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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명문(命門)에 관한 나머지 정의(義)
명문(命門)에 대한 정의(義)는 본래 내경([內經])에는 없었다.
편작(:越人) "신(腎)에는 두 개가 있지만 모두 신(腎)인 것은 아니니, 좌(左)는 신(腎)이고 우(右)는 명문(命門)이다. 명문(命門)은 모든 신(神)과 정(精)이 머무는(:舍) 곳이고 원기(原氣)가 매달려(:繫) 있는 곳이므로, 남자(男子)는 정(精)을 장(藏)하고 여자(女子)는 포(胞)가 매달려(:繫) 있다." 하였다.
이러한 정의(義)에는 미진(未盡)함이 있고 의문점(疑)도 있다.
따라서 삼초포락명문변(<三焦包絡命門辨>)을 지어(:著) 유경부익([類經])의 말미(末: 곧 구정록(<求正錄>))에 붙여(:附) 간행(:梓)하였으니, 개괄(槪)에 대한 것은 거기에 다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미진(未盡)한 바가 있고, 후인(後人)들이 각성(:醒悟)시키기에 부족(不足)하므로 다시 여기에 그 숨은 뜻(:蘊)을 다하였으니, 아래의 조(條)에 열거(列)하였다.
一. ★명문(命門)은 정혈(精血)의 해(海)이고
비위(脾胃)는 수곡(水穀)의 해(海)이니, 모두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근본(本)
★명문(命門)은 원기(元氣)의 근본(根)이고 수화(水火)의 집(:宅)
오장(五臟)의 음기(陰氣)는 이것이 아니면 자(滋)할 수 없고,
오장(五臟)의 양기(陽氣)는 이것이 아니면 발(發)할 수 없다.
★비위(脾胃)는 중주(中州)의 토(土)인데 화(火)가 아니면 생(生)할 수 없다.
춘기(春氣)는 하(下)에서 시(始)하니, 삼양(三陽)이 지(地)에서 일어난(:起)한 후에 만물(萬物)이 화생(化生)
명문(命門)의 양기(陽氣)도 하(下)에 있으니, 바로 비위(脾胃)의 모(母)가 된다.
따라서 내가 "비위(脾胃)는 관주(灌注)하는 본(本)이니 후천(後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고, 명문(命門)은 화생(化生)하는 원(源)이니 선천(先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는다."
이처럼 그 속에는 진실로 본말(本末)의 선후(先後)가 있다.
동원(東垣) "보신(補腎)은 보비(補脾)보다 못하다."
허지가(許知可) "보비(補脾)는 보신(補腎)보다 못하다."
두 사람의 설(說)도 각자 말하려고 하는 바가 있겠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는) 변별(辨)을 기대(待)하지 않아도 분명(明)히 알 수 있다(:허지가의 말이 맞다).
一. 명문(命門)에는 화(火)의 후(候)가 있으니 곧 원양(元陽)을 말하는데, 물(物)을 생(生)하는 화(火)
품부(稟賦)에 강약(强弱)이 있다는 것은 곧 원양(元陽)에 성쇠(盛衰)가 있다는 것
음양(陰陽)에 승부(勝負)가 있다는 것은 곧 병(病)과 그 치(治)에 미심(微甚)이 있다는 것
이것이 화(火)의 후(候)를 마땅히 변별(辨)하여야 하는 까닭
일양(一陽)의 원기(元氣)는 반드시 하(下)에서부터 승(升)하니, 삼초(三焦)로 두루 퍼져야(:普濩) 각각 그 후(候)가 나타난다.
★하초(下焦)의 후(候)는 땅(:地土)과 같으니 화생(化生)하는 본(本)이고,
★중초(中焦)의 후(候)는 솥(:竈釜)과 같으니 수곡(水穀)의 화로(:爐)이며,
★상초(上焦)의 후(候)는 하늘(:太虛)과 같으니 신명(神明)의 집(:宇)이다.
하초(下焦)는 땅(:地土)과 같다
땅(:地土)에는 비옥(肥)함과 척박(瘠)함이 있어 산출(:出産)하는 것이 다르고,
산천(山川)에는 후(厚)함과 박(薄)함이 있어 장축(藏蓄: 간직하다)하는 것이 다르니,
취산(聚散)의 권(權)을 조종(:操)하는 것은 모두 이 양기(陽氣)로 말미암는다.
(양기를) 일분(一分) 얻으면 곧 일분(一分)의 용(用)이 있고,
일분(一分) 잃으면 일분(一分)의 휴(虧)가 있다.
그 수요(壽夭)와 생육(生育) 및 용겁(勇怯)과 정혈(精血)과 병치(病治)하는 바탕(:基)은 이 원양(元陽)이 족(足)한지 부족(不足)한지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소장(消長)과 영축(盈縮)하는 주(主)이기 때문
이것은 하초(下焦)의 화후(火候)를 말하는 것
중초(中焦)는 솥(:竈釜)과 같다
음식(飮食)의 자양(滋)는 수곡(水穀)에 근본(本)
식(食)이 강(强)하면 몸(:體)이 장(壯)하여지고
식(食)이 소(少)하면 몸(:身)이 쇠(衰)하여진다.
위중(胃中)의 양기(陽氣)는 그 열(熱)하기가 솥(:釜)과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아침의 식사(:朝食)가 12시(:午) 정도가 되면 바로 소화(化)되고,
어찌 점심의 식사(:午食)가 오후 4시(:申) 정도가 되면 소화(化)가 되겠는가?
솥(:釜)의 화(化)하는 속도(速)도 이와 같은 것에 불과(不過)
솥(:竈釜)에 불(:炬)을 적게 땔 때를 보면 일경(一頃: 잠시)이라도 느리게(:遲) 화(化)하고,
불(:炬)을 더 땔 때를 보면 일시(一時)라도 빠르게 화(化)하며,
화력(火力)이 도달(到)하지 못하면 전혀(:全然) 화(化)하지 못하니, 곧 이것이 그 증거(證)
따라서 비위(脾胃)의 화(化)와 불화(不化) 및 음식(飮食)의 능(能)과 불능(不能)도 또한 모두 양명(陽明)의 기(氣)가 강(强)한지 강(强)하지 않은지, 음한(陰寒)의 사기(邪)가 범(犯)하였는지 범(犯)하지 않았는지로 말미암을 뿐
병(病)에 이르면 점차 비(痞)하거나 점차 창(脹)하거나 혹 격(隔)하거나 혹 구(嘔)하거나 혹 30~50% 정도만 화(化)하거나 혹 팽취(膨聚: 부풀어 오르다)하여 불소(不消)하거나 혹 탄산(呑酸) 애부(噯腐)하면서 식기(食氣)가 불변(不變)하거나 혹 복동(腹疼) 두통(肚痛)하면서 종일(終日) 불기(不饑: 배고프지 않다)하거나 혹 청탁(淸濁)이 불분(不分)하거나 혹 완곡(完穀)이 불화(不化)
화(化)하면 운행(運行)되지 않음이 없고, 불화(不化)하면 유체(留滯)되지 않음이 없다.
운행(運行)하면 기(氣)가 되고 혈(血)이 되며,
유체(留滯)하면 적(積)이 되고 담(痰)이 된다.
이렇게 되는 연고(故)는 곧 위기(胃氣)의 불건(不健)함을 말하는 것
불건(不健)하다는 것은 곧 화(火)의 후(候)가 무력(無力)하다는 것
요즘 비(痞)를 치(治)하거나 창(脹)을 치(治)하거나 및 탄산(呑酸) 애부(噯腐) 등의 증(證)을 치(治)하는 것을 보건대, 열(熱)이든 열(熱)이 아니든지를 막론(:無論)하고 걸핏하면 위화(胃火)라고 부르는데, 남아 있는 불꽃(:燼)이 그 얼마나 된다고 이것을 감당(堪)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중초(中焦)의 화후(火候)를 말하는 것
상초(上焦)는 하늘(:太虛)과 같다
그 변화(變化)가 반드시 신명(神明)으로 드러나고(:著)
그 신명(神明)은 반드시 양기(陽氣)에 근본(根)하기 때문
이 화(火)는 기(氣)를 생(生)하니 기(氣)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이 화(火)는 신(神)으로 화(化)하니 신(神)이 신령(靈)하지 않음이 없다.
양(陽)이 하(下)에 있으면 온난(溫煖: 따뜻하게 데우다)케 하므로 상화(相火)로 위(位)한다 하고,
양(陽)이 상(上)에 있으면 소명(昭明: 밝게 밝히다)케 하므로 군화(君火)로 명(明)한다 한다.
이러하므로 양(陽)이 장(長)하면 음(陰)이 소(消)하고,
이(離)가 조(照)하면 공(空: 여기서는 얼굴의 구멍들)을 비추므로(:當)
오관(五官)이 치(治)하여지고 만류(萬類)가 성(盛)하여진다.
양(陽)이 쇠(衰)하면 음(陰)이 승(勝)하고, 양(陽)은 음(陰)에 눌리므로(:抑) 총명(聰明)이 탈(奪)하여지고 신기(神氣)가 감(減)하여진다.
사람의 성색(聲色)과 동정(動定) 및 지우(智愚)와 현불초(賢不肖)가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어찌 이 양덕(陽德)의 용(用)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상초(上焦)의 화후(火候)를 말하는 것
이상은 삼초(三焦)로 화후(火候)를 논(論)한 것
각기 사(司)하는 바가 있는데, 어째서 모두 명문(命門)으로 귀(歸)하는가?
수(水) 중의 화(火)는 곧 선천(先天)의 진일(眞一)의 기(氣)이니, 이것은 감(坎) 속에 장(藏)하여져 있다
이 기(氣)는 하(下)에서부터 상(上)하여 후천(後天)의 위기(胃氣)와 서로 접(接)하면서 화(化)하니, 이는 실로 생생(生生)케 하는 근본(本)
따라서 꽃 봉우리(:花萼)의 영(榮)은 그 뿌리(:根柢)에 달려 있고,
솥(:竈釜)의 용(用)은 그 땔감(:柴薪)에 달려 있다.
만약 진양(眞陽)이 연원(淵源)에서 발(發)하지 못하면 총체적(總)으로 무근(無根)의 화(火)에 속(屬)하게 되고, 화(火)가 무근(無根)하게 되면 곧 병기(病氣)가 되니, 이는 원기(元氣)는 아니다.
따라서 주역([易])에서는 뇌(雷)가 지하(地下)에 있는 것을 복괘(復: ䷗)라 하니,
★화(火)의 표(標)는 상(上)에 있고 화(火)의 본(本)은 하(下)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화(火)는 조(燥)한 데로 나아가니(:就), 그 성(性)은 극도(極)로 한(寒)을 두려워(:畏)한다
만약 명문(命門)에 음(陰)이 승(勝)하게 되면 원양(元陽)이 이를 두려워하고 피(避)하게 되며,
용화(龍火)가 장신(藏身)할 곳(:地)이 없으므로 유산(遊散)하여 돌아오지(:歸) 못하게 되니, 번열(煩熱) 격양(格陽) 등의 병(病)이 된다.
이를 잘 치(治)하는 자는 오직 그 성질(性)을 잘 따라야 하니, 단지 양화지기(陽和之氣)가 감(坎) 속으로 바로 들어가 동굴집(:窟宅)에 거(居)할 수 있도록 부르고(:招) 유인(誘)하여야 한다.
곧 동기(同氣)를 서로 구(求)하여야 하니, 허양(虛陽)이 근원(原)으로 돌아오지(:歸) 않을 수 없다.
"감온(甘溫)은 대열(大熱)을 제(除)한다." 하였으니, 바로 이를 말하는 것
몽매(昧)한 자들은 이러한 이치(理)에 밝지 못하여 대부분 허양(虛陽)을 실열(實熱)로 여김
어째서 그 화(火)를 온양(溫養)할 생각(:思)은 하지 않고
단지 한량(寒凉)으로 화(火)를 멸(滅)하는 것만 아는 것인가?
어찌 생의(生意)가 머물러 빨리 죽지(:斃)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는 실로 의가(醫家)에서 제일(第一)로 활인(活人)하는 대의(大義)
곧 이 도(道)를 따르려면 먼저 이러한 이치(理)에 밝지 않으면 안 된다.
혹 삼초(三焦)에 객열(客熱)이나 사화(邪火)가 있다면 모두 화(火)일 뿐
진실로 제(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火)를 제(除)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는가?
이는 본래 정기(正氣)의 화후(火候)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사기(邪)와 정기(正)의 두 글자에 대해 깊이 밝아야 하니,
곧 생(生)을 다스리는(:治) 요점(要)을 얻는 것
一. ★명문(命門)에는 생기(生氣)가 있으니,
이는 곧 건원(乾元)의 불식(不息: 쉬지 않음)하는 기(機)
생(生)이 없으면 식(息: 쉬다 죽다)하는 것
양(陽)은 동(動)을 주(主)하고 음(陰)은 정(靜)을 주(主)하며,
양(陽)은 승(升)을 주(主)하고 음(陰)은 강(降)을 주(主)한다.
오직 동(動)하고 오직 승(升)하는 것은 양(陽)의 생기(生氣)를 얻었기 때문
오직 정(靜)하고 오직 강(降)하는 것은 음(陰)의 사기(死氣)를 얻었기 때문
따라서 ★건원(乾元)의 기(氣)는 하(下)에서 시(始)하여 상(上)에서 성(盛)하니, 승(升)하면 생(生)으로 향(向)하는 것
★곤원(坤元)의 기(氣)는 상(上)에서 시(始)하여 하(下)에서 성(盛)하니, 강(降)하면 사(死)로 향(向)하는 것
따라서 양(陽)은 자(子)에서 생(生)하니 자전(前)에는 승(升)하고 자후(後)에는 강(降)하며,
음(陰)은 오(午)에서 생(生)하니 오전(前)에는 강(降)하고 오후(後)에는 승(升)한다.
이렇게 음양(陰陽)이 갈라지니(:岐), 그 간격(間)이 모발(毛髮: 아주 극미하다)에 불과(不過)할지라도 필경(竟)에 이르러서는 천리(千里)같이 서로 어긋남(:謬)
사(死)와 생(生)을 가르는 자루(:柄)는 실로 오직 이 호리(毫釐)와 같은 승강(升降)의 기(機)에 있을 뿐
또한 수(水)가 난(煖)하면 기(氣)가 화(化)하고 기(氣)가 화(化)하면 승(升)하여 생(生)
수(水)가 한(寒)하면 얼음(:氷)이 되고(:成) 얼음(:氷)이 되면(:成) 강(降)하여 사(死)
따라서 신기(腎氣)가 홀로 침(沈)하면 생(生)을 봉(奉)하는 것이 적어지니(:少),
이는 곧 생기(生氣)의 이치(理)
사람의 생기(生氣)에 있어서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또한 마땅히 살피지 않아야 할 곳이 없다.
예로 장부(臟腑)에도 생기(生氣)가 있고 안색(顔色)에도 생기(生氣)가 있으며, 성음(聲音)에도 생기(生氣)가 있고 맥식(脈息)에도 생기(生氣)가 있으며, 칠규(七竅)에도 생기(生氣)가 있고 사지(四肢)에도 생기(生氣)가 있으며, 이변(二便)에도 생기(生氣)가 있다.
생기(生氣)는 곧 신기(神氣)
신(神)은 형(形)에서부터 생(生)하므로 어찌 변별(辨)할 수 없겠는가?
이것이 쇠(衰)하면 속히 배(培)하여 생(生)하지 못할까 염려(:恐)하여야 하니,
어찌 그 벌(伐)을 감당(堪)하겠는가?
하물며 그것(:생기의 쇠)이 심(甚)한 경우라면 (어떠하겠는가)?
따라서 현명(明)한 의사(師)는 이를 잘 살펴야 하니,
반드시 무엇이 이미 휴(虧)하였는지, 무엇이 아직 가(可)한지, 무엇이 생기(生氣)를 보익(益)할 수 있는지, 무엇이 생기(生氣)를 손상(損)할 수 있는지, 어떠할 때 마땅히 병기(病氣)를 먼저 공(攻)하여 생기(生氣)를 지켜야(:保) 하는지, 어떠할 때 마땅히 생기(生氣)를 먼저 고(固)하여 병기(病氣)를 다스려야(:御)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병기(病氣)가 비록 이와 같아도 생기(生氣)가 어떠한지, 지금(:見在)이 이와 같아도 나중(:日後)에는 어떠할지를 생각하는데 힘써야 한다.
그 기원(:原始)과 결과(:要終)에 밝지 못하면 모두 근시안(:寸光)을 가진 무리(:流)일 뿐
비록 그렇지만 이는 단지 도(道)로 말한 것이니, 이러한 도(道) 이외에도 여전히 설(說)이 있을 것
생기(生氣)는 소양(少陽)의 기(氣)이니, 소양(少陽)의 기(氣)는 진(進)은 있고 퇴(退)는 없는 기(氣)
이 기(氣)는 어디에서 왔는가? 근본(根本)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다.
이 기(氣)는 어떻게 사용(用)되는가? 이 속에는 특별히 현묘(玄)한 진리(眞)가 있다. 인생(人生)에서 귀(貴)한 것은 오직 이 기(氣) 뿐
출입(出入)하는 권(權)은 호흡(呼吸)에 있으니, 이는 생명(:氣數)의 보물(:寶藏)
하거(河車: 물을 건너는 수레)하는 제(濟)는 녹로(轆轤: 도르래. 곧 척추)에 있으니, 이는 실로 전운(轉運: 실어서 보냄)하는 신기(神機)
그 진(進)과 퇴(退), 그 득(得)과 실(失)은 총체적(總)으로 (기가) 생식(生息)하는 사이(:間)에 있으니, 장수와 요절(:彭殤 팽상)하는 길(:途)이 여기에서 갈라진다(:判).
경(經) "신(神)을 얻은 자는 창(昌)하고, 신(神)을 잃은 자는 망(亡)한다."
이러한 생기(生氣)를 말한다.
내가 이처럼 (생기를) 해치는(:剝) 경우를 다 기록(紀)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았으므로(:見遭), 그 의미(:義)를 특별(特)히 여기에다 밝힌 것
一. 명문(命門)은 문호(門戶)가 있으니, 일신(一身)을 견고(:鞏固)하고 하는 관문(關)
경(經) "창름(倉廩)이 장(藏)하지 못하는 것은 문호(門戶)가 요(要: 막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천(水泉)이 지(止)하지 않는 것은 방광(膀胱)이 장(藏)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守)를 얻으면 살고 수(守)를 잃으면 죽는다."
"신(腎)은 위(胃)의 관(關)이다. 관문(關門)이 불리(不利)하므로 수(水)가 취(聚)하니, 이는 그 종류(類)를 따른 것이다."
"북방(北方)은 흑색(黑色)이니 신(腎)으로 들어가 통(通)하며, 이음(二陰)으로 개규(開竅)한다."
이로써 북문(北門)의 주(主)는 모두 신(腎)에 있고,
신(腎)의 정령(政令: 정사의 명령)은 모두 명문(命門)에 있다.
명문(命門)은 북극성(:北辰)의 중추(樞)이고 음양(陰陽)의 조절(:柄)을 맡은(:司) 곳
음양(陰陽)이 화(和)하면 출입(出入)에 항상(常)이 있지만
음양(陰陽)이 병(病)하면 계폐(啓閉: 여닫음)에 질서(序)가 없다.
융폐(癃閉)로 불통(不通)하는 것은 음(陰)이 갈(竭)하고 수(水)가 고(枯)하여 건후(乾涸)하므로 행(行)하지 못하기 때문
활설(滑泄)로 불금(不禁)하는 것은 양(陽)이 허(虛)하고 화(火)가 패(敗)하여 수섭(收攝)에 주(主)가 없기 때문
음정(陰精)이 갈(竭)하였으면 장수(壯水)하지 않으면 결코 행(行)할 수 없고,
양기(陽氣)가 허(虛)하였으면 익화(益火)하지 않으면 결코 고(固)할 수 없다.
이것이 진실로 그 법(法)
그러나 정(精)은 기(氣)가 없으면 행(行)하지 못하고
기(氣)는 수(水)가 없으면 화(化)하지 못한다.
이처럼 그 속에는 또 나눌 수 있지만 나눌 수 없는 묘(妙)한 활용(用)이 있다.
이 또한 지혜(慧)로운 자의 신묘(神)한 깨달음(:悟)에 있으니, 글(:筆楮 연필과 종이)로 다할 수는 없다.
一. 명문(命門)에는 음허(陰虛)가 있는데, 이는 사화(邪火)가 편승(偏勝)하기 때문
사화(邪火)가 편승(偏勝)하는 것은 진수(眞水)의 부족(不足)에 연유(緣)한 것
따라서 병(病)이 되면 번갈(煩渴)이 되거나 혹 골증(骨蒸)이 되거나 혹 해혈(咳血) 토혈(吐血)이 되거나 혹 임탁(淋濁) 유설(遺泄)이 된다.
이는 비록 분명히 화증(火證)이지만 본래의 사열(邪熱) 실열(實熱)에 비(比)할 바가 아니다.
실열(實熱)의 화(火)는 갑자기(:暴) 오고 반드시 감촉(感觸)한 연고(故)가 있으며,
허열(虛熱)의 화(火)는 서서히(徐) 오고 반드시 적손(積損)한 원인(因)이 있다.
이처럼 허화(虛火)와 실화(實火)는 크게 부동(不同)하다.
화(火)를 치(治)할 때,
실열(實熱)의 화(火)는 한(寒)으로 승(勝)할 수 있고 수(水)로 절(折)할 수 있으니, 소위 '열(熱)하면 이를 한(寒)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
허열(虛熱)의 화(火)는 한(寒)으로 승(勝)할 수 없으니, 소위 '노(勞)하면 온(溫)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
왜 그러한가?
허화(虛火)는 수(水)가 없음으로 인한 것이니, 단지 마땅히 수(水)를 보(補)하여 화(火)에 배(配)하면 음양(陰陽)이 평(平)하게 되어 병(病)이 저절로 나을 수 있다.
만약 화(火)를 거(去)하여 수(水)를 회복(復)하려고 한다면 이미 휴(虧)한 수(水)는 반드시 회복(復)될 수 없는데다 화(火)도 아울러 거(去)하므로, 어찌 음양(陰陽)이 둘 다 패(敗)하지 않겠는가?
또 고한(苦寒)한 약물(物)은 승등(升騰)시키려는 생기(生氣)가 절대(絶) 없기 때문에 허(虛)를 보(補)하려고 하여도 이는 무리(無理)
따라서 이를 치료(治)할 때는 반드시 감평(甘平)한 방제(劑)로 진음(眞陰)을 전적(:專)으로 보(補)하였으니, 이는 비록 반드시 바로 낫지는 않는다 하여도 저절로 해(害)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 연후에 승(乘: 추가하다)할 수 있는 것을 살펴야 하니, 잠시 청해(淸解)하거나 혹 점차 온윤(溫潤)을 더한다면 반드시 생기(生氣)가 점차 돌아오게 된다.
바라건대(:庶) 비(脾)가 건(健)할 수 있으면 열(熱)이 퇴(退)할 수 있고, 폐(肺)가 점차 윤(潤)하여지면 수(嗽)가 점차 안정(:寧)되어 비로소 점차 회복(復)되는 좋은(:佳) 징조(兆)가 되니, 대부분 살아나게(:生) 된다.
만약 단지 지모(知) 황백(栢)으로 보음(補陰)할 줄만 안다면 그 신(腎)을 더욱 패(敗)하게 하여 설사(泄瀉) 식감(食減)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그 위태(殆)함을 재촉(: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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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선천과 후천
명문(命門)은 정혈(精血)의 해(海)이고
비위(脾胃)는 수곡(水穀)의 해(海)이니, 모두 오장육부(五臟六腑)의 근본(本)
명문(命門)은 원기(元氣)의 근본(根)이고 수화(水火)의 집(:宅)
오장(五臟)의 음기(陰氣)는 이것이 아니면 자(滋)할 수 없고,
오장(五臟)의 양기(陽氣)는 이것이 아니면 발(發)할 수 없다.
비위(脾胃)는 중주(中州)의 토(土)인데 화(火)가 아니면 생(生)할 수 없다.
춘기(春氣)는 하(下)에서 시(始)하니, 삼양(三陽)이 지(地)에서 일어난(:起)한 후에 만물(萬物)이 화생(化生)
명문(命門)의 양기(陽氣)도 하(下)에 있으니, 바로 비위(脾胃)의 모(母)가 된다.
"비위(脾胃)는 관주(灌注)하는 본(本)이니 후천(後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고,
명문(命門)은 화생(化生)하는 원(源)이니 선천(先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는다."
이처럼 그 속에는 진실로 본말(本末)의 선후(先後)가 있다.
2. 명문의 원양
명문(命門)에는 화(火)의 후(候)가 있으니 곧 원양(元陽), 물(物)을 생(生)하는 화(火)
품부(稟賦)에 강약(强弱)이 있다는 것은 곧 원양(元陽)에 성쇠(盛衰)가 있다는 것
일양(一陽)의 원기(元氣)는 반드시 하(下)에서부터 승(升)하니, 삼초(三焦)로 두루 퍼져야(:普濩) 각각 그 후(候)가 나타난다.
하초(下焦)의 후(候)는 땅(:地土)과 같으니 화생(化生)하는 본(本)이고,
중초(中焦)의 후(候)는 솥(:竈釜)과 같으니 수곡(水穀)의 화로(:爐)이며,
상초(上焦)의 후(候)는 하늘(:太虛)과 같으니 신명(神明)의 집(:宇)이다.
이상은 삼초(三焦)로 화후(火候)를 논(論)한 것
각기 사(司)하는 바가 있는데, 어째서 모두 명문(命門)으로 귀(歸)하는가?
수(水) 중의 화(火)는 곧 선천(先天)의 진일(眞一)의 기(氣)이니, 이것은 감(坎) 속에 장(藏)하여져 있다
이 기(氣)는 하(下)에서부터 상(上)하여 후천(後天)의 위기(胃氣)와 서로 접(接)하면서 화(化)하니, 이는 실로 생생(生生)케 하는 근본(本)
따라서 꽃 봉우리(:花萼)의 영(榮)은 그 뿌리(:根柢)에
솥(:竈釜)의 용(用)은 그 땔감(:柴薪)에
3. 명문의 생기
명문(命門)에는 생기(生氣)가 있으니,
이는 곧 건원(乾元)의 불식(不息: 쉬지 않음)하는 기(機)
생(生)이 없으면 식(息: 쉬다 죽다)하는 것
양(陽)은 동(動)을 주(主)하고 음(陰)은 정(靜)을 주(主)하며,
양(陽)은 승(升)을 주(主)하고 음(陰)은 강(降)을 주(主)한다.
오직 동(動)하고 오직 승(升)하는 것은 양(陽)의 생기(生氣)를 얻었기 때문
오직 정(靜)하고 오직 강(降)하는 것은 음(陰)의 사기(死氣)를 얻었기 때문
따라서 건원(乾元)의 기(氣)는 하(下)에서 시(始)하여 상(上)에서 성(盛)하니, 승(升)하면 생(生)으로 향(向)하는 것
곤원(坤元)의 기(氣)는 상(上)에서 시(始)하여 하(下)에서 성(盛)하니, 강(降)하면 사(死)로 향(向)하는 것
따라서 양(陽)은 자(子)에서 생(生)하니 자전(前)에는 승(升)하고 자후(後)에는 강(降)하며,
음(陰)은 오(午)에서 생(生)하니 오전(前)에는 강(降)하고 오후(後)에는 승(升)한다.
사(死)와 생(生)을 가르는 자루(:柄)는 실로 오직 이 호리(毫釐)와 같은 승강(升降)의 기(機)에 있을 뿐
4. 명문과 관문
명문(命門)은 문호(門戶)가 있으니, 일신(一身)을 견고(:鞏固)하고 하는 관문(關)
신(腎)은 위(胃)의 관(關)
북문(北門)의 주(主)는 모두 신(腎)에 있고,
신(腎)의 정령(政令: 정사의 명령)은 모두 명문(命門)에 있다.
명문(命門)은 북극성(:北辰)의 중추(樞)이고 음양(陰陽)의 조절(:柄)을 맡은(:司) 곳
음양(陰陽)이 화(和)하면 출입(出入)에 항상(常)이 있지만
음양(陰陽)이 병(病)하면 계폐(啓閉: 여닫음)에 질서(序)가 없다.
융폐(癃閉)로 불통(不通)하는 것은 음(陰)이 갈(竭)
활설(滑泄)로 불금(不禁)하는 것은 양(陽)이 허(虛)
실열(實熱)의 화(火)는 갑자기(:暴) 오고 감촉(感觸)한 연고(故)가 있으며,
허열(虛熱)의 화(火)는 서서히(徐) 오고 적손(積損)한 원인(因)이 있다.
명문(命門)에는 음허(陰虛)가 있는데, 이는 사화(邪火)가 편승(偏勝)하기 때문
사화(邪火)가 편승(偏勝)하는 것은 진수(眞水)의 부족(不足)에 연유(緣)한 것
◆ 비위(脾胃)는 관주(灌注)하는 본(本)이니 후천(後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고,
명문(命門)은 화생(化生)하는 원(源)이니 선천(先天)의 기(氣)를 여기서 얻는다.
명문(命門)에는 화(火)의 후(候)가 있으니 곧 원양(元陽), 물(物)을 생(生)하는 화(火)이다.
명문은 일신(一身)을 견고(:鞏固)하고 하는 관문(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