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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화두(話頭)와 의정(疑情)
옛날에 조사들은, 저 달마 대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리라(安心)』 라든가, 육조대사의 『오직 성품을 보는 것만을 논한다(唯論見性)』는것과 마찬가지로 곧 바로 인심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한다 하였으니, 다만 곧장 받아들였을 뿐 화두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뒷날 조사들은 인심을 보는 것이 옛과 같지 아니하며 법을 위해서 선뜻 죽으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댁는 거짓 기틀을 얽어 매양 남의 보믈을 헤아리면서 자기의보배를 삼았다.
그리하여 각각 저마다 기치(門庭)를 세우고 각각 저마다 방편(手眼)을내어 학인들에게 화두를 보게 하였다.
화두에는 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뒬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이미 화미(話尾)를 이루게 된다.
이 한생각도 일어나기 전을 『나지 아니한다』고 부르니 흔들리지 아니하고 혼침하지 아니하고 고요에 빠지지 아니하고 허무에 떨어지지 아니하며, 이를 『없어지지 아니한다(不生)』고 부르나니,언제나 홀로 밝아서 한 생각으로 빛을 돌이키어 반조(返照)한다.
이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함(不生不滅)을 일러서 화두를 본다.(看話頭)고도 하며, 혹은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고도 한다.
화두(話頭)와 의정(疑情)
화두를 보려면 먼저 의정(疑情)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화두를 보는 길잡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정이라 하는가? 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할때에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입으로써 염하는가 아니면 마을으로써 염하는가? 만약에 입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잠들었을지라도 입은 그대로 있는데도 어째서 염할 줄을 모르는가? 만약에 마음으로써 염한다고 한다면, 또 그 마음은 어떻게 생긴 물건인가. 붙잡을 수도 없고 더듬을 수도 없으니 답답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누구인가에 가벼운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거칠게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더욱 좋다.
그리하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홀로 밝게 비추되 마치 물이 땅위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볼 것이요, 두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만약에 의심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또한 의심이 없다면 다시 가볍게 일으켜야 한다. 초심자로서는 고요한 가운데서의 공부가 시끄러운 가운데서의 공부보다 힘을 얻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절대로 분별하는 마을을 내서는 인된다. 힘을 얻거나 못 얻거나 상관하지 말며,또한 끄러운 곳이거나 고요한 곳이거나 상관하지 말라. 다만 한 마음 한 뜻으로 해나가면 그대의 공부는 좋아질 것이다.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念佛是誰)]하는 네 글자 가운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는 [누구인가(誰)]라는 글자이니, 나머지 세 글자는 그것을 늘려 말한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 저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 똥 누고 오줌 누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 노여움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인가라든가, 능히 지각(知覺)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등이다. 어쨌든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누구인가]라는 글자를 들면 가장 쉽게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조그만큼도 반복하여 사량하거나 헤아리거나 생각을 지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인가라는 화두야말로 참으로 참선의 묘법(妙法)이라 할 것이다. 다만 [누구인가], 혹은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부처님의 명호(名號)라는생각을 지어서도안되며, 사량하거나 헤아리지 랫고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염불하는자는 누구인가]라는 네 글자를 가지고 염하는 것이 입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미타불의 큰 공덕을 염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도 하며, 또어떤 이는 어지러운 망상으로써 동으로 찾고 서로 뒤지는 것을 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어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망상도 더욱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는가 이는 마치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서 도리어 아래로 떨어지는 격이니, 똑바로이해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초심인이 일으키는 의심은 대체로 거칠어서 한꺼번에 끊어진 듯했다가는 이어지고, 금방 익은 듯했다가는 설고 하니, 애초에 의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저 생각이라고나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날뛰던 마음을 가두어 염두(念頭)에 무엇인가 잡히는 듯한 것이 있다면 참구(參究)한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다시 점차로 공부가 순숙(純熟)해져서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고 자기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어 한 줄기 의심이 저절로 들어나서 끊어지지 아니할 때에야 비로서 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를 들어 말하면, 처음에야 어찌 공부를 한다고 말하겠는가
? 그저 겨우 망상을 깨뜨린다고나 할 수 있을테지마는 이 때에 이르면 진정한 의심이 드러나게 되니, 비로소 진정한 공부를 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하나의 커다란 관문(關門)이 있으니 흔히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된다.
(一) 이 때에는 아주 깨끗하고 한없이 가볍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각조(覺照)를 놓쳐버릴 것 같으면 곧 가벼운 혼침상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눈 밝은 이가 곁에 있다면 이는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경지를 일러서 [향나무 널판으로 내려치자마자 온 하늘의 구름과 안개가 걷힌다] 는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도를 깨친 것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二) 이 때에는 아주 깨끗하며 텅 비고 툭 틔였기 때문에 의정을 두지 아니할 것 같으면 곧 무기(無記)에 떨어져 마치 나무 등걸이나 바위덩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이[찬물이 돌에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킨다]라고도 한다.
이 때에는 다시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를 들면 곧 각조하게 될 것이다(覺은 곧 미혹하지 아니함이니 慧요, 照는 곧 어지럽지 아니함이니 定이다). 홀로 빛나는 이 한 생각은 고요하게 비추며, 여여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하며, 분명하게 지각하며, 한결같이 이어져 끊이지 아니한다.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면 금강과도 같은 눈동자를 갖추어야 하니, 다시는 화두를 들 필요가 없다. 화두를 다시 든다면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앉혀 놓는 격이다.
옛날에 어떤 중이 조주(趙州)조인에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에는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조주가 [놓아버리라(放下來)]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중은 다시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놓아 버립니까?]하고 물었다. 조주는 [놓아 버리지 않으려면 짊어지고 가거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때의 소식을 말한 것이다. 이 소식은 물을 마셔본자 만이 그물의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말로서 표현할 수는 없다. 이 경지에 이른 이는 저절로 분명하게 알 것이요,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는 말해 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검을 내놓고, 시인이 아니라면 시를 바치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