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懲毖錄) 제2권- 4
그 글 속에는, '서울에 응거해 있는 적병만 20만이오니, 우리 적은 군사로는 대적할 수가 없사옵고 …' 하는 구절이 들어 있고, 또한 끝에 가서, '신이 병이 심하여 중임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주옵소서' 하는 말이 있었다.
이를 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적병의 수는 불과 얼마 안되는데 20만이란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알겠소? 공의 나라 사람들 말이 그렇다 하니 그런 줄 알 뿐이지오.' 제독의 이 말은 핑계였다.
명나라 장수 중에서도 특히 장세작이 퇴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우리 일행이 굳이 이를 만류하여 물러나지 않자, 그는 몹시 화가 난 듯 순변사 이빈을 발로 차면서 꾸짖는 소리가 자못 날카로웠다.
이때 큰 비가 날마다 계속 내리는데로 적은 길가 산들을 모두 불살라 버려 말먹이 풀 한 포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역이 생겨 수일 동안에 수만 필의 말이 쓰러졌다.
이날 세 영책 군사가 도로 임진강을 건너 동파역 앞에 진을 쳤고, 그 이틑날 다시 동파로부터 개성부로 돌아가려 했다.
이를 본 나는 또 제독을 보고, '대군이 한 번 물러서면 그만큼 적들은 교만해지고 우리 민심은 원근이 모두 놀라서 임진강 이북도 보존키 어려울 것이니, 원컨대 잠시 이곳 동파에 유했다가 틈을 보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하니, 제독은 거짓 허락하는 체 하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온 지 얼마 안되어 제독은 말을 채쳐 개성으로 돌아갔고, 모든 군사도 뒤따라 개성으로 물러가 버리고 말았다.
이때 다만 부총병 사수대와 유격장군 관승선만이 군사 수백을 거느리고 임진을 지키고 있었으며, 나는 혼자 동파에 머무른 채 날마다 제독에게 사람을 보내어 진병할 것을 청했다.
제독은 꾸며대기를, '비가 개고 땅이 마르거든 진병에 보자.' 하고 회답해 보냈으나, 실제로는 진병할 의사가 없었다.
대군이 개성에 이른 지 여러 날이 지났다. 따라서 군량이 딸리기 시작했다. 이때는 다만 수로로 좁쌀과 말먹이 풀을 강화에서 운반해 올 뿐이요. 또 충청 전라도에서 세금으로 거두어 둔 양식을 배로 겨우 실어오고 있는 형편인데, 이것도 실어오자마자 떨어져 버리곤 하니 그 형세가 더욱 급했다.
어느날 중국 장수 여럿이 제독을 보고 군량이 없으니 빨리 퇴병하자는 말을 했다. 군량이 떨어졌다는 말에 제독은 여간 노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과 경기 좌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 아래 끊어 앉히고 큰 소리로 꾸짖으면서 군법을 행하고자 하였다.
나는 이를 보고 급히 사죄하면서 제독을 말리기에 진땀을 빼야 했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제독도 나의 모습을 보고 민망했는지 다시 자기 부하 장수를 향해서, '너희가 전날에 나를 따라 서하를 칠적에는 군사가 여러 날을 먹지 못하였어도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마침내 큰 공을 세우더니, 이제 조선에 와서는 겨우 2, 3일 동안 양식이 없다하여 감히 군사를 돌이키자 하느냐? 너희들 중에 갈 사람은 가도 좋다. 나는 여기서 적을 쳐 없애지 않고는 결코 돌아가지 않고, 마땅히 말 가죽으로 나의 시체를 꾸리리라.' 하고 꾸짖으니 그제서야 제장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는 것이었다.
제독을 작별하고 나와서 나는 군량을 단속하지 못한 개성 경력 심예겸을 장형에 처했다. 이날 군량미를 실은 배 수십 척이 강화로부터 서강에 도착하여 겨우 무사하였다. 그날 밤 제독은 총병 장세작을 시켜 나를 불렀다. 그는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며 한 편 싸울 일을 의논하였다.