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참사 100일, ‘위로와 기억’ 미사
2014.7.24.
주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한국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생명평화분과
한국천주교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정의평화환경전문위원회
‘사람(의 존엄함)과 사회(의 공동선, 사회정의)’는
정치공동체와 교회의 길이다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진정한 위로는 ‘기억’하기 일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고 공감하고 동행해야 할 분들이 누구인지 자문하며,
강론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말씀과 복음말씀은 우리에게
‘국가’의 실패와 ‘교회의 실패’를 기억할 것을 촉구합니다.
1독서의 예레미아서는 국가의 실패를
“하느님이 땅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상속재산(주님께 성별된 그분의 수확의 맏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고 서술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하느님께서 경탄하는 세상과 사회를 황폐화시키고,
사람을 비참하고 비루하게 만들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제들, 율법을 다루는 자들, 목자들, 예언자들이 그들입니다.
한마디로 사회교리에서는 이들을 ‘폐쇄된 지배집단’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제자 공동체’ 곧 교회의 실패를 경고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을 감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제자들은 어느 한 순간도
예수님을, 예수님의 뜻(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깨달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반석’이라 칭송받았던 베드로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탄’이라는 질책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를 우리는 ‘교회의 실패’라고 부를 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를 ‘저질의 그리스도교(adulterated forms of Christianity)’라고 까지 했습니다.(복음의 기쁨, 94항)
이 교회의 실패가 가져오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정치공동체(국가)가 필요했습니다.
씨족국가든, 부족국가든, 왕국이든, 민주공화국이든
인류는 언제나 ‘정치공동체’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이렇게 정치공동체(국가)를 형성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과 사회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정치공동체의 존재이유를
‘인간 존엄함 증진, 인권 증진을 통한 공동선 실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집니다.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결합을,
그리고 인류의 일치를 위한, 그러니까 인류 구원의 도구이자 표지라고 고백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1항 참조)
물론 새 하늘 새 땅에서 성취될 하느님 나라, 구원의 완성을 믿고 희망하지만,
이 구원과 해방은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의 실현’
곧 ‘정의와 평화의 건설’로 드러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도 복음의 기쁨에서 이를 이렇게 밝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존엄함이 실현되는 자리가 될 것이다.”(180항 참조)
하느님 나라와 사회생활은 그렇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죄의 구조’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이 죄의 구조들은
오늘날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과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여기에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죄의 구조, 간추린 사회교리 118항, 119항 참조)
이 ‘죄의 구조’는
‘폐쇄적인 지배집단’에 의해 강화됩니다.
그 대가는 사회의 황폐화이며, 대다수 시민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페쇄적인 지배집단’ 형성을 도와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간추린 사회교리, 406항 참조)
그런데 이 ‘죄의 구조’를 정착시키는데 앞장 선 것이
이 땅에서는 ‘정치’였습니다.
일제에 나라를 넘긴 것도, 한국전쟁과 분단을 고착화시킨 것도,
군부독재도, 또 보통의 시민은 무엇인지도 모를 IMF니 FTA도 그렇습니다.
공통점은 사회의 심각한 황폐화이며, 절대다수 시민의 고통이었으며,
사회적 약자의 양산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백성이 고통을 겪었고, 한국전쟁으로 고통을 겪었고,
독재로 고통을 겪었고, IMF와 FTA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수한 시민이 변두리로 변두리로 밀려나
잉여의 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일반화’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은 우리 민족이 시대의 흐름을 거슬렀기 때문이었고,
한국전쟁과 분단은 민족의 분열 때문이었고,
군부독재는 시민 사회의 무질서와 혼란 때문이었고,
IMF는 시민들이 주제넘게 흥청망청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책’하며,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며,
심지어는 ‘내 탓’이라며,
겪는 고통과 시련을 마치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처럼,
사회적 유전인자처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는 사이, 그 폐쇄된 지배집단은 더 정교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마음껏 ‘경제적 이익이라는 탐욕’과 ‘권력에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흔히 국가의 구성요소로 영토와 주권과 국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폐쇄된 지배집단’은 끊임없이,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
영토를 사유화했고, 지금도 사유화하고 있으며,
주권을 내팽개쳤으며, 지금도 내팽개치고 있으며,
절대다수 시민을 경제적 이익의 탐욕과 지배권력의 욕망의 제물로 삼았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조금 전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월호 침몰’과 ‘무고한 생명의 죽음’과 ‘실종’과 그리고 지난 100일 동안의 행적은
바로 사회의 황폐화, 국가의 실패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는) ‘실패’하지 않았는가?‘
‘사회가 황폐화되고, 절대다수의 시민이 고통으로 내몰리는 ‘국가의 실패’에 대해
무엇을 하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품에 머물러 달콤한 평화를 만끽하라고
하느님께서 부르신 축복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이 정한 개인적이며 심리적인 평화와 영성으로
‘하느님의 아늑한 품 안에서’ ‘예수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성령의 포근한 품 안에서’
‘웰 빙의 고상한 영성’을 누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인도 세상 한 복판에서 희망과 절망을 안고
하느님을 향해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을, 인류를,
그것도 사회적 약자를 ‘주인’으로 섬기라고 파견된 종입니다.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그 숙명으로, 하느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교회(우리)는 두 개의 다른 표지를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아 파견된 도구입니다.
사명이란 ‘주어진 임무’, ‘왕이 사신이나 사절에게 내린 명령’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며, 내가 하고 말 것도 아니며,
내 마음대로 바꿀 것도 아닙니다.
‘사명’과 관련해서는 오로지 두 길 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수행하든가’와 ‘하지 않든가’ 뿐입니다.
그대로 했다고 해서 칭찬받을 일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하지 않았을 경우, 명령을 내린 이와의 단절일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 말입니다.
표지를 드러내야 할 사명을 점잖게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는 임무라고 합니다.
징표(표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선 가지 말아야 할 죽음의 길을 경고하는 지양(止揚)의 표지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이 위협을 받을 때
예언자는 반드시 그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권고한 배경입니다.(218항 참조)
또 가야할 생명의 길을 안내하는 지향(指向)의 표지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사회적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를 건설하고,
불평등으로 위협을 받는 사회의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교회가 국가, 사회, 다른 종교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나서라”(복음의 기쁨, 238항 이하)고 촉구한 것도
바로 이 ‘지향’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은
거꾸로 우리에게 이 지양과 지향의 두 표지를 똑똑히 보여 주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이며,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정치 공동체인 국가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자,
세월호가 그 몫을 한 것입니다.
수백명의 무고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우리(국가와 교회)에게 가지 말아야 할 길과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가 사명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을 인용하면,
“사제들도 ‘주님께서 어디 계신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를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신앙의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눈으로 착한 목자의 눈으로,
사람과 사회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에 투신하며,
사회적 약자에게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섬겨야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승리의 깃발’입니다.
십자가는 시대(국가와 교회)의 폭력을 이긴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른바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적 영성과 ‘번영의 신학’을 내세우며,
하느님 백성의 신음에 귀를 막고, 대신 하느님의 땅, 세상을 오염시켰는가?
아니면 교종의 권고를 빌어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경탄하신 그 ‘세상에 투신하는’,
그런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가진 사람을 찾아,
그들과 공감하고 동반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현실에서 교회의 교회다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의 기준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에 투신하는’ 그런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가진 이를 찾아,
그들과 공감하고, 동행하는 것,
그것만이 교회다움과 그리스도인다움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 영혼과 공감하고 동행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승리의 깃발로 삼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공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 새 이 땅에 아름답고 숭고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말하자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동행하는
‘따뜻한 마음’ ‘숭고한 영혼’을 가진 이들은 누구입니까?
물론 이 땅의 무수한 무고한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사도권고 ‘복음의 기쁨’은 이를 ‘대중의 경건함’이라고 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땅이 신음하는 것을 못 견뎌,
‘온 몸을 땅과 동반하고자 했던 밀양의 어르신들이 아닙니까?
평화의 제주가 신음하는 것을 못 견디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정’의 사람들이 아닙니까?
동료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진 수많은 노동자들과 그 이웃들이 아닙니까?
불길로 내몰려 마지막을 맞이한
용산의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가슴앓이 하는 그 가족들과 이웃들이 아닙니까?
죽음의 공포 속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찾던 이들을
마음에 묻고 어찌할 바 모르는 세월호 침몰 피살자의 가족과 이웃들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했습니까?
그 영혼을 지닌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까?
그 때문에 신발에 흙을 묻혔습니까?
그 때문에 상처를 입었습니까? 그 때문에 돌팔매질을 당했습니까?
우리 앞에는 ‘신앙’과 ‘불신앙’의 길이 놓여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의 표현을 빌자면,
저질(품질이 나쁜) 껍데기뿐인 그리스도교(94항 참조)의 길과
참된 신앙의 기쁨, 복음의 기쁨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셨고, 만나셨고, 일으켜 세우셨고, 동행하셨던
그 사람들을 기억하며
그 예수님과 공감하며 동행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걷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며 교회입니다.
다시 길을 찾읍시다.
요나가 니느웨를 돌아다니며, 마음의 회개와 삶의 전환을 호소했듯이,
지금 수많은 요나가 절규하며,
우리를 향해, 정치공동체와 교회를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인용하며 강론을 마칩니다.
“때때로 정설(정통교리)의 수호자들이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상황과 그것을 지속시키는 정권에 대해
수동적이라는, 혹은 무저항적이라는,
혹은 관대하다는, 혹은 공범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득한 생명과 지혜의 오솔길을 따라 충실히 걷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194항)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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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