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설
이 문제는 밑줄 그은 내용 그대로 '발해가 황제국임을 나타내는 자료'를 찾는 문제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건국하였으며, 지배층의 대부분은 고구려인이었어요. 이에 발해는 국내외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내세웠어요.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계승하였다고 밝힌 점, 발해 문왕이 자신을 고(구)려 국왕이라고 표방한 점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자주 국가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당시 발해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였고, '인안', '대흥' 등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ㄱ - 산둥 반도의 등주에 설치된 발해관은 발해 사신들이 이용하였던 숙소로, 이는 황제국 표방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ㄴ - 동아시아에서 연호는 황제국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발해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황제국을 표방한 자주적인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근거입니다.
발해는 고왕 대조영이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무왕은 ‘인안(仁安)’, 문왕은 대흥(大興) 선왕은 ‘건흥
(建興)’ 등 중국의 연호가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ㄷ - '황상(皇上)'은 황제의 다른 표현으로, 발해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근거입니다.
문왕의 넷째 딸 정효 공주의 묘비에는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皇上罷朝興慟)"라는 내용이 남아있어요.
ㄹ - 신라로 가는 교통로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며, 황제국 표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발해는 문왕 때 들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었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을 해소하려 했어요.
신라도는 발해의 수도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로 가던 교통로로 오늘날의 동해안을 따라 발해와
신라가 통교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발해의 건국과 발전
1. 건국 : 대조영(고왕)과 고구려계 유민(지배층)+말갈(피지배층) → 남북국 형세 형성,
고구려 계승 의식 표방 - 대일 외교 문서에 반영(고려·고려국왕 표방), 문화의 유사성
2. 발전
① 무왕(대무예) : 영토 확장, 당의 산둥 지방 공격(장문휴),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 사용
② 문왕(대흠무) : 당과 친선 관계 추진, 당 문물 수용, 체제 정비, 신라와 상설 교통로 개설, 상경 천도, 대흥 연호 사용
③ 선왕 : 영토 확대(고구려 영토 대부분 회복), 지방을 5경 15부 62주로 정비, ⇒ 해동성국
유사 기출문제
발해의 성격
21회 고급 18번 문제
18. 역대 왕조들의 자주적인 천하관 답⑤
그동안 출제되지 않았던 자주적인 천하관을 묻는 문제가 출제되었네요.
물론 발해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역사 인식에 맞서 발해가 우리 역사의 일부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문제가 출제되기는 하였지만, 이런 문제 유형은 처음인 듯합니다.
밑줄친 내용처럼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국가임을 내세웠던 사례를 찾으면 되는 문제네요.
(아래 파란색 글자 부분은 필요한 분만 읽으셔도 됩니다.)
먼저 조공과 책봉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자구요.
동아시아 전통의 국제 관계는 기본적으로 중원을 중심에 둔 책봉과 조공의 질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책봉이란 황제가 주변국의 통치자에게 관직과 작위를 수여하는 것이고, 조공은 주변국이 중원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는 조공을 통해 권위를 세우고 조공국의 왕은 책봉을 받아 통치의 정통성 확보와 아울러 상당한 답례품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중원과 주변국 모두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책봉·조공 체제는 형식적으로 국가 간의 상하 관계를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의례적 외교 관계이자 국제 무역의 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원과 주변국의 상황에 따라 이러한 국제 관계는 시대별로 변화하고, 양국의 역학 관계에 따라 국가별로도 다르게 적용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대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은 중원을 중심에 둔 책봉과 조공의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세력권 내에서 스스로를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과 또 다른 책봉·조공 관계를 맺는 자주적인고 독자적인 천하관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 당시 '천손의 자손'임을 내세웠고 ‘태왕’이라는 칭호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취급하는 인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발해는 천통, 인안, 대흥, 건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말갈족에 복속을 강요하였습니다.
ㄱ -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은 조공과 책봉 관계를 기본으로 한 사대 관계를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모화관은 ‘중화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가진 건물로, 명·청 대에 중국에서 온 사신들의 연회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영은문은 이들 '사신들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가진 건물입니다.
19세기 말 독립협회는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고 영은문 대신에 독립문을 세워 자주적인 국가임을 내세웠어요.
ㄴ - 탐라총관부는 원 간섭기에 몽골이 설치, 운영(1273~1301)한 기관이었습니다.
원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후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해 일본 원정을 준비하고 목마장을 운영하였습니다.
ㄷ -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고구려의 자주적이며 독자적인 천하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문에는 고구려가 천제(天帝)의 후손이 지배하는 국가임을 내세웠고, 고구려를 중심에 두고 주변국인 신라와 백제·
부여 등을 조공국으로 인식하는 국가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와 '태왕(太王)'이라는
칭호 사용을 통해 자주적,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ㄹ - 발해가 인안, 건흥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자주적인 국가임을 내세웠다는 근거입니다.
발해는 고왕 대조영이 ‘천통(天統)’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이래, 무왕은 ‘인안(仁安)’, 문왕은 대흥(大興) 선왕은 ‘건흥
(建興)’ 등 계속하여 중국의 연호과 아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19회 고급 6번 문제
6.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 파악 답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는 것은 학교 시험, 수능, 공무원 시험 등에서 수없이 나왔던 문제입니다.
제시된 자료인 "발해고"는 조선 후기 유득공의 저술로, 그 주요내용은 고려가 고구려인 대조영이 고구려 엤 땅에 세웠던 발해의 역사를 포함해 남북국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유득공은 '남북국'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하였던 인물입니다.
밑줄친 ㉠의 주장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실을 답지에서 찾으면 됩니다.
7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습니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습니다.
발해는 당과 대립하면서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습니다.
발해의 주민은 말갈족이 대다수였지만 지배층에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많았고,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고 보는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727)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라고 표현하였으며,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759)에도 스스로 ‘고(구)려국왕’이라고 칭하도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 문화의 유사성을 통해서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어요.
정혜 공주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이고, 천장도 고구려와 같은 모줄임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였던 상경 터에서는 온돌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입니다.
궁전터와 사원터에서 나온 기와의 문양이 소박하고 직선적인 것 역시 고구려의 특징을 닮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① 발해는 주자감을 세워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는데, 이는 당의 국자감 관제를 본뜬 것입니다.
② 발해와 당의 교역품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연관성이 없습니다.
③ 발해의 3성 6부제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이 나타나지만, 3성 6부제는 중국의 제도를 수용한 것입니다.
④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을 본떠 건설되었습니다.
⑤ 발해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자신을 고(구)려국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3회 1급 8번 문제
8. 발해의 독자성(중국의 동북공정 반박) 답④
제시된 중국의 역사서를 보면, 발해를 독자 국가가 아닌,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이 오늘날 중국의 동북부 지역에서 성립, 발전하였던 국가, 즉 고구려, 발해 등을 자국의 지방 정권으로 파악하는 동북공정에 따른 인식의 결과입니다.
이에 따라 발해사를 고구려를 계승한 독자적 국가가 아니라 말갈 정권으로 파악하고, 당의 책봉을 받은 지방 정권의 하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중국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는 발해가 독자 국가였음을 밝히는 자료여야 합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건국하였으며, 지배층의 대부분은 고구려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계승하였다고 밝힌 점, 발해 문왕이 자신을 고(구)려 국왕이라고 표방한 점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자 국가라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그리고 당에 대한 조공과 책봉은 당시의 일반적인 외교 행위였을 뿐이었며, 당시 발해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였고, '인안', '대흥' 등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통해서 자주국이었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 합격하는 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사실은 당이 발해를 외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ㄱ - 이는 발해를 속말말갈 정권이라고 보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ㄴ - 발해가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라,
독자 국가였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ㄷ - 중국은 발해가 당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들어 발해가 당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ㄹ - 당의 빈공과는 외국인을 관리로 채용하기 위한 과거 시험이었므로 이는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제3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8회 고급 2번 문제
2. 발해와 관련한 사실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밑줄친 그가 누구일까요?
'동모산을 거점으로(도읍)……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민족 구성)'를 규합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입니다.
따라서 발해에 대한 설명을 찾으면 됩니다.
ㄱ - 대조영(고왕)에 이어 즉위한 무왕은 영토 확장에 힘써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합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려 하였죠.
이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선제 공격(732)하고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습니다.
ㄴ -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입니다.
발해의 영역은 옛 고구려의 영토에 비해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 요서 지역으로는 진출하지 못하였죠.
ㄷ -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또 당과 연결되어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여 발해와는 관계가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왕 때 들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습니다.
신라도는 발해의 수도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신라로 가던 교통로로 오늘날의 동해안을 따라 발해와
신라가 통교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ㄹ - 부여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해는 7세기 말에 건국되었기에 시기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무왕(대무예, 719~737)과 관련된 내용
9. 발해 무왕 시기의 사실 답①
최근 발해에 대한 문제는 빠지지 않고 출제되네요. 이 문제는 20회 고급 9번 문제와 아주 유사하게 출제되었네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흑수(말갈)가 당과 연합해 발해를 공격할 것을 염려해 동생 대문예를 시켜 흑수를 공격하였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등주를 공격해 자사를 죽였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네요.
이는 무왕(대무예) 시기에 일어났던 사실입니다.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698)한 후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당과 대립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어요. 무왕은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죠..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발해는 흑수말갈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죠. 무왕의 동생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치는 것은 당과의 전면전을 불러올 수 있다며 반대하였으나, 무왕은 대문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흑수말갈을 치라고 하죠. 대문예는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러서도 이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자 무왕은 그를 파면하죠. 이에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합니다.
당은 대문예를 우대하면서 발해를 분열시키려는데 이용하려 하자 발해는 대문예의 송환을 요청합니다. 당이 이를 계속 거부하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732)하여 등주 자사를 죽였어요. 이에 당이 발해를 공격했으나 별 성과없이 돌아가죠. 이때 당의 요청으로 신라도 발해 남쪽을 공격했으나 발해군의 저항과 추위로 큰 피해를 입고 물러갔습니다.
① 무왕 때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발해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천통(고왕, 대조영), 인안(무왕), 대흥(문왕), 건흥
(선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② 애왕(906~925) 때의 일입니다.
발해는 거란이 요를 건국(916)하고 지속적으로 공격해오자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거란에게 멸망하였어요(926).
③ 선왕(818~830) 때의 일입니다.
이 시기 발해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어요.
④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한 것은 선왕(818~830) 때입니다.
⑤ 문왕(737~793)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천도를 많이 단행하였어요.
동모산에서 중경(742)→상경(756)→동경(785)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었지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0회 고급 9번 문제
9. 발해 무왕의 정책 답②
발해에 대한 문제도 자주 출제되죠.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인안'이라는 연호, '흑수(말갈)가 당과 연결하여 당과 연합해 발해를 칠 것을 염려해 흑수를 공격하게 하는 내용을 통해 밑줄 친 '왕'은 무왕임을 알 수 있어요.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698)한 후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당과 대립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732)하고 이어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①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698)한 이는 대조영(고왕)입니다.
②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과 연결하여 발해를 칠 것을 염려하여 흑수말갈을 치는 한편,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 반도의
등주를 공격했어요.
③ 문왕(737~793)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천도를 많이 단행하였어요.
동모산에서 중경(742)→상경(756)→동경(785)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었지요.
④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정비한 것은 선왕(818~830) 때입니다.
⑤ 발해가 요동을 확보한 것은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입니다.
발해는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4회 고급 9번 문제
9. 발해 무왕(대무예)과 문왕(대흠무)의 업적 답④
무왕과 문왕의 업적은 발해에서 비중 있게 출제되니 잘 알아두세요.
발해와 관련하여서는 1~3대왕, 즉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고왕), 무왕, 문왕, 그리고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려진 선왕에 대해서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은 시조(대조영, 고왕)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니 발해의 2대왕 무왕입니다.
㉡은 무예(무왕)에 이어 즉위했으니 3대왕 문왕입니다.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698)한 후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당과 대립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732)하고 이어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문왕(737~793) 때에는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모산에서 중경으로 천도를 단행하죠(742).
그리고 당과 대립 관계를 완화해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였습니다.
당에서 안·사의 난(755~762)이 일어나자 이들의 침입에 대비해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756)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8세기 말에는 일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동경으로 다시한번 천도를 단행하였어요(785).
① ㉠의 (대)무예는 무왕, ㉡의 (대)흠무는 문왕의 이름입니다.
② 무왕은 727년 사신을 통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습니다.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문왕도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보낸 외교 문서(759)에도 스스로 ‘고(구)려국왕’이라고 칭하였습니다.
③ 무왕 당시 당이 흑수 말갈과 연결하려 하자 장문휴으로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732)하게 하였습니다.
④ 발해가 요동을 확보한 것은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입니다.
발해는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⑤ 문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천도를 많이 단행하였어요.
동모산에서 중경(742)→상경(756)→동경(785)으로 천도를 단행하였었지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5회 고급 9번 문제
9. 발해 무왕 시기 당과의 대립 답④
주어진 자료에 '장문휴의 등주 공격'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으니, 무왕 시기의 일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대)무예(武藝)'는 대조영(고왕)에 이어 즉위한 무왕(719~737)의 이름이었습니다.
발해는 무왕 때 당과 대립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합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732)하고 이어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무왕 때는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① 장문휴의 등주 공격(732)은 무왕(719~737) 시기의 일입니다.
② 당이 발해와 대립하고 있던 흑수 말갈과 연결하려 하자 장문휴에게 산둥 지방의 등주를 선제 공격하게 하였죠.
③ 당은 이이 정책으로 주변 민족을 견제하였는데, 신라에게 발해 후방을 공격하게 한 것도 이 정책의 하나였습니다.
④ 발해와 당은 3대 문왕(737~793) 때부터 친선 관계를 맺었으니, 백여 년이라는 진술은 틀린 내용입니다.
⑤ 발해를 견제하기 위해 당은 나·당 전쟁으로 악화된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죠.
이에 신라의 대동강 이남의 통치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문왕(대흠무, 737~793)과 관련된 내용
7. 발해 문왕(737~793)의 업적 답④
발해에 대한 문제는 정치와 문화에 대한 내용이 출제됩니다.
정치 중에는 발해의 대외 관계, 무왕과 문왕의 업적을 파악하는 문제, 문화쪽에서는 발해 고분이나 발해 문화유산을 고르는 문제가 출제되고 있어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정효 공주 묘에서 발견된 묘지석의 내용입니다.
밑줄 친 '황상'은 황제를 의미하며, 이 황제는 정효 공주의 아버지로 자료 첫째줄에 '대흥 56년(792)'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니, 문왕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왕과 관련된 내용을 고르면 됩니다.
문왕(737~793)은 발해의 2대 무왕의 아들로 아버지를 이어 3대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문왕은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모산에서 중경으로 천도합니다(742).
당과는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였습니다.
또한 무왕 때 일본과 국교를 체결(727)한 이래 문왕 때도 사신을 파견하고 교류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신라 배후에 있는 일본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이 강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에서 안·사의 난(755~762)이 일어나자 이들의 침입에 대비해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756)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8세기 말에는 일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동경으로 다시한번 천도를 단행하였어요(785).
문왕은 관직 제도 정비,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 설립 등 정치·문화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딸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 칭하고 있어 발해가 그의 대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정혜 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 정효 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입니다.
정효 공주 묘는 중국과 비슷한 벽돌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묘지와 12인물상이 그려진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정혜 공주 묘는 고구려와 같은 굴식 돌방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힘차고 생동감 있는 돌사자상이 발굴되었습니다.
두 무덤 모두 모줄임 천장 구조라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① 문왕은 이전과는 달리 당이나 신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당과는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였습니다.
② 선왕(818~830) 때의 일입니다.
이 시기 발해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어요.
③ 무왕(719~737) 때의 일입니다.
무왕은 당과 군사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며 정복 활동을 폈어요.
특히, 흑수부 말갈과 당이 연결하려고 하자 장문휴로 하여금 산둥 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④ 문왕은 천도를 많이 단행하였다는 특징이 있어요.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모산에서 중경으로 천도(742)하였고, 당에서 안·사의 난(755~762)이 일어
나자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756)하였으며, 8세기 말에는 동경으로 다시한번 천도를 단행하였습니다(785).
⑤ 대조영(고왕, 698~719)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7회 고급 7번 문제
7. 발해 문왕 재위 시기(737~793)의 사실 답④
지도는 남북국 시대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표시된 내용을 보면 발해의 이 왕은 재위 기간 두 번이나 천도를 단행하였네요.
중경에서 상경으로,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를 한 발해의 왕은 3대 문왕(대흠무)입니다.
대조영이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건국(698)한 후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당과 대립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선제 공격하고(732),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문왕(737~793) 때에는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모산에서 중경으로 천도하였습니다(742).
그리고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습니다.
이 무렵, 당에서 안·사의 난(755~762)이 일어나자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기고(756) 지배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안·사의 난으로 당의 국력이 약화되자 발해는 이 틈을 타 요하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8세기 말에는 동경으로 다시한번 천도를 단행합니다(785).
한편 문왕에 이어 즉위한 성왕(794~795) 때 다시 상경으로 환도합니다.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렸습니다.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문왕), 건흥(선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① 문왕 때에는 신라도를 개설하여 부분적으로 신라와 교류하였습니다.
신라도는 발해의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를 의미합니다.
이는 8세기 전반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나, 자주 이용된 것은 8세기 후반 이후 9세기 전반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② 문왕이 759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 '고려 국왕 대흠무'라 소개하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한 것입니다.
③ 발해는 무왕 때 인안, 문왕은 대흥, 선왕은 건흥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안으로 왕권의 강대함을 표현한 것이며, 밖으로는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④ 발해 무왕 때의 사실입니다.
무왕은 왕호처럼 당과 군사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하며 정복 활동을 폈습니다.
한편, 흑수부 말갈과 당이 연결하려고 하자 장문휴로 하여금 산둥 반도의 등주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⑤ 문왕은 당이 안·사의 난으로 혼란한 틈을 이용해 요하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회 1급 11번 문제
11. 발해 문왕(대흠무)의 업적 답③
이 문제는 밑줄친 '대흠무'가 누구인지만 알아도 맞출 수 있는 쉬운 문제네요.
'고려 국왕'이라는 것에서 '고구려' 또는 '고려'의 왕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밝혔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성씨가 '대'이니 우리나라 왕조 중에서 '대씨'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밖에 없으니 당연히 발해를 떠올려야 겠죠?
문왕(737~793)은 발해의 2대 무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 3대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문왕은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동모산에서 중경으로 천도합니다(742).
당과는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였습니다.
또한 무왕 때 일본과 국교를 체결(727)한 이래 문왕 때도 사신을 파견하고 교류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는 신라 배후에 있는 일본을 통해 신라를 견제하려는 외교적 목적이 강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에서 안·사의 난(755~762)이 일어나자 이들의 침입에 대비해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756)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8세기 말에는 일본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동경으로 다시한번 천도를 단행하였어요(785).
문왕은 관직 제도 정비,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 설립 등 정치·문화 발전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 칭하고 있어 발해가 그의 대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여 후원 세력으로 삼는 한편, 이를 통해 당, 신라를 견제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발해의 대외 관계와 문화
13회 고급 7번 문제
7. 남북국 시대의 국제 관계 답②
남북국 시대의 국제 관계를 묻는 문제는 수능에서도 옛날부터 종종 출제되는 유형입니다.
이 문제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우선 어느 시기의 지도인지를 파악해야겠죠?
남북국 시대인지 고려 시대인지 정도가 조금 헛갈릴 수도 있겠지만, 밑에 답지를 보면 남북국 시대임이 확연하기에 몰라도 헛갈리지는 않을듯 싶네요.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경선이 대동강~원산만인 시기는 남북국 시대라는 것 알아두세요.
우리나라 국경선 관련 문제는 17번 문제를 풀어보면 확실히 공부할 수 있으니 잘 공부해보세요.
남북국 시대임을 알았으니 (가)는 당, (나)는 발해, (다)는 신라, (라)는 일본임을 파악할 수 있죠?
이 시기 일반적인 외교 관계는 (가)와 (다)가 친밀하고 (나)와 (라)가 친밀한 외교 관계였다는 것....
그러나 발해도 8세기 중엽 문왕 때부터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는 것 알아두세요.
그럼 답지들을 하나씩 알아보죠.
① 신라와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하여 당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 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였는데, 때로
는 신라인과 발해인 사이에 수석자리를 놓고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당이 두 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추켜 발생한 것으로, 빈공과 등재 서열 사건이라고 합니다.
869년 발해 오소도와 신라의 이동 사이의 빈공과 수석 다툼, 906년 신라의 최언위와 발해의 오광찬 사이에 일어난 빈
공과 수석 다툼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② 발해와 당은 초기에는 적대 관계였다가 8세기 중엽부터는 친선 관계로 전환되었지요.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과 대립하였으며, 특히 2대 무왕 때에는 장문휴의 수군이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고, 요서 지
역에서 당군과 격돌하는 등 적대 관계가 극해 달했습니다.
3대 문왕 때 들어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이후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어요.
③ 발해는 중국과 대등함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왕들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2대 무왕은 인안, 3대 문왕은 대흥...발해가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10대 선왕은 건흥이라는 연호
를 사용하였습니다.
중국과 다른 독자 연호의 사용은 국력과 왕권이 강한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④ 발해는 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북으로는 돌궐, 그리고 당과 연결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바다 건너 일본과 친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답니다.
⑤ 발해와 신라는 건국 초기에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발해는 신라와도 신라도라는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습니다.
신라도는 발해의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로, 8세기 전반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나, 자주 이용된 것은 8세기 후반 이후 9세기 전반까지라고 보고 있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1회 고급 6번 문제
6. 발해와 관련한 사실 답①
이 문제도 2점으로 배점이 되었지만, 1점 난이도라고 봐야 합니다.
세계사를 배웠다면 정말 쉬운 문제고, 배우지 않았더라도 발해의 건국~멸망까지 중국은 통일 왕조인 당이 다스리고 있었음을 모두 알터이니 이 문제도 그냥 거저먹으라고 준 문제입니다.
제시된 자료를 보면 '인안(무왕), 대흥(문왕), 정력(성왕), 건흥(선왕)' 등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고
'고구려의 옛 터전을 회복하고~'라는 내용을 통해 고구려를 계승, 고구려 영토 위에 세워진 국가,
즉 발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답지를 살펴보면서 잘못 서술된 내용을 찾아볼까요?
① 발해가 건국~멸망할 때까지 중국은 통일 왕조인 당이 존재하였습니다.
양나라(502~557)가 존재한 때는 남북조 시대입니다.
② 8세기 후반 문왕 때, 대립 관계를 유지하던 신라와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지요.
신라도는 발해의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를 신라도라 합니다.
③ 자기, 말, 모피 등은 발해의 주요 수출품이었어요.
당으로부터는 비단, 책 등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했습니다.
④ 무왕 때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흑수부 말갈이 당과 연결하고자 하자, 발해는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선제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답니다.
⑤ 발해는 당의 연호가 아니라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8회 고급 5번 문제
5. 발해의 정효 공주 묘의 특징 답③
발해의 고분은 정혜 공주 묘와 정효 공주 묘, 두 가지만 알아두면 되죠?
정혜 공주는 문왕의 둘째 딸, 정효 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입니다.
문제에 제시된 고분을 보면, 벽화가 그려져 있고 묘지가 발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정효 공주 묘(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고분)입니다.
정효공주 묘는 중국과 비슷한 벽돌 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습니다.
벽화에는 12인물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편, 정혜 공주 묘는 고구려와 같은 굴식 돌방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힘차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진 돌사자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두 무덤 모두 모줄임 천장 구조라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③ 돌사자상은 정혜 공주 묘 입구에서 발굴된 유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7. 발해의 문화 답②
주어진 유물의 설명에 '조우관의 전통이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실물'이라고 나와 있네요.
'조우관'은 고구려를 상징하는 것이니,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의 유물을 1차적으로 생각하며 풀어야 겠네요.
주어진 유물은 룽터우산(용두산) 고분군에 있는 발해 왕실 무덤에서 출토된 금제 관식입니다.
이 고분군에서는 최근에 발해국 3대 문왕(737~793)의 황후 효의 왕후와 9대 간왕(817~818)의 황후 순목 황후의 묘지(墓誌)가 출토되었습니다.
중국은 아직 이 묘지들에 대해 공개를 하고 있지 않지만, 순목 황후의 묘지에는 “발해국 순목 황후는 간왕의 황후 태(泰)씨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면 발해는 황제를 칭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는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발해가 당의 지방 정권이 아니라, 독립 국가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① 통일 신라에서 만든 경주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입니다.
② 발해 상경성 절터에 남아 있는 석등입니다.
③ 통일 신라 때 만든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입니다.
④ 통일 신라 때 만든 연곡사 동부도입니다.
⑤ 고려 개성 만월대에 남아 있는 용머리 석조물입니다.
발해의 용머리 장식품도 보여드릴게요.
2회 2급 2번 문제
2. 발해의 문화 답④
이 문제는 주어진 세 개의 문화유산 중 하나라도 어느 나라의 것인지 알면 쉽게 풀수 있어, 1점 배점이네요.
주어진 문화유산은 차례대로 각각 발해의 돌사자상, 이불 병좌성, 석등입니다.
발해 문화유산만 알면 답은 바로 찾아지죠.
첫번째는 정혜공주 묘 앞에 있던 돌사자상입니다.
정혜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같은 무덤 양식입니다.
묘지와 함께 힘차고 생동감 있는 돌사자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두번째는 이불 병좌상입니다.
이 불상은 흙을 구워 만든 것으로, 두 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세번째는 발해의 석등입니다.
상경에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이 석등은 힘찬 기운을 보여 주며, 발해 석조 미술의 대표로 꼽힙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해설 잘 보았습니다~
해설이 참 좋아요 꼼꼼합니다^.^
발해라....
북만주 일대까지 장악하고...
대조영 대단합니다.
내분으로 거란에게 빨리 멸하는 바람에.....
이해가쏙쏙잘됩니다^.^
해설 너무 자세해서 좋아요 감사합니다
해설 잘 보았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 ^^
개인적으로 발해가 가장 취약한 부분인데, 해설만 봤는데도 이해가 빨리 되네요. 감사합니다.
해설 정말 잘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해설 최고예요^^
발해가 정리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일본에 국서를 보낸 왕은 무왕인가요 문왕인가요?? 4회 9번문제 2번에는 무왕이 보냈다고 적혀있는데.. 2회 11번문제는 대흠무.. 문왕.. (?) 둘다보낸건가..
잘 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당^^
해설 감샇바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
잘 보고 갑니다ㅊ^^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발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왕은 싸우죠
돌궐,일본과 친하고
왠지 나쁜 느낌 ㅎㅎ
문왕은 여려요
도망다니고 공주도 먼저가고 ㅠ
그냥 외우려고 이런 생각해봐요~^^;;
정리가 쏘옥~~
발해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이것만 봐도 오전공부량은 거뜬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