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 맞은 한국 노장 감독의 신작, 어땠나?
조회수 1만2023. 11. 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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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년들> ⓒ CJ ENM
[양기자의 영화영수증 #824] <소년들> (The Boys, 2022)
글 : 양미르 에디터
6년 전 여름,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2017년)의 개봉을 앞두고, 제작을 맡았던 정지영 감독을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이제 70대 노감독이 됐다"라는 말에 정지영 감독은 "나는 원로 감독이라는 말을 듣기 싫다"라며, "그냥 '완숙해 가는' 감독이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정지영 감독의 작품을 떠올린다면, 크게 우리 사회나 정치적 이슈를 굵직하게 다룬 것들을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냉철하면서도, 뚜렷한 주제 의식을 담았다.
"진실에 좀 더 다가가는 방법은 없을까 모색하고, 그것을 찾아서 관객과 대중에게 문제를 제기해, 새롭게 생각해 보게 하는 작업을 원하는" 정지영 감독의 인생철학과 닮아 있었다.
당시엔 금기시에 가까웠던 이야기인 '빨치산'을 소재로 해 청룡영화상에서 4관왕을 차지한 <남부군>(1990년)이 있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은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를 소재로 한 <하얀 전쟁>(1992년)이 있었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라는 안성기의 명대사가 함께하던 영화 <부러진 화살>(2011년)은 정지영 감독의 가장 큰 흥행작이었다.
346만 관객을 동원한 이 작품으로 그는 생애 두 번째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품에 안게 된다.
2007년 일어난 일명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사법부뿐 아니라 기득권 네트워크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어 연출한 <남영동 1985>(2012년)를 통해선 관객을 1980년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있었던 고문의 현장으로 인도했었다.
이전 작품인 <블랙머니>(2019년)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소재로 했다.
외국 자본이 자산가치 70조 원의 외환은행을 헐값인 1조 7천억 원에 인수한 이후에 생겨난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떠난 사건으로, 정지영 감독은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연출했다.
<소년들>은 1999년 '삼례나라슈퍼 사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3인조 강도가 슈퍼에 침입해 주인 할머니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사건 9일 만에 동네에 사는 소년 3명이 용의자로 검거되고, 수사는 범행 일체에 대한 자백과 함께 일사천리로 종결된다.
그러나 이들은 진범이 아니었다.
수사 과정에서 폭행으로 만들어진 허위 자백이 있었던 것.
각각 3년~6년의 징역을 선고받은 소년들은 '빨간 줄'이 그어진 채 '살인범'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2009년 공소시효가 만료되고, 청년이 된 소년들은 2015년이 되어서야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으로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2016년 '진범'의 자백을 토대로 3명은 무죄를 선고받는다.
영화 <소년들>은 억울하게 살인범으로 몰린 무고한 소년들과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끝까지 추적하는 수사반장의 이야기를 통해, 정지영 감독은 사회 전반적으로 내재해 있는 약자를 향한 시선에 대한 문제의식, 기득권 세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동시에 제시한다.
1999년, 전북 전주에서 손꼽는 검거율을 자랑하는 형사 '황준철'(설경구)은 한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는다고 해서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완주경찰서의 수사반장으로 부임해 사건을 해결해 나가던 어느 날, '준철'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미 범인이 잡힌 '우리슈퍼' 강도치사사건의 진범을 제보하겠다는 것.
사라진 현장검증 영상, 어긋난 진술, 조작된 증거 등 사건을 다시 파헤치던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재수사에 나선다.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로 서장의 신임을 받는 전북청 수사계장 '최우성'(유준상)은 자신의 자리에 반장으로 부임한 '준철'이 이미 다 끝난 사건을 들쑤시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준철'은 피해자의 딸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윤미숙'(진경)을 찾아간다.
분명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던 범인의 손과 체포된 소년의 손이 같아 보였지만, '준철'이 가져온 증거는 다른 진실을 가리키고,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우성'의 방해로 모든 것이 수포가 되고, '준철'은 좌천되고 만다.
16년 후,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미숙'과 소년들이 다시 '준철'을 찾아오고, '준철'은 자신의 경찰 인생을 걸고 재심 과정에 동참한다.
<소년들>은 16년 전과 16년 후의 시간대를 교차로 보여주면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만약 시간대로 이야기가 전개됐다면, 다큐멘터리처럼 관객에게 보였을 가능성이 큰데, 그랬다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방송된 사건 내막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정지영 감독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알려진 사건에 대해 결론만 기억하기 쉽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그 과정에 우리 사회의 구조가 보이기 마련"이라면서, "어떤 사건이 사건으로만 그치는 것이 안타깝다. 그 사건 하나를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나와 내 가족, 내 이웃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소년들>의 주인공을 수사반장으로 설정한 이유도, 그 많은 사건 중 하나로만 기억되는 것을 막기 위함처럼 느껴졌다.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거리는 기득권 경찰과 검찰 세력에 저항하는 한 열혈 형사의 모습을 강조하는 점도, 분명 경찰과 같은 공무원이 지닌 '직업윤리'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터.
물론, 이런 주제 의식이 훤히 보이는 영화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주체하지 않았다.
요즘 영화들이 자칫 그렇게 끓어오르면 '신파' 혹은 '억지 감동'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되기 때문에, 근래 한국 영화계에서는 '금기시'되는 연출이긴 하지만, <소년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이에 따라 불의에 참지 않는, 그래서 차가운 연출을 해야 할 부분에선 식힌 상태로 연출할 생각이 하나도 없는 노장 감독의 의지가 끝까지 전해졌다.
본인 스스로가 그런 차가운 연출을 선보인 '사회파 감독' 켄 로치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데, 어찌하겠는가?
이런 정지영 감독은 앞으로 '4.3 사건', '김구 암살 사건'과 같은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때도 어떤 '감정'으로 관객을 맞이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