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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33
8월26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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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신뢰와 우애가 더욱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이요 백성들의 자존심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몇번이나 파괴되고 정복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AD 70년,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히 함락 당하고 산산히 부서집니다.
그 와중에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알량한 교도권을 행사하며, 유다교를 지탱해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토록 불행하던 시절, AD 90년경,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게 되는데, 그 무렵 그리스도교는 유다교로부터 완전히 선을 긋고 독립하게 됩니다.
민족 종교이자 기성 종교, 나름 정통성을 자부하던 유다교 입장에서는 신생 그리스도교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다교 쪽에서 워낙 강하고 심하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몰아붙였기에,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던 복음사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유다 회당의 지도자 격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이고 있던 위선과 이중성을
신랄하고 지적하고 몰아 붙입니다. 그들의 율법주의를 고발하고 단죄하면서, 절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고발과 단죄의 말씀이 얼마나 강하던지, 듣고 있노라면 섬뜩할 정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단죄와 고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입니다. 속으로 ‘아이고~ 잘 됐다. 속이 다 시원하다!’며 뒤돌아서서 고소해하고, 끼리끼리 모여 낄낄댈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7가지 불행 선언은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위선적 삶과 이중적인 신앙생활은 오늘 우리도 저지르기 쉬운 악덕이니만큼, 강력한 경고 말씀을 매일 우리 각자의 삶에 비추어볼 일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나 자비, 신의나 이웃 사랑과 같은 율법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을 뒤로 내동댕이치고, 세세한 율법의 준수에만 목숨을 거는 율법제일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 손에 ‘지식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뽐내던 지식은 거짓 지식으로 결국 백성들을 멸망에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참된 지식의 열쇠는 이미 수제자 베드로 사도와 그리스도 교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들의 전매특허인 ‘맹세’를 밥먹듯이 되풀이하는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절대 진실’을 요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절대로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스러운 하느님의 이름을 거명하기는 두려웠던지 우회적인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정말 웃기고 속보이게도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금촛대, 금속죄판, 금화)이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보이려고 기를 썼지만, 성전 장사꾼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오 복음 23장 17절)
예수님께서 성전은 성전을 장식하는 금촛대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니고, 제단은 제단 위에 바쳐진 예물보다 훨씬 상위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명쾌히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간에 자주 오고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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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도자의 조건>
영재 발굴단에 나온 여섯 살 서진이는 문제를 푸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도 다른 것은 대답하지 않고 “일단 문제 하나 내봐요!”라며 자신의 실력을 뽐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들은 아직 풀 수 없다며 자격지심을 드러냅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여섯 살 다른 아이들은 꿈도 못 꾸는 혼합계산과 같은 것입니다. 영재로 인정받음에도 그런 자격지심은 왜 생겼을까요? 상담 선생님은 “나는 네가 문제를 잘 푸는지, 안 푸는지가 궁금하지 않은데? 네 기분이 어떤지가 궁금한데?”라고 말하니 서진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서진이는 문제집이 재미있어서 풀었던 것이 아닙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문제를 풀어왔던 것입니다. 엄마는 서진이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맞히면 칭찬해주고 틀리면 칭찬해주지 않는 것 자체가 서진이에게 남들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서진이 말고 세윤이도 있었습니다. 엄마는 여덟 살 세윤이가 공부가 제일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윤이는 학원을 무려 11개나 다닙니다. 팔방미인으로 엄청난 칭찬을 듣는 아이입니다. 세윤이는 엄마가 억지로 시킨 공부 때문에 한숨을 쉬다가 엄마가 나오는 동요에서 엄마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달리는 것인지, 엄마의 꿈을 위해 달리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우리는 다 누군가의 지도자요 인도자들입니다. 내가 인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인도자입니다. 인도자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면 그를 따르는 이들은 그 지도자와 함께 망하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지도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하늘나라의 문을 잠그고 자신도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자녀에게 신앙보다는 공부나 성공을 우선시 가르쳤다면 그 부모는 눈먼 인도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지옥가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 또 세상의 권력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각자, 또 나에게 딸린 가족이나 이웃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손목에 소위 만보기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은 하루에 몇 보를 걸었는지 체크하기 위해 손목에 그런 기구를 차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들은 자신들의 건강을 수시로 체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차고 다니는 수고를 감수한다는 말은 그 사람들에겐 건강이 최고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손목에 어떤 것을 차고 다녀야할까요? 영혼 구원을 위해 하루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했는지 안 했는지 체크하는 무언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차고 다니며 수시로 체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기도시간’입니다. 스마트 폰을 기도시간에 맞추어 놓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분들은 하루의 기도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명예를 얻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며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녀들의 신앙일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 얼마동안 기도해야겠다는 것이 정해져있습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그것을 몇 프로나 채웠는지 체크합니다. 이것이 하루 중 가장 신경 쓰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제가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또 기도하면 다 잘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친교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면 자신과 이웃을 위한 잘못된 인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도자의 조건은 무엇이 중요한 지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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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3-22 :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복음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해 가장 무서운 말씀이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13.15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이나 차례로 당할 화를 지적하신다. ‘불행하여라!’는 말씀은 진노일 뿐 아니라 비애가 곁들여 있는 말씀으로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고 하느님의 뜻에 완고하게 눈을 감고 자기 편한대로 하느님을 이용하는 자에 대한 서글픈 사랑의 심정에서 나오는 분노이다.
위선자라는 말은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내면의 상상과 감정은 겉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을 경건하게 준수한다든지 정교하게 꾸며진 기도문, 성구를 적은 것을 옷 속에 넣는다든지 옷 술을 달고 다닌다든지 한다. 또한 규칙과 규례를 소상하게 준수하지만, 마음속으로 이웃을 이해하거나 동정하거나 사랑하거나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과 거만함과 자기만족이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자기 스스로의 못된 행위로 닫아 놓고서는 자신은 못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다른 사람들까지도 가로막는 데에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마태 6,10에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러한 세상을 생각하고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시민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이란 사랑의 실천이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이 그들이 만든 수천 가지나 되는 사소한 규칙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소홀히 한 그것이 바로 자신들의 면전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버리는 행위라고 예수님은 지적하시면서 경고하신다.
그러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떤가? 예수께서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그토록 ‘불행하여라!’고 진노하셨다면 예수님의 그 진노를 받을 만한 허물이 과연 나에게는 없는가? 특히 하느님 앞에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불림을 받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안다고 하는 오늘날의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까지도 내 악한 표양으로 막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오늘의 복음 앞에 진정 하느님의 뜻을 따름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경외하며 겸손하게 행하도록 해야겠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하느님께 축복을 받는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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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그동안 겪은 역경과 박해에도 그들이 보여 준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항구한 희망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일깨워 줍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불행하여라, 너희 ……들아!”로 시작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불행 선언은, 각각 하느님 나라, 개종자를 얻으려는 행위, 맹세에 관한 것이며 그들의 위선을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과 종교를 왜곡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의 태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열린 마음과 열정과 기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하느님을 믿는 이들을 주변에서 봅니다. 이런 태도는 마음은 멀어지고 입술로만 하느님을 공경하는 헛된 예배 행위입니다. 나아가 이는 ‘늘 해 오던 것’만 굳게 지키며, 새로운 바람을 두려워하여 시대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전통주의를 고집하며 오래된 옷과 가구의 냄새를 제거하는 신선한 산들바람에 창문을 닫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면 인간의 대답, 곧 믿음은 행실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힘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믿음과 사랑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 삶의 분리,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분리, 생각과 말과 행위의 분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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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맹세>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 23,16-17)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21-22)
당시 사람들은 맹세를 할 때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가 없어서 성전을 두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랬다가 맹세를 지켜야 할 때가 되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것이 아니니까 안 지켜도 된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그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억지 주장을 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3-37)
야고보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 5,12)
지금 말하고 있는 ‘맹세’는,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일을 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 또 “‘예.’와 ‘아니요.’라는 말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맹세는 악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언제나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맹세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맹세를 하거나, 또는 거짓을 말하면서도 진실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맹세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도 죄이고, 자기 마음대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도 죄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
헤로데의 이야기에서 함부로 맹세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2-23)
여기서 “맹세까지 하였다.”라는 말은,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헤로데는 정말로 자기 왕국의 절반을 딸에게 줄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습니다. 로마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서 헛된 맹세를 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한 헤로데가 “천벌을(하느님의 벌을) 받아도 좋다.”라고 맹세한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것은 진심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습관적인 거짓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마태 26,73-74)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것도 큰 잘못인데, 자기 말이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한 것도 큰 잘못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맹세한 대로 천벌을 받았을까? 실제로 천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천벌을 받은 것보다 더 큰 심적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그때의 일을 뉘우쳤고, 울면서 통회했다고 전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날이 밝자 유다인들은 모의를 하고,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였다."(사도 23,12)
바오로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그 유대인들의 모의는 실패했습니다.(사도 23장) 그러면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지켰을까? 하루 정도는 지켰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모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들의 맹세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2서를 보면, 하느님을 걸고 맹세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걸고 말하는데,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아니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2코린 1,18)
“나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불러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에 아직도 코린토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2코린 1,23)
우리는 이 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를 위해서 변명한다면,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거짓말을 감추려고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코린토 신자들이 그런 어법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어서 신자들에게 맞추려고 그런 것은 아닐까, 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러분 앞에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다고 여러분은 줄곧 생각해 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2코린 12,19)
(그래도 어떻든 ‘하느님을 걸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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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유재훈 바오로 신부님]
한 본당에서 토종닭을 기르던 일이 생각납니다. 봄이 되면 어미닭은 자신이 품을 수 있을 만큼의 알을 낳습니다. 이후 어미닭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둥지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모이를 먹을 때만 빼고는 항상 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알은 부화됩니다.
알에서 나온 병아리들은 어미닭을 졸졸 따라다니며 어미닭이 하는 대로 합니다. 어미닭이 부리로 풀을 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하고, 어미닭이 발로 흙을 헤집으면 병아리들도 그렇게 합니다. 물 한 모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어미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병아리들은 어미닭이 먹는 것을 먹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본능으로 압니다. 어미닭은 병아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인도자이자 보호자입니다.
복음에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도자는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과 위험이 있는지 정확히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도자들이 눈이 멀었기 때문에 화를 입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인도자가 눈이 멀었다면 그뒤를 따라오는 사람은 모두 불행한 일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걸어가도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데 인도자가 눈이 멀었으니 그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앞날은 뻔합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하느님의 인도자인 저의 눈은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혹시 스스로 시력이 좋다고 착각하고 있는 눈뜬 장님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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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최종수 윤호요셉 신부님]
최영 장군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을 보는 상황과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며칠 굶주린 사람에게 빵과 황금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것을 선택할까요. 대부분 빵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흘을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황금을 신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빵보다 황금을 선택할 것입니다. 황금을 팔면 빵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조직폭력배의 영화들이 유행처럼 흥행했습니다. 조직세계의 정신은 의리와 복종에 있다고 합니다. 조직에 들어올 때 맹세한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치는가 하면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는 상대편 조직원의 목숨까지도 앗아버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동안 그 영화들이 흥행하는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치입니다.
우리는 진복팔단의 참된 행복에서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 슬픔, 온유, 옳은 일, 자비를 베품, 마음의 깨끗함, 평화를 위하여 일함, 옳은 일을 하다가 받는 박해가 하늘나라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음이 그것입니다.
이 상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참된 행복이 황금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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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승원 니코메데스 신부님]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선언은 오늘과 내일에 걸쳐 우리가 듣게 될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곱 가지 불행선언 가운데 첫 번째부터 세 번째 불행선언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불행선언이란 말은 7개의 단락이 모두가 “불행하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선언은 불행에 대한 암시적인 심판을 수반하는 말씀으로 진복팔단의 말씀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 말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1절). 우리는 이로 인해 이 말씀을 해석학적으로 교회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위선이 아니라 오늘 교회 공동체와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에도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13절부터 시작되는 불행의 선언은 ‘율법’이나 ‘모세의 자리’가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범한 그들의 가르침과 위선에 대한 경고와 교훈입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가 늘 경계해야할 교훈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당하게 될 불행은 3절 후반부터 4절까지 언급된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그것들을 얹어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부터 15절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불행의 선언입니다. 때문에 이 불행은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시각과 관행, 이런 잘못된 시각과 관행에 그 책임이 있는 율법학자들에 내리시는 통렬한 불행선언입니다.
본문에 다섯 번이나 나오는 “外飾하는 者” 또는 “위선자, 연기자(배우)”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선행을 하는 동기’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이익과 보상을 얻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者’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 단어는 자기기만(自己欺滿)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기만(欺滿)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율법 연구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유대교의 지도층으로 지칭되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모세의 가르침인 율법을 해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그릇되게 율법을 해석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을 사람들 앞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행동이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문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닫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13절)
더구나 그들의 잘못된 인도 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 된다는 것입니다.(15절)
16절부터 22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 그들의 그릇된 궤변적인 해석과 가르침을 정죄하시는 세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불행하다. 바리사이 위선자들아!”라는 지금까지의 호칭을 16절에 와서 아주 통렬하게 “불행하다. 너희 눈먼 길잡이들아!”로, 그리고 18절에 서는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로 저들을 부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무지와 위선, 무책임이 자신 뿐 아니라 공동체에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무지와 위선, 무책임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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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에게>
마태오 23,13-2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에게>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한 걸음 뒤에선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만물을 짓고 품으시는 하느님을 설교하기보다
그에게 하느님처럼 다가가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설명하기보다
낮아짐으로써 그를 올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기보다
그와 묵묵히 함께 걷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하늘나라를 떠벌리기보다
살아있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믿음을 강요하기보다
실천하는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사랑을 다그치기보다
그를 나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십자가를 웅변하기보다
내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가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부활의 환상을 심어주기보다
어둠을 사르는 빛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군가의 한 걸음 앞에서
한 걸음 뒤에선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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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내 마음 안에 부는 바람…>
지금 고운님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젊든 늙든, 고통이 있건 없건, 문제가 있건 없건, 등등..우리가 왜 이렇게 아픈지 이제는 알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은 이후 부터가 제대로 된 고운님들 삶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건강한 하루의 삶이 시작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요즘 마음은 어떠세요?"
내가 당신 편입니다. 내가 당신을 지지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요즘 마음은 어떠세요? 라는 말은 마치 어두운 마음(분노, 억울함, 상처)에 천천히 정확하게 햇빛을 쬐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운님들 마음뿐만 아니라 누군가에 마음에 햇빛이라는 바람이 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마음은 어떠세요?"
특히 고운님들의 아이에게 물어야 합니다.
"요즘 마음이 어떠니?"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눈먼 인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눈먼 인도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금보다 성전이, 그리고 제단 위의 예물보다 제단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성전보다 더 금을, 제단보다는 제단 위의 예물을 더 중시하게 가르치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거룩한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재물과 탐욕이 들어와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보아야 하고 붙들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바람은 마음결 따라 분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 안에 꽃을 피우는 사람에게는 꽃바람이 불고, 고독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소슬바람(낙엽이 지고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부는 가을바람)이 불며, 싸늘한 사람에게는 찬 바람이 붑니다. 강에서 불면 강바람이 되고, 바다에서 불면 바닷바람, 들에서 불면 들바람이 됩니다. 죄를 품은 바람이 불면 성난 파도가 일고, 사랑 품은 바람이 불면 순풍이 됩니다.
바람은 오늘도 붑니다. 마음은 어떠세요? 어느 바람에 고운님들의 마음을 실어볼까요? 왜냐면, 바람은 마음결 따라 불기 때문입니다. 고운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 힘들고 아픈 문제들을 조목조목, 하나하나씩 꺼내어, 예수님께 맡길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이미 구원의 바람이 불고, 문제의 매듭이 풀려 회복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티모테오 2서 3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섭리를 고운님들의 마음에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마음을 품고, 주님 앞에 모든 질병과 슬픔을 내려놓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 충만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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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35)
♧♧ 시편 45편 4절….
"오, 용사시여. 허리에 칼을 차소서. 당신의 엄위와 영화를 입으소서."
이 구절은... 임금이 전쟁에 출전하기에 앞서 화려한 갑옷을 입고 허리띠를 두르며 허리에 칼을 차는 등의 완전 무장한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기서 ‘칼...’은 임금의 절대적 권세를, 영화와 위엄은 모든 백성은 물론 많은 적들까지도 그 임금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는 임금의 지존하심을 나타냅니다. 한편 이러한 임금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어둠의 권세 잡은 자들과 싸워 정복하는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예표하는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1장 16절, 19장 15-16절. 참조)
♧♧ 시편 45편 5절…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아가 이루소서. 진실과 정의를! 당신의 오른팔이 당신께 무서운 일들을 가르치리이다."
* 당신의 영화와 함께 나아가 이루소서. 진실과 정의를!...
임금이 불의와 폭력이 아닌 진실과 정의, 자비와 참된 평화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 그러한 것을 위협하는 많은 적들과 싸워 이기라는 말입니다.
이는 폭력으로 다스리는 자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거짓과 불의를 배척해야 할 이스라엘의 임금의 본분과 다스리시는 방식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 당신의 오른팔이 당신께 무서운 일들을 가르치리이다...
‘왼손...’에 비해 오른손은 대개 힘이 세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데 ‘힘’ 또는 ‘권력’ 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도 ‘당신(주님)의 오른팔...’은 임금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서운 일들...’은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을 힘입어 많은 적들과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6절. 참조)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궁극적으로 진실과 자비와 정의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세상을 멸망시키시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임을 예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시편 45편 6절…
"임금님의 화살은 날카롭게 원수들의 심장을 꿰뚫고 민족들은 당신 발아래 쓰러집니다."
* 임금님의 화살은 날카롭게 원수들의 심장을 꿰뚫고...
여기서 날카로운 화살이 많은 적의 가슴을 꿰뚫었다는 것은 많은 적에 대한 임금의 공격이 치명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이는 궁극적으로 원수 마귀에 대한 메시아의 절대적 승리를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민족들은 당신 발아래 쓰러집니다...
이는 임금의 정복이 주변 민족들에 미쳐서 민족들이 임금 앞에 굴복하게 됨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귀에 의한 메시아의 완전한 승리로 인하여 이방 민족들이 임금 앞에 나아가 경배하게 됨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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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에 걸려서 생을 마감했지요. 사실 그가 2003년 10월 처음 암으로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아직 종양 크기가 작으니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스티스 잡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의 병 역시 고칠 수 있다고 믿었나 봅니다. 수술을 거부하고 대체 의학을 선택했습니다.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부작용을 겪기보다는 효과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선택한 대체 의학을 통해서 치료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암은 계속 성장하여 퍼져나가 간까지 전이되어 어쩔 수 없이 여덟 달 뒤 수술에 동의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본인도 그의 자서전에서 후회했던 결정으로 수술 거부한 것을 뽑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아이폰을 만들었던 힘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이상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 문제는 자기 자신만이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남들까지 설득을 시켜서 자신의 영역에 끼워 넣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자.’라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죽자.’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남들도 다 하니까.’라면서 똑같이 행동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예를 들어 교통신호를 받아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또 그 뒤의 차도 신호를 무시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의 차는 ‘왜 가지 않느냐?’면서 경적을 울립니다. 신호는 분명 정지 신호인데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따라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직접 강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하는 말과 행동만으로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남다르다면 어떨까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을 향해 불행선언을 외치십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의 단식과 기도와 자선은 그 누구도 쫓아가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위선을 보셨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 남들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삶, 그러한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영향을 받아 커다란 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위선을 통해서는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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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
저는 물을 잘 안 마십니다. 그런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많이 마셔야 몸의 노폐물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마셔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천이 잘 안 됩니다. 이런 고민을 어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저의 소변 색깔이 진한지 그리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물어보십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몸에 수분이 정말로 부족하면 신장에서 밖으로 배출하지 않고 수분을 꽉 잡아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변 색깔이 진해지는 것이지요. 또한 수분이 부족하면 몸은 본능적으로 갈증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따라서 소변 색깔도 정상이고, 갈증도 없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신부님, 우리 몸의 70% 이상이 이미 물입니다. 더 마신다고 그만큼 더 좋아지지 않아요.”라고 대답해주십니다. 굳이 억지로 물을 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변 색깔이 진해지거나 갈증이 생기면 얼른 물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이상이 있을 때, 심한 영적 갈증을 느끼게 될 때는 얼른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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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조재형 신부님이 미국에서 올리시기 때문에 시차관계로 하루씩 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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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외국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기까지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는 ‘수업료’를 냈다고들 하십니다. 때로 서러움에 눈물 흘리기도 했고, 왜 정든 땅을 떠나야 했는지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민이라는 좁은 문을 잘 참고 견디었기에 오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고 합니다. 거주자 등록하는 데 1달 시간이 필요하고, 자동차 면허 따는 데 2달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는 곳에서 살았기에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이 또한 뿌리내리는 과정입니다.
25년 전의 기억입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교포 사목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을 듣고 기뻤습니다. 인정받았다고 느꼈습니다. 학원도 다니고, 조용히 준비하면 좋았습니다. 들뜬 마음에 술자리를 자주 했습니다. 젊었고, 가슴은 뜨거웠지만 냉철하지 못했습니다. 주교님께서 다지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의 지나친 음주를 걱정하셨고, 질책하셨습니다. 미국 가는 결정도 취소하셨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쳤으면 좋았겠지만, 원망의 마음이 컸습니다. 저의 음주 사실을 주교님께 알린 사람이 미웠습니다. 분명 같이 마신 사람 중에 있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돌아와 성경책을 펼치니 욥기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욥은 성실하게 살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가족은 행방불명 되었고, 종들은 강도를 만났고, 재산은 거센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몸마저 병이 들었습니다. 욥은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분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음에 감사한다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쁜 것을 주셔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감사드립니다.’ 욥 성인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슴에 차오르던 원망도, 분노도 봄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따뜻한 바람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제 마음도 따뜻해졌습니다.
10시면 사제관에 들어오는 좋은 습관이 생겼고, 술자리에서도 과음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일찍 자니,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니 여유가 있었고, 일할 때도 여유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침에는 연락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고, 조용하기에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주교님의 견책이 제게는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영적인 죽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땀을 흘리고, 노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더 큰 노력과 땀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세상의 문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상대방이 더 노력하고, 더 능력이 있으면 내가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세상의 문은 ‘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메달의 숫자는 한정되어있고, 메달을 원하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절대적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나누면 됩니다. 천국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비경쟁 가치’를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랑, 나눔, 배려와 같은 것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모든 것을 나누는 희생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우경식 요셉의원 원장님은 세속의 성공과 명예보다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먼저 선택하는 사랑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을 보면 더러운 일, 힘든 일을 늘 앞장서서 하는 봉사의 열쇠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의 열쇠를 가진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신앙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열쇠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어둠에 빛을,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주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아들아 너는 주님의 견책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도 말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는 자에게 매를 든다.” 그렇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주님의 견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절망과 좌절 속에서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방법과 길을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배울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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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보석寶石같은 사람들!-
얼마전 산책중 만난 수도형제의 “보석을 주었습니까?”인사말이 생각납니다. 이어 보내준 ‘임마누엘 보석’이란 메시지와 더불어 수도원 정문 옆 임마누엘 신부가 설치한 작품 사진이었습니다. 요즘에서야 깨닫는 무수한 보석들입니다. 얼마전 ‘야외이발소’란 메시지와 더불어 선물받은 저와 수도형제가 서로 이발해주는 사진도 보석같았습니다.
어제 저녀성무일도중 기도하는 엄마 품에 잠든 아기 장면도 보석처럼 참 아름답고 평화로워 기도가 끝나는 즉시 사진에 담았습니다. 얼마전 사진을 받은 자매의 답글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꽃과 사람, 나무와 풀들, 하느님의 선물인 노동, 우리의 형제인 예쁜 강아지들, 감사드립니다. 보석인줄 모르고 살았어요.”
얼마나 보석같은 행복을 놓치고, 잊고 살았는지 깨닫습니다. 요즘은 산책중 찍는 아름다운 사진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보석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저에게 산책은 보석 줍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찌 산책 시간 뿐이겠는지요? 참으로 깨어 있는 삶이라면 하루하루 모두가 반짝이는 보석들을 줍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행복기도중 다음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진짜 살아있는 생명의 보석들은 기쁨, 평화, 감사,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강론중 많이 쓰는 ‘깨닫다’라는 말마디입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선물, 깨달음의 행복입니다. 깨달음과 더불어 내적 이해 지평과 내적 자유의 확장이요, 점차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참으로 깨달아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생명의 보석같은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보석중의 보석이 살아있는 사람들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살아있는 보석들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사진에 예쁘다고 감동하는 분들에게 저는 지체없이 “형제님의 영혼은 더 예쁩니다.” 하고 격려하곤 합니다.
사실 사랑하는 영혼들 보다 더 예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가 우리 영혼을 튼튼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하느님의 살아있는 보석들이 되어 살게 합니다. 새삼 육신 건강에 앞서 영혼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테살로니카 1서에서 우리는 참 아름다운 보석같은 영혼들을 만납니다. 살아있는 복음서 같은 바오로의 삶이요, 바오로에게 극찬을 받는 참 아름다운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삶입니다. 저절로 “행복하여라, 테살로니카 교우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신망애의 삶을 살아가는 참 행복한, 아름다운 테살로니카 교우들입니다. 다음 두 대목이 우리의 행복한 신앙생활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도 절실한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라는 신망애 삼박자의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며,---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들을 버리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께 돌아와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회개-섬김-기다림’의 종말론적인 깨어있는 삶은 언제나 유효한 우리 영적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보석같은 테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의 삶입니다. 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호된 질책을 받는 오늘 복음의 일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대신 “불행하여라”라는 말마디가 세 번 거푸 연속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 먼 인도자들아!”
이는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깊은 아픔, 또는 심판 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들의 회개는 물론 복음을 듣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형제들에게 디딤돌이 아닌 걸림돌이 되고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무분별한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현대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삼 늘 강조하는 마음의 병, 무지가 화근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런 위선적 걸림돌이 되거나 무분별한 무지의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안다면 위선과 교만에서 벗어나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 것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문제입니다. 하여 늘 강조하는 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가 빛나는 보석같은, 생명과 사랑의 보석같은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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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이 주는 위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올바로 믿고, 전하는 방법도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으로 하여 꼭 구원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이사야는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 29,13-14)
우리는 이런 책망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6)라고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5,33-37)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생활이나 여가 생활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23,4)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종교는 무의미합니다. 자비를 입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주는 위로요, 희망입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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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일갈을 듣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해 당신의 때를 향해가시는 예수님으로서는 위험천만한 발언입니다.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일으킬수록 주님의 죽음은 더 확연히 실체를 드러낼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예수님의 목소리는 거침 없습니다. 이미 밑바닥을 받아들인 이에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 23,13)
행복과 불행은 당사자 본인이 감정이나 느낌으로 감지하는 상태지, 명령한다고 그리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형태의 어미를 사용하신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깨닫지 못하면서 악을 자행하는 이들을 더욱 강하게 일깨우시려는 의도 같습니다. 그 안에는 "사실 너희는 불행하다, 계속 그렇게 산다면 반드시 너희는 불행해질 것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하지만 저주의 의미를 담은 단정으로 들리지 않고 내장이 뒤집힐 만큼 안타까움 가득한 호소에 가깝게 들립니다.
소위 백성을 하늘 나라로 이끌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추구하려는 사랑이나 열의 없이 제도적 절차로만 의무를 이행할 때 지도자와 백성은 서로 불행합니다. 지도자는 스스로 하느님(하늘 나라)을 놓아버렸기에 불행하고, 백성은 그 길을 차단 당해 불행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선택권이 없었던 터라 하느님에게서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의 신앙이나 조직에 한 명이라도 더 끌어들이려 온 힘을 기울이지만, 정작 개종하게 되면 정신보다 형식을, 본질보다 비본질을 택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도록 이끄는 자도 불행합니다. 사실 정성을 다해 철저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들보다 편법에 능한 형식주의자가 함께하기 훨씬 편하겠지만, 결국 함께 "지옥의 자식들"로 전락할 뿐입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예수님께서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금과 성전, 예물과 제단 중 과연 어느 것이 본질이고 어느 것이 비본질인지 묻고 계십니다. 지금 복음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는 알 것 같은데, 당시의 패러다임에 갇힌 이들은 그 뻔한 정답을 진짜로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까요?
"무엇이 더 중요하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이 공허하게 허공에서 흩어집니다. 이기심과 편견,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들에게서는 그냥 튕겨나올 뿐, 도무지 내면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허공을 떠돕니다. 예수님은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시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비본질이 본질 자리를 꿰어찬지 오래라서 이 질문 자체가 진작에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낯선 이방인 바오로와 그 일행을 신뢰해 주님의 길에 들어선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서 복음의 불행 선언과 대조되는 축복을 발견합니다.
"믿음의 행위, 사랑의 노고, 희망의 인내"(1테살 1,3)
테살로니카 신자들의 이러한 덕행은 사도와 그 일행의 "처신"(1테살 1,7)이 맺은 열매입니다. 그것은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1테살 1,5) 복음은 전했기 때문이며, 새로운 개종자들이 자신들을 능가하는 신앙과 열정으로 살아가길 사심없이 축복하면서 길을 터준 바오로, 실바누스, 티모테오의 진정어린 기도 덕분입니다.
그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위해 주님께 빌어 주는 "은총과 평화"(1테살 1,1)는 과거 예수님께서 기존 유다교의 지도자들에게 안타깝게 외치신 호소에 대한 응답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은 한 걸음 앞서 가면서 비록 자신이 소멸되더라도 하느님 백성의 성장과 행복을 기뻐할 줄 압니다.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화답송)
딱 한 걸음 앞서 걷는 이들은 뒤따르는 이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살펴주고 북돋워 주어야 할 소명을 지닙니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을 충실히 사랑하면서 이 사랑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아낌없이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가 어떻든 "그 자리에서 환호"하며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에게 이기심이나 자기 영광, 권태나 게으름은 발붙이지 못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아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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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을 이기는 선이 있다. 선은 하느님 말씀이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기 때문에 패배하고 흙투성이가 되며, 지옥 속에 살기 때문에 많은 경우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모든 것을 이기는 선이 있다. 선은 하느님 말씀이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며 우리에겐 하느님 말씀이 있다. 비록 선이 지더라도, 어쨌든 승리한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때로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죄와 한계로 인해 압박을 받아도, 결국 우리 안에 거주하시는 말씀, 곧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하느님 말씀이 내재(內在, 內面化) 되어 “살아 움직이고(Living Power)(1테살 2,13절 공동번역 참조)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다.”(Indeed,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effective)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면 죄로 패배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승리함을 믿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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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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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마태23,13)
'위선에 대한 책망!'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심하게 꾸짖으십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예수님의 크신 분노는 위선의 모습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위선(僞善)이란?
거짓된 선, 가짜 선을 의미합니다.
사전적 정의는 '겉으로만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밈'입니다.
한마디로 위선은 겉으로만 믿고 삶으로 진실되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늘 묵상되어지는 것이지만
이 위선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또한 우리의 믿음은 고통 앞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이 진실된 믿음인지 아니면 위선인지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고통과 죽음이라는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던 것처럼.
완전한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늘 나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위선을 버리고 진실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항구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늘 오늘 주님께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의 회개의 노력입니다.
오늘도 회개하는 사람이 되어,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찾고,
그래서 주님을 참으로 기쁘게 해 드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싸움은 안 된다.'
하느님의 백성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과 직장에서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이 시기와 질투로 일어나고 있습니까! 일부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속성의 영향으로 권력과 특권과 쾌락과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며 이에 방해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다툽니다."('복음의 기쁨', 9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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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진정성>
"무엇이 더 중요하냐?"
취준생들의 고충이 대단,
뒷바라지하는 부모 고충 또한 대단합니다.
성당에 초중고 학생들의 숫자도
급격히 줄었고 성직자 수도자 지망생도
현저히 줄어 기근이 심각!!
시골일이나 공장일에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리하게 되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기술직 노동직은
외면하고 30세가 넘어서도 가방들고
그럴싸한 직업을 위해 매진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더 많이 더 높이 오르려!
양을 위해 매진하면 더 더 비만해지고
질을 위해 매진하면 더 더 튼튼해지죠.
무엇이 중요한지 묻고 또 물으며
진정성을 키워가는 작은 몸부림이
제대로된 인간이 되는 지름길이며
행복의 열쇠를 쥐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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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 19)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야 할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거짓과 모순을
버려야 진리의
길을 제대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길을 인도하는
어리석고 눈먼
인도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음으로
욕망을 먼저
내려놓을 수
있어야 참된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깊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눈먼 인도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제자신의 어둠과
어리석음을 먼저 닦는
인도자이길 바랍니다.
이 모든 삶을
이끄시는
하느님, 당신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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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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