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연정을 품은 원수
진결은 땅에 엎드려 눈물이 글썽거리는 애처로운 눈초리로 한산중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당신의 졸개가 나를 구타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후련하시오?"
한산중은 조롱조의 코웃음을 쳤다.
"흥, 너는 너의 아비가 극독으로 나를 해치려고 하고, 또 여러 고수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더냐?"
진결의 눈초리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의 빛이 감돌았다. 그러면서도 일면으로는 말할 수 없는 애정의 빛이 감돌았다.
한산중은 노한 눈초리로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을 쏘아보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석한 감이 들어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흐느껴 울기만 하던 그녀가 급히 한산중을 불렀다. 울음섞인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에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더욱 예뻐 보였다.
"한산중, 지금까지 당신을 괴롭혀 온 것은 모두 나의 짓이었을 뿐,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아버지께 조금도 원한을 품지 말고 나를 죽여주세요."
한산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었다.
"하하하…… 그런 소리 말아라. 반룡산 밑에서 나를 모욕하고 독약으로 죽이려고 한 것은 모두 너의 뜻이 아니라, 너의 아비가 계략을 세웠다는 것을 나는 다 알고 있다."
진정은 풀이 죽어 있다가 돌연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 너의 말이 맞다. 왜냐하면 너는 젊은 나이에 너무나 거만하고 너무 날뛰어 강호의 천지에서 조금의 인정도 베풀 줄 모르는 냉혈동물과도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사마장웅은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면서 성난 사자처럼 외쳤다.
"이런 천하에 죽일 놈 같으니……"
진정은 고개를 돌려 노한 눈초리로 사마장웅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노기의 불꽃이 이글거렸고, 떨리는 목소리는 원한의 빛이 가득했다.
"너…… 너는 참으로 한산중의 충성스러운 부하로구나."
사마장웅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고 그의 눈가에는 냉랭한 살기가 감돌더니 조롱하듯 싱긋이 웃고는 진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원주님을 위해서 나의 짧은 한평생의 목숨이나마 내맡긴 사람이다. 나는 진정 원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죽음의 불 속이라도 뛰어들 수 있다. 너는 몇 명이나 너를 위해서 충성을 다할 부하를 두었느냐? 내가 보기에는 나 같은 충성스런 부하가 한 명도 없을 것 같구나."
진정은 기가 막혀서 벽력같은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선혈을 토하더니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으…… 음."
쓰러진 진정은 아직도 정신이 있는 듯 눈을 감지 못하고 원한이 서린 눈초리로 한산중을 바라보았다.
진결은 깜짝 놀라 울부짖으며 자기 아버지를 붙잡아 일으켰다.
"아버지……"
그녀는 너무나 설움과 비통에 복받쳐 자기 아버지의 쓰러진 몸을 부둥켜안고는 한없이 흐느껴 울었다.
한산중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마음 한구석이 찌릿해 옴을 느꼈다.
"장웅, 더 이상 입씨름을 하지 말게."
사마장웅은 아무런 말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한산중은 흐느껴 우는 진결의 옆으로 다가가서 조용히 타이르듯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진결, 몸을 무림 중에 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은원(恩怨)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 역시 너의 백룡문과 이미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맺었으니, 쌍방의 잘잘못은 이제 강호의 전통적인 규칙대로 해결키로 하자."
진결의 표정은 비교적 차분했으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고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거렸다.
"한산중, 당신이 오늘 나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언젠가는 당신을 죽여 우리 백룡문을 멸망시킨 원수를 갚고, 나도 자결을 해 버리겠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죽게 되는 날에는 나 역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까요."
한산중은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산중의 입가에는 차가운 웃음의 빛이 감돌았다.
"네가 그토록 나와 함께 죽을 각오를 가졌다면 왜 진작 내가 중독을 당하고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 누구나 내가 죽은 것으로 간주 했을 터인데, 어찌 그때에는 내 뒤를 따라 죽지 않고 이제 그다지도 얼빠진 소리를 하는 거냐?"
진결은 한산중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직까지도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한산중을 못 잊겠다는 듯 애처로운 빛이 감돌았다.
과연 사랑의 힘이라는 것은 무서웠다. 자기의 가슴속에 영원히 씻지 못할 천추의 한을 남긴 한산중을 그토록 못 잊어 하고 사모하다니……
"그때 남들은 모두 당신이 화를 입어 죽은 것으로 알았지만, 나는 당신의 굽힐 줄 모르는 불굴의 정신과 굳센 의지력과 호인적인 슬기로 보아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 함께 죽어 한 무덤 속에 묻힐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한산중이 막 그녀에게 반박을 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큼직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달려왔다.
그림자는 마치 날으는 구름처럼 달려오더니 한산중의 앞에 우뚝 섰다. 호랑이 수염이 치켜 올라가고 두 눈이 쭉 찢어진 보기에도 험상궂은 대한이었다.
그의 몸집은 무척이나 우람해서 마치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앞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금도호랑(金刀呼浪) 지원(遲元)이었다.
그는 얼마나 빨리 달려왔던지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원주님, 지금 백룡문의 무리들은 요망스러운 짓으로 원주님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계속했다.
"제가 방금 백룡문의 잔당들을 소탕할 때 그 주위를 살펴보았더니 큼직한 무덤 하나를 파놓고는 그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한산중은 다급히 그의 말을 재촉했다. 그들이 무슨 간악한 흉계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자기를 어떠한 방법으로 저주하고 있었는 지 그것이 궁금했다.
"어서 계속 말해 보게."
지원은 몹시도 흥분이 되어서 입에는 게거품을 물고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거…… 거기에는 '한산중, 진결 부부의 무덤'이라는 뚜렷한 글자가 새겨졌고, 구리로 만든 두 개의 관은 뚜껑도 덮지 않은 채 그대로 무덤 속에 놓여 있더군요."
한산중은 목이 타오름을 느끼며 미친 듯이 외쳤다. 그의 눈에는 분노와 울분의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치욕인가? 생각할수록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는 울분이었다.
"뭐…… 뭐야? 누가…… 그런 요망한 짓을 하더란 말인가?"
지원은 시선을 돌리더니 진결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마치 개구리를 잡아먹으려는 뱀의 눈과 같이 차갑고 매서웠다.
"원주님, 진결을 제외하고는 누가 그러겠습니까?"
그는 아직까지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산중의 휘번덕거리는 무서운 눈매를 바라보더니, 또 눈길을 돌려 진결을 내려다보았다.
"원주님, 당장에 저 계집을 처치해서 무덤 속에 쳐 넣어 원앙총(鴛鴦塚)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산중은 아무런 말이 없이 무서운 눈초리로 지원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는 무서운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
지원은 제풀에 겁을 먹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뒷걸음질을 쳐서 몇 발짝 물러났다.
그의 안색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창백하고 사지는 미풍에 사시나무 떨듯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한산중은 지원에게는 더 이상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사마장웅에게 명령했다.
"자네는 진정부녀를 호목원 곤룡동(困龍洞)에 감금시키기에 앞서 우선 이곳 토굴에 처넣도록 하게."
명령을 받은 사마장웅은 호목원의 장정들에게 눈짓을 해서 진정부녀를 끌고 나가게 했다.
한산중은 끌려가는 진정 부녀를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한산중은 눈길을 돌려 지원을 바라보며 분부했다.
"진정의 상세가 매우 위중하니, 자네는 즉시 진선생에게 달려가 그를 잘 치료해 줄 것을 분부하게."
지원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한산중을 바라보았다.
"원주님, 그 무덤은……"
한산중은 괴상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더니 또다시 가벼운 한숨을 지었다.
"그것은 그대로 놔두게. 나중에라도 기념물로 볼 수 있게 말이야……"
지원이 떠난 후 한산중은 방안을 유심히 훑어보다가 조그마한 문이 열려 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운치와 정감이 감도는 조용하고 아늑한 방이었다. 좌우의 창문에는 연분홍 휘장이 드리워져서 방안의 분위기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창문 아래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붉은색 바탕에 자개가 수 놓여진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고 보료와 방석이 깔린 의자는 용의 형상을 새겨서 마치 앉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벽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자태를 그린 사녀도(仕女圖)가 걸려 있었다. 그 사녀도 위에는 두 마리의 나는 새와 회색의 구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새와 같았고 바람에 나는 무운과도 같이 정교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사녀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한 감회를 느끼게 했다. 그림 속의 여인이 혼자서 조용한 규방을 지키고 있었던 때문일까? 한산중은 내심 탄식을 금치 못하며, 그 사녀도를 떼어서 품안에 간직하고 다시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화장대의 윗서랍에는 몇 개의 은으로 만든 비녀와 가락지와 빗이 들어 있었고, 아랫서랍에는 머릿기름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는 화장대의 서랍을 모조리 열어보았다. 마치 자기의 살림을 뒤지듯이 구석구석까지도 모조리 뒤져보았다.
그러던 중 화장대 제일 아래에서 하나의 작은 상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던지 상자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얹혀 있었다.
한산중은 상자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자에는 무슨 중요한 보배가 들어 있는지 자물쇠를 채우고 겉에는 비단보로 정성들여서 싸놓았다.
한산중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의 보를 풀고는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한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한산중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번쩍거렸다.
상자 속에는 그가 전날 백룡문에서 고수들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다가 남기고 간 피묻은 옷자락이 정성스럽게 개어진 채 들어 있었다.
'진결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옷을 지금까지 간수해 두었을까? 그녀가 이토록 나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한 한산중은 다시 옷을 들어내고 밑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 아래에는 백지에 싸놓은 몇 개의 머리카락과 두 장의 간지와 마치 상아의 질과 같은 떨어진 동정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은잔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한산중은 은잔을 보자 몸이 약간 떨려왔다.
그 은잔은 바로 그 당시 구화독이 들어 있던 것으로써 술을 가득히 부어 자기 입에 억지로 퍼먹이던 술잔이었다.
백지에 쌓인 머리털은 진결이 자기를 미친 듯이 포옹할 때 떨어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었다.
두 장의 간지 중에 한 장은 자기가 마음 내키는 대로 그려보았던 염노교도(念奴嬌圖)였고, 또 한 장은 진결이 열아홉 살 되던 해 한산중이 생일날 그녀에게 보내 준 축하문이었다.
한산중은 옛날 한때에 진결과 오손도손 다정한 이야기를 속삭이던 시절이 마치 아득한 옛 추억을 더듬는 것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한산중의 마음은 새삼 착잡해졌다. 이상한 감회가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본시 성미가 쌀쌀하여 여자와의 관계가 별로 없었고, 여자들로 하여금 정이 들지 않게 했다.
한산중은 진결 역시도 사귀는 것을 일시적인 흥미로만 여겼는데, 그녀는 한산중과는 달리 무척이나 애타게 그리워했다.
그녀는 자기를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고, 끝내는 자기가 그녀의 뜻대로 응해 주지 않자 최후에는 죽이려고까지 생각했다.
한산중은 잠시 눈을 감고 이런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보니 몸서리가 쳐졌다.
한산중은 그 상자마저 품안에 간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 밖을 향해 나섰다.
사마장웅은 마침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산중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불렀다.
"원주님, 어찌 이처럼 심각하십니까?"
한산중의 입가에는 아직도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쓰디쓴 웃음이 감돌았다.
"자네는 다음에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지 말게. 여자의 마음이란 참으로 모질고……"
한산중은 말끝을 흐리더니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기의 일생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크나큰 과오를 남기게 되네."
"원주님, 진결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여자란 참으로 무섭고도 끈질긴 동물이야……"
"원주님! 남녀가 진정한 사랑으로써 서로 사랑한다면 어찌 그와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겠습니까?"
한산중은 앞에 서서 걸으면서 담담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장웅, 그대는 아직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한 야릇한 맛을 몰라서 하는 말일세."
두 사람이 정사 밖으로 나오자 수십 명의 호목원 장사가 화원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에 각각 한 자루씩의 휘황한 횃불을 들어 한산중과 사마장웅의 가는 길을 비추어 주었다.
한산중은 사마장웅과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갔다. 이들의 주위에는 잠잠한 침묵만이 밤의 고요함 속에 흘러갔다.
한산중은 사마장웅을 바라보며 조용하면서도 나직하게 침묵을 깨듯이 입을 열었다.
"진정 부녀는 지금 토굴 안에 감금되어 있겠지?"
"지원이 진정 부녀와 학가 녀석을 모두 토굴 안에 감금시켜 놓았고 동지들은 모두 구곡교 밖에 모여서 떠날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산중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사마장웅은 무표정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주님, 이곳의 집들은 이대로 버려두시겠습니까?"
한산중은 돌층계를 내려서면서 뒤에 따르는 사마장웅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헐어 버릴 생각이 없네. 이대로 놔두어서 백룡문 사람들의 기념물로 삼도록 하겠네."
한산중은 갑자기 걱정된다는 듯이 사마장웅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물었다.
"살목비(薩牧非)의 상처는 어떠한가? 그는 독약이 묻은 암기에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진선생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가 맞은 암기에는 자반초(紫斑草)라는 무서운 독이 묻어 있어서 백미각만으로는 도저히 치료를 할 수가 없으나 다행히도 진선생에게는 벽서각을 가진 게 있어서, 그는 지금 치료를 받고 편안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는 다시 싱긋이 웃으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원주님, 포천은 참으로 지독한 사람이더군요. 그는 전신에 여러 군데의 상처를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어깻죽지에 입은 상처는 매우 심한 데도 이를 악물고 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태연하게 버티더군요."
"그럼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겠던가?"
"예, 그러나 아마 앞으로 한 삼사 개월 이상은 요양을 해야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산중은 매우 걱정이 되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 녀석은 언제나 자기의 목숨을 남의 생명 보듯 하니 정말 큰 걱정이란 말이야."
"제가 꼭 책임지고 포천을 요양시키겠습니다."
한산중은 매우 흡족했다. 이처럼 자기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형제들이 있는가 하면 형제의 신의를 생각해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니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한산중은 즐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만면에 가득히 미소를 지었다.
한산중은 얼마 동안 넋을 잃고는 자기의 애마 철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비록 말을 못하는 한갓 짐승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가. 철뢰는 지금까지 자기를 따라서 동분서주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왔다. 그리고 어느 때는 자기가 죽음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구해 주기까지도 했다.
한산중은 새삼 애마 철뢰에 대해서 고마움을 느꼈다. 한산중은 고개를 돌려 횃불을 들고 오는 장정들을 바라보았다.
"횃불을 이리 가져오너라."
사마장웅은 손수 부하 장정의 손에서 횃불을 받아들고는 한산중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산중은 품속에서 은침 하나를 꺼내어 횃불에 한 번 비추어 보았다. 그 은침은 매우 예리했다. 휘황한 횃불 아래 작은 은침은 마치 반사경처럼 번쩍거렸다.
그는 서서히 철뢰 앞으로 다가가더니 애마의 다리를 긁어 주면서 말발굽을 들어올렸다.
수 명의 장정이 들어도 꼼짝하지 않을 말발굽이지만 한산중은 힘들이지 않고 들었다.
애마가 벌써 주인의 뜻을 알았던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주인이하는 대로 거동만 보고 있었다.
한산중은 말발굽 사이를 후벼내고 물로 씻은 다음에 금창약(金創藥)을 붙여 주었다.
한산중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사마장웅은 옆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뢰가 상처를 입었던가요?"
"내가 소령주(小靈州) 밖에 있는 석교에서 적도들을 물리치며 나올 때 백룡문의 선성통(旋星筒)이란 암기가 날아오는 바람에 그만 애매한 철뢰가 상처를 입었지……"
사마장웅은 철뢰의 머리 쪽으로 가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음…… 죽일 놈…… 도저히 용서할 수 없군."
한산중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복수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가는 한산중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그렇지, 이 한산중의 도끼가 그놈들을 용서할 수 없지……"
한산중은 옆에 서 있는 사마장웅을 바라보고는 분부를 했다.
"그러나 철뢰가 심한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만 잘해 주면 며칠 안으로 회복될 수 있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서 가장 좋은 먹이로만 주도록 하게."
사마장웅이 말을 몰고 떠난 후 한산중은 구곡교(九曲橋)에 이르러 신조(神釣) 조내리(曺耐吏)에게 물었다.
"아군의 사상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조내리는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한산중을 맞이했다. 그는 자초지종을 모두 한산중에게 보고했다.
"아군의 부상자는 모두 이십여 명은 되는데, 그들은 이미 응급치료를 하였고 전사자 사십여 명은 서정호로 운반했습니다."
한산중은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제 모두들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하게."
하룻밤 사이에 소령주를 피바다로 만든 한산중 일행은 새벽바람에 흑건과 호피로 만든 외투자락을 펄럭이며 장등성(張登城) 이십 리 밖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한산중 일행이 그곳에 당도하자 그곳에 잠복해 있는 이십여 명의 흑의를 걸친 장한들이 일제히 나타나 한산중을 맞이했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다 한결같이 밝았다.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감돌았고 기쁘고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주님, 큰 전공을 이루고 평안히 돌아오시니 저희들의 반가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한산중은 그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뒤에 있는 사마장웅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여러 동지들에게 충분히 쉬도록 지시하게."
그리고는 앞장을 서서 대문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대문 앞에는 두 사람의 수문장이 서 있었다.
한산중은 그들에게 수고에 대한 경의를 표한 뒤 지시를 했다.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이제 날이 밝았으니 물러가서 쉬도록 해라."
그들이 황송한 듯 허리를 굽히고 물러가자, 한산중은 다급한 마음으로 몽소유가 거처하는 침실로 다가갔다.
한산중은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조용하고 침착하게 방문을 두들겼다. 한산중의 가슴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렸다.
방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몽소유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한산중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마치 아침 햇빛처럼 밝은 표정으로 달려 나와 한산중을 맞이했다.
"수고가 많으셨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때 한산중의 온몸에는 핏자국이 얼룩지고 머리에는 먼지가 뒤덮여 보기에도 흉측한 괴물 같았다.
"소유, 보다시피 이처럼 지저분한 몰골로 어찌 깨끗한 그대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겠소?"
몽소유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마치 깃을 찾아드는 작은 새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혼자서 전장에 나간 그리운 님을 기다리는 몽소유의 마음은 너무나도 외롭고 초조했다.
단 하룻밤의 짧은 시간이지만 기다리는 그녀에게는 마치 수십 개월의 세월과도 같이 지루했다.
한동안을 쥐 죽은 듯이 한산중의 품에 안겨 있던 몽소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면서 부드러운 두 손으로 볼을 부벼댔다.
한산중은 그녀의 좁은 어깨를 으스러져라 껴안고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소유, 간밤에 잠은 잘 잤소? 겨우 하룻밤 사이지만 나는 마치 수개월 동안이나 소유의 얼굴을 못 본 것만 같았소."
"저도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물론 당신에게 아무런 사고는 없으리라고 믿고 있었지만 어쩐지 밤새도록 걱정이 되었어요."
그리고는 살며시 한산중의 품안에서 빠져나가더니 차를 한 잔 끓여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과 그윽하게 풍기는 향기는 한산중에게 바치는 그녀의 마음이 송두리째 승화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한산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권하는 찻잔을 받았다.
"소유, 속담에도 즐거웠던 시절이 멀어질수록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 있듯이 나 역시 소유와 만난 지 오래 되긴 했으나 지금까지 단란히 지낼 만한 시간의 여유가 없고 보니 자연 허무감을 느끼게 되는구려."
몽소유는 내심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산중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한산중이 무슨 마음으로 자기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세요? 우리는 영원히 서로 헤어지지 않기로 굳게 약속하지 않았어요?"
"소유, 인간의 한평생이란 참으로 짧은 거야. 삶의 진미를 맛보지 못하고 머리에 하얀 털이 돋아나게 되면 그때 가서 무슨 삶의 보람을 느끼겠나?"
"그럼 우리가 지금 늙어서 백발이 되었고, 또 당장 죽게 되었다는 말씀이세요? 그토록 패기가 넘치던 당신이 하룻밤 사이에 어찌……"
말을 멈춘 몽소유는 가벼운 한숨을 짓더니 수심에 찬 듯 애조 띤 눈초리로 한산중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아무튼 나는 이 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되고 바람에 날리더라도 당신의 뒤만을 따르겠어요."
한산중은 팔을 벌려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이 되어 지금까지 자기가 경솔하게 대한 것이 미안스럽게만 생각되었다.
"소유! 정말 고마워. 나도 그대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야."
"좋아요. 당신은 나의 영원한 생명이에요."
한산중은 그녀의 말에 너무나 감동이 되어 부둥켜안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하여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소유!"
한산중은 그녀를 얼싸안았던 팔을 풀면서 다시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는 소유의 권고대로 어젯밤 싸움에서 백룡문 사람들에게 될 수 있는 한 살 길을 열어 주었지."
몽소유는 한산중의 말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녀의 얼굴에는 즐거운 빛이 가득했다
"산중! 나의 권고를 들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한산중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는 잠잠히 앉아 있었다.
"소유! 내가 언제 진결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예,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도 그녀를 해치지 않았겠지요?"
"해치다니? 이번에 생포된 그들 부녀와 백룡문의 십륙 개 고수 중 세 사람은 모두 호목원에서 한평생 지내도록 데리고 있는데……"
"그럼 그들을 어디에……"
"아주 살기 좋은 곳이지. 바로 곤룡동(困龍洞)이야."
몽소유는 불안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곤룡동은 매우 무서운 곳이라고 하던데 어찌 그들을 석방해 주지 않고 그곳에……"
한산중은 아직도 그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영상을 지우기 위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소유는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들에게는 그만한 대우도 과한 거야. 더구나 진결이란 여자는 마치 미친 여자와 같아서 정말 싫단 말이야……"
"미친 여자라뇨? 미친 여자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해요?"
몽소유는 아직도 한산중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한산중은 백룡문에서 만들어 놓았던 원앙총의 일부터 모든 사건들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몽소유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샛별처럼 아름다운 눈초리로 한산중만 바라보았다.
한산중은 진결의 모습이 떠오르자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 나이를 먹도록 그처럼 무서운 여자는 처음 보았어."
그러나 웬일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보이던 몽소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한 장의 먹구름이 덮인 듯 침울하고 슬픔의 빛만이 감돌았다.
침울한 그녀의 눈에는 이슬과 같은 눈물이 괴었고 끝내는 눈물이 되어서 방울방울 뺨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한산중은 도대체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니 한산중의 마음은 몹시 아팠다.
"소유, 왜 그렇게 상심을 하지? 내 말이 너무 서운했던가? 어서말해 봐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ㄱㅅ
사람의 마음은 묘하구나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고, 정리해야 할 인정을 끊지 못하니 마음만 복잡하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