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 내 맘의 풍경을 읽다
내 남아 있는 생애 중 가장 젊은 날, 속리산의 품에 안겨들었다.
속리산의 품은 넉넉하고도 아기자기한 옛날 얘기 같았다. 유장(悠長)한 얘기 가락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뾰족한 솔잎 끝에서 비단스카프 같은 바람이 풀려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기 위해 승차 장소에 도착한 나는 머릿속이 온통 하얬다. 손등으로 연신 두 눈을 비비다가, 퉁퉁 부은 눈두덩을 꾹꾹 누르다가 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제일 불편해하는 것 중 하나가 정해진 일정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시각이 새벽이거나 이른 아침이면 불편함은 높다란 산능성을 가뿐히 넘어선다. 초등학교(국민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등교시간이면 자주 헐레벌떡 교문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직장에 다녔던 이십 년간은 또 어떠했던가. 어쩌다가 지각을 하게 되는 날이면 정말이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서늘함이 온몸을 휘감곤 했다. 한번은 지각하기 싫어서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아예 결근을 해버린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반백년을 살아온 지금도 짜여진 일정에 맞춰 움직이는 건 힘에 겨웁다. 하지만, 눈비비며 다가간 옹달샘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이미 여럿 나와 있었다. 푸석푸석하면서도 환한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손을 내밀며 나를 반겼다.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하였는데 님들의 손들은 하나같이 따스했다.
거의 정시에 도착한 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다시 출발했다.
나는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Y 씨에게 문자를 날렸다.
"방금 출발, 조금 후에 봐."
Y씨는 다른 장소에서 승차하기로 한 친구다.
말은 저리 했지만, 내심 저번처럼 또 늦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밑에 깔려 있었다.
"응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Y 씨가 답글을 보내왔다.
와우!
몇 십년을 살고도 1급수를 고수하고 있는 그녀는, 필시 천재지 싶다. 내 속마음을 이리도 잘 읽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요즘은 상대방의 맘을 잘 읽어야 하는 세상이다. 오죽하면 어느 교수가 이렇게 말했을까.
"글을 읽지 못하는 게 20세기의 문맹이라면, 마음을 읽지 못하는 건 21세기의 문맹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실 내 마음도 잘 못 읽을 때가 잦다. 오늘 나는 과연 속리산의 풍경을, 아니 속리산의 마음을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마지막 승차지에서 버스는 잠시 멈춰 섰고, 일행들이 탔다. Y 씨도 쪼르르(그녀의 덩치가 좀 큰 편이어서 이 표현이 겉도는 감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래도 그 당시 내 눈에는 '쪼르르'로 보였다. 그렇다고 '쭈르르'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달려와 비워둔 내 옆자리에 털석 앉았다. 이제 배가 볼록해진 빨강 버스는 속리산을 향해 제대로 내닫기 시작했다.
빨강 버스에 탄 사람들의 마음도 빨갛게 부풀어 오른 듯 했다.
저 새빨간 홍옥 같은 표정들을 보라! 새큼달큼하면서도 싱그런 몸짓들! 아이고, 릴리 님의 저 소녀 같은 모습은 풋풋하다못해 차라리 귀엽다. 진달래 색 양말로 단장한 두 발마저도 흥에 겨워 까닥까닥 까다다닥......
회장님이 애써 만드신 영상물들을 보며 우리는 모두 선남선녀가 되었다. 영화가 영화다운 것은 배경음악이 흐르기 때문이라고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해왔다. 우리 모두가 주연 배우인 저 영상물들과 분위기에 꼭 맞는 음악이 있어서 우리도 오늘 더 흥겨운 것이리라. 릴리 언니는 자기가 화면에 여러 번 나왔다며 출연료를 받아야겠다고 농담을 했다. 내 생각에는 언니를 모델처럼 멋지게 만들어준 회장님께 도로 감사의 선물이라도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이크, 나의 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언니는 우리가 휴게소에서 잠시 머물 때, 버스에 물건을 팔러 온 아주머니에게서 등산용간이머플러를 일곱 개나 샀다. 그리고는 그것을 동행한 여러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아무래도 산에 오르면 추울 것 같다면서. 감색 상의를 입은 회장님께는 분홍 색 머플러를 드렸다. Y씨가 그걸 보고 한 오 년은 더 젊어 보인다며 덕담을 건넸다. 화기애애한 웃음들로 차 안이 화들짝 화원이 되었다. 단돈 만 원으로 빨강 버스를 통째로 꽃밭으로 만들어버린 릴리 언니는 짱 마술사!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산 문을 두드렸다.
산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기꺼이 품을 열어 주었다. 나는 오늘 이 산을, 산의 풍경을, 아니 산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까. 나의 눈이 아닌 산의 눈으로, 나의 언어가 아닌 산의 언어로.
나희덕 시인은 그의 시 '속리산에서' 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지금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것'이다. 헉헉거리는 이 가쁜 숨이 고비가 아니라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늘 산은 오르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부터는 아니라고 해야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이후부터는 언제나 그리 여길 것이므로.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의 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므로.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한 모롱이를 돌아서면 또 비슷한 모롱이가 나타나고 또 다른 모롱이가 다가서고...... 구비구비 난 산의 실핏줄을 따라서 우리는 산의 심장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산의 속살은 천의 얼굴을 가졌다.
그늘진 돌의 한 켠에 살며시 열린 창문처럼 내비친 햇살이 눈부시다. 그늘 한가운데서 오롯이 손바닥만 한 저 환함. 이곳의 그늘과 햇살은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여기서 만약 그늘이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과연 햇살이 저토록 환할 수 있을까. 반대의 경우도 매 한가지이다. 사람의 경우도 저와 하나 다를 바 없다. '나'라는 것은 '너'가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 '딸'이나 '아들'이 있어야 '어머니'나 '아버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누군가가 최고가 되고 싶다면, 그러기에는 분명코 그 사람을 최고가 되어주게 할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독야청청 딱 한 사람 뿐인 곳에서 그는 결단코 최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방에 홀로 가서 노래를 불러본 적 있는가. 나는 그걸 소망하면서도 아직 그럴 용기가 없어서 해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상상만으로도 그 기분이 어떨지 능히 짐작이 간다. 참 재미없을 것 같다. 흥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청승맞기까지 할 것 같다. 잘 하든 잘 못 하든 내 노래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그 사실에 우리는 어깨춤을 추어가며 노래부르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속리산의 속살을 더듬을 때, 내 발자국 옆에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발자국들을 남기는 산우들이 한결 더 정겹게 느껴졌다. 아, 얼마나 귀한 우리의 산벗들인가!
다시 저 손바닥 만한 그늘 속의 햇살을 바라본다.
저것은 마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풀리노라면 헤벌쭉 입꼬리가 올라가는 내 친구의 미소 같다. 그럴 때면 나는 그 친구의 두 눈을 이윽히 들여다보곤 한다. 두 눈에 어린 그 향긋한 미소가 나는 참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눈가에 번져나는 그 아련하고도 아득한 미소는 맑디 맑은 날 밤하늘의 별 모두를 한데 모아 놓은 것보다도 더 환하다. 더 반짝인다. 더 풍요롭다. 친구의 미소에 내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것은,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 살아가는 것은 비단 사람 만은 아닌 것 같다. 이름도 없는 저 바위들을 보라. 저렇게도 정에 겹도록 기대고 있는 모습을. 저 둘은 지금 막 오수에 빠져드는 중이지 싶다. 햇살과 그늘이 저들을 가려주지만 온전히 가려주지는 못한다. 넓다랗고 얇다란 홑이불 하나 활짝 펼쳐서 저들을 푹 덮어주고 싶다. 머리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 감싸주고 싶다.
저들은 서로를 뭐라고 부를까.
언어학자들은,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이름이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이름(규정하기)이 전제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이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다. 결과는, 저들의 말이 맞았다. 이름 없는 것들은 아무리 눈을 꼭 감아도 형상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하늘, 바람, 구름, 기생여뀌, 구절초..........화장대 위의 먼지 한 톨, 잇새에 낀 고춧가루까지 모두 저마다의 이름 있는 것들만 떠올랐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를 조금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이름. 그러고 보면 우리네 이름은 우리 존재 전부이면서 또한 제각각 전설이고 신화다.
문득, 저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그냥 바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애절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언어를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의 언어로 감히 저들을 불러보았다. 갑돌이와 갑순이. 에게게, 고작 이게 나의 한계였다. 누가 더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면 참 좋겠다.
좁디 좁은 한 뼘 땅에서 참으로 여러 생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내 눈에 띄는 것만 얼추 꼽아 보아도 서너 가지는 됐다. 바위와 이끼와 산죽과 단풍잎과 나무와 낙엽......열거한 것들은 다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일 뿐이었다. 사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었다. 저 흙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숨을 쉬고 있을지 내 깜냥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평화롭다못해 차라리 태평스러워 보였다. 찬찬히 그리고 자꾸 보다 보니 저들은 필연적으로 꼭 저 자리에 놓여 있어야만 했던 것처럼 생각됐다. 저 중에 단 하나라도 빠졌다고 가정해 보니 참으로 밋밋했다. 자연은 제 스스로 앉을 자리를 잘도 찾아들었다. 좁디 좁은 한 칸 초가집에서 어깨동무하고 살아가는 저들의 찬란한 동거가 부러운 게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니지 싶었다.
뒤로 나자빠지도록 하 하 호 호 웃으며
때로는 저마다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들기도 하며
고단하고 캄캄한 길 함께 더듬어 찾아가며
마침내, 우리는 꼭대기에 올랐다.
아니, 속리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달았다.
언제 내린 빗물일까.
그곳에 누리끼리하고 푸르스름한 물이 고인 웅덩이 세 개가 있었다. 속리산의 가장 깊숙한 곳, 심장은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곪아터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인간의 발길보다 더 독한 게 또 있을까?
내려오는 길은 험했다.
같은 길이지만 올라갈 때와는 사뭇 달랐다. 잠시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인데, 그 사이에 왜 그리 달라졌느냐고 물어도 길은 그저 시치미를 뚝 뗀 채 버티고 섰기만 했다. 난 무릎 보호대를 하고 지팡이 두 개에 의지한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뎠다. 어이쿠, 일행 중 한 사람이 기어이 무릎에 탈이 나고 말았다. 그 사람은 카키 색 점퍼에 비둘기 색 목도리와 검은 색 모자를 썼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몇해 전, 팔공산 동봉에서 갓바위로 가는 능선 한가운데서 무릎이 물풍선처럼 부어올랐던 때의 고단함이 새삼스레 온몸에 뻗쳐올라왔다. 나와 함께 내려오던 산대장님이 파스를 바르고 있는 그녀를 보자 부리나케 한달음에 달려갔다. 응급처치를 하는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내쳐 내려왔다. 일행들에게서 많이 뒤처져서였다. 대숲에 들어가 잠시 볼일을 본 것 뿐인데 벗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무릎이 불편해진 그녀는 산을 다 내려온 뒤, 거기서부터 빨강 버스가 있는 곳까지는 누군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이동했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일행 중의 누군가가 자기가 하고 있던 무릎 보호대를 끌러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정경인지! 팔공산에서 무릎이 탈이 난 이래로 다섯 해 동안이나 산행을 할 수 없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가 별 탈이 없길 간절히 빌었다.
우리의 행복 바이러스인 총무는 만나는 순간부터 헤어지는 때까지 우리를 환하게 해 줬다.
정말이지 톡톡 튀는 그 재주는 육백만불 짜리다. 할 수만 있다면 특허라도 내고 싶을 지경이다. 게다가 그녀가 마련한 하산주 음식들은 또 얼마나 푸짐하고 맛깔스러운지.......산행의 피로가 확 날아가버렸다.
오늘의 메뉴는 찐고구마와 찐땅콩과 달콤한 포도와 삶은 돼지고기와 한 잔 술. 총무가 우리 자리로 오더니 땅콩 껍질을 까서 내보이며 몸에 좋은 자색 땅콩이라고 일설을 풀어놓았다. 안 그래도 우리는 부지런히 땅콩을 먹고 있던 참인데, 그 덕에 땅콩 그릇은 금방 바닥을 하얗게 드러내고 말았다. 나는 땅콩을 더 청했고, 그릇은 또 금방 허연 배를 까뒤집어버렸다. 릴리 언니와 함께 온 남학생들 중의 한 분은 귀가했을 때 식구들이 몰라보면 어쩌느냐며 농담을 했다. 산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날씨가 제법 서늘했다. 나는 자켓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목도리도 위로 끌어올려 입까지 덮었다. 그때 버스 기사가 세워둔 버스를 우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서늘하던 음지가 눈 깜짝할 새에 따스한 양지로 변했다. 모두의 얼굴이 화들짝 환해졌다. 그와 동시에 야! 탄성도 터져나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극구 음지로만 찾아들었었는데 말이다. 시절은 바야흐로 가을의 허리춤에서 흥성했다.
만약, 꼭두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나 달려간 속리산에서 무얼 봤느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속리산에서 내가 본 것은 속리산이 아니었다. 내가 읽은 건 속리산의 풍경이 아닌 내 맘의 풍경이었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내 안에는 너무도 많은 내가 있다. 딸아이 앞에서 나는 엄마이며, 부모님 앞에선 자식이고, 남편 앞에선 아내이고, 친구 앞에선 친구이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앞에선 선생이다. 좋은 독서에 대해 가르칠땐 독서 지도 선생이고, 글쓰기를 가르칠 땐 글쓰기 선생이며, 역사논술을 가르칠 땐 논술 지도 선생이다. 아이에게 주저리주저리 잔소리를 늘어놓을 땐 잔소리쟁이고, 부모님의 저린 다리를 주물러 드릴 땐 효녀이며, 시를 읽거나 쓸 땐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친구의 넋두리에 귀 기울이며 고개를 주억거려줄 땐 좋은 상담자이다. 오, 참 많고도 많은 나의 페르소나(persona). 이 중에서 진정한 나는 도대체 어느 걸까? 속리산에서 등산화를 신고 한 발 두 발 내디디며 오롯이 내 발자국 소리에만 집중했던 나는 또 누군가?
나는 오랫동안 내 속의 풍경을 읽었다. 내 안의 풍경은 이제껏 써 온 나의 언어로 씌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바람의 언어였고, 낙엽의 언어였고, 돌의 언어였고, 흙의 언어였다. 나는 그저 그들에게 나의 오감을 내맡기고 코를 벌름거릴 뿐, 달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코 의미로는 해독할 수 없는 언어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라고 한 어느 시인의 싯구가 생각났다.
다음 달, 나는 또 다시 나의 내면의 풍경을 읽으러 떠날 것이다.
별 다른 일이 없으면 그곳은 아마도 백암산이 될 것이다. 그때 나와 동행할 산벗들이 하마 그립다.
몇해 전 어느 날 아침.
내일, 통일호의 운행을 중단한다는 조간 기사를 보다가, 신문을 휙 집어던지고 기차역으로 달려가서, 무작정 차표를 끊었던 적이 있었다. 동대구역에서 포항으로 가는 마지막 통일호 열차. 그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열차 안에서, 내일이면 영영 사라질 그 열차를 그리워했었다. 벚꽃 이파리가, 꼬물거리는 아지랑이 발가락 사이로 떨어져 내리며 하얀 눈의 눈물처럼 나부꼈던 그 봄날의 열차.
그때처럼, 빨강 버스를 타고 일상의 삶터로 되돌아오는 내내, 차에 동승한 산벗들을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