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배규한
사진, 편집 : 박노일
수요산행팀에서는 작년(2023) 5월부터 매월 셋째 수요일은 조선왕릉을 탐방하기로 했다. 왕실의 무덤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되는데, 능은 왕과 왕비(추존된 왕과 왕비 포함)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 비, 왕의 사친(私親) 무덤을 말한다.
조선왕릉은 현재 42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남한에 있는 40기(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로 제릉(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사망한 첫 부인 신의왕후의 능)과 후릉(2대 정종의 능) 2기는 개성 부근에 있다.
조선왕릉은 당시 국가통치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따라 조성되어 공간의 크기와 석물(石物) 배치 등 예술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정치와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 멸망 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후손들(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의해 산릉제례가 계속되고 있는 것도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의 왕릉(40기)과 원(13기)은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영능, 강원도 영월의 장릉 3기 외에는 모두 도읍인 한양에서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40km 이내)에 있다. 그중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 장릉((莊陵, 단종의 능)인데, 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애달픈 사연을 안고 있다. 조선 왕조사에 비극적 사건이 많았지만, 당시는 물론 현대인들에게까지 가장 애처롭고 가슴 아픈 사연은 “단종애사”(이광수의 소설 제목)일 것이다. 오늘 우리가 탐방하기로 한 곳이 바로 장릉이다.
청량리역에서 08:30에 출발하는 이름도 낭만적인 ‘정선아리랑열차’를 탔다. 청량리역이 유난히 복잡한 역이라 혹시라도 누군가 늦을까 걱정했는데 모두 여유있게 나와서 즐거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참 오랜만에 타보는 일반열차인데, 노란색 꽃무늬 시트 커버에 에어컨과 선풍기까지 갖춘 객실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쉼 없이 펼쳐지는 신록의 향연을 즐기며 “복사꽃 능금 꽃이 피는 내 고향” 추억에 잠겼다. 부실한 아침식사를 채우라고 서로 준비한 간식을 나눠준다. 옛날 완행열차의 단골 메뉴인 삶은 계란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원주(09:29), 제천(09:51)을 거쳐 10:32에 영월에 도착했다. 영월에 들어서며 첫눈에 띈 것은 봄 강가에 화사하게 피어난 유채꽃이었다. 정겨운 영월역에 내려 기념사진을 찍는데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역장과 여직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적한 소도시의 정겨운 경관을 즐기며 걸어서 장릉을 향했다.
가는 도중 연못 가에 아름답게 조성된 “장릉노루조각공원”이 있었다. 장릉과 노루에 관한 아래 전설을 토대로 만든 공원이었다.
사약을 받은 후 사망한 단종의 시신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가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지게에 지고 동을지산으로 갔는데, 온 산에 눈이 쌓여 있어 모실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갑자기 누루가 뛰어가는데 보니 노루가 앉았던 자리에는 눈이 녹아 있었다. 잠시 그 자리에 지게를 버티어놓고 쉬다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니 지게 목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엄흥도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몸을 피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약 1시간 만에 장릉(莊陵)에 도착하여 문화해설사를 찾으니 점심시간이 촉박함에도 흔쾌히 응해 주셨다.
장릉은 비운의 소년 군주로 생을 마감한 조선 제6대 단종(端宗, 1452~1455)의 능이다.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의 적장남으로 태어나(1441. 7. 23) 7세가 되던 세종 30년(1448)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1450) 왕세자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산후 후유증으로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어렸을 때 승하하였으며, 문종마저 재위 2년 4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단종은 혈혈단신의 어린 나이(11세)로 보위에 올라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의 보좌를 받았다.
(엄홍도 정여각)
즉위 1년 후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1453)을 일으켜 국정의 전권을 장악하자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하고(1455)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사육신이 주도한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면서 단종은 세조 3년(1457) 노산군으로 강봉된 뒤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하여 6일 후인 28일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면서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내려졌다. 거듭된 복위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때마침 중국에서 복위 사건이 있었음) 세조에 의해 단종은 유배 4개월 만인 음력 10월 24일 사약을 받고 1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엄흥도에 의해 암장되었던 단종의 묘는 왕위가 4번이나 바뀐 후 중종 11년(1516)에야 비로소 왕릉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고, 숙종 24년(1698)에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된 능이 아니므로 다른 왕릉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우선 정자각(능 제향을 올리는 丁자 모양의 집)으로 들어가는 향로(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와 어로(임금이 걸어가는 길)가 ㄱ자로 꺽여 있다. 그리고 다른 왕릉은 정자각에서 뒷편 문으로 보면 능이 보이는데, 장릉의 경우 비탈만 보이고 능은 안보인다. 또한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망주석에 세호(細虎 다람쥐처럼 생긴 호랑이) 조각이 없다. 석물도 무인석은 없고 문인석만 있으며, 동물석도 석양 한 쌍만 있다.
장릉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정령송(精靈松) 팻말이 붙은 소나무가 눈에 띄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혼이라도 함께 하라는 뜻에서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思陵,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107)에서 옮겨심은 나무라고 한다. 입구에는 단종의 애달픈 사연을 보여주는 단종역사관이 있고, 영조 2년(1726)년에 어명으로 세운 엄흥도정려각(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집)도 있다. 그리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조사, 환자군노, 여인 등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영월군수이던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박충원낙촌비도 눈여겨 볼 만 하다. 가뭄 때도 마르지 않고 단종제를 올릴 때면 수량이 더 많아진다는 신비한 우물인 영천(靈泉)도 있다.
장릉 바로 앞 식당에서 곤드레나물과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 청령포를 향해 걸어가는 중에 ‘장릉깨비굴’이라는 석굴이 있었다. 입구가 막혀있어 들어가지는 못하고 들여다보니 도깨비에 관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든 굴 같았다. 장릉에는 노루 전설과 함께 도깨비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단종의 비극 이후 이곳에 부임한 지방관리들에게 의문의 죽음이 잇달았으며, 도깨비들이 단종의 묘를 지켜주었다고도 한다. 지금도 매주 말 장릉 경내에서 “장릉 낮도깨비-1457년 잠든 소년”이란 마당극이 공연되고 있다. 단종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단종을 지킨 도깨비 설화를 함께 풀어낸 마당극 형식의 창작 뮤지컬로서, 아이들에겐 재미와 역사를, 어른들에겐 감동과 추억을 안겨준다고 한다.
아름답게 조성된 널찍한 수변공원을 거쳐 40분쯤 후 청령포에 도착하니 광장 한가운
데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랑을 그린 “천상재회”라는 조각상이 다시 한번 모두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배표를 끊어 청령포로 들어가는데, 배는 수시로 왕래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좋은 문화해설사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청령포는 참으로 특이한 지형이다. 동.남.북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짐승도 다니기 어려울 정도의 험준한 암벽이다. 세종이 이곳의 지형을 보며 천혜의 유배지라고 했다는데, 사랑하는 친손자가 이곳에 유배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단종어소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돼 있으며, 본 채 외에 궁녀와 관노들이 머물던 행랑채도 있다. 청룡포는 수백년 거송들이 울창한 수림지인데, 그중에서도 1988년에 천년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관음송(觀音松)이 눈에 띈다. 수령은 600년 정도(단종 유배 시에는 약 60년생)로 추정되며, 단종이 두 갈래로 갈라진 이 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고 전해진다.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고(觀), 때때로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송으로 불리어 왔다고 한다.
관음송 뒤편 가파른 계단 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노산대와 망향탑을 볼 수 있다. 노산대는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기던 장소라고 한다. 망향탑은 청룡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절벽에 있는 돌탑이다. 단종이 기약할 수 없는 앞일과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 씨의 안위를 걱정하며, 주변의 막돌을 모아 정성을 다해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돌아가는 길에 비통한 심정으로 읊었다는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비가 가슴에 저민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원래는 영월역까지 걸어갈 계획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 택시를 불러 타고 여유있게 영월역으로 왔다. 역전 식당에 들어가 동강에서 잡았다는 다슬기탕 안주에 한잔 술로 애잔한 마음을 달래며 이른 저녁 식사까지 마쳤다. 오늘 식사는 임원택 사무총장이 취직 턱으로 낸다고 했다. 대한성서공회에 취직이 되어 지난 8일부터 출근하고 있다니, 반갑고 놀라운 일이다. 73세 노인이 재취업을 하다니 참으로 은혜로운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17:44에 무궁화호를 타고 귀경길에 올라 20:09에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수학여행 떠나듯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했던 아침과 달리, 귀경길은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 권력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과 행태는 그대로인 것 같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고 행복한 삶의 길일까?
끝으로, 이 모든 일정을 기획하고 왕복기차표 예약까지 다해 준 박노일 산행대장에게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