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증왕(500~514)의 업적 답⑤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난 '우경이 시작되었다.', '실직주(삼척) 설치와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라는 내용에서 지증왕 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라는 국호, 왕이라는 칭호 사용, 우경 실시, 순장 금지, 이사부를 통한 우산국 정벌'이라는 내용이 나오면 지증왕 때의 사실임을 먼저 생각하세요.
신라는 6세기 초 지증왕 때에 본격적인 제도 정비를 실시하였습니다. 나라 이름을 사로국에서 ‘신라('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는 의미)로 정하고, 왕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여 중앙 집권을 보다 강화하고 지방 제도를 군사 제도와 병행시켰습니다. 지방은 주·군 제도를 정하고 각주에는 군주(軍主)라는 관리를 파견하였어요. 이때 최초로 설치되었던 것이 실직주(삼척)였고 여기에 이사부가 군주로 임명되었어요. 대외적으로는 하슬라주(강릉) 군주로 있던 이사부가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비롯하여 경상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512).
또한,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우경을 장려하였으며,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순장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기관으로 동시전을 설치(509)하였어요.
① 원성왕(780~798)은 국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로 채용하는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였습니다.
② 신문왕(681~692)은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687)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689)하였습니다.
③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 때부터 김씨에 의한 독점적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습니다.
④ 법흥왕(514~540)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골품 제도를 정비했으며, 불교를 공인(527)하였습니다.
⑤ 지증왕은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 지배자(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신라의 발전 과정
내물왕 (356~402) | • 진한 지역 차지, 김씨 왕위 세습 → 마립간(대수장) 칭호 사용 • 고구려 도움으로 왜의 침략 격퇴(호우명 그릇) |
눌지왕 (417~458) | • 백제와 동맹(나·제 동맹, 433) • 왕위 부자 상속제 확립 |
소지왕 (479~500) | •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 경주에 시장 설치 • 백제 동성왕과 결혼 동맹(493) |
지증왕 (500~514) | • 국호 '신라', '왕' 칭호 사용, 지방 제도 정비(군주 파견) • 우경 장려, 동시전 설치(509), 순장 금지, 우산국 복속(512) |
법흥왕 (514~540) | • 병부 설치, 상대등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골품 제도 정비, 연호(건원) 사용 • 불교 공인(527) • 금관가야 정복(532) |
진흥왕 (540~576) | • 영토 확장 : 한강 유역 장악, 함경도 유역까지 진출, 대가야 정복(562) → 순수비 건립(단양 적성비,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창녕비)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 사상 통합 :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 거칠부가 국사 편찬(545) |
진평왕 (579~632) | • 위화부, 조부, 예부 설치 • 원광에게 명해 걸사표 작성(수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 |
선덕여왕 (632~647) | • 고구려와 연합 시도 실패 후 당과 연합(김춘추의 외교 활동) •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건립(자장의 건의) |
진덕여왕 (647~654) | • 집사부, 창부, 좌이방부 설치 • 성골계 왕위 계승 단절 |
무열왕 (654~661) | •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 등극, 무열왕계 시작 • 당과 연합해 백제 멸망(660) |
문무왕 (661~681) | • 고구려 멸망(668), 나·당 전쟁 승리(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 • 민족 융합 노력(삼한 일통 의식) |
유사 기출문제
10회 고급 6번 문제
6. 신라사의 시대 구분 답④
문제에 제시된 신라사 시대 구분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시대 구분 방식이네요.
신라사 시대 구분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삼국사기, 또 하나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시대 구분 방식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삼국사기〉는 유교적 관점에서,〈삼국유사〉는 불교적 관점에서 편찬한 점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신라의 역사를 불교 이전의 시대, 불교 진흥의 시대, 중국 시호의 시대의 세 시기로 구분하였어요.
반면〈삼국사기〉는 유교적 관점에서 편찬되었는데, 신라의 역사를 통일기 이전, 전제 왕권 시기(무열왕계), 왕위 쟁탈전의 시기(혼란기)로 구분하였어요.
기준 | 시대 구분 | |
삼국사기 | 상대 | 박혁거세~진덕여왕 |
중대 | 무열왕~혜공왕 | |
하대 | 선덕왕~경순왕 | |
삼국유사 | 상고 | 박혁거세~지증왕 |
중고 | 법흥왕~진덕여왕 | |
하고 | 무열왕~경순왕 |
ㄱ - (가)에는 지증왕이 들어가죠?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진흥왕 때입니다.
진흥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 기억하지요.
ㄴ - (나)는 법흥왕이 들어갑니다.
중고(中古)는 불교식 왕명이 사용되었던 법흥왕~진덕여왕까지입니다.
ㄷ - (다)는 진덕여왕이죠?
영일 냉수리비는 504년, 지증왕 때 세워진 비석입니다.
ㄹ - (라)에는 태종 무열왕이 들어가죠.
태종 무열왕은 진골로서 처음 왕에 오른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은 ④번입니다.
건국~ 5세기
17회 고급 11번 문제
11. 신라 눌지왕(417~458) 때의 역사적 사실 답⑤
박제상, 망부석 설화에 대해서는 역사 시간 또는 문학 수업 시간 등을 통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셨겠지만, 당시의 왕이 누구였는지 아는 분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이 문제는 문제풀이 테크닉 측면으로 보면, 무척 쉽습니다.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 '418년'이라는 시간이 나타나 있으니 어떤 왕인지 굳이 몰라도 답지를 보면 생각보다 쉽네요.
제시된 답지들이 답을 빼고는 나머지 4개의 답지가 시간적으로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418년 전후의 중요한 역사 사실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면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신라는 내물왕 때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사 원조(400)를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에 주둔하고, 왕위 계승 등 고구려의 정치 간섭을 받는 처지에 놓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번 들어온 군대가 순수하게 물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죠?
고구려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도와준 것을 이유로 신라에 이러저런 간섭을 하거나 이권을 요구했겠죠.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에 이에 등극한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427)하고 적극적으로 남진 정책을 추구합니다.
당시 신라의 왕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아 등극한 눌지왕(마립간)이었습니다.
눌지왕은 자신을 해치려는 실성왕을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위 후 실성왕 때에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내진 자신의 친동생을 신라로 귀환시켰는데 이 때에 활약한 인물이 문제에 제시된 박제상입니다.
이후 눌지왕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고구려의 남진 정책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433년에 백제(비유왕)와 나·제 동맹을 결성하여 공동으로 대응하기로 합니다.
① 국학 설치는 신문왕(681~692) 때입니다.
전제 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교육을 위한 국학을 설립하였습니다(682).
신문왕은 녹읍 폐지 관료전 지급, 만파식적의 설화 등과 관련있는 것도 알아두세요.
②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540~576) 때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고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였습니다.
③ 신라가 중국의 남조와 처음 수교한 것은 법흥왕(514~540) 때입니다.
신라는 백제의 안내를 받아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를 맺었습니다(521).
이전에는 내물왕(마립간) 때인 377년과 382년 두 차례에 고구려의 도움으로 중국 북조의 전진에 사신을 보냈었어요.
④ '마립간'에서 '왕'으로 왕호를 바꾼 것, 그리고 우산국 정벌은 지증왕(500~514) 때입니다.
지증왕은 정치 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국호를 '신라',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503).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습니다(512).
⑤ 눌지왕은 고구려의 남진에 공동으로 재항하기 위해 백제의 비유왕과 나·제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433).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6회 고급 4번 문제
4. 고구려의 남진 정책과 나·제 동맹 답⑤
삼국의 항쟁과 관련한 문제는 매번 빼놓지 않고 출제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4세기 후반의 백제의 전성기,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6세기 중반 신라의 전성기 상황을 묻는 문제가 많이 출제되죠.
그러니 이 시기의 대외 정복 모습과 이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 등을 함께 살펴두세요.
문제에는 신라가 소지 마립간(479~500) 시기에 백제와 동맹해 신라에 대항하고, 백제 동성왕(479~501)이 혼인을 청하자 이에 응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네요.
즉 나·제 동맹과 결혼 동맹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때에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원조를 받아,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죠.
그러나 5세기 초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고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펴자, 눌지마립간 때에 백제(비유왕)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와 항쟁하며 간섭에서 벗어 나려 하였습니다(433).
그 후 소지마립간 때에는 백제와 혼인 동맹까지 맺어 유대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493).
① 연개소문의 권력 장악은 7세기 중반의 일입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대신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하고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642).
② 2세기 당시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2세기 태조왕 때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으며, 요동
지방으로도 진출을 꾀하였습니다.
③ 고국원왕의 전사는 4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371).
④ 4세기 초반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 때 낙랑군(313)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⑤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진 정책을 펴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이에 대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9회 고급 4번 문제
4. 호우명 그릇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답②
명문이 새겨진 유물을 제시하고 이 유물과 관련된 설명을 고르는 문제입니다.
명문 내용은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으로, 광개토, 호태왕, 호우만 읽어낼 수 있다면 이것이 호우총에서 출토된 호우명 그릇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호우명 그릇은 1946년 경주시 노서리에 있는 신라 고분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고분은 부장품 중에서 문제의 청동제 그릇이 발견되어 '호우총'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호우명 그릇의 명문 중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은 광개토 대왕의 시호이며, 을묘년은 415년(장수왕 3년)에 해당합니다.
이 명문의 서체가 호태왕(광개토 대왕) 비문과 같은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만들어 가지고 신라로 들여온 것 으로 보며, 또한 그 연대도 이 명문에 의해 415년으로 봅니다.
신라는 내물왕(356~402) 때에 신라에 침입한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고구려(광개토 대왕) 군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후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죠.
이 때문에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갑니다.
결국 호우명 그릇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인 것입니다.
① 근초고왕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는 칠지도와 관계 있습니다.
칠지도 앞면에 '泰□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태화 4년 9월
16일 병오 정양일에 백련철(百鍊鐵)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제후국 왕
들에게 나누어줌이 마땅하다. ○○○가 제작함)', 뒷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선세(先世) 이래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이 왜왕지(倭王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라)'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③ 이것을 답지로 고른 수험생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광개토 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내용이 나타나 있는 것은 광개토 대왕릉비입니다.
④ 무덤 주인이 누군인 지 알 수 있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무덤 주인의 성명, 생몰 연월일이 새겨져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입니다.
지석에 기록된 내용은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到 乙巳年八月 癸酉朔
十二日甲申 安登冠大墓 立志如左(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입니다.
무령왕릉에서는 왕비의 지석도 발경되었어요.
⑤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짐작케 하는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이나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7회 고급 3번 문제
3. 광개토 대왕 당시의 한반도 정세 답②
주어진 내용은 395~404년이라는 연도가 제시되어 있어 시기를 파악하기 쉽습니다.
주어진 내용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3)의 대외 정복 활동입니다.
소수림왕이 율령 반포, 불교 수용, 태학 설립 등을 통해 내정을 정비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뤄놓은 후 즉위한 광개토 대왕은 이를 기반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폅니다.
즉위 초부터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을 차지하였으며,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광개토 대왕릉비(길림성 집안 소재)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ㄱ - 실성왕은 내물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있다가 이후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실성왕은 그 원한으로 내물 마립간의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또 다른 아들이었던 눌지까지 볼모로
보냅니다. 그리고 고구려인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다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의 지원으로 쳐들어와 실성왕을 제거
하고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볼 수 있습니다.
ㄴ - 백제와 신라가 나·제 동맹을 맺은 이후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는 6세기 중엽에 해당합니다.
이 당시에는 문제에 제시된 내용처럼 광개토 대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를 도왔으므로, 신라와 고구려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ㄷ - 김해 금관가야가 이끌었던 전기 가야 연맹은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됩니다.
ㄹ - 6세기 초의 상황입니다.
금관가야 멸망 후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대가야는 6세기 초에 이르러 백제, 신라와 세력을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때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습니다(522).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ㄷ으로 묶인 ②번입니다.
6회 고급 3번 문제
3. 충주(중원) 고구려비 답②
문제에 제시된 비문에는 고(구)려 대왕과 신라 매금왕이 형제처럼 위아래로 화합하여 '수천'(守天)하자는 구절이 나와 있습니다.
수천은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나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왕이 남하하여 신라왕을 부른 뒤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을 하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비문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천하관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당시 고구려가 자신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 국가를 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군사 지휘관이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던 사실도 비문 속의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군사 지휘관이 주둔하고 있던 신라 영토는 중원 지방이 아니라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북도 지방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ㄱ, ㄴ - 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②번입니다.
2회 2급 7번 문제
7. 호우명 그릇과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 답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유물입니다.
이 그릇 밑바닥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여기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은 광개토 대왕의 시호입니다.
이 명문의 서체가 호태왕(광개토 대왕) 비문과 같은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만들어 가지고 신라로 들여온 것 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라는 내물왕(356~402) 때에 신라에 침입한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고구려(광개토 대왕) 군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후 고구려군이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죠.
이 때문에 이 시기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호우명 그릇은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① 근초고왕 때 만들어진 칠지도를 들 수 있습니다.
② 신라의 금관가야 병합은 법흥왕 때의 일입니다.
③ 특별한 유물은 없으며, 나·제 동맹이나 결혼 동맹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④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 중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해당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지증왕(500~514)
15회 고급 3번 문제
3. 신라 지증왕(500~514) 시기의 사실 답③
문제에 제시된 내용 중의 핵심 키워드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512)'입니다.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한 시기의 왕은 지증왕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지증왕의 업적을 찾으면 되겠네요.
신라는 지증왕 때 들어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었어요.
국호를 사로국에서 '왕의 덕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는 의미의 이름인 '신라'로 정하고, 왕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는데, 지방은 주·군 제도를 정하고 각주에는 군주(軍主)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습니다. 이를 통해 중앙 집권을 보다 강화하고 지방 제도를 군사 제도와 병행시키죠.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정비는 신라가 선진 중국 문화와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 사회의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밖에 시장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기관으로 동시전을 설치(509)하였으며, 농경에 소를 이용하는 우경을 적극 권장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였어요.
그리고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순장을 금지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였습니다(512).
①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내물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지증왕 때부터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② 이차돈의 순교를 통한 불교 공인(527)은 법흥왕 때의 일입니다.
③ 신라는 지증왕 때에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답니다.
④ 김해 금관가야 정복(532)은 법흥왕, 고령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 때입니다.
⑤ 백제와의 나·제 동맹 체결(433)은 5세기 초인 눌지왕 때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법흥왕(514~540)
23회 고급 5번 문제
5. 이차돈 답⑤
유물 사진만 보고도 이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분도 많죠?
제시된 인물 설명에 '순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목에서 흰 피가 솟는 모습'이라는 내용을 통해 이차돈 순교와 관련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이차돈은 법흥왕의 측근으로,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를 자처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았어요.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 백제는 침류왕 때인 384년에 국가에서 불교를 공인한 것과 달리 신라는 이때까지도 불교를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법흥왕은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 불력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토착 신앙을 신봉하는 귀족들의 반대가 심해 불교를 공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를 자청하고 나섰어요.
결국 법흥왕은 이차돈의 의견을 수용해 참형을 내리자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경주의 북쪽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라고 전해집니다. 이에 왕과 군신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하였다고 합니다(527). 이 사건으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완공되었어요.
헌덕왕 때인 818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교비를 건립하였어요. 비는 조각과 비문(碑文)이 결합된 형태로, 6면으로 된 비석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로 표현하였으며, 제2~6면에는 가로 세로 선을 긋고 순교와 관련한 내용을 새겨 넣었어요. 이 비문은 경주 백률사에 있다가 1914년 현재의 국립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졌어요.
① 혜초(704~787)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혜초는 통일 신라의 승려로 당에 가 인도에 순례를 다녀온 후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어요. 현재 이책은 프랑스에 있습니다.
② 백제 성왕 때의 노리사치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원효(617~686)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④ 의상(625~702에 대한 설명입니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죠.
그리고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며 불교 대중화에도 노력했어요.
⑤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불교가 공인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7회 고급 2번 문제
2. 법흥왕(514~540)이 실시한 정책 답③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수용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밑줄 친 왕은 법흥왕이네요.
제시된 자료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법흥왕 때의 기사입니다.
법흥왕이 불교를 수용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한 불교 공인(527)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나라의 법령인 율령을 반포(520)하고. 17관등과 모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치 질서 확립을 통해 다양한 세력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통합시켰습니다.
또.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536)하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나타냈습니다.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교를 공인(527)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여 낙동강 유역의 가야 땅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법흥왕 때의 내정 정비를 바탕으로 진흥왕(540~576)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히 펴 전성기를 누립니다.
① 진흥왕 때의 사실입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
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거칠부를 시켜 국가의 역사를 정리하도록 하여 ‘국사’를 편찬하였습니다.
② 진흥왕 때의 사실입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③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일률적인 통치 규범을 마련하였습니다.
④ 내물왕(356~402) 때의 사실입니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칭호도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대신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습니다.
⑤ 외사정 설치는 문무왕(661~681) 때입니다.
문무왕은 외사정을 설치(673)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진흥왕(540~576)
26회 고급 7번 문제
7. 493~554년 사이의 사실 답②
(가)는 신라(소지왕)와 백제(동성왕)의 결혼 동맹(493), (나)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왕(성왕)의 전사(554) 사실이 나타나 있네요.
따라서 493~554년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이 시기 백제에서는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이 차례대로 재위한 시기였고, 신라에서는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 법흥왕(514~540), 진흥왕(540~576)이 재위하였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답지에서 ① 지증왕, ③ 무령왕, ④ 법흥왕(건원 연호 사용), ⑤ 성왕은 당연히 이 시기 안에 재위하였으므로 답이 될 수 없으니, 정답은 ②번이네요.
즉,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답지 자체가 틀린 내용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이 문제는 왕의 재위 시기만 알면 찾을 수 있는 문제네요.
① 지증왕(500~514)은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순장을 금지하였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우경을 장려하였어요.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방 행정 구역을
주·군으로 나누어 관리를 파견하였으며,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하였어요.
② 진흥왕(540~576)이 황초령비를 세운 시기는 568년으로 이 시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는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어요.
이어 대가야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영토 팽창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등의 비석을 세웠습니다.
또한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고, '개국'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품주를 설치하였어요. 불교를
장려하여 황룡사를 건립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으며(국통, 주통, 승통), 팔관회와 백좌 강회 등을 열었어요.
③ 무령왕(501~523)은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어요.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하여 문물을 수용하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④ 법흥왕(514~540)은 왕권 강화와 자주성의 표현으로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정비하였으며, 관리들을 17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복색을 달리하였습니다.
또한, 병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상대등을 설치하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금관가야를 병합하였어요.
⑤ 성왕(523~554)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어 중흥을 꾀하였어요.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어요. 왜에 불교를 전하고(노리사치계)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겼어요. 이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4회 고급 7번 문제
7. 신라의 화랑도 답④
세속 5계는 신라 화랑들이 행동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죠.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어요.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습니다.
화랑도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어요.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어요.
① 박사와 조교는 교육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교육 기관인 국학 등에 해당합니다.
② 만장일치제 운영은 신라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와 관련 있죠.
귀족들은 화백 회의를 통해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
기도 하였습니다. 화백 회의의 수장은 상대등이었어요.
③ 경당은 고구려가 지방에 설치한 교육 기관이었어요.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④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정비하고 이를 국가 발전에 이용하였습니다.
⑤ 화백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화랑도는 귀족 자제에서 평민까지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2회 고급 3번 문제
3. 진흥왕(540~576)의 업적 답⑤
문제에 제시된 첫번째 자료에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선을 정하였다.', '북한산주 설치', 그리고 두번째 자료에 '관경을 순수하면서'라는 내용을 통해 한강 유역 확보와 북한산 순수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료와 관련있는 왕은 신라 진흥왕입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율령 정비, 관등제 정비와 공복 제정, 골품제 정비, 불교 수용, 금관가야 정복 등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진흥왕(540~576)은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어요.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를 빼앗아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어요.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 강화와 전략 거점 확보,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①, ④ 동시전 설치, 왕이라는 칭호 사용은 지증왕(500~514) 때의 일입니다.
지증왕 때에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동시전(509)을 설치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어요(512).
② 첨성대는 선덕여왕(632~647) 때 세웠어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세우고 호국의 의지를 담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았기고(642),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③ 법흥왕(514~540) 때의 일입니다.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어요.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습니다.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였어요.
⑤ 진흥왕 때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정복(562)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0회 고급 5번 문제
5. 장수왕과 진흥왕의 업적 답③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장수왕, 신라는 법흥왕~진흥왕에 대한 문제가 자주 출제됩니다.
(가)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신라에 군사를 보내 왜를 격퇴해 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광개토 대왕(릉)비입니다.
이 비를 세운 이는 광개토 대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장수왕(412~491)입니다.
(나)는 '태창(진흥왕이 568년부터 사용한 연호) 원년 왕이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540~576)이 세운 순수비 중 황초령비입니다.
(가)
광개토 대왕(391~412)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412~491)은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외교 관계를 맺어 둘 사이를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 대왕비를 건립하였어요.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죠.
그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을 체결했습니다(433.)
(나)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540~576)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이어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562)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태창'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당과의 안시성 전투(645)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642~668) 때의 일입니다.
② 미천왕(300~331) 때인 4세기 초반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 때 낙랑군(313)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③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대가야를 정복(562)한 것은 진흥왕(540~576) 때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고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였습니다.
④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512)한 것은 지증왕(500~514) 때의 일입니다.
지증왕은 정치 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국호를 '신라',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503).
⑤ 장수왕(412~491)과 진흥왕(540~576)은 시기적으로 겹치지 않았어요.
장수왕 재위 당시 한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진흥왕이 백제 성왕과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고구려 왕은 양원왕(545~559)이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5회 고급 2번 문제
2. 신라의 화랑도 답①
'외모가 고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정하게 하게 하고.....'라는 내용으로 보아 (가)에 들어갈 내용은 '화랑(花郞)'입니다.
따라서 (가)가 중심이 단체는 바로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된 화랑도입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화랑도는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답니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무술과 도의를 닦으며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습니다.
이러한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국가적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신라의 발전과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① 진흥왕은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세속 5계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② 백제의 귀족 회의인 정사암 회의에 대한 설명이다.
③ 고려 시대의 농민 조직인 향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신라의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조선 시대 유향소(향청)와 향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라의 화랑도
기원 |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됨 |
개편 | 진흥왕 때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 확대 |
구성 | 화랑(진골 귀족) + 낭도( 일반 귀족이나 평민) |
활동 | 제천 의식 거행, 무예, 사냥과 전쟁 학습 |
규율 | 세속 5계(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전수) ⇨ 유+불+선의 가치관 |
특징 | •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 조절․완화 기능, 인재 선발 기능, • 국가 발전과 삼국 통일에 기여 |
14회 고급 4번 문제
4. 신라 진흥왕(540~576) 시기의 모습 답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밑줄 친 왕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죠?
첫번째 자료를 보면 '백제 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니 군주 김무력이 교전하였고, 고간 도도가 백제왕을 죽였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관산성을 공격하다 죽은 백제의 왕은 바로 성왕(523~554)입니다.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공격해 한강 유역을 일시 회복합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는데, 기습적으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까지 공격하여 빼았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그리고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입니다.
금관가야는 법흥왕 때 신라에게 멸망(532)하였다는 거 아시죠?
두번째 자료를 보면 가야를 공격하여 정벌할 때 사다함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네요.
이는 대가야를 정벌(562)한 것을 뜻합니다.
위의 두 자료에 나타난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 전사(554),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 때의 사실이니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을 고르면 됩니다.
진흥왕 시기의 주요 사실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한강 유역 차지,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 고령의 대가야 정복,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 건립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②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527)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372), 백제는 침류왕 때(384)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비해, 신라는 귀족들의 반발 때문에 법흥왕
때 들어서야 공인을 하여 삼국 중 가장 늦었어요.
③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지증왕 때(512)의 일입니다.
④ 관료전 지급은 신문왕 때(687)입니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답니다.
⑤ 국학 설립은 신문왕 때(682)의 사실입니다.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1회 고급 5번 문제
5. 삼국의 여러 유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파악 답②
이 문제는 카페 <시험전 꼭보기방>에 올려놓은 삼국시대 비문 총정리 글을 읽은 분들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그 글을 안 읽었더라도 1점짜리 문제 수준이기에 대부분 맞았을 문제입니다.
유물 이름+설명까지 다 제시하고 있는데 고급 2점짜리 문제라면 유물 이름까지 제시하지 않았어야 하는 문제지요.
그럼 답지를 하나씩 알아볼까요?
①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으로, 강철로 만든 칼에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긴 것입니다.
이는 백제와 왜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죠.
② 중원(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 죽령~남양만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알려주는 비석입니다.
③ 임신서기석 은 신라의 두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학습하기로 한 맹세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도교 사상이 반영된 유물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사신도, 백제의 금동 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사택지적비를 들 수 있어요.
④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가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광개토 대왕의 왜구 격퇴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나타나 있죠.
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이 그릇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8회 고급 8번 문제
8. 진흥왕(540~576)의 업적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진흥왕 순수비 중 ‘북한산비’의 비문 내용입니다.
교과서 사진 자료를 꼼꼼히 살펴 알아둔 분들은 북한산비임을 쉽게 파악하였을 겁니다.
(북한산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용산)에 보관중입니다.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판독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신라가 율령을 반포한 것은 법흥왕(514~540) 때입니다.
③ 신라가 우산국(울릉도, 독도)을 정벌한 것은 지증왕(500~514)때입니다.
④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2)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장인인 김흠돌 모역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귀족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한 이는 신문왕(681~692)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5회 고급 7번 문제
7.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비석의 내용 중 서두에 나와 있는 '짐은 하늘의 은혜를 입고......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라는 내용을 보고 광개토 대왕릉비로 착각하는 분도 있었을 것 같네요. 그렇게 헛갈린 분은 ①번을 답으로 체크하는 우를 범하였겠네요.
그러나 비석의 내용 끝에 나와 있는 '관경(管境)을 순수(巡狩)'라는 내용를 통해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신라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① 광개토 대왕(391~412) 때의 고구려의 영통 확장 내용입니다.
② 장수왕(412~491) 때의 남한 강 유역 점령 내용입니다.
③ 지증왕(500~514) 때의 우경과 순장 금지 내용입니다.
⑤ 문무왕(661~681) 때의 민족 융합 정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5회 고급 12번 문제
12. 6세기 전반 고구려의 내분과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답③
이 문제는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문제이나,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을 이용해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니 한번 같이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서 고구려 안원왕(531~545)이 나타나 있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이 당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나와 있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 고구려가 내정 불안을 겪고 있던 이 시기 국가를 새롭게 중흥시킨 백제 성왕(523~554)과 신라 진흥왕(540~576)은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그리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차지하죠.
그런데 연합을 맺었던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이를 빼앗는 일이 벌어집니다.
화가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554).
이 사건으로 120여 년 간 유지되었던 나·제 동맹(433~554)도 깨지게 됩니다.
①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에 서북쪽의 전연의 침입,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결국 백제(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371)하는 등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② 고구려는 고국천왕(179~197)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습니다(194).
④ 고구려 보장왕(642~668) 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트집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당군을
물리쳤습니다(645).
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합니다.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화가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4회 고급 4번 문제
4. 삼국 시대 세워진 신라의 비석 답①
(가) 영일 냉수리비(경북 포항)입니다.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503)으로 추정되는(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재산권 분쟁을 각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중신 회의에서 합의하여 처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阿干支), 나마(奈麻)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있어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 울진 봉평비(경북 울진)입니다.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에는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할 때 주민들의 항쟁 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6부 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관련자를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비가 건립되기 이전인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에 6부가 성립되었다는 것,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 등을 파악할 수 있답니다.
(다)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라) 북한산비(서울)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세요.
(마) 마운령비입니다.
마운령비(568)는 황초령비(568)와 함께 진흥왕 때 신라가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① 울진 봉평 신라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3회 1급 9번 문제
9.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과정에서의 기념비 답①
문제에 제시된 비석을 세운 공통적인 배경을 묻는 문제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제시된 비석이 어느 나라에서 언제 만든 것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 때,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는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비의 건립 연도는 여러 설이 있으나 48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비의 내용과 존재를 통해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어요.
그리고 북한산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결국 이를 종합해 볼 때 세 개의 비석들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세운 기념비임을 알 수 있지요?
당시 삼국 간의 항쟁에서 한강 유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강을 차지한 국가가 국가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당시 전성기를 보였고, 고구려는 장수왕 때, 신라는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가장 전성기를 보였습니다.
② 신라와 고구려와의 동맹 관계는 중원고구려비에만 해당됩니다.
이 밖에 호우명 그릇과 광개토 대왕릉비를 통해서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③ 제시된 비석의 내용에 불교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④ 도교와 관련된 삼국의 문화유산으로는 고구려의 사신도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으로는 백제의 사택지적비가 있어요.
⑤ 삼국 시대에 유학을 공부하였던 내용을 알려주는 금석문으로는 임신서기석을 들 수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을 통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진평왕(579~632)~선덕여왕(632~647)
26회 고급 5번 문제
5. 김춘추(무열왕)의 활동 답⑤
제시돤 상황은 김춘추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하러 갔으나, 고구려로부터 죽령 이북의 땅(한강 이북)을 고구려에 반환하라는 요구를 받는 장면입니다.
김춘추는 훗날 무열왕(654~661)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신라는 선덕 여왕(632~647) 시기에 백제의 잦은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642년에는 백제군의 공격으로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빼앗깁니다(642). 이때 김춘추의 딸과 대야성주였던 사위가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김춘추는 고구려로 가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신라가 진흥왕 때 탈취한 죽령 이북의 한강 상류를 반환할 것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고 김춘추는 당시 실권자인 연개소문에 의해 감금당했다가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어요.
김춘추는 상대등 비담이 난을 일으키자(647) 김유신과 연합해 이를 진압하여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합니다. 그는 고구려와의 동맹 결렬 이후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펴면서 대당 외교에 공을 들여 결국 나·당 동맹을 성사시킵니다(648). 그리고 진덕 여왕(647~654)에게 국가 기밀을 당당하는 집사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설치하게 하였어요.
마지막 성골이었던 진덕 여왕이 죽자, 김춘추는 상대등 알천공 등의 주도로 화백 회의에 의해 추대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무열왕은 갈문왕 제도 폐지, 사정부(사정 기관) 설치 등의 개혁을 시도하는 한편,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킵니다(660). 그러나 이듬해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던 중 죽었습니다.
통일 전쟁은 아들 문무왕(661~681)이 계승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668),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보이는 당을 나·당 전쟁으로 물리치고(676, 기벌포 전투 승리) 삼국 통일을 완성합니다.
① 문무왕(661~681)은 나·당 연합으로 고구려를 멸망(668)시킨 후,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보인 당을
매소성 전투(675)와 기벌포 전투(676)에서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완성하였어요.
② 성골 출신의 왕위 계승은 진덕 여왕(647~654)을 마지막으로 단절되었습니다.
김춘추는 진덕 여왕에 이어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이 되었어요.
③ 선덕여왕은 당에서 귀국한 승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하였습니다.
④ 김흠돌 모역 사건(681)은 신문왕(681~692) 때의 일입니다.
신문왕은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제도를 재편하여 왕권을 전제화하였어요.
⑤ 김춘추는 진덕 여왕에게 집사부를 두어 군사 기밀과 왕실 사무를 관장하도록 건의하였으며, 대당 외교를 주도하여
나·당 동맹을 성사시켰어요(648).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5회 고급 5번 문제
5. 선덕여왕(632~647)과 진성여왕(887~897) 시기의 사실 답③
(가)에는 황룡사 9층탑의 건립, (나)에는 신라 말 원종과 애노의 난이 나타나 있네요. 황룡사 9층탑은 자장의 건의로 선덕 여왕이 건립하였고(황룡사는 진흥왕 때 건립), 신라 말 원종과 애노를 비롯한 농민 봉기가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는 진성 여왕 때입니다.
(가) 선덕여왕(632~647)은 아버지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로 여왕이 되었어요. 선덕 여왕 다음에는 그의 여동생이 진덕 여왕(647~654)에 즉위하였고, 이후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김춘추가 무열왕(654~66)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여왕 시기 신라는 첨성대를 세우고 분황사, 그리고 승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방상 주요 거점인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기는(642) 등 위협을 받습니다. 이에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자 당에 군사를 요청하기도 하였어요. 그리고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어요.
(나) 9세기 말 진성 여왕(887~897) 때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모순이 심화되었습니다. 귀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으며, 흉년에 재해까지 겹쳐 지방의 조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났어요. 그리하여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자, 마침내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습니다.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889)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이때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이 진성 여왕에게 개혁안으로 시무 10조를 건의하였으나(894),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진성여왕 10년(896)에는 적고적이라 불리는 도적들이 일어나 경주의 서쪽 모량리까지 이르는 등 신라는 급격히 붕괴되어 갔어요.
① 진흥왕 때의 일입니다.
진흥왕은 신라의 청소년 집단인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하여 국가 발전에 이용하였어요. 화랑들은 원광이
제시한 세속 5계를 마음가짐과 행동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② 법흥왕은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어요(527).
③ 진성 여왕 때 각간 위홍과 대구 화상이 왕의 명을 받아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하였어요(888).
④ 김흠돌 모역 사건은 7세기 말 신문왕 때의 일입니다.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제도를 재편하여 왕권을 전제화합니다.
⑤ 선덕 여왕은 성골 출신이었어요.
진덕 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끊기자 이후부터는 진골 출신들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이 김춘추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9회 고급 5번 문제
5. 선덕여왕(632~647)의 정책 답③
사료 내용에 나와 있는 밑줄 친 국왕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그의 정책을 찾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사료에서는 비담과 염종이 당시의 왕이 정치를 못한다며 난을 일으켰다는 것,
두 번째 사료에서는 왕의 유언대로 낭산 아래 있는 도리천에 장사지냈으며, 문무왕 대에 이르러 국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는 비담이 난을 일으킨 시기, 그리고 문무왕 이전의 왕이라는 사실에서 힌트를 찾아야 합니다.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자료에 밑줄 친 '국왕'은 선덕여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579~632)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위에 올라 신라 최초로 여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선덕여왕 시기 신라는 첨성대를 세우고 분황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방상 주요 거점인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앗기고(642),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답니다.
ㄱ - 원광법사는 진평왕 30년(608년) 왕명으로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하였습니다.
ㄴ -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세워 천문 현상을 관측케 하였습니다.
천문 관측은 하늘의 움직임을 보고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그리고 농사와도 관계 있어 중요하였답니다.
ㄷ - 선덕여왕 때 백제는 의자왕이 신라를 자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고 당항성, 대야성까지 함락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해 군사적 도움을 청하도록 하였습니다만 실패합니다.
결국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후 이를 바탕으로 나당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되죠.
ㄹ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한 것은 진흥왕 때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8회 고급 4번 문제
4. 7세기 전반의 삼국의 상황 답①
제시된 내용은 신라의 황룡사 9층탑 건립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590~658)은 중국의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이에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에 귀국하여 탑을 세울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선덕여왕(632~647)이 신하들과 의논하여 백제에서 탑을 잘 쌓는 기술자를 불러오기로 하여 초청되어 신라에 온 사람이 바로 백제의 명공 아비지(阿非知)였어요.
선덕여왕 시기 신라는 첨성대를 세우고 분황사,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공격으로 40여 성과 국방상 주요 거점인 대야성마저 백제에게 빼앗기고(642),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답니다.
이 시기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막아 내어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공격에 어려움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였으나 실패하자 당과 연결하여 동맹을 맺습니다.
ㄱ - 이 시기 고구려는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의 군대를 안시성에서 크게 물리쳤습니다(645).
ㄴ - 신라는 대야성 함락(642) 후 김춘추를 보내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였으나 실패하죠.
ㄷ -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것(538)은 백제 성왕의 중흥 정책 중의 하나입니다.
ㄹ -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라와는 결혼 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결국 진흥왕 때 멸망하였습니다(562).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으로 묶인 ①번입니다.
4회 고급 6번 문제
6. 원광(555~638)의 활동 답①
제시된 자료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침입에 시달리는 신라가 수나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글(걸사표)을 올리려고 하는데, 이 글을 승려에게 부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승려는 왕의 부탁을 받고 걸사표를 작성하였는데, 이를 작성한 인물은 원광(555~638)입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불교의 특징 중인 하나인 호국 불교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네요.
당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아 어려움에 처해 있었어요.
진평왕(579~632)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응하고자 수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작성해 원광을 수에 보냅니다(608).
원광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세속 5계를 지어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② 신라 말 선종을 도입한 승려는 도의 선사입니다(821).
그는 선종의 9산 선문 중의 하나인 가지산파를 개창하였습니다(장흥 보림사).
③ 자장은 선덕여왕 때 대국통이었습니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외침을 막고 주변 민족을 복속시키기기 위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습니다(643).
④ 화쟁 사상은 원효가 주장한 것입니다.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⑤ 의상은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습니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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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시험을 보고온 분들을 포함해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 등을 적어주세요.
지증왕에 대한 내용이 정리 되었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경은 잘 몰랐지만...
이사부! 노래로 많이 들은 분이죠. 우산국에 관한거네요!
우산국을 신라영토로 편입한건 지증왕때입니다.
요거만 알면 풀리죠
삼국 각각 왕들의 특징이 있는데 그건 필수항목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지증왕 힌트가 우경..우산국 대체로 쉽게 해주었던 것 같아요
우경을 언제 시작했는가 지문이 신석기,청동기 문제로도 종종 깔리니 기억해둡시다~
암기해야해여 순장.지.우.신.왕 ㅡㅡㅡ지증왕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형식적인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왕에 관한 문제 헷갈리고 어려운데 관련 문제를 눈으로라도 풀어보니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좋습니다.
기출문제해설로 보기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니 이해가 되네요
해설이좋아서 좋네요
첫번째 문제의 경우 우경을 통해 신라의 지증왕에 대한 설명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2번 보기의 경우 잘 몰라서 넘어갔고 3번의 경우 4c 내물 마립간 시기에 이뤄진 설명이고, 4번 신라에 율령반포를 한 왕은 법흥왕으로써 틀린 설명이고, 5번의 경우 그 이전까지 마립간을 사용했는데 지증왕 이후, 신라를 국호로 칭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정답은 5번입니다.
설명이 자세하네요
지증황의 정치적 업적을 정확하게 알았어야 했네요
막상 문제를 풀어보니 상당히 어렵고 헷갈리네요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사고 좋네요~
문제설명이 굉장히 꼼꼼하게 되어잇네요.. 놀랏어요..
망부석에대한문제는정말몰랐어요~
저런문제가나옴당황할꺼같아요ㅠ
삼국시대왕들의업적을자세히풀이해놓으셔서
좋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한국사 문제라 사실 잘 기억나는 것도 없고 어렵네요...ㅠㅠ 그래도 해설이 꼼꼼하게 되어있어서 이해가 잘 되는 거 같아요
이비에스로 공부하고있는데 지증왕에데하여 우경이라든지 몰랏던 것과 밑에 댓글쓰시는분들 덕분에 하나 알아갑니다
해설정말좋네요
해설 감사합니다~!
신라의 왕들에 대한 비슷한 형식의 문제가 여러번 출제 되었었는데 푼 문제도 있고 틀린 문제도 있네요..ㅠㅠ아직 공부를 다 하지는 않았는데 복습을 철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어요.ㅠㅠ난이도는 천차 만별이네요 망부석 이야기의 왕이 누군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내용좋네요
해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27회 7번 문제에 솔직히 보기에 나와 있는 내용으론 누군지 유추가 안 돼 아예 해설을 바로 읽어버렸습니다. 꼼꼼히 읽고 나니 알게 됐네요 28회에 바로 나올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층 더 알아가게 됐습니다...
내용 좋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고급과정은 ..어렵네요.. 해설 열심히 봐야겟네요
두 시기를 주고 사이에 일어난 일은? 이 유형의 문제가 진짜 어렵네요...더 상세하게 파악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아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