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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26일자에 실린 이야기 입니다.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농촌을 살리고자 했던 '목사의 삶' 현대사 100년을 말하다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 2019. 6. 26. 6:02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명창식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다. |
올해 98세 인천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서 지내
소림면서 대대로 풍헌 지낸 사회 지도층 가문
해방직후 농촌청년훈련소·조선민주당서 활동
공산당과 패싸움 연루돼 반동분자 낙인 감옥행
이후 정치가였던 큰아버지 도움으로 '서울살이'
전쟁때 한강다리 폭파로 집 부서져 피란길 올라
종전이후 전국 곳곳서 37년간 목회자로서 살아
목사였던 부친과 함께 농촌서 농업활성화 노력
'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명창식(98) 할아버지는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평안북도 영변군 소림면에서 태어났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이 쓴 시 '진달래꽃'(1922) 속 '영변에 약산(藥山)'을 낀 바로 그 동네다.
감리교 목사 출신인 명창식 할아버지는 1990년 은퇴한 뒤 인천 남구 주안동에 있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원로원에서 지내고 있다. 1층짜리 단독주택인 원로원에 딸린 마당에는 각종 채소와 과일을 기르는 텃밭이 소담하다.
할아버지가 지내는 단독주택과 인근 다세대주택으로 구성된 원로원에는 은퇴한 목사 5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100세가 넘은 원로도 있다.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부인과 사별했고,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도 여기서 세상을 떴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교단 원로를 예우한다는 차원으로 1964년 인천 주안동에 전국에 하나뿐인 감리교 원로원을 마련했다. 원로원 땅은 해방 이후 감리교 목회자들이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적산(敵産)농지였다고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낸 '해방 후 감리교 농촌선교사' 자료에 나온다.
감리교 직영농장을 운영하면서 농촌선교운동본부로 쓰다가 은퇴 목사를 위한 주택을 지었다.
태어난 평북 영변에서 지금의 인천에 이르기까지 100년에 가까운 할아버지의 삶은 한반도 100년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할아버지 집안에는 근현대사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정치인도 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역사교과서 속에나 나올 법하다.
할아버지는 해방되던 해에 이미 가정을 꾸린 20대 중반이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영변 소림면에서 대대로 풍헌(風憲)을 지낸 사회 지도층이었다. 풍헌은 조선 때 지방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지방자치기관인 향소에서 면 단위 행정을 맡은 지역 양반이다.
전답 60마지기(1만2천평)를 소유할 정도로 넉넉하게 살았다. 또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다. 부친 명제영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영변에서 선교활동과 농촌운동에 적극적으로 몸담았다.
"원래 기독교 집안은 아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젊은 시절 술고래였어. 유학자인 할아버지가 보다못해 '교회에선 술을 못 마시게 하니 교회에 나가라'고 해서 30대를 넘겨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셨지. 그때부터 농촌운동을 열심히 하셨어. 아버지가 평양신학교에 다닐 동안 장남인 내가 농사짓고 집안일을 봤어."
명창식 할아버지도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평안북도에서 세운 농촌청년훈련소에 들어갔다. 당시 각 면에서 2명씩만 선발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엽부터 영변군 농회(農會·농협의 전신)에서 기수(技手)로 근무했다. 기수는 지금으로 따지면 기술직 공무원이다. 논과 밭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양수기를 도입해 농업용수를 끌어온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평남건국준비위원장인 조만식(曺晩植·1883~1950)이 1945년 11월 창당한 조선민주당에서 청년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에선 해방 직후 조선민주당을 비롯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건국운동이 활발했다.
해방 직후만 해도 북한은 김일성(金日成·1912~1994)의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기독교도와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조선민주당, 천도교 정당인 청우당 등 3개 정치세력이 협력하는 모양새로 정국을 이끌었다. 이들 정치세력은 1946년 초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해 같은 해 3월 토지개혁 같은 주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 집안은 토지개혁 이전인 1945년 말에 미리 농민에게 토지를 나눠줬다고 한다. 역사문제연구소가 낸 '북한의 역사'를 보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할아버지 집안 같은 경우를 '애국지주'로 인정해 주택이나 농기구를 몰수하지 않았다.
"조선민주당 소림면당에서 활동하면서 토지개혁도 농회에서 일했던 내가 앞장서서 했어. 집에 딸린 식구에 따라 남자는 100점, 여자는 70점, 아이는 50점으로 점수를 매겼어. 점수가 높은 순으로 토지를 할당해줬어. 산지는 나라 소유가 됐고. 왜정 때 일본놈들이 땅을 하도 꼼꼼하게 정리해놔서 그나마 수월했지."
토지개혁은 북한 내 소위 지주계급의 저항을 불렀고, 조선민주당을 지지하던 상당수 지주와 자본가가 월남을 택했다. 조선민주당과 공산당 간 대립도 점점 심해지면서 물리적 충돌도 잦았다.
명창식 할아버지도 1946년 초 영변군에서의 조선민주당원과 공산당원이 벌인 패싸움에 연루돼 5개월 동안 평양 보안국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89년 평안북도민회에서 발간한 '평안북도 망향 40년사'를 보면, 이 사건으로 투옥된 영변군 조선민주당원 60명 명단에 명창식 할아버지가 포함돼 있다.
"같은 동네에서도 민주당원이랑 공산당원은 사이가 나빴어. 나무로 창을 만들어서 서로 싸운다기에 내가 공산당 소림면 책임자랑 타협해 중재했는데도 보안국으로 들어오라는 거야. 싸움을 모략했다며 반동분자라고 나한테 뒤집어씌웠어. 그때부터 북한에서 살기 힘들어질 것 같더라고."
할아버지를 평양 보안국에서 풀어준 이는 목사이면서 1970년대 북한 국가 부주석까지 지낸 정치인 강양욱(康良煜·1903~1983)이었다. 김일성의 외가 쪽 친척인 강양욱은 명창식 할아버지 부친의 평양신학교 3년 후배여서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 식구들은 1947년 5월 당국에 의해 "숙청당했다"며 집에서 쫓겨났다. 결국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4남매 중 셋째다. 둘째 형과 당시 시집간 막내 여동생은 북에 남았다.
할아버지는 당시 서울에 있던 큰아버지에게 의탁했다.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는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 서울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지금의 감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큰아버지 도움으로 명창식 할아버지는 난지도 농장을 관리하는 일자리를 얻었다. 한강 하류에 있는 272만㎡ 규모의 범람원인 난지도는 당시 잡곡이나 콩·옥수수를 재배하는 밭이었다. 이후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의 쓰레기매립장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됐다.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노량진에 조그만 목조주택을 마련해 부모와 함께 살았다. 북한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한 지 3일째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명창식 할아버지의 집이 마치 지진이 날 때처럼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흙으로 된 벽이 전부 떨어져 나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고 한다. 한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남하를 늦추기 위해 한강철교와 한강대교를 폭파한 순간이었다. 이날 한강 다리 폭파로 피란길에 오르려 다리 위에 있던 민간인을 포함해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당시 미군 군사고문단은 추정했다. 미군은 6월 29일부터 이틀간 폭격기를 동원해 한강 다리에 맹폭을 가했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6월 27~28일 인민군이 막 점령하기 시작한 서울의 상황이 나온다. 당시 서울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였던 김성칠은 이때 일기에 '비는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하고 대포알은 쉴새없이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휘잉하고 하늘을 찢는 듯 공중을 나는 소리, 이어서 탕 하고 포탄의 터지는 소리. 저것이 백에 한번 추호라도 겨냥을 잘못하면 우리는 죽을 운명에 놓여있다'고 적었다. 서울이 포화에 휩싸이자 명창식 할아버지 식구는 피란길에 올랐다.
"이북에서 반동분자로 찍힌 데다가, 집도 부서져서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어. 경기도 이천의 교회로 갔다가 충남 조치원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내려갔지. 큰아버지만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서울이 수복되면서 사촌 형님이랑 둘이서 다시 상경했어. 큰아버지는 인민군에게 잡혀갔고, 노량진 집은 폭격 맞아서 흔적도 안 남았더라고."
수복된 서울로 다시 올라온 명창식 할아버지는 1·4후퇴 때까지 중앙청(1996년 철거된 조선총독부·대한민국 초기 정부청사) 인근에서 미군 구호물자 배급일을 했다. 주로 밀가루를 주민들에게 나눠줬는데, 먹을 게 귀한 전쟁통이라 밀가루조차도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서울대 교수조차 배를 곯는 상황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김성칠의 1950년 10월 18일자 일기를 보면, 한 동료 교수가 '처음엔 매 세대에 밀가루 한 포대씩을 나눠주느니, 쌀을 5홉씩 배급 주느니 말만 들어도 푸짐하더니 5홉이 2홉으로 줄고 2홉이 다시 1홉 4작으로 줄고 그거나마 뚝 끊어지고 (중략) 인제는 꼼짝없이 굶어 죽는 수밖에 없이 되었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를 따라 경북 김천에 있는 아천교회 전도사로 활동했고, 얼마 후 목사로 부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대구, 경북 경주, 충남 천안, 논산(강경)을 비롯해 전국을 돌며 37년간 목회자로 살았다. 전쟁 이후에도 농촌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아버지도, 나도 평생 농촌에서 목사를 지내면서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어. 1960년대까지도 농촌은 잘살지 못했거든. 연탄보일러도 직접 만들어서 교인들한테 나눠줬고…. 농촌을 살리고자 했던 그런 활동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돼."
명창식 할아버지의 인생을 좇아가자니 인천의 이 원로원이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한 세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래된 기억의 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명창식 할아버지 제공·경인일보 DB·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큰아버지 명제세 선생 임시정부서 맹활약
1919년 3·1운동 직후 2차 '만세운동' 추진
강화도 출신인 유경근·윤종석과도 연결돼
1920년대 조만식과 국산품애용운동 전개
초대 심계원장 역임·전쟁 직후 납북 당해
아버지 명제영 목사 영변교회 전도사 활동
당시 담당 목사가 이후 강화 잠두교회 부임
이동휘·조봉암이 다니던 곳… 민족애 영향
아들 명창식 "후세에서 오래 기억됐으면…"
평안북도 영변이 고향인 명창식(98) 할아버지의 집안 사람들은 인천 강화도 출신 독립운동가들과의 인연이 남다르다. 강화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감리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와도 묘하게 얽혔다.
할아버지의 큰아버지 명제세(明濟世·1885~?)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명제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외국어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1910년대 초반 중국 톈진(天津)에서 무역상을 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무렵 톈진에서는 조선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조직인 '불변단(不變團)'이 결성됐는데, 명제세는 부단장으로 참여해 단장까지 지냈다.
불변단은 결성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밀외곽단체로 편제돼 군자금을 모으고, 국내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임시정부 '특파원' 역할을 했다.
명제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9월 톈진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 강화도 사람들이 자주 묵는 '조선여관'에서 지내면서 강화도 출신 송암(松菴) 유경근(劉景根·1877~1957)과 시위운동을 논의하라는 지시를 받은 터였다.
유경근은 1905년 강화도 자택에 광창학교를 설립한 교육운동가이기도 했고, 잠두교회 분회를 지어 헌납한 종교인이기도 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인천 남구 주안동 감리교 원로원에서 낡은 책을 꺼내 읽으며 집안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를 회고하고 있다. |
하지만 서울에 도착한 명제세는 유경근을 만나진 못했다. 유경근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을 상하이로 피신시켜 해외 망명정부를 세우려 했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大同團)'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뒤였기 때문이다.
대동단원이자 세브란스의학교 3학년 학생이던 강화도 출신 윤종석(尹鍾奭·1896~1927)도 대동단 사건으로 체포됐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 6권에 실린 윤종석의 당시 심문조서에 이 같은 명제세와 유경근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명제세는 이듬해까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계속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고, 주요 간부를 잃은 불변단은 해산됐다. 불변단이 사라진 뒤 톈진에는 여러 조선인 단체가 생겼다.
그중 하나가 사회주의 계열의 '고려국민회'다. 이는 강화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기도 한 이동휘(李東輝·1873~1935)가 지원한 단체였다고 한다.
명제세는 1920년대 초중반에는 민족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해 국산품애용운동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이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큰아버지는 양복을 절대 안 입었고, 늘 선비처럼 길게 수염을 기른 채 하얀 한복만 고집하셨어. 겉보기와는 다르게 고지식하지 않고 호탕한 성격이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였어.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와해된 1930년대 중반부터 해방까지 명제세 선생의 행적은 당시 신문이나 자료를 통해 찾아보기 어렵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요시찰 인물로 지정돼 본인은 물론 우리 가족까지 일본 형사가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며 "영변에 탄광이 많은데, 해방될 때까지 탄광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했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월남해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결성을 주도한 정치조직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을 지내며 남한 정부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명제세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심계원장(감사원장)에 임명됐다.
당시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은 1947년 5월 북한 당국에 의해 고향 영변에서 쫓겨나 큰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
큰아버지가 장관급인 심계원장에 오르면서 현 서울역 옆에 있던 중앙청(1996년 철거) 인근에 관사가 제공됐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 가족도 심계원장 관사로 거처를 옮겼다가 머지않아 노량진에 집을 얻어 독립했다.
"큰아버지는 심계원 공무원들한테 출근할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점심 도시락을 싸오라고 지시했어. 감사업무를 하는 공무원이니까 외부에 나가서 밥 얻어먹지 말라는 뜻이거든. 너무 강직하셔서 아랫사람들한테는 영 인기가 없었지."
명제세 선생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서울을 지키다가 납북됐다. 역사학자 김성칠(金聖七·1913~1951)이 1945년 12월부터 1951년 4월까지 쓴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정병준 해제)에는 명제세의 아들이 김성칠을 찾아온 장면이 나온다.
1950년 8월 6일 일기를 보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의 납북에 대해 "정부는 부통령도 내버리고 외국사신들에게까지 충분한 연락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도망하는 판"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명제세의 아들은 "(아버지가) '40년 동안 일제의 몹쓸 착취와 닦달을 받고 나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가엾은 조선 사람들이 아닌가. 피차 서로를 위하고 아껴주어야지. 서로 칼부림질해서 함께 넘어져 죽을 까닭이 무엇이 있나'라고 하시며 순순히 포박을 받으셨다"고 말했다고 김성칠은 기록했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부친인 명제영(明濟英·1898~1966) 목사는 평북 영변에 살던 시절 감리교 영변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백학신(白學信·1899~?) 목사가 영변교회를 담당했다고 한다.
평북 용천 출신인 백학신 목사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영변교회 주관자로 있다가 1948년 강화도로 부임했다. 1949년부터는 잠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고 '강화중앙교회 100년사'에서 전한다.
백학신 목사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1950년 9월 말 강화도를 점령했던 북한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납북됐다.
1900년 설립된 잠두교회는 이동휘가 초창기 교인으로 활동했고, 같은 시기 강화도에서 교육운동에 힘을 쏟은 독립신문 기자 출신 손승용(孫承鏞·1855∼1928) 목사 같은 걸출한 인물이 담임목사를 맡았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도 어릴 적 잠두교회를 다녔다. 소설가 이원규가 쓴 '조봉암 평전'에서는 이동휘가 강조한 신앙을 통한 구국투쟁이 잠두교회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이 같은 배경을 가진 교회를 다닌 어린 조봉암이 민족애와 조국애를 생각하게 됐을 거라고 했다.
죽산 조봉암은 1919년 3월 18일 강화읍에서 열린 '강화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같은 해 4월 중순에는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배포하다가 경찰에 체포돼 약 3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평생 모은 할아버지 집안과 감리교회의 역사 관련 자료를 살필 정도로 배움의 열정이 남다르다.
명창식 할아버지를 세 번째 찾아간 지난 5일 오전 인천 남구 감리교 원로원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돋보기안경을 쓴 할아버지는 인천지구 평북도민회가 1997년 펴낸 '평안북도지'를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취재기자에게 설명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날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가져온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큰아버지 명제세에 관한 대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인터뷰에 동석한 막내아들에게 "당장 책을 주문해달라"고도 했다.
실향민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영변에 대한, 집안에 대한 자료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다룬다. 자신이 사라진다면 기억은 잊히겠지만, 자료는 오랜 시간 남을 거란 생각에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여기고 있다.
할아버지는 1990년 감리교 원로원에 입주하면서 인천과 첫 인연을 맺었다. 스스로 그 이전까지는 인천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고 했지만, 할아버지의 삶과 삶에 얽힌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니 인천의 이야기와도 연결 지어졌다.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온 실향민 1세대의 이야기를 모으는 게 중요한 이유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옛날에 만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이젠 몇 사람 남지 않았다"며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후세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거기서 새로운 걸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평북 영변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난 지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과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이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
구룡강 기슭 용강리 약산동대 유명
김소월 외에 많은 문인들도 매료돼
"강화도 고려산도 여기는 못따라가"
고구려때 쌓은 성곽 철옹성의 고장
3대가 살던 소림면 농사짓기 좋은 곳
당시 냉면은 손님 접대용 귀한 음식
잔칫집에 빠지지 않던 온반도 '자랑'
핵시설 들어서 풍경 많이 변했을 듯
# 이야기 하나
실향민 명창식(98) 할아버지가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용강리(龍江里)를 떠난 지 어느덧 70년이 지났다. 긴 세월에 많은 기억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게 있다. 고향의 '멋과 맛'이다.
영변 용강리는 관서지방을 흐르는 청천강 지류인 구룡강이 흐르는 동네라서 붙은 지명이다. 구룡강 기슭에는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시 '진달래꽃'(1922)으로 유명한 약산동대(藥山東臺)가 있다. 약산동대는 제일봉(해발 488m), 동대, 학벼루와 거북바위 같은 기암괴석이 있는 곳을 통칭한다.
"우리 집에서 구룡강을 건너면 약산이야. 여기저기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솟은 돌산인데, 어릴 적엔 동네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면서 놀았어. 조금 커서는 나무하러 다녔어. 봄에 제일봉 꼭대기에 오르면 분홍빛 진달래꽃이 산 전체를 수놓았더라니까. 오죽하면 소월이가 약산 진달래를 노래했겠나."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약산동대. 특히 봄철 산을 분홍빛으로 뒤덮는 진달래 군락으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진달래가 만발한 사진은 남한에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평북 구성 출신의 김소월뿐 아니라 여러 문인이 깎아진 절벽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에 매료됐다.
시인이자 수필가 노자영(盧子泳· 1898~1940)은 기행문 '약산동대'에서 '붉고 붉고, 타고 타고, 만지홍(滿地紅) 만지적(滿地赤)의 동대로 가는 길이 모두 다 정열이요, 모두 불덩이가 아닌가'라고 극찬했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金億·1896~?)이 약산동대를 여행한 이후 제자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관한 생각을 적은 글이 명사들의 기행문을 모은 '반도산하'(1944)에 실렸다.
'진달래는 약산동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외다. 반도의 산하에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약산동대 진달래라 하면서 다른 곳 진달래는 다 내어버리고 약산동대의 그것만을 노래하며 귀엽다 하니 이것은 약산이 아름다운지라, 진달래까지 또한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이외다.'
흔하디흔한 진달래이지만, 어딜 가도 고향에서 핀 꽃만큼 아름답지 않은 게 실향민의 마음이다. 명창식 할아버지는 "진달래로 유명한 강화도 고려산엘 가 봤는데 약산동대보다 못하다"고 했다.
영변은 약산동대를 낀 '철옹성(鐵甕城)'의 고장이기도 하다. 철옹성은 영변읍을 중심으로 주변 산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사방을 두른 둘레 14㎞, 높이 6~7m짜리 성곽이다.
고구려 때 처음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은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계속 개축됐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약산의 험한 것은 동방의 으뜸이라'는 고기(古記)를 전하며 국방의 요충지로 꼽았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영변에 살 때 만해도 영변읍은 성곽도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철옹성 안이 읍내였고, 장도 성 안에 섰어. 약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꼭 쇠로 만든 옹기 모양이었지. 산을 넘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야. 우리 동네서 40리(약 16㎞) 떨어졌는데, 길이 어찌나 험한지 새벽에 장 보러 읍내 나가면 한밤중에나 돌아왔어."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평양에 머물던 선조(재위 1567∼1608)는 형세가 급박해지자 1592년 6월 다시 피란길에 올라 영변에 닿았다.
'선조실록'의 임진년(1592년) 6월 13일 기사에 '상이 안주에서부터 비를 무릅쓰고 영변부로 들어가니,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가고 관인 5~6명만 있을 뿐이었다'는 대목을 보면, 임금의 철옹성 입성 장면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효종(재위 1649∼1659) 때 새로 고친 '선조 수정(修正)실록'에서는 삭제됐다.
선조는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에게 조정을 나누는 분조(分朝)를 명해 영변을 지키게 하고, 명나라가 코앞인 북쪽 의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한성, 성주, 충주에 보관했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타고, 전주에 소장했던 실록만 남은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실록은 영변에 보관했다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강화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게 됐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서울, 강화도, 영변, 봉화, 평창 등 5개 사고에서 나눠 관리했다.
조선 왕실 역사의 명맥을 잇는 데에 일조한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는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19세기 초 제작된 전국 군현지도집인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영변 철옹성 일대 지도. 성 왼쪽 아래 소림면(少林面)이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출처/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 이야기 둘
명창식 할아버지는 'ㄷ'자 기와집에서 3대가 살았는데, 머슴을 둬야 할 정도로 집이 컸다. 8살 때 동네에서 유일하게 소학교에 입학했고 혼자서 10리(3.9㎞)를 걸어 통학했다고 한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가정을 꾸리면서 'ㄷ'자 집에서 아래채를 증축해 'ㅁ'자 기와집이 됐다. 할아버지는 부인, 자녀와 함께 추가로 지은 아래채에서 지냈다고 한다.
구룡강 건너인 영변읍(철옹성)과는 달리, 할아버지 동네인 소림면은 땅이 넓고 비옥해 농사짓기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집마다 누에를 기르는 양잠 농사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조선 때부터 영변 주민들의 주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54년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영변의 토산물을 오곡, 뽕나무, 삼(麻), 닥나무, 왕골, 배, 밤, 꿀, 옻, 석이(石耳), 오미자, 잣, 지초 등으로 적었다.
1530년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실(絲), 삼, 오미자, 인삼, 벌꿀, 잣, 사향(麝香), 자초(紫草) 등을 영변 토산물로 꼽았다. 실을 뽑아낼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는 양잠의 필수 작물이다.
명창식 할아버지의 고향 기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평안도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어릴 적부터 먹었던 냉면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국민음식'이 된 냉면의 본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도다.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1781∼1850)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냉면을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고, 여기에 돼지고기를 섞은 것'이라고 전하며 '냉면은 관서지방의 냉면이 최고다'라고 평가했다.
명창식 할아버지가 10대 시절이던 1920~30년대만 해도 냉면은 손님 대접할 때나 내놓는 귀한 음식이었다. 메밀면을 뽑는 국수틀을 가진 집도 마을에서 한두 집밖에 없었다고 한다.
"영변에서는 손님한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냉면 먹으러 가자는 뜻일 정도로 고급 음식이었어. 하얀 동치미 국물에다가 메밀면을 말아먹기도 했어. 고기를 푹 고아서 육수를 낸 다음 식혀서 면을 말고 고기를 얹어 먹는 게 제일 고급이지. 소나 돼지가 귀해서 산에서 꿩을 잡아다가 육수를 내기도 했어."
냉면을 만들기 위해 고기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메밀면을 뽑는 작업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인 기산 김준근이 그린 메밀국수 면발을 뽑는 장면. 한글로 '국수 누르는 모양'이라 제목을 붙인 이 그림은 평양식 국수 제조 방식이다. 출처/민속원 발간 '기산(箕山), 한국의 옛그림 풍경과 민속' |
메밀가루는 점성이 별로 없어 잘 뭉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생몰년 미상)이 국수를 뽑는 과정을 그린 풍속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일꾼 한 명이 거꾸로 사다리에 올라 받침대에 등을 대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국수틀을 누르며 면을 밀어내고 있다. 이게 바로 평양식 메밀국수 제조법이라고 한다.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白石·1912~1996)은 영변을 여행하면서 얼마나 진한 메밀 냄새를 맡았던지 그때의 경험을 쓴 시 '북신-서행시초2'에서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고 읊었다. 백석은 1941년 '국수'라는 제목의 평안도 냉면을 소재로 다룬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백석 '국수' 중에서)
명창식 할아버지는 고향 잔칫집에서 빠지지 않던 온반을 먹어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금은 생소한 평안도 음식인 온반은 푹 삶은 닭고기 육수에 각종 고명을 얹어 밥을 말아먹는 국밥의 일종이다. 이북식 잔치음식이라고 한다.
영변군 영변읍과 용강리가 속한 소림면 일대는 북한이 1960년대 초반 원자로를 들여와 원자력연구소를 조성했다. 이후 북한에서 핵물질을 생산하는 시설은 대부분 영변에 들어섰다. 고향 땅의 모습이 크게 변했을 거라는 게 명창식 할아버지의 걱정이다.
"이젠 고향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가물가물해. 영변에 핵시설이 들어서면서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데 어린 시절 귀한 별미로 먹던 냉면 맛이랑 온반 맛은 잊히질 않아. 마지막으로 진짜 고향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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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9]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下)
구룡강 기슭 용강리 약산동대 유명김소월 외에 많은 문인들도 매료돼``강화도 고려산도 여기는 못따라가``고구려때 쌓은 성곽 철옹성의 고장3대가 살던 소림면 농사짓기 좋은 곳당시 냉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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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북도 영변군 출신 명창식 할아버지-농촌을 살리고자 했던 '목사의 삶' 현대사 100년을 말하다|작성자 이동현 이북도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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