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스 대성당(1211~1290)
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
Reims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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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athedrale-reims.com/ 홈페이지
랭스 대성당
전성기의 고딕 성당은 샤르트르, 랭스, 아미앵 대성당의 순으로 지어지고,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완성도도 높아져서 아미앵 대성당에서 마침내 정점을 이룹니다.
하지만 아미앵 대성당은 후기 고딕과 살짝 겹치기도 하고, 상파뉴(샴페인!)의 중심 도시인 랭스에 있다는 사실 말고도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훨씬 더 의미가 있는 랭스 대성당을 살펴보면서 초기 고딕과 전성기 고딕의 차이점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실은 아미앵 대성당은 가보질 않았고, 랭스 대성당은 두 번이나 방문했기 때문에
어차피 랭스 대성당을 다룰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
랭스의 첫 성당은 400년경에 건립된 매우 유서 깊은 성당이었고, 프랑크왕국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재위 486~511)가 508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게르만 국왕 중에 최초로 세례를 받은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프랑크왕국을 제국으로 키운 샤를마뉴(재위 768~814)는 황제 대관식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진행하였으며, 수도를 파리에서 독일의 아헨으로 옮기는 등 친 독일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에, 프랑크왕국에서 갈라진 동프랑크(독일)의 국왕들은 샤를마뉴를 시조로 삼고 주로 아헨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합니다.
그런데 대관식이란 게 신으로부터 점지받은 왕이라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클로비스 1세가 세례를 받은 랭스 대성당을 대관식 장소로 정하게 됩니다.
샤를마뉴의 직계인 카롤루스 왕조가 지배하던 서프랑크 왕국(843~987) 시절에는 몇 명의 왕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리긴 했어도 아직 대관식이 완전히 정착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이 5세(재위 986~987)가 스무 살에 자식도 없이 말에서 떨어져 죽는 바람에 한낱 파리의 백작에 불과했던 위그 카페(재위 987~996)가 새로이 프랑스 왕국(987~1792)을 출범하게 되면서, 허약한 왕권을 조금이라도 보강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관식을 정착시킵니다.
하지만 위그 카페의 아들인 로베르 2세(재위 996~1031)는 누아용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앙리 1세(재위 1031~60) 때부터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의례가 본격적으로 정착됩니다.
그래서 1027년 앙리 1세 이후로 루이 14세, 루이 16세를 포함해 1825년 샤를 10세의 대관식까지,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치른 나폴레옹 등 몇 명을 제외한 총 29명의 왕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게 됩니다.
대관식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 하나는, 원래도 백년전쟁이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빌미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백년전쟁의 말기인 1422년에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사망하면서, 법적으로는 그의 후계 자리가 아들인 샤를 7세가 아니라 외손자인 영국 왕 헨리 6세에게 넘어가는, 샤를 7세 입장에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사태가 발생합니다.
랭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프랑스 땅도 당시 영국군이 다 차지한 상태라 조만간 게임 오버인 절박한 순간에, 전쟁 경험이 1도 없는 16세 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31)의 혜성 같은 등장으로 프랑스는 바로 랭스를 탈환하게 되고, 샤를 7세는 잽싸게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서 헨리 6세의 허를 찌르게 됩니다.
당황한 헨리 6세가 뒤늦게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라도 대관식을 치렀지만 아무도 먹어주질 않았고, 결국 백년전쟁도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것이 랭스 대성당 앞마당과 내부의 예배당에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는 이유입니다.
참고로 잔 다르크는 마치 이순신 장군과 선조의 관계처럼 이제는 그녀가 부담스러워진 샤를 7세의 방관하에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힌 다음, 샤를 7세가 몸값 지급마저 거절하면서 결국은 형식적인 이단 재판을 거쳐 1431년에 화형을 당합니다.
내심 찜찜했던 샤를 7세는 1456년에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을 통해 잔 다르크를 복권 시킵니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도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다고 합니다.
성당의 입구 맞은편에 있는 잔 다르크의 청동 기마상
잔 다르크 예배당에 있는 잔 다르크 동상
1210년에 세 번째의 화재로 인해 기존의 성당이 소실된 후에 대관식에 어울릴만한 규모로 재건을 계획했는데, 공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대주교가 사면장을 마구 남발하고 온갖 명목의 세금들을 걷다가 데모로 한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 덕택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축이 됩니다.
그 뒤로도 프랑스 혁명과 1차 대전으로 인해 차례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미국의 록펠러 가문의 기부로 완벽하게 복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당의 외관을 유심히 살펴보면 시커멓게 탄 부분과 밝은 부분이 섞여 있는데, 시커먼 부분은 전쟁의 후유증이고 밝은 부분은 새로이 복구된 부분입니다.
밝은 부분과 시커먼 부분
성당의 평면도
랭스 대성당의 평면도 사진
일단 평면도를 먼저 살펴보면서 교회의 모습에 대한 기본적인 감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쪽인 제일 왼쪽의 전실은 복도 3개에 1칸이라서 3랑식 1베이,
본당은 3랑식 8베이,
트랜셉트는 팔을 기준으로 계산하니까 복도가 세 개인 3랑식이고,
동쪽 성직자 영역은 5랑식 2베이에, 빨간색 사각형인 성가대석과 파란색 반원형인 앱스와 이 둘을 둘러싼 녹색의 복도(앰블러토리)가 있고, 동쪽 끝에는 다섯 개의 노란색 예배당이 보입니다.
신도석(네이브)과 복도(아일)의 천장은 X자 표시로 4분 리브볼트인 것을 알 수 있고, 신도석과 복도 사이의 기둥도 4분 볼트에 어울리는 단일기둥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본당과 성가대석이 모두 복도가 다섯 개인 5랑식인데 반해,
샤르트르 대성당, 랭스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은 셋 다 본당은 세 개의 복도를 가진 3랑식으로 지어지고, 동쪽의 성가대석은 다섯 개의 복도를 가진 5랑식으로 지어집니다.
5랑식으로 만들면 창을 통과한 빛이 복도 두 개를 지나서 중앙에 도달하기 때문에, 신도석이 너무 어두워져서 3랑식을 택한 것이며, 전성기 고딕에서는 이렇게 특히 신도석의 밝기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성가대석이 5랑식인 이유는 조금 어둡더라도 성직자의 높아진 위상에 맞게 규모를 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성당의 전체 규모는 샤르트르에서 아미앵 대성당으로 갈수록 점점 더 커집니다.
기술력의 평가 기준 중 하나인 신도석의 폭은 전성기 로마네스크의 11미터에 비해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이미 16.3미터를 찍었고, 랭스 대성당과 아미앵 대성당도 비슷해 보입니다.
또 하나의 평가 기준인 신도석 벽의 기둥 간격은 샤르트르에선 6.7미터, 랭스에선 8.2미터를 달성해서 내부에 훨씬 더 많은 개방감을 선사해서 밝고 확 트인 실내를 만드는 데 이바지합니다.
십자가의 팔에 해당하는 트랜셉트(익랑)는 노트르담과 유사하게 성가대석의 폭과 거의 같으며, 샤르트르 대성당과 아미앵 대성당은 팔이 성가대석보다 약간 튀어나온 정도입니다.
하지만 트랜셉트의 길이가 길지 않은 대신에 폭이 대폭 넓어져서 노트르담까지는 1랑식이던 트랜셉트가 이제는 세 개의 복도를 가진 3랑식이 됩니다.
첫댓글 랭스 대성당(cathedral)이라 붙여진 것은 쟌다르크 때문인가요?
이미 옛날부터 랭스 대성당은 유명했었고, 잔 다르크와의 인연때문에 성당 내에 잔다르크 예배당이 있고, 성당 밖에는 잔다르크 기마상이 있는 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