단정져 지는 것은 못마땅하지만 노벨상이 과학사에 획을 긋는 중요한 연구에 주어진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런것들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것은 탐구자들이 끝없이 기쁨을 느끼며 탐구대상에게 열정을 쏟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중요한 건 앞서간 선배들과 뒤이은 사람들이 친구라는 사실이다.
그들 사이에는 깰 수 없는 우정이 있다.
아까 공동체와 비슷하다고 한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남창훈 선생님은 우리에게 또 그의 후배들에게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과학기술실험하면 어렵고 따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오해를 안 하면 좋겠다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말하면 탐구한다는 것은 뜨거운 열정과 따스한 동료애 그리고 베일 벗은 세상 사물들의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나는 딱 한 구절이 기억에 남진 않았다.
그저 남창훈 선생님이 마음을 내 이 책을 선물했듯 어느거든 이렇게 열정과 행복과 사랑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난 그럴 수 있을까... 제발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이런 장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좋아보이고, 마음이 따뜻했다. <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